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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제국 14대 샤한샤 𐭩𐭦𐭣𐭪𐭥𐭲𐭩 |야즈데게르드 1세 | ||
제호 | 한국어 | 야즈데게르드 1세 |
중기 페르시아어 | 𐭩𐭦𐭣𐭪𐭥𐭲𐭩 | |
영어 | Yazdegerd 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420년 | |
재위 기간 | 399년~4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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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제14대 샤한샤.2. 생애
야즈데게르드는 야지드 야지타(Yazad Yazata: 신성한 존재)와 카르타(karta: 창조)의 합성어로, 신이 만든 자를 의미한다. 팔라비 어로 야즈데게르트(Yazdekert), 시리아어로 야즈데게르드(Yazdegerd), 그리스 어로 이즈디게르데스(Isdigerdes)로 일컬어진다. 그는 셀레우키아 공의회에서 "샤푸르의 아들"로 언급된다. 샤푸르 2세를 지칭하는지, 샤푸르 3세를 지칭하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몇몇 문헌은 그를 바흐람 4세의 아들이라고 기록했으나, 이것은 잘못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399년 바흐람 4세가 귀족들의 음모로 암살된 뒤 새 샤한샤로 즉위했다.사산인에 기반을 둔 자료들은 그를 많은 죄를 지은 폭군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날카로운 지능과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걸 오용했으며, 극단적인 의심과 이기심을 드러냈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으며, 사소한 실패에도 엄하게 처벌했지만 자기가 베푼 사소한 호의에 대한 많은 감사를 받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말이나 의지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경고했고, '외국 사절이 조언할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조언도 듣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이 서로 긴밀한 우정을 형성하는 걸 막았다. 신하들은 신께 그의 폭정을 끝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조로아스터교 사제들과 귀족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들은 야즈데게르드의 평화적인 정책, 종교적 관용, 자신들의 권력을 억제하려는 시도 때문에 증오했다.
반면 프로코피우스 등 로마측 기록은 그가 무척 훌륭한 군주였다고 묘사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야즈데게르드가 "고귀한 인격으로 큰 명성을 얻은 군주"였으며, 기독교 신민들이 왕의 안위를 위해 매일 기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 한다. 사산 제국 내 기독교도측 자료에 따르면,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잘해주었으며, 유대인 신민들에게 매우 친절하고 자상했다고 한다. 사실 그의 황후가 유대인 출신의 슈산두흐트였기 때문에, 아내의 입장을 고려하여 유대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로마측 역사가들로부터 이같은 찬사를 받은 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자로서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데서 비롯되었다. 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말년에 아직 어린 테오도시우스의 후견인이 되어줄 이를 물색했지만, 딱히 믿고 맡길 인물이 없자 고심 끝에 야즈데게르드에게 사절을 보내 테오도시우스를 부탁했다. 야즈데게르드는 즉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 사절을 보내 로마 황제의 요청을 영광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이겠으며, 향후 테오도시우스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을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여 가차없이 처단하겠다고 맹세했다. 408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새 황제로 즉위한 뒤, 그는 아르카디우스의 부탁을 준수하여 로마와 평화를 유지하였다. 당시 로마 제국은 고트족 등 이민족들의 침략에 고통받고 있었기에, 사산 왕조의 이같은 협력은 제국 유지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한편, 그는 기독교를 후원해주기도 했다. 동로마에서 찾아온 마루타 주교의 조언에 따라, 샤한샤는 "아시리아 교회를 위한 밀라노 칙령"으로 명명된 공식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예배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고, 파괴된 교회들을 재건할 수 있게 해줬으며,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마루타는 410년에 셀레우키아에서 교회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고, 샤한샤는 이를 후원했다. 조로아스터 사제들, 즉 마기 계급은 이러한 샤한샤의 행보에 심히 분노하여 기독교 후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지만, 샤한샤는 좀처럼 뜻을 꺾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 찬사를 받는 반면 사산인들의 기록에는 악평만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위 말년, 그는 중대한 사태에 직면했다. 후제스탄의 오마르즈드-아르다시르의 주교인 압다와 기독교 신자들이 419년 또는 420년에 조로아스터교의 봉화 신전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야즈데게르드는 압다를 불러 물었다.
"당신은 이 사람들의 우두머리인데 어찌하여 그들이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우리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행하게 하는가? 우리가 우리 조상들에게서 영예롭게 받은 성전을 헐어버리는 까닭이 무엇인가?"
한 평신도가 압다 대신 답했다.
"하느님의 집이 아니며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에 성전을 헐고 불을 껐습니다."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은 이 사건에 분노하여 강력한 압력을 가했고, 결국 샤한샤는 압다와 수행원들을 처형했다. 그 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고, 교회 몇 곳을 허물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샤한샤를 훌륭한 군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 기록에서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지나친 행위가 문제였지 샤한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모세스 코레나츠이(Moses Khorenats’i)에 따르면, 그는 병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히르카니아에 머물고 있을 때, 강에서 매우 멋진 말이 갑자기 나타나 그것에 차여 죽었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말은 신이 보낸 천사였다"며 폭정을 멈추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도 히르카니아의 귀족들이 샤한샤를 살해한 뒤 창작한 설화일 것이다. 아르메니아 왕 샤푸르는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테시폰으로 곧장 달려가서 샤푸르 4세를 칭했지만 신하들의 배신으로 살해되었다. 이후 귀족들은 바흐람 4세의 아들 호스로를 샤한샤로 앉혔지만, 알히라의 라흠 왕국 궁정에서 자란 바흐람이 아랍군과 함께 크테시폰에 도착한 뒤 호스로를 축출하고 바흐람 5세로서 새 샤한샤로 즉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