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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탈 ηβοδαλο | Ebodalo | Hephthalites 嚈噠 | 囐噠 | 悒怛 | 滑 | |||
6세기경 에프탈의 최대 강역 | |||
440년? ~ 710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키다라 | 돌궐 제1제국 | ||
사산 왕조 | |||
알촌 | 튀르크 샤히 | ||
준빌 | |||
수도 | 쿤두즈 발흐 | ||
언어 | 박트리아어[1], 소그드어[2], 호라즘어[3], 프라크리트어[4], 튀르크어(?), 산스크리트어 | ||
종교 |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교, 불교, 에프탈 다신교 | ||
군주 칭호 | (불명) | ||
주요 군주 | 아흐순와르 (458년경~?) |
1. 개요
언어별 명칭 | |
박트리아어 | ηβοδαλο (에보달로) |
파슈토어 | هپتالیان (압달리) |
코이네 그리스어 | Ἐφθαλῖται (헤프탈리테) |
한자 | 嚈噠 (엽달) 囐噠 (언달) 悒怛 (읍달) 滑 (활) |
산스크리트어 | श्वेतहुन् (스웨타후나) |
백훈족이라고도 불리는 에프탈(Hephthalites)은 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 그리고 서북 인도방면으로 세력을 떨친 유목 민족, 혹은 그들이 세운 유목제국을 일컫는다. 중국 사적에는 엽달(嚈噠), 읍달(悒怛), 활(滑)이라고 기록되었고, 서방 사료에는 Ephthalites, Abdel, Haital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인도에서는 후나족(Huna people)으로 불렸다.[5] 지배층은 알타이 산맥 일대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튀르크 계통의 민족으로 추측되나, 피지배층은 인종·언어로 볼 때 인도유럽어족계의 토하라인이었으며, 왕족 또한 이들과 많이 혼혈되어 있었다.[6]
상술했듯이 박트리아를 중심지로 삼은 에프탈인들은 동쪽으로는 유연과 경쟁하면서 타림 분지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를 쳐서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였다.[7]
2. 이름
"에프탈"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는데, '강함'이라는 뜻의 호탄어 단어 *Hitala, 가설적 소그드어 *Heβtalak의 복수형인 Heβtalīt, 또는 중세 페르시아어 *haft āl, 7개의 아리아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에보달로(ηβοδαλο)'라고 칭했고, 동전에다가 이를 '에프(ηβ)'로 축약하여 표기하였다. 이 명칭은 에프탈에게 복속되었던 롭 왕국[8]의 박트리아어 문서와 비문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가능하다.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문헌들은 그들을 '헤프탈리테(Ἐφθαλῖται)', 압달(Abdel) 또는 아브델(Avdel)이라고 불렀다.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에프탈인들은 헤프탈(Hephthal), 헵탈(Hep't'al), 테탈(Tetal) 등으로 불렸는데, 가끔씩 쿠샨인들과 혼동되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의 적대국이었던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사료에서는 헤프탈(Hephtal), 헤브탈(Hēvtāls)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아랍에서는 '알하야틸라(هياطلة)' 혹은 헤야텔라이트(Heyâthelites)로 불렀으며 튀르크인의 분파라고 기록하였다.
엽달국(嚈噠國)은 대월지와 유사한 종족이며, 고차[9]의 별종(別種)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본디 새북(塞北)[10]에서 기원하였는데, 금산(金山)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우전의 서쪽ㅡ 즉 오허수(烏許水) 남쪽 200리 되는 곳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그곳은 장안과 10,100리 떨어진 곳이다...(중략) 이는 북위 문성제보다 약 80년에서 90년 전의 일이다.[11] 그 사람됨은 흉폭하며 싸움에 능하다. 서역의 강거, 우전, 사륵(沙勒), 안식[12] 및 다른 소국 30여 개가 모두 그들에게 복속하며 ‘대국(大國)’이라고 칭한다. 연연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다. 태안(太安)[13] 연간 이후 매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으며, 정광(正光)[14] 말년에는 사신을 보내 사자 한 마리를 바쳤는데, 고평(高平)에 이르렀을 때 묵기추노(万俟醜奴)의 반란이 일어나 그로 인하여 억류되었다가, 난이 평정되자 경사로 보내졌다. 영희(永熙)[15] 연간 이후 조공이 마침내 끊어졌다.
『위서』102권 제90 서역열전
중국 사료에서는 '엽달(嚈噠)' 혹은 '활(滑)'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이전에 장건이 찾아갔던 대월지와 유사한 종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6] 재미있는 점은 표준중국어 발음보다 중고한어 발음이 더 잘 보존되어 있는 광둥어와 한국어 명칭이 그리스어 및 박트리아어 원음과 더 유사하다는 것이다.『위서』102권 제90 서역열전
3. 기원과 특징
에프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주장 2가지는 이란계 민족이라는 설과 알타이계 민족이라는 설이다. 현재 가장 신빙성 있는 이론은, 에프탈인들이 처음에는 튀르크계 유목민에서 기원했으나 나중에 박트리아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란화했다는 것이다.[17]1995년, 일본의 역사학자 에노키 카즈오는 에프탈을 언급한 고대 사료들이 공통적으로 그들이 소그디아나와 힌두쿠시 사이에 위치했다고 기록한 점, 그리고 에프탈인들의 외모 묘사에서 부분적이지만 이란계 민족들의 특성이 드러났다는 점에 근거하여 그들이 박트리아에서 기원한 인도유럽계 동이란인이라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중앙아시아사 연구가 리처드 넬슨 프라이는 에노키의 가설을 조심스럽게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에프탈은 아마도 혼혈집단이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비교적 최근에 편찬된 이란 백과사전(encyclopædia iranica)이나 이슬람 백과사전 등은 에프탈을 아프간계 민족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다른 역사학자들인 요제프 마르크바르트(Josef Marquart)나 르네 그루셰(René Grousset)는 에프탈이 원시 몽골족일 가능성을 제안했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유태산(余太山)은 에프탈의 기원을 선비족, 더 나아가서는 고구려까지 추적하기도 했다.
드 라 바시에르(de la Vaissière) 등 다른 학자들은 중국측 사료에 대한 최근의 재평가를 근거로, 에프탈이 처음에는 원시 튀르크족에게서 기원했지만 나중에는 여러 목적으로 박트리아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사실 에프탈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민족들의 연맹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처드 넬슨 프라이는 저서에서 한 페이지를 할당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후대의 유목 제국들이 수많은 민족들의 연합이었던 것처럼, 우리는 잠정적으로 이 침략자들의 지배층들이 동쪽과 북쪽에서 온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이거나, 적어도 그들이 이 연합에 포함되어 있다고 제안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온족 연합에 속한 민족들, 특히 에프탈인들은 이란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유목민들은 기존에 그랬던 것처럼 정주민들의 언어, 제도, 문화를 채택하였다.
3.1. 훈족과의 관계
역사학자 마틴 쇼트키(Martin Schottky)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은 동시대에 유럽을 휩쓴 훈족들과 관련은 없었지만, 이들의 이동에는 인과적으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다른 학자들은 에프탈이 그들의 적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스스로를 '훈'이라고 자칭했다고 말한다.이와는 반대로, 드 라 바시에르와 같은 학자들은 다른 가설을 제안한다. 에프탈이 알타이 지역에서 기원하고 궁극적으로 유럽에 도착한 유목민 이주물결[18]의 일부였으며, 이들이 '정치적, 부분적으로 흉노의 후예'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목민들의 이주물결은 4세기의 기후변화에 의해 촉발되었으며,[19] 알타이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초원 및 목초지에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만다 로마조프(Amanda Lomazoff)와 아론 랄비(Aaron Ralby)에 따르면, 훈족과 에프탈 사이에는 '광범위한 영토적 중복'이 있었으며 서쪽 아틸라의 '공포의 통치'와 남쪽의 에프탈 사이에는 높은 동시성이 존재했다고 한다.
한편 북흉노의 잔존 일파가 세운 열반국을 다룬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족의 또다른 잔존세력이 중앙아시아로 들어갔다고 기록하였는데, 훈족-흉노 동계설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이주한 흉노족[20]이 알타이 산맥과 중앙아시아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살아가다가 이상기후로 인해 각각 서진, 남진하여 훈족과 에프탈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 민족의 이름이 일부분이지만 일치한다는 점, 동양인스러운 외모와 서양인스러운 외모가 혼재한다는 점, 대대적으로 이동하기 전에 거주하던 지역이 대부분 겹친다는 점 등에서 상당히 가능성있는 가설일수도 있다.
6세기의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는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에프탈이 유럽의 훈족과 관련이 있지만, 이들의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서로의 문화적, 사회적인 괴리를 기록하였다.
백훈족이라 불리는 에프탈 훈족[...] 그들은 이름에서 훈족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혈통적으로도 훈족이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어떠한 훈족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과 인접하지도 않고 심지어 그들과 매우 가깝지도 않은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토는 페르시아의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훈족과 같이 유목민은 아니고, 오랫동안 좋은 땅에서 정착 생활을 해왔다. 훈족들 가운데서 추하지 않은 하얀 몸과 얼굴을 가진 사람은 오직 그들뿐이다. 또한 그들의 삶의 방식이 그들의 친척들과 같지도 않고, 그들처럼 야만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들은 한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고, 합법적인 헌법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에 못지 않게 서로와 이웃들간의 거래에서 옳고 그림과 정의를 준수한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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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탈 기병 |
에프탈족에 관한 역사 기록은 에프탈족의 적이었던 사산 왕조와 사산 왕조의 적이었던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그리고 당시 탄압받던 중국인 불교 승려들의 기록을 통해 알려져 있다.
쿠샨 왕조의 붕괴에 편승하여 5세기 중엽 토하리스탄 지방을 지배하던 키다라족을 무너뜨리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서쪽으로는 사산 왕조를 쳐서 위와 같은 광대한 판도를 만들었고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를 제압하여 시르 강에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타림 분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에프탈은 567년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와 돌궐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여러 소국으로 나뉘어 잔존하다가 멸망했다.
이런 나름 강해진 세력을 기반으로 인도·중국·페르시아·남러시아를 연결하는 무역 노선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며 중앙아시아에서 일대 세력을 일구었다. 남북조시대 북위의 승려인 송운(宋雲)과, 알렉산드리아의 상인 코스마스가 남긴 이 나라에 대한 견문기는 꽤나 유명하다. 초기 왕들인 킹길라와 토라마나 시대에는 불교를 후원했으나, 펀자브 방면의 통치자였던 미히라쿨라 왕의 시대가 되면 불교 박해로 악명이 높았다. 미히라쿨라의 불교 탄압으로부터 1세기 후 현장이 방문했을 때 불교는 크게 쇠퇴해 있었다. 한편 천신(天神)과 화신(火神)을 믿는 토속 신앙이 있었다.[21] 다만 동로마 측의 기록에 의하면 에프탈족들 사이에서 이마에 십자가 모양의 문신을 새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에프탈족 사회에 기독교가 퍼져 있었던 것이라고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로마제국에서 이단으로 분류되어 페르시아로 달아난 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가 동방으로 선교를 하면서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4.1. 출현과 전성기
4.1.1. 사산 제국과의 동맹: 서기 442년 ~ 530년
에프탈은 5세기 초까지 유연의 속국 내지는 그에 복속되었던 유목 집단으로 추정되었다. 이 시기에 에프탈은 유연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그들의 문화를 차용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유연이 사용한 '카간'이라는 칭호가 에프탈인들이 남긴 동전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학자들은 에프탈이 본래의 거주지였던 알타이 산맥에서 남동쪽으로 이주한 이유가 유연의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에프탈이 언제 박트리아로 이주했는지는 불명이나, 최소한 450년 혹은 그 이전에 박트리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에프탈이 350년경에 (박트리아에) 도착한 시온족(Chionites)과 380년경에 도착한 키다라(Kidarites)에 이어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유목민의 3번째 이주 물결을 형성했다고 일반적으로 여겼지만, (상술했듯이)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에프탈은 기후 변화 및 초원 지대의 황폐화로 인해 촉발된 일련의 대규모 유목민 이주 물결ㅡ 일명 '대침략'에 편승하여 섞여들어온 민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박트리아에 도착한 에프탈은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키다라족을 펀자브 방면으로 밀어내고, 알촌 훈족을 압박하여 그들이 간다라와 북인도 방면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었다.
아르메니아 역사가 엘리제 바르다페드의 기록에 의하면 442년경 페르시아의 샤한샤였던 야즈데게르드 2세는 '에프탈의 부족'과 싸웠다고 한다.
453년, 야즈데게르드 2세는 에프탈을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방면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유목민족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자신의 궁정을 조금 더 동쪽으로 이전시켰다.
458년, 아흐순와르라고 알려진 에프탈 족장이 페로즈 1세가 샤한샤에 즉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페로즈는 본래 사산 제국의 동쪽 변경이었던 시스탄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에프탈에 대해 비교적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프탈은 사산 왕조와 잠시동안이지만 동맹을 맺고 공통의 적이었던 키다라를 공격했다. 467년, 페로즈 1세가 이끄는 사산-에프탈 연합군이 발람을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키다라족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약화된 키다라인들은 겨우 살아남아 간다라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다.
4.1.2. 사산 제국을 공격하다: 서기 474년 ~ 488년
일시적이었던 이들의 동맹은 474년경에 끝났다. 페로즈 1세는 키다라를 능가할 정도로 성장한 에프탈에게 점차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선제 공격을 두번이나 감행했지만, 두번 다 실패하고 에프탈에게 사로잡혀 어마어마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특히 두번째 패배 이후, 그는 은화를 가득 실은 노새 30마리를 에프탈 왕에게 바쳤을 뿐만 아니라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잡히는 굴욕을 당했다. 페로즈 1세의 이러한 실패로 인해 몇십년 동안 박트리아에서는 사산제 은화가 넘쳐났다고 한다.-
이때 박트리아는 에프탈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에프탈은 사산 왕조의 행정을 모방하여 이 지역에 성곽을 건설하고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었는데, 당시 에프탈에게 복속되었던 롭 왕국의 기록 보관소를 통해 에프탈이 본래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던 유목민족 치고는 꽤나 빠르고 정교하게 정주민들의 행정 및 정치 조직을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박트리아어 문서들은 오늘날 에프탈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데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페로즈 1세를 이긴 후, 에프탈은 그의 아들 카바드의 보호자이자 후원자가 되었다. 카바드는 에프탈 군대를 끌어들여 민심을 잃어버린 자신의 숙부 발라쉬를 몰아내고 사산 왕조의 샤한샤인 카바드 1세(재위 488 ~ 496, 498 ~ 531)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 496년에 카바드 1세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폐위되었는데, 겨우 탈출한 그는 에프탈의 도움을 받아 다시 복위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에프탈 군대는 점령한 도시들에게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4.1.3. 토하리스탄의 에프탈: 466년경
서기 461~462년 즈음, 메하마라는 이름의 알촌 훈족 족장이 토하리스탄 동부에서 세력을 떨쳤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는 에프탈이 발흐를 중심으로 토하리스탄을 알촌 훈족과 분할 점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메하마는 서기 462년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박트리아어 서신에서 자신을 "카다그 지역의 왕 메야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번영하는 제국을 다스리는 페로즈 왕의 총독"이라고 묘사한다.[22] 서신에서는 자신을 페로즈 1세의 가신이라고 말한 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동부 국경지대를 침략하여 파괴한 것 때문에 사산 왕조는 한동안 유목민들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다.[23]에프탈은 서기 466년 키다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후 토하리스탄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서쪽(에서), 에프탈 민족의 번영하는 야브구 화데강의 아들. (그리고) 하루 롭, 에프탈 군주의 서기관(이자) 토하리스탄과 가르치스탄의 재판관(이다).
롭 왕국의 박트리아어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하나.
롭 왕국의 박트리아어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된 문서 가운데 하나.
4.1.4. 소그디아나의 에프탈: 서기 479년
에프탈이 서기 479년 이후에 소그디아나를 침공하여 정복하였다고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소그드 사신이 479년에 마지막으로 중국 궁정을 방문한 이후 소식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양직공도에서도 479년부터 소그디아나가 에프탈의 치하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다.[24] 최소한 에프탈은 484년 이전에 소그디아나를 완전히 정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484년경 주조된 에프탈 동전에는 아흐순와르의 초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소그드어로 새겨져 있었다. "X'wnd'r (권력자)".에프탈은 토하리스탄과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성곽을 건설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걷었으며 심지어 직사각형의 '계획 도시'(!)를 건설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25] 또한 그 지역의 토착 통치자들이나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 안정적으로 통치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에프탈은 적정선에서는 이들의 독자적인 행동을 용인했던 것으로 보인다.[26] 사산 왕조에게서 뜯어낸 공물은 에프탈에 의해 박트리아와 소그디아나에 재투자되었다. 에프탈인들은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서 실크로드가 관통하는 박트리아 및 소그디아나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이전 쿠샨 왕조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실크로드에서 주요한 중개자 역할을 맡았고, 중국 - 사산 왕조 - 로마로 이어지는 무역로에 대한 중개 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현지 소그드인과 계약을 맺었다.
4.1.5. 타림 분지 정복: 서기 480년 ~ 550년
서기 5세기 후반, 에프탈은 높은 산봉우리를 건너는 대신에 비교적 쉬운 길이었던 파미르고원 지대를 건너 동쪽으로 더 나아가 정복을 계속했다. 그들은 타림 분지의 서부인 카슈가르와 호탄을 점령하고 나머지 오아시스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막대한 공물을 거둬들였다. 때마침 북위의 공격으로 인해 이전까지 타림 분지를 경영해왔던 유연이 약화된 것도 에프탈의 타림분지 정복에 한몫 거들었다. 479년에 에프탈은 투르판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타림 분지의 동쪽 끝까지 나아갔으며 497년에서 509년 사이에는 유연을 우루무치 북쪽으로 밀어냈다. 6세기 초에 작성된 북위의 기록에 따르면, 에프탈이 타림 분지에서 북중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아마도 당시 중국 출신의 둔황 총독이었던 이현(李賢)과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에프탈의 영토가 중앙아시아를 넘어 타림 분지로 확장되면서, 에프탈의 예술 양식은 소그디아나, 바미얀, 쿠차와 같이 그들이 지배하던 지역의 끄트머리 부분까지 퍼져나갔다. 타림 분지 지역의 대표적인 에프탈 유적지로는 키질 동굴 유적지, 쿰투라 동굴 유적지, 수바시 저수지 등이 있다. 에프탈 예술의 특징적인 부분은 오른쪽 옷깃이 삼각형 모양으로 접힌 카프탄, 초승달/날개 모양의 장식이 달린 모자, 크롭컷과 유사한 독특한 머리 모양을 가진 인물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쿠차 지역의 그림들, 특히 키질 동굴에 그려져있는 검객들은 에프탈이 이 지역을 지배했던 480년 무렵에서 55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500년경의 초기 그림들 중 일부에서는 간다라 양식의 흔적이 얼핏 나타나는데, 이것은 에프탈의 지배 하에서 박트리아와 쿠차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지역이 서로 정치적 · 문화적으로 이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림에 있는 몇몇 토하라어 단어들은 6세기 즈음에 에프탈인들에 의해 채택되었을 수도 있다.
4.1.6. 중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다
서기 516~526년 무렵 양나라에 도착한 에프탈(滑) 사절의 삽화는, 양나라의 4대 황제인 효원제(孝元帝) 소역(蕭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전해지는 『양직공도』에 묘사되어 있다. 이후 『양직공도』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9세기 당나라의『당염립본왕회도(唐閻立本王會圖)』와 11세기 송나라의 판본을 포함한 몇몇 모사본이 보존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졌다.에프탈 사절단의 그림과 함께 한문으로 설명문이 적혀져 있는데, 이 글은 그들이 유연의 봉신국이었을 때 에프탈의 세력이 얼마나 작았는지와 함께, 어떻게 에프탈이 소그디아나를 점령한 후 사산 왕조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을 정복했는지를 언급하고 있다.
元魏之居桑乾也, 滑猶爲小國, 屬芮芮。後稍強大, 征其旁國波斯, 盤盤, 罽賓, 焉耆, 龜茲, 疏勒, 姑墨, 于闐, 句盤等國, 開地千餘里。
원위(元魏)가 아직 상건(桑乾) 지역에 거주할 때까지는 활(滑)은 여전히 소국이었으며, 예예(芮芮)에 속하여 있었다. 제나라 시대에 그들은 처음으로 그곳을 떠나 막사(莫獻)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27]...(중략) 그 뒤에 (활은) 점차 강대하여져서 주변의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罽賓), 언기(焉耆), 구자(龜茲),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闐), 구반(句盤) 등의 국가들을 정벌하여 땅을 천여 리나 개척하였다.
『양직공도』설명문, 『양서』54권 48제 서역 열전
원위(元魏)가 아직 상건(桑乾) 지역에 거주할 때까지는 활(滑)은 여전히 소국이었으며, 예예(芮芮)에 속하여 있었다. 제나라 시대에 그들은 처음으로 그곳을 떠나 막사(莫獻)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27]...(중략) 그 뒤에 (활은) 점차 강대하여져서 주변의 파사(波斯), 반반(盤盤?), 계빈(罽賓), 언기(焉耆), 구자(龜茲), 소륵(疏勒), 고묵(姑墨), 우전(于闐), 구반(句盤) 등의 국가들을 정벌하여 땅을 천여 리나 개척하였다.
『양직공도』설명문, 『양서』54권 48제 서역 열전
『양직공도』는 516년 이전에는 에프탈 사절이 중국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 바로 그해에 '성염대명이율타(姓厭帶名夷栗陁)'라는 이름의 에프탈 왕이 '포다체(蒲多达)'라는 사절을 보냈다. 520년에 또 다른 에프탈 사절인 부하요요(富何了了)가 궁정을 방문하여 황(黃)사자, 백(白)담비갖옷, 파사산 비단(波斯錦) 등의 물품을 바쳤다. 그들의 언어는 하남국 사람들의 통역을 거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양직공도』에서 에프탈 사절의 그림은 다른 나라 사절의 그림보다 앞에 위치해 있고, 가장 긴 설명문이 쓰여졌기 때문에 아마도 에프탈은 양나라에게 중요한 외교국이었을 것이다. 『양서』54권에 따르면, 에프탈 사절은 토하라인(胡蜜丹), 야르칸드(周古柯), 코바디얀(呵跋檀) 출신의 수행원들을 동행했다고 한다.
중국 연대기에는 약 24개의 에프탈 대사관이 기록되어 있는데, 456년에 최초로 대사관을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507~558년까지 20개가 설치되었다.[28] 마지막 세 곳은 『주서』에 언급되어 있는데, 『주서』에는 에프탈이 안서(安西), 호탄(和田) 등 서역의 20여 개국을 정복했으며 546년, 553년, 558년에 각각 서위와 북주의 조정에 사절단을 파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헤프탈 사람들이 '튀르크인들에 의해 박살난' 이후, 중국의 에프탈 대사관들은 폐쇄되었다.
또한 에프탈은 서기 550년 무렵에 셀레우키아 및 크테시폰의 동방 교회 총대주교인 마르 아바 1세(Mar Aba I)로부터 기독교 주교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 아바 1세가 이를 수락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된다.[29]
4.1.7. 바미얀 석불 축조
바미얀 석불은 에프탈의 통치 하에서 축조되었다. 550~560년대에 비록 에프탈 제국이 멸망했지만, 에프탈인들은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박트리아 지역에서 통치를 이어갔고, 특히 바미얀과 그 일대의 성들을 지배했다. 바미얀 석불에 대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비교적 작은 38m 높이의 '동쪽 석불'은 570년 무렵(95%의 확률로 544~595년 사이)에 건설되었고, 더 큰 55m 높이의 '서쪽 석불'은 618년 무렵(95%의 확률로 591~64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동쪽 석불이 지어진 연도는 돌궐 제 1 카간국과 사산 제국의 동맹을 맺고 에프탈 제국을 멸망시키기 직전, 또는 그 이후에 해당된다.
- 서쪽 석불이 지어진 연도는 에프탈인이 제국의 멸망 이후 옥수스 남부에서 제후국을 형성하고, 625년에 서튀르크인들이 그들을 압도하여 토하라 야브구국을 형성할 무렵에 해당된다.
동쪽 석불의 천장에는 말이 끄는 전차 위의 태양신 주위로 여러 에프탈인 신도들이 둘러싸고 있는 의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태양신은 토하라 양식의 카프탄을 착용하고, 장화를 신었으며, 창을 들고 있다. 이는 소그디아나에서 숭배되는 이란 신 미트라의 도상에서 유래되었다. 그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황금 이륜 전차를 타고 있으며, 그 옆에는 날개가 달린 수행원 두명이 서서 깃털이 달린 코린토스식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들고 있다. 맨 위에는 하늘을 날고 있는 바람의 신들이 있다. 이 훌륭하고 독특한 구도는 간다라나 인도의 그림과 비교해보았을때 매우 이질적이지만, 키질 동굴이나 둔황에서 발견된 그림과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한편 중앙 그림에는 태양신뿐만 아니라 부처, 보살, 그리고 여러 에프탈 왕과 고관대작들이 그려져 있다. 옆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승려 뒤에 서있는 인물은 바미얀의 왕이었다. 그는 초승달 한개와 코림보스(Kόρυμβος)[30]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둥근 목 장식의 튜닉을 착용하고 있었다. 한편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 대부분은 에프탈 왕족과 부유층들이었는데, 그들에게서 에프탈 특유의 풍습이 얼핏 보인다.
안타깝게도 2001년, 바미얀 석불이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면서 이 그림 또한 같이 사라져버렸다.
4.2. 쇠퇴
4.2.1. 제국의 멸망과 제후국 형성
카바드 1세 이후 에프탈인들은 사산 제국으로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렸고, 그 사이 사산 제국에서는 호스로 1세가 즉위하여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550년대 무렵,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호스로 1세는 이제 동부의 에프탈에 대해 전면적인 군사력 투사를 감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스로 1세의 개혁 아래 페르시아의 군사력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산인들은 에프탈이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맺을 국가를 모색하려 했다. 이에 대한 고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궐이 중앙아시아를 침공하면서 해결되었다.552년, 튀르크인들은 유연을 멸망시키고 몽골 고원을 장악했으며 돌궐 제1제국을 건국하였다. 이들의 팽창은 무시무시하였는데 558년에는 중앙아시아를 횡단하여 볼가강 하류에 도달할 정도였다. 돌궐의 중앙아시아로의 팽창은 곧 그들과 에프탈 사이의 충돌을 의미했고, 에프탈과 돌궐은 이제 같은 지역을 두고 싸우는 경쟁자가 되었다.
에프탈인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양면 전선으로 인해 싸울 병력이 부족했다. 피르다우시의『샤나메』에 따르면, 에프탈인은 이때 발흐, 쉬그난, 아몰, 잠, 쿠탈, 테르메즈, 와슈기르드에서 온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557년부터 사산 제국과 돌궐 제 1 카간국은 동맹을 맺고 에프탈을 양쪽에서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에프탈인들은 이때 무질서하고 분열되어 있어서 이들의 공격에 대처가 힘들었다.
560년, 카르시 근처에서 벌어진 골자르룬 전투에서 에프탈인들이 사산-튀르크 동맹군에게 패배함으로써 에프탈 제국은 최종적으로 멸망했다.
골자르룬 전투의 패배 이후, 에프탈인들은 박트리아로 철수했고, 차가니얀의 통치자였던 파가니쉬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뒤 박트리아와 옥수스 일대에 수많은 반독립적인 에프탈 제후국들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사산-튀르크 동맹에 의해 멸망한 에프탈 제국의 잔재였을 것이다. 차가니얀, 쿠탈, 테르메즈, 발흐, 바드기스, 헤라트, 카불의 자라프샨 계곡 등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에프탈 쿠르간이 발굴되었는데, 바미얀에서도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사산 왕조와 돌궐은 옥수스를 경계로 삼아 에프탈의 영토를 분할했고, 그 사이에 위치한 에프탈 제후국들은 두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에프탈인들이 차가니얀의 파가니쉬를 왕으로 추대하자, 호스로 1세는 옥수스를 건너 차가니얀 제후국과 쿠탈 제후국을 제외한 나머지 제후국들을 복속시켜 속국으로 삼았다. 579년 호스로 1세 사후 박트리아와 호탄의 에프탈인들이 사산 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는 돌궐에 의해 손쉽게 진압되었다. 한편 그 무렵에 돌궐 제1제국이 분열되었고, 중앙아시아~캅카스에 이르는 지역에는 서돌궐 제국이 들어섰다.
588년, 동돌궐의 막하가한(莫何可汗, Bagha Kaghan)은 제1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자신에게 복속한 에프탈 제후국들과 함께 옥수스 남쪽의 사산령 영토를 침공했고, 발흐에 주둔한 사산 군대를 격파한 다음 탈라칸, 바드기스, 헤라트 등의 도시를 잇달아 점령했다. 그러나 사산 제국의 장군인 바흐람 추빈이 출정하여 돌궐 군대를 물리치고 동부 영토를 수복했다.
4.2.2. 제후국 시대: 사산 제국을 습격하다
서기 600년경, 에프탈인들은 사산 왕조의 변경을 급습하고 페르시아 중부의 이스파한까지 도달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그들은 호스로 2세의 주화를 모방한 수많은 동전들을 발행했고, 그 앞면에 소그드어로 된 에프탈 상징과 문장을 새겼다.서기 616~617년에 제2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자, 돌궐과 에프탈인들은 사산 왕조를 침공하여 재차 이스파한을 약탈했다. 이에 당시 페르시아의 샤한샤였던 호스로 2세는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 출신의 슴바트 4세 바그라투니를 파견하여 침략자들을 물리치도록 했는데, 슴바트는 한 페르시아 왕자의 도움을 받아 에프탈인들을 격퇴하고, 역으로 그들의 영토에 쳐들어가서 왕을 죽였다고 한다. 이후 호스로 2세는 슴바트에게 '호스로우 순(The Joy of Khosrow, 호스로의 기쁨)'을, 슴바트의 아들 바라즈티로츠에게는 '자비테안 호스로우(Javitean Khosrow, 영원한 호스로)'의 칭호를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4.3. 멸망
4.3.1. 서돌궐의 침입과 토하라 야브구국
서기 625년부터, 옥수스 남쪽에 존재하고 있던 에프탈 제후국들의 영토는 서돌궐의 일파가 남하하여 설립한 토하라 야브구국에 의해 잠식당하기 시작했다.[31][32] 돌궐이 옥수스 남쪽의 영토를 점령할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때마침 서쪽에서 발생한 동로마-페르시아 전쟁(603 ~ 628)은 그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사산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에 골몰하고 있을 625년 무렵, 서돌궐의 통엽호가한(統葉護可汗, Tong Yabghu Khagan)[33]은 박트리아에 침입하여 에프탈 제후국들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이후 그는 인더스 강 인근까지 남하하여 모든 에프탈 공국들을 장악하고, 그 지역의 통치자들을 에프탈에서 모두 돌궐인으로 대체했다.중국 사서 가운데 한개인『책부원귀』에 따르면, 이때 돌궐에 의해 점령된 공국들이 자불리스탄, 간다라, 쿠탈, 차가니얀, 쉬그난, 바흐다트, 바드기스, 와칸, 구즈간, 바미얀, 코바디얀, 바다흐샨 등이었다고 한다. 쿠탈과 간다라 일대는 토라마나 2세라는 왕의 지배 아래 가장 동쪽에 있는 '에프탈의 제후국'[34]으로서 존속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제후국들과 마찬가지로 돌궐의 봉신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간다라 지역에서 발행된 지역 통치자들의 동전 초상화에 '황소머리 왕관'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통엽호가한이 분열되어 있던 돌궐을 다시금 통일한 599년부터 사용된 '부카(buqa, 황소)'라는 칭호를 에프탈인들이 채택했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아마도 이는 그들이 돌궐의 종주권을 인정했다는 증거로서 볼 수도 있다.
통엽호가한은 자신의 아들 통두설(達頭设, Tardush Shad)을 토하리스탄의 야브구(부왕)로 임명하고, 쿤두즈에서부터 옥수스 남쪽까지의 새로 정복한 모든 영토를 그가 다스리도록 했다. 이후 토하라 야브구국은 서기 758년까지 바다흐샨 지역에서 소규모의 정치 집단으로 존속했으며, 그들의 잔재는 9세기까지 튀르크 샤히, 준빌 등으로 이어져 박트리아의 동남쪽ㅡ 아프가니스탄 서남부로 팽창하였다.
4.3.2. 아랍의 침공
650년대는 이슬람이 나하반드 전투(642)에서 승리한 이후 페르시아를 한창 정복해가던 중이었다. 이 무렵 사산 왕조의 마지막 샤한샤였던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박트리아 일대에서 잔존 세력을 끌어모아 군대를 결집시켰는데, 그는 동쪽으로 향하여 돌궐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처음에 야즈데게르드는 차가니얀의 에프탈 제후에게 지원을 받았지만, 메르브에 도달한 후 그곳의 총독에게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여 지지를 잃었다. 메르브 총독은 바드기스의 에프탈 통치자 네자크 타르칸(Nezak Tarkan)과 동맹을 맺고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를 물리쳤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간신히 목숨을 걸고 도망칠 수 있었지만, 곧 메르브 인근에서 살해당했고, 아랍인들은 같은 해 메르브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652년 이후 아랍인들은 발흐를 비롯한 박트리아 북부의 도시들을 점령했는데, 에프탈 제후국들은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고 이슬람 군대를 도시 내에 주둔시켜야 했다. 654년, 카렌 가문과 손잡은 네자크 타르칸은 휘하의 에프탈인들과 함께 이슬람 지배에 반기를 들었다. 반란은 헤라트, 바기스, 호라산까지 확산되었고, 심지어 반란군은 아랍인들을 발흐와 니샤푸르에서 물리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가 이끄는 군대가 곧 도착하여 반란을 진압했고, 주동자 네자크 타르칸은 목이 잘렸다.
659년 중국 연대기에는 여전히 '읍달태간(悒達太汗)'[35]이라는 인물이 토하리스탄의 '활로(活路)[36]를 지배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메르브는 아랍인들의 중앙아시아 정복의 근거지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661년에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 약 4년간의 내전을 겪으며 기세가 잠시 둔화되었지만, 내전이 종결된 이후에는 이를 수습하고 팽창을 계속할 수 있었다.
689년경, 바드기스의 에프탈 통치자와 압드 알라 이븐 카심 알-술라미(이븐 알 주바이르 세력의 호라산 총독)가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이후 그들은 테르메즈를 점령하고 잠시이긴 하지만 호라산 전역을 장악하였다. 당시 아랍 기록은 테르메즈를 '에프탈인들의 거점(아랍어: مقر الهفتاليت, dār mamlakat al-Hayāṭela)'이라고 칭했다.
704년, 야지드 이븐 알 무할라브 휘하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군대가 테르메즈를 탈환했지만, 5년 뒤인 709년 네자크 타르칸을 포함한 바드기스의 에프탈인들은 토하라 야브구와 다른 에프탈 제후국들의 지원을 받고 재차 반란을 일으켰다. 710년,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은 박트리아에 대한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였고, 항복한 네자크 타르칸은 칼리파국 동부 영토 총독 알 하지 이븐 유수프의 명으로 처형되었다.
718년, 중국 연대기에는 여전히 '읍달(悒達)'이 그들의 종주국인 토하라 야브구국에 5만 명의 군대를 지원할 수 있는 국가라고 언급되어 있다.
8세기 경의 고대 티베트어 문서에서 돌궐의 카파간 카간 휘하 12개 튀르크 부족 가운데 에프탈 부족이 언급되었다. 또한 카파칸 카간을 다룬 중국 연대기는 서기 748년경에 '에프탈 왕국'의 사절단이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9세기 무렵 아바스 체제의 붕괴와 여러 반독립 이슬람 왕조들(타히르, 사만, 사라프)의 대두, 그리고 튀르크계 유목민들의 이동으로 인해 중앙아시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아마도 그 즈음에 에프탈 제후국들의 일부 잔재들은 완전히 튀르크인들에게 동화되었을 것이다. 이후에는 에프탈에 대한 기록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5. 풍습과 종교
에프탈이 주조한 동전에 새겨진 초상화, 그리고 이들을 묘사한 몇몇 사료들과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에프탈은 일처다부제와 편두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과 근연 민족이었던 알촌 훈족과 키다라인 또한 편두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중국 연대기는 에프탈이 '타국의 신', '악마', '하늘의 신', '불의 신' 등을 숭배했으며, 이들이 도시에 정착하여 살지 않고 천막을 지으며 떠돌아다니는 유목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37]
土地溫暖, 多山川樹木, 有五穀. 國人以麨及羊肉爲糧. 其獸有師子·兩腳駱駝, 野驢有角. 人皆善射, 著小袖長身袍, 用金玉爲帶. 女人被裘, 頭上刻木爲角, 長六尺, 以金銀飾之. 少女子, 兄弟共妻. 無城郭, 氈屋爲居, 東向開戶. 其王坐金床, 隨太歲轉, 與妻並坐接客. 無文字, 以木爲契. 與旁國通, 則使旁國胡爲胡書, 羊皮爲紙. 無職官. 事天神·火神, 每日則出戶祀神而後食. 其跪一拜而止. 葬以木爲槨. 父母死, 其子截一耳, 葬訖卽吉.
활국은 기후가 온난하며, 산천(山川)과 수목(樹木)이 많고, 오곡(五穀)이 난다. 국인들은 보릿가루와 양고기로 양식을 삼는다. 그 나라의 짐승으로는 사자와 두 발 낙타[兩腳駱駝]가 있고, 또 뿔이 달린 야생 나귀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활쏘기를 잘하고, 작은 소매에 길이가 긴 솜 외투를 입고, 금옥(金玉)을 써서 허리띠를 만든다. 여인들은 갖옷을 두르고, 머리 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뿔을 다는데, 길이가 6척이나 되고 금과 은으로 꾸몄다. 여자가 적어서 형제가 처를 공유한다. 성곽이 없고, 모직물[氈]로 집을 만들어 살며, 동향으로 문을 낸다. 그 왕은 금으로 만든 평상에 앉으며, 목성(木星)의 위치 즉 그 해의 간지[太歲]를 따라 그 앉는 방향을 돌리며, 처와 나란히 앉아 손님을 접견한다. 문자는 없고, 나무에 [부호를 새겨] 약속을 정한다. 이웃 나라와 교통할 때는 이웃 나라의 호인(胡人)에게 호(胡)의 글자로 쓰게 하는데, 양의 가죽에 적는다. 직위와 관등(職官)이 없다. 천신(天神)과 화신(火神)을 섬기는데, 매일 문을 나가 신에 제사를 지낸 뒤에야 먹는다. 꿇어 앉아 한번 절하는 것으로 그친다. 장례 시에는 나무로 곽(槨)을 만든다. 부모가 죽으면, 그 아들은 한쪽 귀를 자르고, 매장이 끝나면 평상으로 돌아간다.
『양서』54권 열전 48제 서역열전
활국은 기후가 온난하며, 산천(山川)과 수목(樹木)이 많고, 오곡(五穀)이 난다. 국인들은 보릿가루와 양고기로 양식을 삼는다. 그 나라의 짐승으로는 사자와 두 발 낙타[兩腳駱駝]가 있고, 또 뿔이 달린 야생 나귀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활쏘기를 잘하고, 작은 소매에 길이가 긴 솜 외투를 입고, 금옥(金玉)을 써서 허리띠를 만든다. 여인들은 갖옷을 두르고, 머리 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뿔을 다는데, 길이가 6척이나 되고 금과 은으로 꾸몄다. 여자가 적어서 형제가 처를 공유한다. 성곽이 없고, 모직물[氈]로 집을 만들어 살며, 동향으로 문을 낸다. 그 왕은 금으로 만든 평상에 앉으며, 목성(木星)의 위치 즉 그 해의 간지[太歲]를 따라 그 앉는 방향을 돌리며, 처와 나란히 앉아 손님을 접견한다. 문자는 없고, 나무에 [부호를 새겨] 약속을 정한다. 이웃 나라와 교통할 때는 이웃 나라의 호인(胡人)에게 호(胡)의 글자로 쓰게 하는데, 양의 가죽에 적는다. 직위와 관등(職官)이 없다. 천신(天神)과 화신(火神)을 섬기는데, 매일 문을 나가 신에 제사를 지낸 뒤에야 먹는다. 꿇어 앉아 한번 절하는 것으로 그친다. 장례 시에는 나무로 곽(槨)을 만든다. 부모가 죽으면, 그 아들은 한쪽 귀를 자르고, 매장이 끝나면 평상으로 돌아간다.
『양서』54권 열전 48제 서역열전
역사학자 안드레 윙크(André Wink)에 따르면, 에프탈의 지역에서는 불교가 주를 이루었지만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 또한 존재했다고 한다. 발흐에는 100여 개의 불교 사원과 3만 명의 승려가 있었고, 시가지 밖에는 나중에 나바 비하라(Nava Vihāra)로 알려진 큰 불교 공동체가 존재했다.
540년에 에프탈이 지배하던 영토를 방문한 중국의 승려 송운(宋雲)에 따르면, '에프탈인들은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사이비 신을 설파했으며, 그들이 먹을 고기를 얻기 위해 살생을 저질렀다'고 한다. 몇몇 에프탈인들은 불교 사원들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학살했는데, 약 1세기 이후 현장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불교가 크게 쇠퇴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던 차가니얀에는 5개의 불교 사원이 있었다고 한다.
6. 유사 민족
인도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새로 등장한 여러 부족들을 후나족으로 불렀고, 에프탈은 후나족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동일 부족이거나 친연관계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부족들이 여럿 기록에 남아 있다. 우선 알촌 훈족(Alchon Huna)는 인도로 진출한 에프탈로 알려졌는데, 최근 에프탈과 알촌이 별개의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른 후나족으로 카불 일대에 정착한 네자크 훈족(Nezak Huns)이 있으며, 에프탈이 멸망시킨 키다라족(Kidarites, Kidara Huns)도 후나족의 일부로 포함하기도 한다. 후나족의 명칭은 훈족과 비슷하지만, 그 이름이 훈족에서 따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튀르크계의 돌궐이 중앙아시아에 진입한 이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생긴 토하라 야브구(Tokhara Yabghus)[38], 투르크 샤히(Turk Shahis), 준빌(Zunbils)[39] 같은 군소 세력들은 튀르크와 에프탈의 혼혈로 보인다.7. 여담
편두 풍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은화를 살펴보면 은화속 왕들의 이마는 모두 평평하게 묘사되어있다.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은 중세부터 근세까지 주로 압달(Abdal, Abdali)이라고 칭해졌는데, 말 그대로 '에프탈족(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19세기 무렵까지 아프간 북동부 산악지대의 누리스탄인들은 파슈툰족들을 압달리라고 불렀다.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에프탈 연맹은 에프탈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인다.
<토탈 워: 아틸라>에서는 백훈족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며, 만들어진 목적도 패왕이라 불리던 사산 왕조의 난이도 올리기라 그런지 실제 역사보다 더 먼치킨이다.[40] 특히 백훈족 궁기병은 근접전 최강인데 겉보기보다 방어력이 상당히 높아서 백훈 건담(...)이라 불리며 완전체 취급받는다.[41]인게임에서의 백훈은 에프탈과 인도쪽으로 진출한 알촌을 동일시하여 내놓는 고증오류가 있다.
중세 페르시아의 전설을 모은 문헌인 《샤나메》를 보면 페르시아의 샤한샤(황제)가 북쪽에 사는 백귀(하얀 귀신)들을 정복하러 원정을 나섰다가 백귀들의 마법에 속아 병사들을 모두 잃고 사로잡혔다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이는 실제로 페르시아의 사산군이 에프탈 원정 도중에 에프탈군의 매복에 걸려 참패하고 샤한샤가 사로잡혔던 일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 공용어. 에프탈족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 지역의 토착 언어이다. 본래는 피지배층에서만 사용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회 전반에서 널리 쓰였다.[2] 소그디아나 지역의 토착 언어로서, 상인 계층이었던 소그드인들의 활동에 힘입어 널리 사용되었다.[3] 호라즘 지역에서 사용되었다.[4] 인도 방면의 영토에서 사용되었다.[5] 이 명칭이 비슷한 시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훈족과 연관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후술할 '기원과 특징' 문단 참고.[6] 다만 에프탈을 다룬 역사적인 사료가 매우 희박할 뿐더러, 역사학자들끼리도 이들의 기원과 민족적인 구분 등의 의견에서 서로 의견이 갈리므로 에프탈에 대해 자세히 알기란 매우 어렵다. 심지어는 이들 지도자의 이름과 가계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다루는 에프탈의 행적은 이들의 침략을 받은 주변 국가들(특히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의 기록에 의존하여 서술함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7] 한편 이들의 분파로 추정되었지만 현재는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별개의 유목민족이었다는 사실을 밝혀진 알촌 훈족은 힌두쿠시를 넘어 인도 아대륙 방면으로 쳐들어가 전성기를 누리던 굽타 왕조를 대략 반세기만에 멸망시키기도 하였다.[8] 박트리아 남부에 있었던 토착 소그드계 소왕국. 언제 멸망했는지는 불명이나 아마도 사산 왕조가 돌궐과 연합하여 에프탈을 물리칠때 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9] 튀르크계 유목민족 중 하나로, 정령 혹은 철륵이라고도 한다.[10]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북방의 초원지대를 일컫는 단어이다.[11] 이를 통해서 360년경, 혹은 그 이전에 에프탈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12] 본래 안식은 아르사케스조 파르티아 제국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시기로 보아 파르티아 멸망 이후에 들어선 사산 왕조를 가리킨다.[13] 북위 문성제의 연호.[14] 북위 효명제의 연호.[15] 북위 효무제의 연호.[16] 이는 에프탈이 쿠샨 왕조의 중심지였던 박트리아를 정복한 이래로 그곳의 문화와 풍습에 점진적으로 동화되어 사실상 쿠샨화(=박트리아화)되었기 때문이다.[17] 실제로 에프탈은 박트리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는데, 이는 이전의 쿠샨 왕조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사용했던 언어였을뿐만 아니라 현지 주민들의 언어이기도 했다. 또한 에프탈은 그들이 발행한 동전에 야브구[42] 등의 칭호를 박트리아어로 새겼다.[18] 혹은 유목민 대이동[19] 4세기경에 일어난 대규모 민족 이동의 원인으로는 화산 폭발, 인구 증가 등 다양한 요인들이 지목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가설은 바로 '기후 변화'였다. 특히 3~4세기의 중앙아시아에 이상 고온으로 인한 극단적인 가뭄이 덮쳤는데[43] 이는 엘니뇨 남방진동(El Nino-Southern Oscillation, ENSO)의 패턴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계절풍이 약화되어 구름이 잘 생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 기후가 전반적으로 더 힘겨운 방향으로 이행하였다'.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외, <옥스포드 세계사> 출판: 2020.12.02.)[20]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시온족(Chionites)'라고 서술하고 있다.[21] 이 천신과 화신이 어느 신인지를 두고 연구자들마다 논란이 있는데, 튀르크·몽골 계통의 텡그리이거나 아니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라는 의견이 분분하다.[22] 카다그는 박트리아 남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박트리아의 옛 지명 중 하나가 '카다그스탄'이기도 했다.[23] 당시에 인도인들은 몰랐을 테지만, 이들이 나중에 북인도로 이주한 것은 굽타 제국의 멸망이라는 어마어마한 재앙을 불러왔다.[24] 다만 에프탈이 509년경에 소그디아나를 정복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사마르칸트 사절단이 509년에 마지막으로 중국 궁정을 방문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는 점, 또는 발흐나 코바디얀과 같은 당시 소그디아나의 도시들이 479년 이후에도 잘만 중국 궁정에 사신을 보내다가 사마르칸트 사신과 비슷한 시기에 관련한 기록이 사라졌다는 점 등을 증거로 들었다.[25] 부하라, 헤라트 등의 구도심에는 그 흔적이 일부분이나마 남아있다.[26] 실제로 에프탈에 복속한 토착 통치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아스바르가 화폐를 주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7] The Illustration of Envoys Presenting Tribute at the Liang Court, Yu TaiShan, p. 102[28] 535년까지 북위에 15개, 541년까지 양나라에 5개가 있었다.[29] Nicholson, Oliver (2018년 4월 19일). 《The Oxford Dictionary of Late Antiquity》 (영어). Oxford University Press. p. 708. ISBN 978-0-19-256246-3.[30] 아르다시르 1세 이후, 사산 제국의 여러 황제들이 사용했던 머리장식. 헤르츠펠트의 명명(命名)이며, 본래는 왕관 윗쪽의 원형 모양 비녀였던 것이 점차 얇은 천으로 제작된 이후 진주나 보석을 박는 형식으로 바뀌면서, 하늘과 땅을 통치하는 왕권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코림보스(korymbo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31] 사실 돌궐의 박트리아 점령은 569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무렵 돌궐인들은 사산 왕조에게 복속한 에프탈 제후국 일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1년 뒤에는 카불과 간다라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전에 사산 왕조의 봉신국이었던 에프탈 제후국들은 돌궐의 패권을 다시금 인정하고 서돌궐 가한의 봉신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한편 북인도로 이주했던 알촌 훈족 역시 카불과 간다라에서 계속 지배를 이어갔지만, 튀르크인들은 에프탈 공국만 점령하고는 돌아가버렸다. 581~582년 사이, 에프탈인들은 달두가한(達頭可汗, Tardu Khagan)에 대항하여 사산인들과 연합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제1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에서 에프탈 제후국들이 대거 튀르크 측으로 참전한 것으로 보아,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32] 이후에 일어난 제2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에서 돌궐 군대가 사산 제국과 맞서 싸우는 에프탈 제후국들을 지원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582년 이후에는 에프탈 제후국들이 완전히 돌궐에게 복속되었던 듯 하다.[33] 하자르의 초대 카간으로 추정됨.[34] 그런데 사실 토라마나 2세는 알촌 훈족 출신이었다.[35] 네자크 타르칸의 음차라고 추정되는데, 앞서 네자크 타르칸은 목이 잘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혼동이 있다. 학자들은 '네자크 타르칸'이 인명이 아니라 이들 군주의 세습되는 칭호라고 여긴다.[36]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마자르이샤리프.[37]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에프탈이 박트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쿠샨 왕조의 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정주민화 된 이후에는 정착생활도 겸했다는 것이 밝혀졌다.[38] 지배자의 이름이 '야브구'였던 토하라인들이라는 뜻[39] 투르크 샤히 출신이 세운 나라로 투르크 샤히의 일종.[40] 특히 동방 제국 상대시 사기 보너스를 주는 동방의 채찍과 기독교 상대 보너스인 신의 채찍 특성을 둘 다 갖고 있어서 더욱 무섭다.[41] 총 아머 수치가 75로 어지간한 중기병 급인데 이는 방패 방어력이 50인게 한 몫했다. 실제 갑옷 자체 수치는 25로 타 팩션에도 있는 어지간한 중무장 궁기병 수준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코림보스(korymbos),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31] 사실 돌궐의 박트리아 점령은 569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 무렵 돌궐인들은 사산 왕조에게 복속한 에프탈 제후국 일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1년 뒤에는 카불과 간다라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전에 사산 왕조의 봉신국이었던 에프탈 제후국들은 돌궐의 패권을 다시금 인정하고 서돌궐 가한의 봉신이 되기로 약속하였다. 한편 북인도로 이주했던 알촌 훈족 역시 카불과 간다라에서 계속 지배를 이어갔지만, 튀르크인들은 에프탈 공국만 점령하고는 돌아가버렸다. 581~582년 사이, 에프탈인들은 달두가한(達頭可汗, Tardu Khagan)에 대항하여 사산인들과 연합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제1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에서 에프탈 제후국들이 대거 튀르크 측으로 참전한 것으로 보아,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32] 이후에 일어난 제2차 돌궐-페르시아 전쟁에서 돌궐 군대가 사산 제국과 맞서 싸우는 에프탈 제후국들을 지원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무래도 582년 이후에는 에프탈 제후국들이 완전히 돌궐에게 복속되었던 듯 하다.[33] 하자르의 초대 카간으로 추정됨.[34] 그런데 사실 토라마나 2세는 알촌 훈족 출신이었다.[35] 네자크 타르칸의 음차라고 추정되는데, 앞서 네자크 타르칸은 목이 잘렸다고 기록되어 있어 혼동이 있다. 학자들은 '네자크 타르칸'이 인명이 아니라 이들 군주의 세습되는 칭호라고 여긴다.[36]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마자르이샤리프.[37]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에프탈이 박트리아 일대에 널리 퍼져있던 쿠샨 왕조의 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정주민화 된 이후에는 정착생활도 겸했다는 것이 밝혀졌다.[38] 지배자의 이름이 '야브구'였던 토하라인들이라는 뜻[39] 투르크 샤히 출신이 세운 나라로 투르크 샤히의 일종.[40] 특히 동방 제국 상대시 사기 보너스를 주는 동방의 채찍과 기독교 상대 보너스인 신의 채찍 특성을 둘 다 갖고 있어서 더욱 무섭다.[41] 총 아머 수치가 75로 어지간한 중기병 급인데 이는 방패 방어력이 50인게 한 몫했다. 실제 갑옷 자체 수치는 25로 타 팩션에도 있는 어지간한 중무장 궁기병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