조지아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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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어: Κολχίς조지아어: ეგრისი
영어: Colchis
흑해 연안에 위치한 조지아 서부 일대를 일컫는 고대 지명. 남서쪽으로 폰토스, 서쪽으로 흑해, 북쪽으로 대 캅카스, 동쪽으로 이베리아 왕국과 국경을 접한 이 지역은 조지아 동부에 세워진 이베리아 왕국과 함께 조지아의 기원으로 손꼽힌다.
2. 역사
'콜키스'라는 용어가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린다. 일각에서는 이 지역의 산악 지대인 콜라(Kola)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8세기 중반의 우라르투 왕 사르두이 2세가 쿨리하(Qulḫa) 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는 점을 근거로, 콜키스가 여기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 용어 콜키스(Κολχίς)는 아이스킬로스(Aeschylus)와 핀다르(Pindar)의 저술에서 지리적 영역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조지아 흑해 연안에 자리잡은 평야 지대는 예로부터 온화한 기후에 땅이 기름졌다. 또한 리오니 강, 초로키 강, 므트크바리 강 등 물고기로 가득찬 강이 흘렀기에 먹을 것도 풍부했다. 그래서 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고, 상업 및 주변 지역과의 무역 활동도 발달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황량한 산악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목축과 벌목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또한 조지아에는 철, 구리, 및 기타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기에, 광업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이렇듯 풍부한 물자에 온화한 기후, 활발한 상업 및 무역 활동이 이뤄지는 이 지역에 기원전 12세기까지 디아오키(Diaokhi), 자바카(Zabakha), 비테루키(Viterukhi), 콜차(Colcha) 등 여러 소국이 세워졌다. 이 나라들은 각자 법률을 제정하고 관료를 선출했으며, 아시리아, 우라르투와 맞서 싸웠다.
콜키스 주민들은 기원전 8세기부터 고대 그리스와 무역 거래를 활발하게 수행했다. 그러다 기원전 7~6세기에 밀레투스 시의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식민도시를 건설한 이래, 그리스인들을 흑해 연안을 따라 여러 식민 도시를 세우고 무역을 통해 생계를 꾸렸다. 그들은 콜키스를 신비로우면서도 자신들과 관련이 많은 장소라고 여겼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이아손은 콜키스 왕 아이에테스가 가지고 있다는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아스클레피오스 등 여러 영웅을 모아 아르고 호의 원정을 감행한다. 그리고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서 인간에게 줬다가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어먹히는 형벌을 받은 프로메테우스는 콜키스 북쪽의 코카서스 산맥의 바위에 묶였다고 한다. 한편, 소아시아의 밀레시아인들도 콜키스에 여러 식민 도시를 세웠다. 이 도시들은 내륙에서 거주하는 부족들과 때때로 충돌했지만, 나중에는 그들과 동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550년경에 건국한 아케메네스 왕조는 남부 콜키스를 일찍부터 병합해 사트라프로 하여금 이곳을 다스리며 세금과 인력을 거두게 했다. 반면 콜키스 북부 부족들은 자치를 인정받는 대가로 100명의 소년과 100명의 소녀를 매 5년간 페르시아 궁정에 보내야 했다. 기원전 400년 크세노폰이 지휘하는 만인대가 그리스로 돌아가던 중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콜키스인들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기도 했다.
기원전 331년 10월,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는 패전의 여파로 와해되었고, 자연히 콜키스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후 동부 조지아에서 이베리아 왕국이 패권을 확립했지만, 콜키스인들은 여전히 통합된 정치체제를 구축하지 못했다.
균일한 힘과 영향력을 갖춘 부족들이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데다 그리스인들이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던 데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간섭도 이베리아 왕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단일 국가가 세워지는 건 지극히 어려웠다. 고대 문헌에는 쿠지(기원전 325년 ~기원전 280년), 사우라케스(기원전 2세기) 같은 인물이 콜키스 왕으로서 군림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신빙성은 높지 않다.
기원전 83년, 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는 콜키스를 병합한 뒤 아들 미트리다테스에게 이 지역을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통치를 무척 잘해 주민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아버지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바람에 반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그 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기원전 65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또다른 아들인 마카레스를 보스포로스 왕국과 콜키스 왕국의 군주로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항복하려 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어 역시 처형되었다.
기원전 63년 콜키스를 장악한 폼페이우스는 이 지역의 족장들 중 한 명인 아리스타르초스를 콜키스 왕국의 군주로 선임했다. 아리스타르초스는 이 지역을 나름대로 이끌었지만, 기원전 47년 폰토스 왕국의 파르나케스 2세의 침략으로 콜키스 전역을 빼앗겼다. 그러나 파르나케스 2세 역시 젤라 전투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참패하면서 몰락했다. 그 후 콜키스는 로마 공화국의 직할 영토가 되었다가 나중에 보스포로스 왕국과 함께 폰토스 왕국의 폴레몬 1세의 치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8년 폴레몬 1세가 사망한 후 아내 피토도리다가 폰토스와 콜키스를 다스렸다. 피토도리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폴레몬 2세는 62년 네로 황제에 의해 킬리키아로 전출되었고, 콜키스는 폰토스와 함께 로마의 속주로 병합되었다. 그 후 콜키스는 로마 제국의 역사 내내 함께 하다가 훗날 트라페준타 제국의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