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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11 04:16:45

파르나케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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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9대 군주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2대 군주

Φαρνάκης | 파르나케스 2세
파일:파르나케스 2세.jpg
제호 한국어 파르나케스 2세
그리스어 Φαρνάκης
영어 Pharnaces II
존호 바실레프스
부모 미트리다테스 6세(아버지)
라오디케(어머니)
형제자매 콜키스의 미트리다테스(큰형)
아르카티아스(둘째 형)
마차레스(셋째 형)
폰토스의 클레오파트라(큰 누나)
드리페티나(작은 누나)
시파리스(이복 형제)
아테나이스(이복 형제)
보스포로스의 미트리다테스 2세(이복 형제)
소 아도보기오나(이복 형제)
아리아라테스 9세(이복 형제)
오르사바리스(이복 형제)
자녀 다리우스(장남)
아르사케스(차남)
뒤나미스(장녀)
생몰 년도 기원전 97년 ~ 기원전 47년
재위 기간 기원전 63년 ~ 기원전 47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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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폰토스 왕국 제9대 국왕, 보스포로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왕조 2대 국왕.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죽음으로 몰아넣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폰토스 왕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폼페이우스 편을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맞섰으나 젤라 전투에서 참패한 뒤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2. 생애

폰토스 왕국 제8대 국왕 미트리다테스 6세와 라오디케의 네번째 아들이다. 남자 형제로 콜키스의 미트리다테스, 아르카티아스, 마차레스가 있었고, 여자 형제로 폰토스의 클레오파트라, 드리페티나가 있었다. 또한 이복 형제로 시파리스, 아테나이스, 보스포로스의 미트리다테스 2세, 소 아도보기오나, 아리아라테스 9세, 오르사바리스가 있었다.

기원전 63년 아버지에 의해 폰토스 왕국의 속국인 보스포로스 국왕으로 선임되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로마군을 상대할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당시 폰토스 왕국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로 국력이 쇠진했고, 백성과 장병 모두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어서 병력 모집이 잘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미트리다테스 6세는 꿋꿋이 전쟁을 이어가려 했고, 파르나케스는 당장 병력을 모집하라는 부친의 독촉에 시달렸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가족에게 매우 냉혹한 인물이었다. 큰아들 미트리다테스가 콜키스 백성들의 신망을 얻자 민심을 모아서 모반을 꾀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고 죽여버리고, 마차레스가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할 기미를 보이자 가차없이 처형했으며,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에게 연패하여 수도 시노페를 적에게 내주고 아르메니아로 망명하게 되자 로마군의 포로로 넘기지 않겠다는 이유로 아내들과 딸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파르나케스는 자신 역시 수틀리면 바로 죽을 거라 여기고, 아버지를 축출하고 폼페이우스의 인정을 받아 폰토스 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파르나케스의 첫 음모는 발각되었지만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그를 용서하고 공모자들만 죽였다고 한다. 아마도 그를 죽이면 남은 적자가 없으니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파르나케스는 아버지가 나중에 자신을 죽일 거라 확신하고, 전쟁에 환멸을 느끼던 병사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6세는 근위병들을 보내 아들을 체포하게 했으나 파르나케스가 이들을 설득해 거사에 가담시켰다고 한다. 파르나케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가 머무는 판티카파에움 성채로 진군하고 장수들 마저 더 이상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절망에 빠져 독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처럼 독살당할 것을 염려해 독약을 아주 조금씩 복용해왔기 때문에 내성이 생겨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켈트족 출신 경호원이자 친구인 비투이투스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파르나케스는 아버지의 시신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겼고, 폼페이우스는 폰토스의 옛 수도 야마사(아마시아)에 있는 역대 폰토스 국왕들의 무덤에 묻었다. 폼페이우스는 귀순한 파르나케스 2세를 폰토스와 보스포로스 왕국의 군주로 인정하는 대신 파플라고니아를 로마의 속주로 편입했다. 그 후 그는 로마의 봉신으로서 조용히 지냈지만, 내심 소아시아의 패권을 다시 확보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다른 소아시아 군주들과 함께 폼페이우스의 편을 들었다. 기원전 47년 폼페이우스가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완패한 뒤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살해당하고 뒤이어 이집트로 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려 알렉산드리아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는 이 틈을 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다.그는 콜키스를 확보한 뒤 소아르메니아와 비티니아, 카파도키아를 잇따라 공략하여 영역을 확장했다.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카파도키아, 비티니아 군주들은 카이사르에 의해 소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칼비누스는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위태로운 지경에 몰려 있던 카이사르의 구원 요청에 따라 2개 군단을 보내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당장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시간을 끌기로 하고, 파르나케스 2세에게 "당장 빼앗은 모든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 후 제36군단을 이끌고 코마나로 이동했고, 최근에 현지인들로부터 징집한 1개 군단, 갈라티아 2개 군단, 카파도키아 보병 10,000명, 그리고 기병 1,000명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에서 철수하는 건 동의했지만 소 아르메니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마땅히 가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협상 용의가 있다고 꾸준히 알렸지만, 칼비누스는 그가 수비하기 불리한 칼리키아에서 물러나 방어에 용이한 소 아르메니아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일 뿐 실제로 평화 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는 걸 간파하고 소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파르나케스 2세는 막대한 제물을 제시하며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청했으나 소용이 없자, 니코폴리스 인근으로 후퇴했다. 그는 도시 앞 평원에 주력군을 숙영시키고 인근 숲에 기병대를 매복시킨 뒤 적이 몰려오길 기다렸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하게 해, 칼비누스가 "적이 겁을 집어먹고 싸우길 꺼리는구나"라고 오판하여 방심한 채 쳐들어오길 기대했다.

그러나 니코폴리스 시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운 칼비누스가 의외로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는 바람에 로마군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파르나케스 2세는 이러다 매복이 발각될 걸 우려해 매복한 군대를 본진으로 돌아오게 했다. 그 후 협상이 결렬되자, 칼비누스는 니코폴리스 근처로 이동하여 또다른 숙영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적군이 도시 인근 고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고, 파르나케스 2세 역시 유리한 지형을 버리고 적과 교전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대치만 할 뿐 쉽사리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카이사르가 칼비누스에게 보낸 2명의 전령이 폰토스 장병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상황이 위급하니 군대를 더 보내달라"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가져왔다. 파르나케스는 이 메시지가 로마군이 철수하거나 불리한 전투를 감행하게 하기를 희망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칼비누스는 카이사르의 메시지를 받은 뒤 깊이 고민하다가, 폰토스군을 하루속히 격파하고 카이사를 돕기로 마음먹고 다음날 군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로마군의 동맹자로서 함께 했던 카파도키아군과 갈라티아군이 폰토스군의 맹공으로 붕괴되는 바람에 칼비누스가 패배했다.

기록에 따르면, 칼비누스는 이날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2/3을 잃었다고 한다. 다만 사상자 대부분은 갈라티아와 카파도키아 보병들이었고, 전투에 참여한 로마군 제36군단의 사상자는 250명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칼비누스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철수한 뒤, 파르나케스 2세는 카파도키아로 재차 쳐들어가 여러 도시를 함락하고 그곳에 살던 로마 시민들을 학살하고 소년들을 거세했으며, 국고를 약탈했다. 그러던 중 보스포로스 왕국을 다스리던 아산드로스가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보스포러스를 향해 북상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마무리한 뒤 시리아를 통해 소아시아로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카이사르부터 처리하기로 하고 회군했다.

카이사르는 내전 동안 폼페이우스를 지지했던 외국 왕과 로마 총독들을 사면하고 그들로부터 많은 공물과 군사 지원을 받았다. 그러다가 안티오키아에서 행진을 멈춘 뒤, 카이사르는 이곳에 머무르면서 소아시아 일대의 로마군을 규합했다. 또한 타르수스에서 킬리키아 지역 지도자들을 불러모은 뒤 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갈라티아 등을 거쳐 폰토스로 북상하는 군사 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카이사르는 계획에 따라 북상하면서 일부 갈라티아 부족민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기원전 47년 5월 20일 폰토스 왕국군에게 심하게 파괴된 젤라 마을 근처에 도착한 뒤 부하들에게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파르나케스는 시간을 끌 요량으로 사절을 보내 휴전을 제의했지만, 카이사르는 전장에서 만나자고 답하고 돌려보냈다.

파르나케스가 이끄는 폰토스군은 젤라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9km 쯤 떨어진 높은 언덕에 진영을 갖췄다. 이 사실을 정찰병으로부터 보고받은 카이사르는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적 야영지 근처로 진격해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던 중 폰토스군이 진영 밖으로 나와서 대열을 정비하자, 카이사르는 소수의 부하들에게 진영 밖으로 나와서 대열을 서게 하면서도 나머지 부하들은 주둔지 공사를 지속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곧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폰토스군이 로마군과 자신들의 주둔지 사이에 있는 험한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군의 주둔지를 향해 쳐들어온 것이다. 갑작스런 적의 맹공에 로마 병사들은 일시적으로 어수선했다. 하지만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던 그들은 곧 카이사르의 소집 명령에 따라 진영을 갖추고 적과 전투를 벌일 태세를 갖췄다.

파르나케스가 왜 이런 공세를 취했는지에 대해선 현재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지만, 대체로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자신감, 아군의 숫자가 적의 2배 이상이라는 점, 카이사르의 군대가 니코폴리스의 패잔병과 폼페이우스의 옛 부하들로 구성되어서 조직력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점, 적이 주둔지를 건설하던 중에 공격하는 것이니 승산이 높아보였던 점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폰토스 왕국군의 주력인 팔랑크스 보병대는 평지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만 구릉 지대에서는 대열이 흐트러져서 틈새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폰토스 왕국군의 또다른 주력 병기인 전차는 언덕을 올라갈 때는 별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기본적으로 전투력이 뛰어났고, 카이사르는 어떤 돌발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 정도로 임기응변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카이사르군은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언덕 위에서 주둔한 채 언덕 위로 올라오는 적을 상대한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잘 활용했다. 약 2시간 동안의 격렬한 전투 끝에, 제6군단을 비롯한 로마군 우익은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폰토스 부대를 격파하고 뒤이어 적 중앙의 측면을 강타했다. 그러자 폰토스 왕국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자신들의 진지로 도주했다. 이에 로마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한 시간 동안 접전을 벌인 끝에 적의 진영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폰토스군은 이 젤라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파르나케스는 몇몇 측근 및 호위병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하여 수도 시노페로 달아났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 젤라 전투와 관련된 보고서를 보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서 영예를 누렸다니, 폼페이우스는 참으로 운이 좋았다."

파르나케스는 시노페로 향한 뒤 병력을 모집하여 반격하려 했지만, 카이사르가 파견한 칼비누스의 군대가 접근해오자 시노페를 탈출하여 보스포로스 왕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스키타이인과 사르마티아인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테오도시아와 판티카파에움 요새를 공략했다. 아산드로스는 즉시 반격하여 그들을 물리쳤고, 파르나케스는 전사했다. 카이사르는 아산드로스가 주군을 살해했으니 용납할 수 없다며 보스포로스 왕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알렉산드리아 전쟁 때 자신을 도와준 트로코니 부족의 왕자이자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생아인 미트리다테스를 보스포로스 왕으로 세우고 아산드로스를 축출하게 했다. 그 후 폰토스 왕국은 10년간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다가 기원전 37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 의해 파르나케스 2세의 장남 다리우스를 왕으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