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르 제국 د سوریانو ټولواکمني | ||
존속기간 | 1540년 ~ 1556년 | |
위치 | 인도 북부 | |
수도 | 델리 | |
국가원수 | 술탄 | |
주요 술탄 | 셰르 샤 수리(1538~1545) | |
언어 | 파슈토어, 페르시아어, 힌두스탄어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종족 | 파슈툰족, 인도아리아인 | |
성립 이전 | 무굴 제국 | |
멸망 이후 | 무굴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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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6세기 중반, 북인도를 잠시 지배한 아프간족의 제국. 수르 제국은 중세 인도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체계적인 은화 주조 시스템을 재도입시켰는데, 여기에는 건국의 주체가 파슈툰족[1]이라는 점도 있었다. 수르 제국의 통화 체계는 무굴 제국의 통화 체계로 그대로 계승되었다.[2]2. 역사
그 시대에 아프간계 델리 술탄국인 로디 왕조가 인도로 쳐들어온 티무르 제국의 후신 바부르의 무굴 제국에 박살났으나 이 당시 무굴 제국은 초기로서 아직 힌두스탄을 중심으로 한 군벌 왕조에 불과했으며 아프간-튀르크-힌두계와 대치하고 있었다.[3]수르 왕조의 시조 셰르 샤 수리는 아프간계 출신이자 로디 왕조의 봉신으로 몸을 일으켜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입지를 다졌다. 이후 권력이 점차 안정되어가자 전리품 수입이 없이도 농민들에게 거두는 세금으로 병사들에게 급여를 안정적으로 지급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기존 아프간계 군벌 왕조들은 유목민 출신답게 군인들에게 정기적인 봉급 대신에 전투 승리와 약탈을 통해 얻는 전리품을 그때그때 나누어주던 편이었다. 세르 샤는 바부르 사후 유약한 2대 황제 후마윤을 패배시켜 축출해버리고 자칭 세르 샤로서 힌두스탄의 황제임을 선언하여 수르 제국을 건국한다. 세르 샤는 유능한 황제였는데 무굴 제국의 통치체계가 세르 샤의 수르 제국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 세르 샤의 통치가 제대로 이어졌더라면 북인도는 아프간계의 수르 제국이 통치하고 무굴 제국은 그야말로 2대 최단기간에 망한 튀르크-몽골계의 무굴 왕조 델리 술탄국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 샤는 1545년 칼린자르 성채를 포위하던 중 화약 폭발 사고로 어이없이 사망한다. 그를 계승한 차남 이슬람샤는 포위를 이어가 성채를 함락한 후, 성내의 모든 이를 학살하여 부친의 혼을 달래었다. 이슬람샤 억시 나름 유능한 지도자이며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지배기간에도 다른 형제들의 반란과 여러 민족들 간의 분쟁 등으로 수르 제국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재위 8년 만인 1553년 갑작스러운 병으로 급사하였고 수르 제국은 후계자들의 다툼으로 순식간에 몰락으로 치닫는다. 이 때 사파비 왕조의 지원을 받아 페르시아에서
세르 샤는 주민들을 요역(강제 노동)에 동원하는 제도를 폐지하고 공공 사업에 임금을 받는 일꾼들을 고용하는 편이었는데 이런 선구적인 정책은 당시 중국이나 무굴 제국의 그것보다 훨씬 앞선 것이기도 했다.
3. 영향
셰르 샤 수리의 영묘 (아우랑가바드)
델리 푸라나 킬라 옆, 새 왕성이던 셰르가르의 셰르 샤 성문
존속 기간이 매우 짧았지만 뒤이어 다시 인도를 장악하는 무굴 제국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세르 샤는 행정 조직을 개편했고 라지푸트족과 다투면서 관료 조직을 정비했으며 고대 이후로 인도에서 잊혀졌던 체계적인 화폐 주조 방식을 재도입하여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의 치세 동안 루피라고 불리는 은화는 11.5그램(178 grains), 모후르라고 불리는 금화는 10.9그램(169 grains)으로 고정되어 주조되었는데, 덕분에 통화 가치가 안정되면서 부패가 감소하고 상업이 부흥한 것은 물론이다.
이 외에도 병사들에게 임금을 공정하게 지급할 수 있도록 군사 조직을 개편하고 치밀하게 계획된 감독 제도를 개발하고 시행했는데, 이 시스템 역시 무굴 제국으로 흡수되었다. 세르 샤는 병사들이 어느 장교에게 임금을 지급받아야 하는지를 도장과 낙인을 통해 체계적으로 알기 쉽게 확정한 것은 물론 병사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는 병사들의 민간인 약탈 감소로 이어졌다. 수르 제국 이전의 아프간계 왕조들 이를테면 로디 왕조의 경우 이런 식의 체계적인 관리가 없이 병사들의 민간인 약탈과 이에 따른 민심 이반 문제가 심각했다.
명군 세르 샤는 안정적인 화폐 제도 운영 외에도 상술한 강제 노역 폐지 및 요역에 투입된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정책 등등 국민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중앙아시아의 역참 제도를 참조하여 우편 제도를 개선하고 토목공사와 도로 공사를 해 인도 내 물자이동 등을 개편했다. 이러한 업적들은 무굴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4. 여담
무굴 제국 초반에 잠시 생겼다가 이후 무굴 제국에 흡수되었으나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델리 술탄국 시기로 편의상 합쳐서 보는 시각들도 적지 않다.[1] 파슈툰족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은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영향이 오래 남은데다 헤라트, 발흐 등을 중심으로 동서 무역도 활발해서인지 서기 9세기 무렵까지 그리스어가 쓰인 화폐가 주조되었다.[2] 수르 제국의 화폐 제도가 오늘날 인도 루피와 방글라데시 타카의 직계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3] 남인도에서는 중부의 바흐마니 술탄국 등의 이슬람 세력과 사실상 마지막 중세 힌두 왕조인 비자야나가르 제국 간의 회전이 벌어지고 패한 비자야나가르 제국은 산산조각 나고 소국으로 전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