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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토스 왕국 초대 군주 Mιθριδάτης Kτίστης | 미트리다테스 1세 크티스테스 | ||
제호 | 한국어 | 미트리다테스 1세 |
그리스어 | Mιθριδάτης | |
영어 | Mithridates I | |
존호 | 바실레프스 | |
별명 | 크티스테스(Ctistes) | |
가족 | 키오스의 미트리다테스 2세(아버지)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아들) | |
생몰 년도 | 미상 ~ 기원전 266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281년 ~ 기원전 2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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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폰토스 왕국의 초대 군주. 안티고노스 1세에 의해 가족을 잃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가 전사한 틈을 타 세력을 갖추었다. 리시마코스와 셀레우코스 1세의 전쟁으로 소아시아가 혼란한 틈을 타 폰토스에서 독립하여 15년간 통치했다.2. 생애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키오스의 사트라프였던 미트리다테스 2세의 아들이라고 한다. 별명인 크티스테스(Ctistes)는 "창시자"를 의미한다. 아버지 미트리다테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침공했을 때 귀순했고, 알렉산드로스3세가 사망한 뒤에도 키오스의 지배자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에우메네스와 안티고노스 1세가 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맞붙었을 때 에우메네스를 지지했으나, 에우메네스가 패하자 안티고노스 1세에게 귀순하고 아들 미트리다테스를 인질로 넘겼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는 동갑이며 안티고노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와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기원전 302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디아도코이 안티고노스 1세는 미트리다테스가 자신의 경쟁자인 카산드로스와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는 어느날 밤 꿈에서 밭에 황금 씨앗을 뿌렸고 나중에 황금을 수확하려고 방문했다. 그러나 황금은 이미 수확되었고, 미트리다테스가 범인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티고노스는 이 꿈을 꾼 뒤 미트리다테스를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데메트리오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안티고노스 1세의 궁정에서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
미트리다테스는 파플라고니아로 도망친 뒤 키미아타 요새를 근거지로 삼은 뒤 그리스인 도시 아마시아를 점거했다. 그는 점차적으로 폰틱 카파도키아 전체, 즉 소아시아의 흑해 연안을 따라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301년 입소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 1세가 전사한 뒤 리시마코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기원전 281년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 1세와 코루페디온 전투를 치르다 전사하면서 소아시아 일대가 혼란해지자, 그는 폰토스 국왕을 칭하고 셀레우코스 1세에 대항하여 비티니아의 도시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소아시아를 침략한 켈트족을 물리쳤다.
기원전 266년 사망했고, 아들 아리오바르자네스 1세가 뒤를 이어 폰토스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