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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왕국 6대 군주 არტაგ | 아르토케스 | ||
제호 | 한국어 | 아르토케스 |
조지아어 | არტაგ | |
라틴어 | Artoces | |
생몰 년도 | 미상 ~ 미상 | |
재위 기간 | 기원전 78년 ~ 기원전 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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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베리아 왕국 6대 군주.2. 생애
이베리아 왕국 5대 군주 아르탁시아스 1세의 아들로, 기원전 78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65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를 추격하다가 미트리다테스와 손잡고 자신에게 대항한 코카서스의 알바니아 부족을 정복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지만, 폼페이우스는 그가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시간을 질질 끌려한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로마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던 그는 미트리다테스 6세,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와 연합하여 로마군을 치기로 했다.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첩자들로부터 이베리아인들이 비밀리에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베리아를 기습 공격해 하르모지케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급히 쿠라 강 좌측 강둑으로 후퇴했고, 로마군은 우측 강둑에 이르렀다. 아르토케스는 적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다리를 무너뜨린 뒤, 다리를 복원하고 식량을 공급할 테니 평화 협약을 맺자고 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따르는 척했다가 아르토케스가 다리를 복원하자마자 곧바로 다리를 건너 그를 추격했다. 그는 아라그비 강으로 철수한 뒤 다리를 다시 파괴했고, 일부 이베리아 투사들은 숲에 숨어서 지나가는 로마 군인들을 향해 원거리 무기를 쏘고 적이 쫓아오면 후퇴했다가 재차 공격하길 반복했다. 이 유격전에는 이베리아 여인들도 상당수 참여했다고 한다.
폼페이우스는 숲을 베거나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베리아 투사들은 결국 패배했다. 폼페이우스는 뒤이어 아르토케스를 추격해 이베리아 깊숙이 진격하여 펠로루스 강 인근에서 따라잡았다. 아르토케스는 우수한 궁수대를 활용하여 적에게 화살 세례를 퍼붓게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신속한 보병 돌격으로 궁수들을 무력화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이베리아군 9,000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10,000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아르토케스는 더 이상 항전하는 건 가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왕관, 금상, 침대를 포함한 막대한 귀금속을 바치며 휴전을 요청했다. 폼페이우스는 그의 아이들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아르토케스는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저했다. 이에 폼페이우스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아라그비 강을 건너 이베리아군을 압박했고, 결국 아르토케스는 아이들을 인질로 보낸 뒤 로마 공화국의 속국을 자처했다.
기원전 63년 미트리다테스 6세의 사망을 확인한 폼페이우스로부터 퇴위를 요구당하자 아들 파르나바즈 2세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났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