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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어: Ἰβηρία라틴어: Hiberia
영어: Iberia
기원전 302년 파르나바즈 1세에 의해 건국되어 580년 사산 왕조에게 완전 병합될 때까지 700여 년간 조지아 동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콜키스, 동쪽으로 코카서스 알바니아, 남쪽으로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캅카스 일대를 지배한 고대 왕국. 콜키스와 함께 조지아의 기원으로 손꼽히는 왕국이다.
2. 어원
이베리아는 카르틀리(Kartli, 조지아어로 ქართლი) 왕국에 대한 외래어다. 이 이름의 출처는 불분명하다. 한 이론에 따르면 동시대의 아르메니아 측에서 이 왕국을 'Iverk'라고 표기한 것이 이베리아로 파생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콜키스 사람들이 리키 산맥 너머에 있는 이 왕국을 "산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는 뜻의 "Imer"라고 지칭했는데, 이것이 이베리아로 파생되었다고 한다. 명칭이 이베리아 반도와 우연히 겹치기에, 캅카스 이베리아 또는 동(東) 이베리아 왕국이라 칭하기도 한다.3. 역사
바그라티온 왕조 시대에 집필된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K'art'lis C'xovreba)>에 따르면, 초대 군주 파르나바즈 1세는 도갈마의 아들인 카르톨로스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도갈마는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손자 고멜의 아들로 기록되었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는 그가 므츠헤타의 사마리아인 마마삭슬리시(mamasaxlisi: 집의 아버지)의 형제이며, 어머니는 이스파한 출신의 페르시아 여성이라고 기술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동방 원정을 떠나 조지아 동부 일대를 침공했을 때 파르나바즈의 아버지와 마마삭슬리시 등이 살해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3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코카서스로 도망친 뒤 홀로 양육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그는 고향 므츠헤타로 돌아갔고, 탁월한 궁술을 기반으로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에 의해 카르틀리 지역을 다스리던 아존이 그를 위험인물로 여긴 걸 눈치챈 어머니는 아들에게 위험을 경고하여 아스파한으로 망명하라고 촉구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떠나기 전에 트빌리시 근처에 있는 디그미 평원에서 사냥을 하던 중 절벽 기슭에서 죽어가는 사슴을 죽였다. 그 후 거센 비가 와서 동굴에 피신했는데, 거기서 멋진 보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신이 자신이 카르틀리의 왕이 되라는 계시라고 여기고, 여러 유목 민족을 모아 1,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므츠헤타를 공략하고 아존을 죽인 뒤 왕국을 세웠다.
파르나바즈 1세는 누이를 오세티아 왕과 결혼시키고 콜키스의 영토를 쿠이 족에게 넘겨줌으로써 동맹 부족들에게 보답했다. 본인은 콜카서스의 두르주크족 여인과 결혼했다. 그는 8명의 지방 관리와 스파스패티(spaspeti)라 불리는 군사 지휘관을 선임했으며, 미츠헤타의 아르마즈체 요새에 아르마즈 신을 숭배하는 신전을 건립했다. 이 아르마즈 신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동일시된다. 한편, 그는 사절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에게 보내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왕위를 인정받았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27세에 왕이 된 뒤 65년간 통치하다가 사망한 뒤 아르마즈체 요새 내에 마련된 영묘에 묻혔다고 한다. 그의 영묘는 훗날 왕국의 성지가 되었고, 이베리아 역대 국왕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삼기 전까지 그의 영묘에 반드시 들려서 조상을 기렸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사우로마케스 1세는 즉위 직후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가족을 데리고 어머니의 고향에서 숨어지내야 했다. 그러다 아즈루니, 오비시, 두르주크인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복귀할 수 있었다. 그는 반란에 에리스타비(이베리아 왕국 행정 구역의 수장)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면서도 왕국의 북부 일대엔 에리스타비를 설치하지 않고 왕실의 직할지로 삼아서 두르주크 사람들을 여기에 이주시켰다. 한편 아버지처럼 셀레우코스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세력 확장을 꾀해 현재의 조지아 동부와 조지아 서부의 남서부 일대를 장악했다. 또한 바르다비(알바니아) 출신의 페르시아 고위 관리의 딸과 결혼했지만 두 딸만 낳고 아들은 낳지 못했다. 딸 하나는 에그리시의 에리스타비인 쿠지와 결혼했고, 다른 딸은 페르시아의 미리안과 결혼했다. 그는 미리안을 양자로 삼음으로서 후계자로 지명했다.
기원전 159년 사우로마케스 1세가 사망한 후 양자 미리안이 미리안 1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국제 정세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베리아 남쪽 국경과 접한 나라인 아르탁세스 왕조 아르메니아는 세력을 확장할 기회를 노렸고, 기존의 중동 패권 국가였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갈수록 강성해지는 파르티아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북부 이베리아에서는 이베리아 왕국의 우호 부족이었던 두르주크 족이 왕국 북쪽의 카케티아와 바잘레티 지방을 침략하면서 적대 관계로 돌아섰다. 그들은 이 일대를 황폐화하고 많은 이베리아인을 끌고 갔다. 이에 그는 8명의 스파스패티(spaspeti)를 소집하여 군대를 집결시킨 뒤 스바네티에서 두르주크 족을 격파했다.
이후 두르주크족을 추격하기 전에 키스캅카스인들이 점령한 영토를 해방하는 원정에 착수했다. 다리알리 계곡에서 격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격파하고, 뒤이어 두르주크 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이후 다리알리 계곡에 일련의 요새를 세웠는데, 이를 다리알리 대로라고 한다. 이 요새들은 19세기까지 역대 조지아 국의 유목민족 침략에 대한 첫 방어선으로서 기능했다. 한편, 그는 셀로우코스 제국 대신 파르티아의 봉신이 되었지만, 아르메니아 왕자 아르탁시아스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아르메니아와 동맹 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맹은 미트리다테스 6세가 이끄는 폰토스 왕국이 이베리아 왕국의 이욱 국가인 콜키스를 공략하는 걸 저지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기원전 109년 미리안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파르나좀은 풍요의 신 자단(Zaden)의 동상을 세우고 이를 수용하기 위해 요새를 세웠다. 그러나 외국 신을 수용한 것에 반발한 귀족들이 기원전 90년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반란군과 싸우다 죽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파르나바즈 왕조는 한동안 단절되었고, 아르메니아 왕국의 아르탁세스 왕조가 이베리아 왕위를 차지했다.
아르메니아의 왕자이자 미리안 1세의 사위였던 아르탁시아스 1세는 파르나좀을 죽인 반란군에 의해 추대되었지만, 소운다 시의 성벽을 요새화하는 등 유목민족의 침략에 대비하여 수비를 강화한 것 외에는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 기원전 78년 왕위에 오른 아르토케스는 기원전 6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다가 미트리다테스와 손잡고 자신에게 대항한 코카서스의 알바니아 부족을 정복한 것에 위협을 느끼고,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가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시간을 질질 끌려한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로마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던 그는 미트리다테스 6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와 연합하여 로마군을 치기로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첩자들로부터 이베리아인들이 비밀리에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베리아를 기습 공격해 하르모지케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급히 쿠라 강 좌측 강둑으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우측 강둑에 이르렀다. 아르토케스는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다리를 무너뜨린 뒤, 다리를 복원하고 식량을 공급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따르는 척했다가 아르토케스가 다리를 복원하자마자 곧바로 다리를 건너 그를 추격했다. 그는 아라그비 강으로 철수한 뒤 다리를 다시 파괴했고, 일부 이베리아 투사들은 숲에 숨어서 지나가는 로마 군인들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쏘고 적이 쫓아오면 후퇴했다가 재차 공격하길 반복했다. 이 유격전에는 이베리아 여인들도 상당수 참여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베리아 투사들은 결국 패배했다. 폼페이우스는 뒤이어 아르토케스를 추격해 이베리아 깊숙이 진격하여 펠로루스 강 인근에서 따라잡았다. 아르토케스는 우수한 궁수대를 활용하여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게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신속한 보병 돌격으로 궁수들을 무력화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이베리아군 9,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10,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아르토케스는 더 이상 항전하는 건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왕관, 금상, 침대를 포함한 막대한 귀금속을 바치며 휴전을 요청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아이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아르토케스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아라그비 강을 건너 이베리아군을 압박했고, 결국 아르토케스는 아이들을 인질로 보낸 뒤 로마 공화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기원전 63년, 아르토케스는 폼페이우스로부터 퇴위 압박을 받자 아들 파르나바즈 2세에게 왕위를 넘겨줬다. 파르나바즈 2세는 로마의 봉신으로 지내다가 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로마가 혼란해지자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인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가 군대를 이끌고 그에게 압력을 행사하자, 어쩔 수 없이 도로 로마의 봉신이 되었고,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지원군을 보냈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파르티아와 손잡기로 하고 파르티아인 카르탐을 양자로 들이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30년 파르나좀의 아들이었던 미리안이 이베리아 귀족들을 끌여들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카르탐과 함께 피살당했다.
파르티아에 망명한 지 60년 만에 왕위를 차지한 미리안 2세는 10년간 집권하다가 기원전 20년에 사망하고 아들 아르탁시아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아르탁시아스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카케티아의 넨카르 또는 네크레시와 우플리츠시케 요새를 강화하고 내치를 다지는 등 국가의 발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미리안 2세에게 살해된 카르탐의 아들 아드레키 왕자가 서기 1년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어 이베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르탁시아스 2세는 이에 맞서 왕국 전역에 병력을 소집하면서, 파르티아에 지원을 요청해 일부 병력을 받아냈다. 양군은 트살리카에서 조우해 이틀간 교전했다. 첫날에는 결판이 나지 않았지만, 두번째 날에는 패배했고, 아르탁시아스 2세는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아드레키는 파라스마네스 1세를 칭하며 왕위에 오른 뒤 아르메니아와 로마의 봉신을 자처했다.
파라스마네스 1세는 집권 후 수십년간 나라를 평온하게 이끌었다. 그러던 35년 로마 제국 황제 티베리우스의 부탁을 받아들여 형제인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에 앉혔다. 그러자 아르메니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고 싶었던 파르티아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아들 오로데스 휘하의 대규모 부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 그는 이에 맞서 사르마티아 및 알바니아인 용병대를 고용해 병력을 증강시킨 뒤 아르메니아로 들어가 미트리다테스와 합류했다.
양군이 곧 조우한 뒤 격전을 한창 벌이던 중 벌어지던 중 그와 오로데스 왕자가 서로 맞붙었다. 그가 오로데스의 투구를 베어 상처를 입혔지만, 오로데스가 말을 몰고 달아나서 목숨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파르티아인들은 왕자가 죽은 줄 알고 혼란에 빠져 도주했다. 이에 분노한 아르타바노스 2세는 대군을 끌어모아 36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지만, 그가 험준한 산세를 활용하여 철저한 방어와 유격 전술로 일관하면서 곤란을 겪다가 파르티아 귀족들이 티리다테스 2세를 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물러나야 했다.
그런데 37년 봄 미트리다테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칼리굴라 황제에 의해 폐위되어 로마로 송환되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이 때를 틈타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42년 오로데스가 사망하자,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미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위시켰다. 로마 수비대는 아르메니아 수도 아르탁사타 인근의 고르니(Gornae) 요새에 주둔하여 미트리다테스의 왕위를 보장했다. 그러나 50년대에 이르러 그와 미트리다테스와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미트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에서 입지가 어느 정도 보장되자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아들 라다미스투스가 오래도록 왕위에 있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를 짐작하고 있던 그는 아들을 설득해 아르메니아 왕위를 노리게 했다. 라다미스투스는 51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미트리다테스를 처단하고 아르메니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52년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가 동생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에 앉히고자 아르메니아를 침공했을 때, 라다미스투스는 지역 귀족과 로마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이베리아로 달아났다.
53년, 그는 파르티아가 내란에 휘말려 다른 데 관심을 쏟지 못하는 틈을 타 로마군의 지원을 받으며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티리다테스 1세를 축출하고 라다미스투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그러나 라다미스투스가 티리다테스 1세와 협력한 인사들을 모조리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일삼자, 이에 분노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몰아내고 티리다테스 1세를 복위시켰다. 라다미스투스는 임신한 아내 제노비아와 함게 이베리아로 달아났다. 그러다 제노비아가 너무 지쳐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자, 그녀가 적의 손에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며 그녀를 칼로 찌르고 아락스 강(오늘날 아라스 강)에 던졌다. 이때 양치기들이 강에 떠내려가는 그녀를 구출하여 치료해준 뒤 아르탁사타로 데려갔다. 이후 아르메니아인들의 초청을 받은 티리다테스 1세는 파르티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아르탁사타에 순조롭게 입성했고, 제노비아를 왕족으로 대우했다.
58년, 라다미스투스는 그에 의해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라다미스투스가 아내 제노비아와 외가 식구들에게 몹쓸 짓을 한 것에 반감을 품자,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을 자기 손으로 처형한 것에 심히 충격받았기 때문인지 얼마 안가 사망했다.
이베리아 왕국은 파라스마네스 1세 사후에도 로마의 동맹국으로서 명맥을 이어갔다. 서기 116년 아마자습 1세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니시비스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어 왕위에 오른 파라스마네스 2세는 강대한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로마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콜키스,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킬 기회를 엿봤다. 흑해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지드리트(Zidrite) 부족의 영토를 공략해 콜키스를 로마의 소아시아 영토에서 분리했다. 그러다 134년 로마군이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 대거 동원되어서 다른 데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알란 용병대를 동원하여 로마와 파르티아의 영토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하여 아르메니아, 알바니아, 메디아 및 카파도키아 일대를 휩쓸고 수많은 이들을 학살했다.
그러다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새 황제로 등극한 뒤 상당한 영토와 재물을 이베리아에 선사했고, 파라스마네스 2세는 이에 만족하여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로마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144년, 그는 아내와 대규모 사절단을 거느린 채 로마를 방문했고,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벨로나 신전에 그의 기마상을 두는 걸 허용했다. 이렇듯 위세를 떨치던 그였으나 최후는 비참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60년경 파르티아가 보낸 요리사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그 후 이베리아 왕국은 로마의 동맹국으로서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185년 왕위에 오른 아마자습 2세 대에 알란족이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쳐들어왔다. 그는 군대를 소집하여 알란족과 맞서 싸우려 했지만, 여러 군사 총독들이 병력을 보내길 거부했고, 오직 카케티에, 호우난, 삼치빌데 총독만이 병력을 보냈다. 알란족이 7일간 휴식을 취한 뒤 이베리아의 수도 므츠헤타를 향한 여정을 떠나자, 그는 사푸르츨레에서 3만 보병과 1만 기병을 이끌고 저지했다. 이날 전투에서 이베리아군이 압승을 거두었고, 다시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를 벌여 알란족의 여러 장수들을 전사시키고 뒤이어 새로 합류한 기병을 파견해 알란 족의 왕을 처단했다. 침략자들이 코카서스 너머로 피신하자, 그는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북캅사스 일대에서 1년간 그들을 추격하여 섬멸하고 알란족의 땅을 합병했다.
이렇듯 군사적 위업을 달성하고 복귀한 아마자습 2세는 소집에 불응한 여러 귀족을 처형했으며, 아르메니아 및 로마 제국과 맺은 동맹을 깨고 파르티아와 손을 잡으려 했다. 이러한 행보에 분노한 귀족들은 189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서부 이베리아를 횡행하며 아르메니아의 볼로가세스 2세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반란군은 로마군과 합세한 뒤 남쪽에서 북상했다. 그는 이에 맞서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4세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뒤 파인자우리 계곡에서 반란군과 조우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끝내 패배를 면치 못하고 전사했다. 이리하여 왕실의 대가 끊어지자, 귀족들은 아르메니아 왕 볼로가세스 2세의 아들이자 아마자습 2세의 외조카이기도 한 레브 1세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이리하여 아르샤쿠니 왕조가 이베리아의 새 왕조로 등극했다.
레브 1세는 그리스인의 딸 세필리아와 결혼했으며, 수도 므츠헤다에 아프로디테의 동상을 세웠다. 한편 인신공양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보호해줘서 후대 기독교 학자들로부터 "정의로운 자"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르샤쿠니 왕조는 이후에도 이베리아를 다스렸으나, 사산 왕조가 왕가의 본토인 파르티아를 정복한 이후 사산 왕조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260년 샤푸르 1세가 이베리아 왕으로 아마자습 3세를 선출해 미흐르다트 2세와 대립시키기도 했다.
265년 미흐르다트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스파쿠레스 1세는 사산 왕조의 코카서스로의 진출 시도에 강력히 저항했으며, 그 과정에서 우자르마 요새를 건설하거나 복원했다. 282년 카루스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했을 때, 그도 참여해 로마군이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여 크세노폰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카루스가 283년 낙뢰로 사망한 뒤 로마군이 철수하자 사산 왕조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284년 이베리아를 침공한 사산 왕조군에게 패배한 뒤 새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오세티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돌연 사망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아스파쿠레스 1세가 사망했을 때 아들이 없고 어린 딸 아베슈라만 있었다. 이에 귀족들은 한 자리에 모여 차기 왕으로 누굴 세울 지 논의한 끝에, "호스로의 아들 미리안"을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조지아 역사 연구가 키릴 투마노프는 미리안이 파르티아부터 사산 왕조까지 이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7대 가문 중 하나인 미흐란 가문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이베리아는 사산 왕조의 치하에 있었으며, 미리안은 사산 왕조를 섬기는 왕으로서 옹립되었다고 덧붙였다. 반면 조르지 멜리키슈빌리 교수는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를 작성한 중세 역사가들이 미리안을 이국적인 외국 왕족 출신으로 묘사함으로써 권위를 부여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실제라는 이베리아 귀족 출신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한편 역시 중세 조지아의 역사 기록인 카르틀리의 개종에서는 미리안이 레위의 아들이라고 서술했다.
아무튼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미리안 3세는 선왕의 어린 딸 아베슈라와 결혼한 뒤 사산 왕조의 협조 아래 콜키스와 알바니아를 통치했으며, 시리아에서 사산 왕조군과 함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다 로마 부황제 갈레리우스의 대반격으로 사산 왕조군이 참패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지자, 사산 왕조의 샤한샤 나르세스 1세는 로마 정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니시비스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사산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의 패권을 로마에 헌납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권력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되었고, 곧바로 로마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한편, 아베슈라가 292년 사망하자 "폰토스의 올리고토스의 딸" 나나와 재혼했다.
337년, 미리안 3세는 기독교를 이베리아의 국교로 선포했다. 역사학계는 그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을 염두에 두고 로마 제국의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는 이교 사원의 재산을 몰수하여 일부는 교회에 양도하고 나머지는 국고에 충당했다. 왕실과 귀족들은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이교를 믿었다. 특히 산악지대에 사는 이들은 자기들이 믿는 신을 고수하며 기독교를 배격했고, 이로 인한 민란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백성들이 기독교를 수용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로마 역사가 루피누스에 따르면, 이베리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즉시 사제와 유물을 이베리아로 보냈고, 그들은 이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므츠헤타에 대성당을 지었고 죽기 직전에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고 한다.
361년 뒤이어 왕위에 오른 사우로마케스 2세는 친로마 정책을 구사하다가 363년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2세의 침공을 받자 로마로 피신했다. 샤푸르 2세는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로 아스파쿠레스 2세를 내세웠다. 로마는 370년경 반격을 개시했다. 당시 발렌티니아누스 1세와 함께 로마 제국을 공동으로 다스리고 있던 발렌스 황제는 테렌티우스가 지휘하는 12개 군단을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아스파쿠레스 2세는 이베리아로 침입한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 로마에 협상을 요청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아스파쿠레스 2세는 자신의 아들 울트라가 페르시아에 인질로 가 있어서 페르시아를 버릴 수 없다면서, 그 대신 사우로마케스와 자신이 이베리아를 양분해서 다스리겠다고 요청했다. 테렌티우스는 이를 받아들이면서 병화 협약이 수립되었다. 사우로마케스 2세는 라지스 등 아르메니아 국경에 가까운 이베리아 서부 지역을 다스렸다. 반면 아스파쿠레스 2세는 알바니아 등 페르시아와 가까운 이베리아 동부 지역을 다스렸다.
378년, 샤푸르 2세는 발렌스에게 이베리아를 단일 왕국으로 통합하고 아스파쿠레스를 이베리아의 주권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발렌스가 거부하자, 샤푸르 2세는 수레나 장군을 파견해 사우로마케스 2세를 지키는 로마군을 물리치게 했다. 로마군은 격파되었고, 그는 폐위되었다. 당시 발렌스는 378년 8월 9일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전사했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통합 이베리아 왕국의 집권자가 된 아스파쿠레스 2세의 후예들은 사산 왕조의 의향에 따라 기독교를 탄압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다 서기 406년 집권한 파라스마네스 4세는 사산 왕조에 조공을 바치는 걸 거부하고 모든 교회를 복원했다. 409년에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미흐르다트 4세도 형의 정책을 고수했다.
411년, 사산 왕조 샤한샤 야즈데게르드 1세는 조공을 끊은 이베리아 왕국을 응징하고자 침공을 개시했다. 미흐르다트 4세는 처음에는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에서 승리했지만 얼마 안가 패배하여 생포된 뒤 크테시폰으로 끌려갔다. 이베리아 왕국 전역이 페르시아군에게 파괴되고 있을 때, 왕실 구성원들은 산악 지대인 카케티 지역의 은신처에서 겨우 자리를 잡고 그의 아들인 아르칠리를 새 군주로 옹립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나르세스 장군에게 이베리아 일대의 지배를 확립하도록 시키고, 자신은 트란스캅카스를 침공해여 그곳의 부족들을 복종시켰다. 아르칠리는 사산 왕조군의 기세에 짓눌려 야즈데게르드 1세에게 복종을 서약해야 했다. 카르틀리 왕실 연대기에 따르면, 아르칠리는 나중에 아르메니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해 독립을 쟁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이를 신빙성 없는 기록으로 간주하며, 이베리아는 사산 왕조의 간접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설상가상으로, 428년 이베리아 왕국의 남쪽 나라인 아르메니아 왕국이 사산 왕조에 완전히 합병되면서, 이베리아 왕국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447년 왕위에 오른 바크탕 1세는 사산 왕조의 지배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는 나라를 잇따라 침입하는 알란족과 백훈족을 물리치고 에그리(라지카)와 압하지아(아바지아)를 공략했다. 또한 로마 황제 제노의 친척 헬레나와 결혼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이베리아 교회의 수장이 대주교로 선임되는 걸 허락받는 등 친 로마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사산 왕조에 복종하는 귀족들에 대한 탄압을 감행했다. 이렇게 힘을 기르던 그는 482년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는 아르메니아 총독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르메니아의 반란군 지도자 바한 마미코니안과 동맹을 맺었다. 아르메니아 총독 아드후르 구슈나프는 이베리아-아르메니아 연합군에게 패해 전사했고, 바한은 사하크 2세 바그라투니를 새 총독으로 세웠다. 사산 왕조 샤한샤 페로즈 1세는 진압군을 보내는 한편, 샤푸르 미흐란이 이끄는 또다른 군대를 이베리아로 파견했다.
사산 왕조군은 482년 여름 아르메니아-이베리아 연합군을 격파했고, 사하크 2세 바르가투니와 바한의 동생 바삭이 전사했다. 그는 이베리아를 잃고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라시카로 도주했다. 그러다 타리크 산으로 숨은 뒤 유격전을 전개한 바한과 연합하여 샤푸르 미흐란과 맞서 싸웠다. 샤푸르 미흐란은 이들에게 연이어 패배하다가 크테시폰으로 소환되었고, 바한과 바크탕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을 탈환했다. 483년, 자르미르 하자르우스트 휘하의 사산군이 드빈을 포위했다. 바한과 바크탕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뒤, 동로마 제국 국경 인근의 산속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사산 왕조군이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을 회피하려고 추격하지 않기를 바랬으나, 자르미르는 야간 행군 후 그들을 급습하여 상당한 포로를 확보했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산맥 깊숙이 숨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곳곳에서 사산 왕조의 지배에 불복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 지배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그러던 484년, 페로즈 1세가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사산 왕조군이 궤멸당했다. 이후 새 샤한샤에 즉위한 발라시는 이베리아-아르메니아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바흐탕은 이베리아에 돌아와 권력을 회복한 뒤에도 친로마 정책을 고수했다. 502년, 사산 왕조 샤한샤 카바드 1세가 100여 년간 이어지던 동로마 제국과의 평화를 깨고 소아시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카바드 1세는 그에게 봉신으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거부했고, 카바드 1세는 이베리아로 군대를 파견했다. 바크탕은 침략군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동로마 제국에 망명해야 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이베리아의 구르제네스(Gurgenes) 왕이 522년경 라지카로 피신했고, 아들 페라니우스, 파쿠리우스와 파자스가 로마군의 군영에서 활약했다고 한다. 키릴 토르마노프는 프로코피우스가 바크탕의 별명을 이름으로 착각하고 '구르제네스'로 명기했다며 구르제네스가 바크탕 1세와 동일 인물이라고 추정했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 있어서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 바크탕 고르가살의 생애에 따르면, 그는 로마군과 연합하여 사산 왕조군과 맞서 싸우다가 반역자 노예가 쏜 화살이 갑옷 사이의 겨드랑이에 박히는 바람에 중상을 입고 우자르마에 있는 그의 이송된 뒤 그곳에서 사망하고 므츠헤타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다치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산 왕조의 봉신으로 돌아갔고,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나라를 재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또한 티플리스 성벽을 완성하고 왕궁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베리아의 총대주교 페트레가 사망하자 후계자인 사무엘을 이전 수도인 므츠헤타에 앉혔다. 이후 므츠헤타는 이베리아 왕국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기독교를 여전히 믿지 않는 카케티의 산악 거주민들의 개종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한편, 바크탕 1세의 아들이자 다치의 이복동생인 레온과 미흐르다트는 이베리아 남서부의 클라르제티와 자바케티 지방을 각각 다스렸다. 이중에서 레온은 일찍 죽었고, 미흐르다트와 그의 후손들이 이베리아 남서부에서 자치를 누렸다.
534년 다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바쿠리우스 2세는 아버지가 시작한 신 수도 티플리스 건설 사업을 이어갔으며, 이베리아 남서부의 클라르제티와 자바케티 지방을 별도로 다스리던 삼촌 미흐르다트와 레온의 가족들과도 친선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할아버지 바크탕 1세의 유지를 받들어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고 사산 왕조와 대립했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사이에 트란스캅카시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그가 이 전쟁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양국의 분쟁은 현상유지를 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547년경 왕위에 오른 파라스마네스 5세 대에는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외적들에 맞서 싸우느라 이베리아 왕국에 신경도 쓰지 못했다. 이에 기독교를 믿는 걸 허용받는 조건으로 사산 왕조의 완전한 속국이 되었다. 반면 미흐르다트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이베리아 남서부는 동로마 제국에 계속 충성했다.
그 후 이베리아 왕실은 페르시아에 충실한 봉신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그들의 지시에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베리아 정교회의 발전과 교회 및 수도원 건설에 열을 올렸다. 그러다 580년, 바쿠리우스 3세가 사망했을 때 두 아들 아다르나세와 에리스타우가 너무 어려서 통치를 하기 어려웠다. 사산 왕조 샤한샤 호르미즈드 4세는 이 때를 틈타 왕국을 폐지하고 이베리아 전역을 사산 왕조의 영역으로 삼았으며, 아들 호스로 2세를 캅카스 이베리아의 총독으로 삼았다. 아다르나세와 에리스타우는 호스로 2세로부터 일정한 영지를 받고 일생을 조용히 보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왕국은 770여 년의 역사를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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