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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연방 수도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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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델리 연방 수도구역.png
델리 연방 수도구역
दिल्ली राष्ट्रीय राजधानी क्षेत्र
National Capital Territory of Del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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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10592C> 지역
[[인도|]][[틀:국기|]][[틀:국기|]] 북부
시청 소재지 J7H2+XF3, Sachivalaya Rd, IG Indoor Stadium, ITO, Vikram Nagar, New Delhi, Delhi, 110002
뉴델리 면적 42.7㎢
수도권 면적 1,484㎢
인구 <colcolor=#fff><colbgcolor=#10592C> 뉴델리 249,998명 (2011년)
수도권 32,941,000명 (2023년)
인구
밀도
뉴델리 5,900명/㎢
수도권 11,312명/㎢
인종 구성 35% 펀자브인, 24% 푸르반잘인, 12% 무슬림, 8% 자트족, 8% 바이사인, 구자르인 7%, 시크인 5% 등등
종교 힌두교 81.6%, 이슬람교 12.8%, 시크교 3.4%
지사 비나이 크마르 사제나
총리 [[암 아드미 당|
암 아드미 당
]]
아티시 마를레나 싱
(Atishi Marlena Singh)
시의회 여당 [[암 아드미 당|
암 아드미 당
]]
134석
야당
[[인도 인민당|
인도 인민당
]]
104석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9석
상원의원 [[암 아드미 당|
암 아드미 당
]]
3석
하원의원
[[인도 인민당|
인도 인민당
]]
7석
시간대 UTC +5:30
GDP 2,726억 3천만 $
1인당 $7,500
ISO 3166-2 IN-DL
교통 지하철 델리 지하철
공항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
언어별 명칭
{{{#!folding [펼치기 · 접기] 영어 National Capital Territory of Delhi
힌디어 दिल्ली राष्ट्रीय राजधानी क्षेत्र
펀자브어 ਰਾਸ਼ਟਰੀ ਰਾਜਧਾਨੀ ਖੇਤਰ ਦਿੱਲੀ
타밀어 டெல்லியின் தேசிய தலைநகர் பிரதேசம்
한국어 델리 연방 수도구역 }}}
파일:desktop-wallpaper-india-gate-delhi-city.jpg
인디아 게이트
파일:Red_Fort_in_Delhi_03-2016_img3.jpg
붉은 요새
파일:델리 연꽃 사원.jpg
연꽃 모양의 바하이교 사원 (연꽃 사원)

1. 개요2. 행정 구역
2.1. 올드델리(Old Delhi)2.2. 뉴델리(New Delhi)
3. 기후4. 시가지 변천사5. 역사
5.1. 토마르 왕조5.2. 차우한 왕국5.3. 노예 왕조5.4. 할지 왕조5.5. 투글루크 왕조
5.5.1. 자한파나 건설5.5.2. 피로자바드 건설5.5.3. 티무르의 학살 (1398년)
5.6. 사이드 왕조5.7. 로디 왕조5.8. 무굴 제국 1기5.9. 수르 제국5.10. 무굴 제국 2기
5.10.1. 올드 델리: 무굴 제국의 수도
5.10.1.1. 나디르 샤의 파괴 (1739년)5.10.1.2. 마라타-아프간 패권 다툼 속 수난5.10.1.3. 시크교 세력의 습격5.10.1.4. 마라타-영국 전쟁
5.11. 영국 지배기
5.11.1. 세포이 항쟁 (델리 전투, 1857년)5.11.2. 근현대: 뉴델리 건설
5.12. 현대
6. 경제7. 관광
7.1. 올드 델리7.2. 북부 델리7.3. 뉴델리
7.3.1. 남부 델리
7.4. 열악한 유적 관리
8. 환경 문제9. 교통
9.1. 주요 철도역9.2. 공항
10. 여담

[clearfix]
올드 델리의 모습
델리 전역의 모습

1. 개요

인도 북부에 위치해있는 연방 직할지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 지역[1]이자 거대 도시 권역이다.[2] 동쪽 방면으로는 우타르프라데시 주, 나머지 방면으로는 하리아나 주에 접하고 있다. 영국인도 제국 기간 중에는 펀자브 주에 인접해 있었으며 아직까지도 펀자브 주와 어느 정도 연관이 남아 있다.[3] 지리적으로는 갠지스 평원 내에 위치해 있다.

델리라고 하면 그 이름을 가진 도시 자체(올드델리)를 뜻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공식적으로 남쪽에 위치한 11개 지구 중 하나인 뉴델리 및 다른 지구를 포함한 델리 수도 연방구역 전체를 뜻한다.[4] 참고로,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는 단어 뜻 그대로 델리를 대체하고 만든 신도시다. 이들은 서로 인근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올드델리, 뉴델리를 포함하여 인근지역과 도시를 합친 NCR 지역을 수도권으로 본다. 현재 문서가 개설된 델리의 위성도시로는 구루그람이 있다.

한편 연방수도구역의 인구는 2018년 기준으로 약 1900만 명이다. 델리시 자체도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큼 거대한 도시지만 주변 지역을 포함한 델리 수도 연방구역에는 2천 5백만 명이라는 엄청난 인구가 살고 있으며 더 나아가 인근 주의 델리 위성도시들을 모두 포함한 NCR(델리 광역수도권)로 볼때 대략 50,000㎢에 5200만이 사는 초거대형 도시권이 형성된다.[5]

2. 행정 구역

델리 연방 수도구역은 11개 지구(Zila ज़िले)와 하위행정구역인 테실(Tehsil तहसील) 등으로 구분된다.

여행객들이 흔히 알고 있는 올드델리(Old Delhi)는 공식적으로 센트럴델리 지구에 포함된 비공식적인 지명으로 찬드니 촉(Chandni Chowk) 일대를 중심으로 붉은 성, 파테푸리 성 등을 포함하는 하나의 생활권역을 의미하며 뉴델리(New Delhi)라는 명칭은 뉴델리 지구라는 공식적인 지구(Zila)명칭으로 구분되어 있다.
11개 델리 연방 수도구역 지구(Zila ज़िले)
한국어 명칭 영어 명칭 힌디어 명칭
중앙 델리 Central Delhi मध्य दिल्ली[6]
동부 델리 East Delhi पूर्व दिल्ली
신 델리 New Delhi नवी दिल्ली
북부 델리 North Delhi उत्तर दिल्ली
북동 델리 North East Delhi उत्तर पूर्व दिल्ली
북서 델리 North West Delhi उत्तर पश्चिम दिल्ली
샤다라 Shahdara शाहदरा
남부 델리 South Delhi दक्षिण दिल्ली
남동 델리 South East Delhi दक्षिण पूर्व दिल्ली
남서 델리 South West Delhi दक्षिण पश्चिम दिल्ली
서부 델리 West Delhi पश्चिम दिल्ली

2.1. 올드델리(Old Del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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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373a3c><colbgcolor=#ff671f> 문화유산
1983년

아잔타 석굴
अजंता गुफाएँ
1983년

엘로라 석굴
एलोरा गुफाएं
1983년

아그라 요새
आगरा का किला
1983년

타지마할
ताज महल
1984년

코나라크의 태양신 사원
कोणार्क सूर्य मंदिर
1984년

마히발리푸람 기념물군
महाबलिपुरम के स्मारक समुह
1986년

고아의 성당과 수도원
गोवा के गिरजाघर एवं कॉन्वेंट
1986년

카주라호 기념물군
खजुराहो स्मारक समूह
1986년

함피 기념물군
हम्पी
1986년

파테푸르 시크리
फतेहपुर सीकरी
1987년

파타다칼 기념물군
पत्तदकल
1987년

엘레판타 동굴
एलिफेंटा की गुफाएँ
1987년

대 촐라 사원
महान चोल मंदिर
1989년

산치의 불교 기념물군
साँची के बौद्ध स्तूप
1993년

델리의 후마윤 묘지
हुमायूँ का मकबरा
1993년

델리의 쿠트브 미나르 유적지
कुतुब मीनार एवं अन्य स्मारक
1999년

인도 산악 철도
भारतीय पर्वतीय रेल, दार्जिलिंग
2002년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 단지
बोधगया का महाबोधि विहार
2003년

빔베트카의 바위 은신처
भीमबेटका शैलाश्रय
2003년

차트라파티 시바지 역
(옛 빅토리아 역)
छत्रपति शिवाजी टर्मिनस
2003년

참피네르 - 파바가드 고고 공원
चंपानेर-पावागढ़ पुरातत्व उद्यान
2007년

붉은 요새 복합단지
दिल्ली का लाल किला
2010년

자이푸르의 잔타르 만타르
जंतर मंतर, जयपुर
2013년

라자스탄 구릉 요새
राजस्थान के पहाड़ी दुर्ग
2014년

구자라트주 파탄의 라니키바브
(왕비의 계단 우물)
रानी की वाव
2016년

비하르 날란다의 날란다 대승원
(날란다 대학교)
नालन्दा महाविहार (नालंदा विश्वविद्यालय)
2016년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 작품
: 모더니즘 운동에 관한 탁월한 기여

ली कोर्बुज़िए के वास्तुशिल्प
2017년

아마다바드 역사 도시
अहमदाबाद का ऐतिहासिक शहर
2018년

뭄바이의 빅토리아와 아르데코 양식의 건축군
मुंबई का विक्टोरियन और आर्ट डेको एनसेंबल
2019년

라자스탄의 자이푸르
राजस्थान जयपुर
2021년

라마파 사원
रामप्पा मंदिर
2021년

돌라비라
: 하라판 도시

धोलावीरा
자연유산
1985년

카지랑가 국립공원
काज़ीरंगा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1985년

마나스 야생동물 보호 구역
मानस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1985년

케올라디오 국립공원
केवलादेव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1987년

순다르반스 국립공원
सुंदरवन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1988년

난다 데비 국립공원과 꽃의 계곡 국립공원
नन्दा देवी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एवं फूलों की घाटी
2012년

인도의 서 고츠 산맥
पश्चिमी घाट
2014년

그레이트 히말라야 국립공원 보존 지역
ग्रेट हिमालयन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복합유산
2016년

칸첸중가 국립공원
कंचनजंगा राष्ट्रीय उद्यान
}}} }}}}}} ||
파일:Red_Fort_in_Delhi_03-2016_img3.jpg
찬드니 촉 로드(Chandni Chowk Rd) 동쪽 끝에 자리잡은 레드포트
파일:external/www.dkindia.com/DSC00198.jpg
파일:external/urbanrecorder.files.wordpress.com/img_4355.jpg

델리 정션역(Delhi Jn) 남쪽 찬드니 촉(Chandni Chowk) 일대에 자리잡은 올드델리는 레드 포트(Red Fort)나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와 같은 무굴시대부터 이어진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명소가 있으며 중심 거리인 찬드니 촉 로드(Chandni Chowk Rd)는 보행자전용도로로 운영되고 있다.

2.2. 뉴델리(New Delhi)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뉴델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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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후

온대 하우 기후(Cwa)에 속하며 세부적으로는 아열대기후이다. 5월의 최고기온 평균은 39.9℃, 1월의 최저기온 평균은 7.5℃다. 여름4월 초부터 시작해서 10월 중순까지 매우 길게 계속되는데다가 매우 덥다. 역대 최고기온 기록은 2022년 5월 Mungeshpur 관측소에서 기록된 49.2℃. 여름인 7, 8월에 몬순이 있어서 대부분의 비가 이 때 온다. 평균기온 역시 7, 8월이 아닌 비가 오지 않는 5, 6월이 더 높다. 2015년에도 여름에 평균 40도가 넘는 더위를 기록했었다.

11월~1월은 건기라곤 하나, 12월에는 안개 혹은 스모그가 자주 찾아오며 한국보다 기온이 높긴 해도 썩 따뜻하진 않고, 오히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해서 얇은 가디건이라도 꼭 챙겨 입어야 하거나 체질에 따라서는 얇은 패딩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보통 '인도=더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12월에도 따뜻하겠거니 해서 옷을 얇게 가져갔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히려 50℃ 이상 치솟는 더위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그런지 영상 10℃만 되어도 얼어죽는 경우가 나오는 판. 한국의 가을 정도 되는 기온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렇다고 그렇게 쾌적한 것도 아닌 게, 이 때가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악명높은 델리의 겨울 스모그가 펼쳐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사방이 희뿌연 가운데 매캐한 연기냄새를 맡을 수 있다.

최한월인 1월 평균기온은 13.9℃, 최난월인 6월 평균기온은 33.3℃이며, 역대 최고기온은 49.2℃, 역대 최저기온은 -0.6℃로, 아열대기후치고 연교차가 큰 편이며, 연평균기온도 25.3℃로, 열대기후에 필적할 정도로 높다.

4. 시가지 변천사

파일:델리.png
델리의 역사 시대

델리는 역사가 매우 오래된 도시로서 처음 도시가 건설되었을 때 시가지가 있던 위치와 지금의 시가지가 있는 위치가 조금씩 다른데[7]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역대 왕조들이 델리 일대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델리'를 서로 다른 곳에 건설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상 '델리' 일대에 건설된 도시는 총 10곳이 있다. 작은 촌락까지 합치면 총 15곳에 달한다.

고대와 중세에는 현재의 뉴델리 남부가 중심지였다. 델리 술탄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쿠트브 미나르, 메흐라울리 능원, 투글루카바드 등이 모두 델리 메트로 마젠타라인 양편에 분포하고 있다. 통상 '델리'로 알려진 올드 델리가 본격적으로 도시화된 것은 17세기 무굴 제국 중반기에 들어서 이다.

14세기 중반 페로자바드가 뉴델리 북쪽 ~ 올드델리 남부에 세워지는 등 점차 올드 델리 방면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398년 티무르에 의해 파괴당하여 좌절되었다. 15세기에는 무바라크푸르나 로디 정원 등이 뉴델리 중남부에 세워졌다. 그러다 16세기 들어 후마윤의 딘 파나 (푸라나 킬라), 셰르 샤 수리의 셰르가르가 다시 뉴델리 북쪽에 세워졌다. 특히 셰르 샤의 후계자 이슬람 샤가 세운 살림가르는 현 붉은 요새 바로 옆에 지금도 남아있으며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파일:The_Seven_Cities_of_Delhi_-_The_Seven_Cities.png
델리 시가지 변천도. 위에서부터 샤자하나바드 (올드 델리), 피로자바드[점선••], 셰르가르[점선--], 딘 파나 (푸라나 킬라), 무바라크푸르[영묘일대], 시리, 자한파나, 랄코트 & 라이 피토라, 투글루카바드. 현 뉴델리 중심부는 지도 중앙부에 해당한다.
  1. 인드라프라스타(Indraprastha). 판다바인들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 마하바라타에 따르면 기원전 2800년 경에 건설된 도시이다.
  2. 수라지쿤드(Surajkund). 9세기에서 10세기 경 건설된 토마르 왕조의 도시. 아낭푸르 (Anangpur)로도 불린다. 뉴델리 광역권이긴 하나 엄밀히 따지만 델리연방수도구역 밖, 하리아나 주의 파리다바드 시에 속한다.
  3. 랄코트(Lalkot). 1052년 토마르 왕조의 아낭팔 토마르가 세운 도시. 1180년 차우한 왕조의 프리트비라즈 차우한이 도시를 확장하였다. 확장하는 과정에서 킬라 라이 피토라(Qila Rai Pithora)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며 델리 술탄국 (노예 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메흐라울리(Mehrauli).
  4. 시리(Siri). 1303년 술탄 알라 웃 딘 할지가 세운 도시로, 델리 술탄국 (할지 왕조)의 수도였다. 본래는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설한 군대 주둔지가 요새화되면서 발전한 도시로 1398년 티무르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다.
  5. 투글루카바드(Tughluqabad). 1320년 투글루크 왕조의 창건자 기야스 알 딘 투글루크가 세운 도시.
  6. 자한파나(Jahanpanah). 1325년 투글루크 조의 술탄 무함마드 빈 투글루크가 세운 도시. 랄코트와 시리 사이의 부지에 건설되었다.
  7. 페로자바드(Ferozabad). 1354년 투글루크 조의 술탄 피루즈 샤 투글루크가 건설한 도시로 후대의 통치자들이 다른 건축물들을 세우기 위해 건축 자재들을 뜯어가면서 파괴되는 바람에 왕궁인 페로자 샤 코틀라의 폐허만 빼면 남아있지 않다.
  8. 딘파나(Dinpanah). 1533년 무굴 제국의 황제 후마윤이 건설한 도시로 1540년 수르 왕조의 창건자 셰르 샤 푸리가 후마윤을 몰아낸 이후 셰르가르(Shergarh)로 개명당한 전적이 있다. 오늘날의 푸라나 킬라(Purana Qila).
  9. 샤자하나바드(Shahjahanabad). 1638년 무굴 황제 샤 자한이 제국의 새 수도로 삼기 위해 건설한 도시이다. 오늘날의 올드델리(Old Delhi).
  10. 러티언스 델리(Lutyens' Delhi). 1911년 대영제국의 식민지인 인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 위해 건설된 계획도시. 영국의 건축가 에드윈 러티언스(Edwin Lutyens, 1869–1944)가 건설 총괄을 맡아서 이름이 붙여졌다. 오늘날의 인도의 수도 뉴델리(New Delhi).
이 중 오늘날 인도 역사학계에서 '델리'로 인정받은 도시는 랄코트 (킬라 라이 피토라), 시리, 투글루카바드, 자한파나, 페로자바드, 딘파나, 샤자하나바드의 7개이다. 인드라프라스타는 고고학적 증거가 별로 남아있지 않고, 수라지쿤드는 시 경계 밖에 있으며, 뉴델리의 경우 건설 이후 여전히 인도의 수도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라는 것이 없는 걸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제외된다. 한편 자한파나는 도시라고 하기엔 건축물들이 집약되어있지 않고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끔 이를 제외하고 6대 도시로 설정하기도 한다.

5. 역사

붉은 성채 자리에 베다 시대 유적이 확인되었고, 푸라나 킬라 성채 내에 마하바라타에 언급된 전설적인 도시 인드라프라스타가 있었다고 전한다. 초기 불교 경전에는 인다파타로 기록되었고, 현 푸라나 킬라 일대에서는 기원전 200년경 마우리아 왕조아소카 대왕이 남긴 불교 진흥 내용의 석각이 발견되었다. 한편 페로즈 샤 코틀라와 바라 힌두 라오 공원의 아소카 석주는 델리 술탄국 시절 타지에서 옮겨와 세워둔 것이다. 다만 실질적으로는 서기 10세기 토마르 왕조 하에서야 현 뉴델리 일대에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5.1. 토마르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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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코트 (킬라 라이 피토라) 유적

8세기에 설립된 라지푸트계 토마르 왕조는 본래 뉴델리 남쪽 파리다바드 북부에 세워진 아낭푸르를 수도로 삼았다. 아낭푸르에는 저수조 및 댐 유적이 남아있다. 그러다 1052년, 아낭팔 2세가 메흐라울리에 새 수도인 랄코트를 세웠다. 그는 또한 지금도 쿠트브 미나르 앞에 남아있는 굽타 왕조 시기의 철기둥을 원 위치인 보팔 인근 우다이기리로부터 무려 700km 가량 옮겨 세웠다. 당시 아낭팔 2세가 지명으로 설정한 딜리카는 '도입부'란 뜻으로, 도시의 입지가 갠지스 평원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것에서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5.2. 차우한 왕국

12세기 들어 토마르 왕조를 압박하던 차우한 왕국은 1152년경 랄코트를 정복했다. 1180년, 차우한 군주 아즈메르는 랄코트를 증축하여 킬라 라이 피토라로 명명하였다. 구르 왕조에 맞서던 차우한 왕국은 1192년, 무함마드 고리에게 2차 타라인 전투에서 대패한 후 붕괴되었다. 이듬해 무하마드 고리의 부관 쿠트브 앗 딘 아이바크가 딜리카를 점령했고, 지명은 딜리를 거쳐 점차 델리로 굳어졌다. 한편 구르 왕조가 옹립한 꼭두각시 왕을 폐위하고 집권한 차우한 최후의 군주 하리라자는 델리 수복을 시도했으나, 아이바크에게 패배한 후 절망하며 일가와 함께 자살했다. (1194년) 이로써 차우한 왕국은 멸망했고, 델리 총독에 봉해진 아이바크는 그곳을 바탕으로 힌두스탄 평원에 대한 정복전에 나섰다. 이로써 북인도의 이슬람화가 본격화되었고, 델리는 구르 왕조의 인도 총독부로써 중시되며 더욱 성장하였다.

5.3. 노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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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라 라이 피토라 (랄코트) 내의 쿠트브 미나르 단지

무함마드 고리의 사후 구르 왕조가 빠르게 붕괴하자 북인도의 아이바크는 술탄을 칭하며 자립했다. 비록 그의 시기에 수도는 기존의 중심지 라호르였지만, 델리 역시 중시되었다. 한편 아이바크는 이슬람의 승리를 기념하며 기존 랄코트의 힌두-자이나교 사원들을 파괴, 그 자재를 재활용하여 1193-96년 쿠와툴 이슬람 (이슬람의 힘) 모스크를 세웠다. 1199년부터는 모스크 부설 미나렛 겸 전승 기념탑으로 쿠트브 미나르를 세웠다. 다만 아이바크는 완공을 보지 못한 채로 사망했고, 사후인 1220년에야 과업을 지속한 그의 후계자 일투트미쉬에 의해 완공되었다. 일투트미쉬는 또한 델리로 천도했고, 이후 델리는 (1327~35년을 제외하면) 수도로 유지되며 튀르크계 술탄 정권은 델리 술탄국이라 불리게 되었다.

노예 왕조 시기 델리는 청년기의 술탄 기야스 웃 딘 발반이 맘루크로 팔려와 경력을 쌓기 시작하는 등 튀르크 군부의 거점이 되었고, 종종 술탄의 중앙 집권화에 반발하기도 했다. 또한 왕위 교체의 혼란기에는 수 차례 정변이 일어난 현장이었다. 대표적으로 1236년 일투트미쉬의 딸 라지아 술타나는 이복 동맹을 폐위하고 델리의 유일무이한 술타나 (여성 술탄)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튀르크계를 적극 등용하여 기존 튀르크 군부의 반발을 샀고, 결국 1240년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복위를 시도하다가 피살된 라지아 술타나는 현 올드 델리의 투르크만 성문 곁에 묻혀 있는데, 한때 그녀의 무덤은 성지로 여겨져 순례객들이 방문했다.

1246년, 술탄을 옹립하며 실권을 장악한 권신 발반은 몽골 제국의 펀자브 침공을 격퇴하고 델리를 위협하던 남쪽의 메와트 (메오) 인들을 평정하여 수도의 안보를 확보했다. 1266년에는 직접 제위에 올라 1287년 사망시까지 40여년간 이어진 발반의 집권기에 델리는 북인도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이 되어 번영했다. 한편 일투트미쉬를 시작으로 발반 등 초창기 델리 술탄들은 메흐라울리에 각자의 영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84년간 이오지던 튀르크계 노예 왕조는 1290년, 아프간계 할지 왕조로 대체된다.

5.4. 할지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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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년, 알라 웃 딘 할지가 랄코트의 동북쪽에 새로운 왕성으로 세운 시리 성채 유적 및 내부의 모스크

본래 펀자브에 대한 습격 혹은 약탈 수준이던 몽골군은 차가타이 칸국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오히려 더욱 깊숙히 북인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할지 왕조를 세운 잘랄 웃 딘 할지의 치세에 차가타이 왕공 압둘라가 펀자브 깊숙히 침공하자, 술탄이 직접 반격에 나섰다. 이때 압둘라의 선봉장 울루구 휘하 4천의 몽골 선발대는 포위되자 항복하였고, 잘랄 웃 딘은 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자 델리 외곽에 이주시켰다. 항복한 몽골군이 정착한 델리 외곽 지역인 '몽골 성읍'이란 뜻인 무갈푸라 (Mughalpura)로 불리게 되었다. 1296년, 백부 잘랄 웃 딘을 살해하고 집권한 알라 웃 딘 할지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델리의 반대파를 잔혹히 숙청하였다. 이듬해 겨울, 정권 교체를 틈타 몽골군이 재침했으나 알라 웃 딘의 동생 울루그 칸이 격파하였다. (1298년 2월) 이때 2만에 달하는 몽골군이 전사하거나 학살되었고[11], 살아남은 포로들은 델리로 압송되어 코끼리에 밟혀 죽었다. 이러한 승리와 공개 처형으로 알라 웃 딘은 집권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1299년, 알라 웃 딘의 동생 울루그 칸은 구자라트 원정에 나섰다. 바겔라 왕조를 격파한 그는 술탄 마흐무드가 파괴한 후 재건된 솜나트 신전을 다시 악탈, 파괴했고 시바 신상을 델리로 보내 무슬림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12] 승전 후 원정군은 막대한 전리품 및 포로들[13]과 회군했는데, 도중 장군들이 병사들에게 쿰스 (1/5 세금)을 강요하자 일부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14] 반란의 주도 세력은 잘랄 웃 딘이 받아주어 7년 전에 개종한 3천여 무갈 (몽골) 부대였고, 그들 중 무함마드 샤가 잘로르 차우한 후국과 연합해 델리 진영을 기습했다. 비록 울루그 칸은 피신했지만 그의 비서이자 공동 지휘관 나스라트 칸의 동생 말리크 아이줏딘이 피살되는 등 여러 장군들이 죽었고, 정규군의 반격으로 반란은 4일 만에 진압되었다. 울루그 칸은 쿰스 요구 없이 서둘러 델리로 귀환했고, 반란 지도부는 차우한 혹은 바겔라 측에 망명했다. 보고에 분노한 알라 웃 딘은 반란에 가담한 이들의 처자식을 델리에서 체포했고, 잔혹한 연좌 처벌을 가하였다.[15]

그리고 1299년 재차 차가타이 왕공 쿠틀루그 카와자가 델리 정복을 위해 침공해왔고, 알라 웃 딘은 델리 인근 킬리 (현 올드델리 일대)에서 그들과 대치했다. 그리고 술탄의 수비 명령에도 자파르 칸이 출정, 거의 전멸했으나 쿠틀루그 카와자 역시 중상을 입어 후퇴하던 중 사망했다. 1303년 여름, 알라 웃 딘이 카카티야 왕조 원정에 나선 틈에 몽골군은 재차 델리를 목표로 침공했다. 이에 알라 웃 딘은 몽골군보다 앞서 급히 델리로 회군했고, 당시 건설 중이던 군영인 시리 성채에서 농성을 준비했다. 몽골군은 랄코트 등 기존 델리 시가지를 점령, 약탈했으나 시리 성채를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알라 웃 딘은 시리 성채를 크게 보강하고 군부 및 펀자브 방어선을 강화했다. 1305년, 재차 침공한 몽골군은 요새화된 델리 대신 갠지스 평원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암로하 전투에서 델리 군대는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 등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9천의 몽골 포로들은 델리로 압송되었고, 알라 웃 딘은 장군들 및 일부를 제외한 8천여를 처형하여 그 수급을 시리 성채 건축 자재로 활용했다. 1306년, 몽골군은 아예 정착할 생각으로 처자식까지 데리고 침공했으나 라비 강 전투에서 말리크 카푸르에게 대패했다. 델리로 압송된 포로들은 중 남자들은 대부분 코끼리에 밟혀 죽었고, 2만의 아녀자들은 노예로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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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 웃 딘이 몽골인들을 처형하며 세운 초르 미나르 (도둑들의 탑). 225개의 구멍에 각각 수급이 들어갔고, 넘치면 밑에 쌓아 피라미드 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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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1년, 쿠트브 미나르 앞에 세워진 알라이 다르와자 (알라웃딘의 문). 델리에 처음 생긴 완벽한 아치로 평가된다.

이후 차가타이 칸국은 한동안 북인도를 노리지 않았다.[16] 한편, 여러 전쟁과 차가타이 내전 시의 망명 등으로 1310년경 델리의 몽골 시가지인 무갈푸라의 인구는 1만에 달했다. 이는 1299년의 학살 당시에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자는 처벌을 면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후 알라 웃 딘은 몽골 군인들에 대한 봉급과 이남 (봉토)을 크게 줄였고, 일부는 해임했다. 점차 불만이 축적되던, 1311년 재상 말리크 카푸르가 남인도 정벌에 나서자 몽골 장군 아바치가 그를 암살하려다 들통나 델리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그후 압박이 강화되자 몽골 아미르들은 반란을 계획했고, 알라 웃 딘이 갑옷 없이 매사냥에 나설 때를 노려 3백의 결사대로 기습하기로 했다.[17] 하지만 신료들을 끝없이 감시하던 알라 웃 딘의 수하들이 음모를 밝혀냈고, 분노한 술탄은 날을 잡아 제국 내의 모든 몽골인을 죽이도록 지시했다. 이때 델리 등 2만 ~ 3만의 몽골인은 영문도 알지 못한 채로 무차별 학살되었고, 처자식은 극빈층 혹은 노예가 되었다.[18] 이로써 델리의 무갈푸라는 19년만에 지명만을 남긴채 사라졌다.[19]

5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공을 모두 격퇴하여 북인도를 안정시킨 알라웃딘은 구자라트를 정복하고, 남인도의 힌두 왕조들도 복속시켜 델리 술탄국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때 카카티야 왕조가 공물로 바친 코이누르는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로써 델리 궁정에 대대로 전해졌다. 귀족들을 제압하며 강한 왕권을 휘두르던 알라 웃 딘이 1316년 사망하자, 대장군 말리크 카푸르가 어린 왕자를 옹립했다가 첫째 왕자 쿠트브 웃 딘 무바라크 샤가 정변을 일으켜 집권했다. 무바라크 샤는 부왕 대의 엄격한 물가, 풍속 통제 정책을 폐지하였기에 델리는 곧 음주와 매춘 및 도박이 횡행하는 환락의 도시가 되었다. 무바라크샤 본인 역시 델리 북쪽의 하자르 술탄 궁전에서 사치와 향락을 과시하였다. 다만 뛰어난 군재로 야다바 왕조를 멸망시키는 등 영토를 넓힌 무바라크 샤는 1320년, 자신의 동성 연인인 하산 쿠스라우 칸과 그의 바라두 힌두 용병대의 반란으로 시해되었다. 이로써 할지 왕조는 30여년 만에 멸망했고, 쿠스라우 칸이 직접 즉위했다.

5.5. 투글루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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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왕성인 투글루카바드. 현 뉴델리 남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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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글루카바드의 외곽 요새 내에 세워진 투글루크 영묘

1320년, 펀자브에서 몽골을 방어하던 기아스 앗 딘 쿠틀루그는 무바라크 샤의 시해 소식에 거병했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쿠스라우 칸을 시리 성채 북쪽, 야무나 강 서안의 라흐라와트 평원에서 격파하고 델리에 입성했다. 이와 함께 델리 내외의 바라두 부족은 학살되었다. 민중의 지지와 함께 집권한 투글루크는 1321년부터 투글루크는 기존의 시리 성채 동남쪽에 그를 대신할 새로운 궁성으로 쿠글라카바드를 세우기 시작했다.

델리의 3번째 왕성은 몽골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육중한 성벽을 지니도록 설계되었다. 건설에 집착한 투글루크는 델리의 모든 노동자에 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수피 치슈티 종단을 이끌던 니자뭇딘 아울리야가 저주를 내렸다. 저주가 통했는지 1325년, 투글루크는 벵골 원정 후 회군하던 중 전각이 무너지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과 함께 투글라카바드 건설도 중단되었다.

5.5.1. 자한파나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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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피토라와 이어진 자한파나의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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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파나의 궁전인 사라이 샤지

투글루크의 후계자인 파크르 웃 딘 무함마드는 즉위 직후인 1326년부터 파크룻딘은 새로운 왕성 도시인 자한파나 (페르시아어로 '세상의 피난처'란 뜻)를 건설하였다. 4번째 중세 델리 도시로 평가되는 자한파나는 기존의 랄코트, 시리, 투글루카바드 성채의 삼각 지역 내에 시가지를 세우고 그 모두를 포괄하는 거대한 성벽을 두르려 한 원대한 사업이었다. 몽골의 침공에 대비해 성벽은 두껍게 세워졌는데, 안쪽에 식량 저장고까지 둘 정도였다. 이러한 규모의 성벽을 길게 두르는 것은 재정적 부담이 매우 컸기에, 건설 도중 규모가 소폭 축소되어 투글루크바드까지 포괄하지는 않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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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파나 내의 비자야 만달 (승리의 무대) 궁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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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파나의 외성 격으로 세워진 알리아바드 성채

대신 투글루카바드 남쪽의 언덕에 알리아바드 성채를 세워 수도의 방위력을 높혔다. 이후 1398년 티무르의 파괴 전까지 델리의 시가지를 규정하게 된 자한파나는 서부의 민간 거주 지역 (옛 랄코트), 북부의 군사 지역 (시리 성채), 동부의 궁전 지역 (신시가지)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3개의 성문을 지니고 있었다. 당대에 델리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시리 성채 외곽의 하자르 수탄 (천개의 기둥) 궁전이 술탄의 거처였다고 기록하였다. 다만 그가 감탄한 채색된 나무 돔과 그를 떠받드는 장대한 기둥들은 현존하지 않고, 현재까지도 일대 대부분이 주거지로 활용 중이라 조사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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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파나의 대사원인 베굼푸르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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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한파나의 댐인 사트풀라 유적

한편, 중세 델리의 도시들 중 가장 거대한 자한파나를 건설해 두고도 파크르 웃 딘은 1327년 완성되어 가는 도시를 두고 남인도 정벌 시에 이동 거리가 길다는 이유를 들어 즉흥적으로 수도를 남쪽으로 1천 km 넘게 떨어진 다울라타바드 (데바기리)로 옮겨버렸다. 천도를 위해 그는 두 도시 사이에 넓은 도로를 세우고 그 양편에 나무를 심었으며, 5km 마다 물과 식량을 제공하는 역참을 세웠다. 역참에는 또한 최소 한명의 수피 수도승이 이끄는 칸가 (예배당)가 더해졌고, 우편 기능도 있었다. 1329년 술탄의 모친과 대신들을 시작으로 델리 주민들의 다울라타바드 이주가 본격화되어 모든 노예와 신료, 이슬람 성직자에게 이주 명령이 내려졌다.

이로써 수만에 달하는 인파가 기나긴 이주를 떠났는데, 도중 피로와 배고픔에 의하여 노약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가 나왔다. 이븐 바투타에 의하면 (과장된 표현으로) 당시 델리에는 개나 고양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빈 성이 되었다 한다. 다만 델리에 남겨진 힌두 주민들은 이전보다 윤택한 삶을 누렸다고 한다. 한편 1330년대 들어 차가타이 칸국과 일 칸국이 쇠퇴하자 무주공산이 된 호라산을 공격하기 위해 망명해 온 몽골계 귀족들을 포용하여 37만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하였다. 다만 바로 출정하지 않고 1년간 기회를 엿보는 틈에 30만에 달하는 기병은 델리 인근에 계속 주둔했고, 그 유지비가 극심하여 비무슬림에 대한 세금을 10배 올려도 적자였다. 결국 원정군은 해산되었고, 적자 상쇄를 위한 술탄은 여러 무모한 원정들을 감행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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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바이나 (상인) 카스트 공동체 아그라왈이 (현 뉴델리 도심부에) 세운 바올리 (계단우물)인 아그라센 키 바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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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하우즈 카스의 영묘 건물. 다만 좌측은 로디 왕조기

1333년 파크르 웃 딘은 중국 원정을 염두에 두고 캉그라 공격을 명했으나 대패로 귀결되었고, 10만의 원정군 중 10명만이 델리로 생환했으나 그마저도 분노한 술탄에 의해 처형되었다 한다. 무리한 천도에 이은 히마찰 원정의 실패를 계기 삼아 델리 술탄국의 패권은 점차 약화되었다. 결국 1334년 마두라이를 시작으로 남인도 각지가 독립하기 시작하자 파크르 웃 딘은 진압에 나섰으나, 도중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고 술탄 본인도 감염되어 사경을 헤맸다. 결국 1335년, 그는 북인도마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하여 (불만이 많던) 이주민들에게 귀환을 허가하며 델리로 재천도하였다. 이로써 더욱 방치된 중남부 인도의 자립은 기세를 더했고, 1347년에는 수도였던 다울라타바드마저 바흐마니 술탄국으로 떨어져 나갔다. 제국이 붕괴되던 1351년, 북인도라도 지키려던 파크르 웃 딘은 원정 중 병사했다.

뒤를 이은 사촌 피루즈 샤 투글루크는 1353-55년과 1358-59년에 벵골을 원정했으나, 모두 실패하여 벵갈 술탄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이후 피루즈 샤는 내치에 힘쓰며 대중 복지 시설들을 세웠다. 따라서 델리 등지에 사라이 (객잔), 정원, 영묘, 마드라사가 대거 건립되었다. 빈자들을 대상으로 무상 진료를 하는 병원들도 다수 세워졌고, 빈곤층 여성들에게 디완-이-카이라트 (자선부)를 통해 결혼 자금을 지원하였다.[21] 또한 서부 야무나 강 수로 등 5개의 대수로를 재건 혹은 신설하여 델리 일대의 농경지가 넓어져 곡물 및 과일 생산량이 늘어났다. 경제 부흥을 바탕으로 피루즈 샤는 델리 내외에 많은 건설 사업을 벌였다. 정치적으로 그는 힌두교에서 개종한 현지인 무슬림들을 우대하여 기존 튀르크 군부를 견제하는 근왕 세력으로 삼았다.

5.5.2. 피로자바드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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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로즈 샤 코틀라 유적의 아소카 대왕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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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자바드 대사원 (자미 마스지드)

정권이 안정되자 피로즈샤 역시 기존 술탄들처럼 자신만의 왕성을 세우고자 했고, 1354년 델리 북쪽 외곽 (현 뉴델리 북부 ~ 델리 남부)에 피로자바드를 세웠다. 피로자바드의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 옆 궁전 옥상에 델리 북쪽 180 km 지점의 암발라에 있던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옮겨와 세웠다. 또한 피루즈 샤는 기존 델리의 여러 건축물들을 유지, 보수하는데 힘썼다. 우선 1352-53년 반세기 이전 알라웃딘 할지 대에 세워진 하우즈 카스 저수조 단지에 마드라사를 세웠고, 사후 그 옆에 더해진 영묘에 안장되었다.

1368년에는 벼락에 의해 쿠트브 미나르의 상층부가 파괴되자, 상층부를 대신하여 2개 층의 대리석 & 적색 사암 구조물을 더하여 이전보다 더욱 화려하게 재단장하였다. 또한 현 뉴델리 중심부에는 사냥 별장인 쿠샤크 마할 (쉬카르가)을 세웠고, 델리에서 동북쪽으로 50km 지점의 메루트에 있던 또다른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현 올드 델리 북쪽의 산지 (캄라 네루 공원)에 옮겨와 세웠다.[22] 다만 피루즈 샤의 치세에 세워진 건물들은 과거에 비해 검소한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의 재정 위기를 대변한다. 37년간 장기 재위하며 말년에 후계자 문제를 겪던 피루즈 샤는 13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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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 웃딘이 세우고 피루즈 샤가 대대적으로 증축한 뉴델리 한복판의 하우즈 카스 (왕실 저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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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즈 카스 내의 피루즈 샤 영묘

피루즈 샤의 사후 델리는 2년 간의 내전 끝에 막내 왕자 나시르 웃 딘 무함마드 샤가 집권했으나, 1394년 사망했다. 이후 장남 알라 웃 딘 시칸다르 샤가 계승했으나 곧 요절했고, 귀족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각각 동생 나시르 웃 딘 마흐무드 샤과 사촌 나시르 웃 딘 누스라트 샤를 각각 자한파나 (시리 성채)와 피로자바드에 옹립했다. 오늘날의 델리 광역권 내에서 두 술탄이 남북으로 대립하는 동안 자운푸르구자라트 술탄국, 말와 술탄국 등이 독립하며 델리 술탄국의 해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로써 델리 술탄국의 영토는 펀자브 남부와 하리아나 지역에 국한되어 창건 후 가장 축소되었다.

1397년 후원자인 말루 이크발 칸이 델리를 장악하며 마흐무드 샤가 단독 술탄이 되었고, 3년 간의 내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같은해 말엽부터 티무르 제국이 펀자브를 공격했고, 1398년 9월에는 티무르가 직접 9만 2천 대군과 함께 인더스 강을 건너 북인도를 침공하였다. 물탄, 데팔푸르를 연이어 점령한 티무르 군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며 델리로 진군했고, 카가르 강에서 합세했다. 티무르는 델리를 바로 공격하는 대신 메루트 등 남쪽의 후방 지역들을 초토화시켜 도시를 고립시켰고, 더 많은 피난민들이 델리로 향하게 하여 성내에 공포심을 유발시켰다.

5.5.3. 티무르의 학살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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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의 북인도 진격로 (좌), 델리 전투를 묘사한 16세기 무굴 제국 삽화 (우)

1398년 가을, 델리는 외부 지원에서 차단된 채로 고립되었다. 그러던 12월 11일, 불과 7백의 정찰대 만을 대동하고 델리 주변에서 회전을 치를 곳을 모색하던 티무르를 말루 이크발이 수천의 기병과 성을 나와 기습하였다. 놀란 티무르는 3백의 결사대를 보내어 적군을 지연시키게 한 후, 그들의 희생을 틈타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만 델리 측의 '승전' 소식이 퍼지자 티무르 군영의 5만에 달하는 인도인 포로들이 구출 가능성에 들썩였고, 전투 도중 이들이 후방을 교란할 것을 우려한 티무르는 포로들을 다음날 전원 학살하였다. 인도판 신안대학살 14일 티무르는 결전지로 정한 푸슈트-이-비할리 (하우즈 카스 인근)에 병력을 배치하였고, 말루 이크발과 마흐무드 샤 역시 성을 나와 적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9만에 달하는 티무르 군대에 비해 델리 군대는 기병 4만과 보병 1만, 그리고 코끼리 125마리에 불과하였다.

말루 이크발은 주력 병력과 6백의 선발대 사이에 독을 묻힌 가시를 두른 상아를 지닌 코끼리 부대를 배치하였다. 16일 아침에 시작된 전투에서 티무르는 우선 좌익과 우익의 기병에게 치고 빠지기를 통해 적군을 교란시키게 하였고, 흙먼지가 자욱한 틈을 타 우측으로 우회하여 델리측 선발대를 기습해 격파하였다. 이후 좌우익이 총공격을 가하여 델리측 양익을 성문까지 몰아세웠고, 티무르는 델리측 본대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델리 측 본대 앞에는 술탄의 비장의 무기인 코끼리 부대가 나열해 있었고, 처음으로 코끼리를 목격한 티무르 군대의 병사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에 티무르는 우선 참호를 파게 하여 진군을 멈추었는데, 이내 코끼리의 약점[23]을 파악하고는 거대한 마름쇠를 뿌려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보급용으로 가져온 낙타들에 건초와 목재를 실은 후, 불을 붙이고 채찍질을 가하여 불타는 낙타 떼가 비명을 지르며 코끼리들에 돌격하게 하였다. 동물학대

놀란 코끼리들은 요동치다 마름쇠를 밟고 쓰러지거나 그대로 아군 쪽으로 도주하였고, 이로써 델리 진영이 혼란에 빠지자 티무르는 총공격에 나섰다. 이때 델리측 양익을 섬멸한 피르 무함마드의 양익이 돌아와 델리 군대를 양옆에서 포위하였고, 델리 군대는 악조건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저녁 무렵이 되자 성문 앞까지 밀려나 결국 큰 사상자를 내고는 성내로 패주하였다. 티무르는 시가전으로 인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여 적을 추격하지 않았고, 밤 사이 말루 이크발과 나시룻딘이 서문을 통해 도주하자 성안의 원로들은 티무르에게 항복 서신을 보내었다. 티무르는 항복을 승인, 안전을 보장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쿠트바 (금요 예배문)가 울려퍼지게 하였다. 그리고 사로잡은 코끼리들을 각지로 보내어 자신의 승전 소식을 알렸다.

이후 티무르와 주요 인사들은 시내 관광 및 배상금 징수를 위해 입성하였다. 동시에 호위를 위해 소수의 병력이 뒤따랐는데, 그들은 주민들과의 갈등을 겪은 후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나머지 병력도 입성하여 대대적으로 약탈을 벌였고, 원로들의 항의에 티무르는 자신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해명하였다. 하지만 겁에 질린 주민들이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에 모여 저항하자 21일 티무르는 그들을 학살하라 명하였고, 이후 델리 전역은 5일간 유례 없는 약탈과 파괴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10만에서 20만에 달하는 주민들이 살해되어 거대한 해골탑이 세워지고, 시신은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생존자들은 노예가 되어 구르 왕조 때부터 2세기간 축적된 보물과 함께 사마르칸트로 압송되었다. 이후 북인도는 술탄이 명목상으로만 인정된 채로 군벌 할거 시대에 돌입했고, 1413년 2월 마흐무드 샤가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은 채로 죽으며 투글루크 왕조는 멸망했다.

5.6. 사이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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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샤가 피살된 코틀라 무바라크푸르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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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푸르 북쪽의 무함마드 샤 영묘. 후일 로디 왕조 시기 주변에 영묘들이 더해져 로디 정원이라 불린다.

한 세기에 걸쳐 유지되던 투글루크 왕조가 멸망한 후 자립해 있던 각 지방의 호족들은 대놓고 독립했다. 델리에서는 무정부 상태를 틈타 아프간계 로디 부족 출신인 다울라트 칸이 집권하였다. 한편 티무르의 침공 당시 항복한 물탄 총독 키즈르 칸은 이후 사마르칸트까지 향하여 복속을 표한 대가로 델리 술탄으로 봉해졌다. 펀자브 상당부를 장악하고 기회를 엿보던 키즈르 칸은 1413년 말엽 델리를 포위했고, 이듬해 5월 다울라트 칸이 항복하자 그를 감금한 후 집권하였다. 키즈르 칸은 티무르 제국의 봉신으로서 술탄이라 대신 라야트-이-알라 (숭고한 기치) 혹은 마스나드-알라이 (고귀한 직위)라 칭했고, 1421년에 계승한 아들 무이즈 웃 딘 무바라크 샤가 다시 술탄을 칭했다.

1431년, 펀자브의 코카르 부족장 무스타파 자스라트가 펀자브 전역을 석권한 후, 델리까지 점령했다. 이는 델리 술탄국 창건 이래 델리가 외세에 의해 점령된 두번째 경우였다. 더 맞서지 않고 도주했던 무바라크 샤는 1432년 9월 귀환하여 코카르 군을 격파하고 델리를 수복하였다.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무바라크 샤는 같은해 11월, 피로자바드 근처 (현 뉴델리 시가지 중남부)에 새 왕성인 무바라크푸르를 세웠다. 하지만 그는 1434년 2월, 무바라크 샤는 예배 준비를 하던 도중 해임된 각료 사르부르 울 물크와 힌두 관료들에게 시해되었다. 사후 조카 무함마드 샤 사이드가 계승했으나, 그는 사냥에 치중하여 델리 술탄국은 재차 쇠퇴했다.

1442년, 비록 코카르 군벌 무스타파 자스라트가 죽었지만 같은해 말와 술탄국의 야심찬 군주 알라웃딘 마흐무드 샤가 델리로 진격했다. 이에 무함마드 샤는 동부 펀잡의 라호르 총독 바흐룰 칸 로디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는 2만 기병과 함께 출정하여 말와 군을 격파하였다. 보답으로 무함마드 샤는 바흐룰 칸에게 펀자브 전부를 주었는데, 후자는 델리 정권의 취약함을 파악하고 이듬해 델리를 공격하였다. 비록 격퇴되긴 했지만 이후 펀자브 지방은 바흐룰 칸 하에 사실상 독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44년 무함마드 샤는 사망하여 막 완공된 영묘에 안장되었고, 아들 알라 웃 딘 알람 샤가 계승했다. 하지만 바흐룰 칸이 1447년 재차 델리를 공격했고, 비록 격퇴되긴 했으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 여긴 알람 샤는 이듬해 왕자 시절 영지로 낙향했다. 델리에 남겨진 재상 하미드 칸의 초청을 받은 바흐룰 칸은 1451년 4월, 델리에서 알람 샤의 선양을 받아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5.7. 로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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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델리 술탄국 건축을 대표하는 로디 정원의 영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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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 영묘들 중 유일하게 왕릉으로 증명된 시칸다르 영묘

1452년, 자운푸르 술탄 나시룻딘 마흐무드 샤가 정권 교체를 틈타 델리를 공격했으나 바흐룰 칸에게 격퇴되었다. 이후 델리-자운푸르 전쟁이 시작되었고, 1457년 바흐룰 칸에게 유리한 강화를 체결한 자운푸르 술탄 무함마드 샤가 델리로 도주하려다 피살되기도 했다. 그의 후임자인 후세인 샤는 20여년간 내부를 다진 끝에 1478년 대군을 모아 델리 맞은편의 야무나 강까지 진격하였다. 놀란 바흐룰 칸은 그에 복속하고 제후로서 델리 일대만을 영위하겠다며 강화를 제안했다. 다만 바흐룰 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후세인 샤는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려는 꼼수라 여겨 거부했고, 궁지에 몰린 바흐룰 샤는 예상을 뒤엎고 정예병을 모아 강을 건너 자운푸르 군대를 격파했다. 후세인 샤는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회군했으나, 얼마후 에타와를 함락한 기세를 몰아 재차 델리로 나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바흐룰 칸에게 격퇴되어 휴전을 맺은 후 철수하였다. 1479년 3월, 후세인 샤가 또다시 야무나 강으로 나아갔으나 역시나 패배하였다.

3천 연속 승리한 바흐룰 칸은 이번에는 역습에 나서 자운푸르 술탄국을 정복, 힌두스탄을 80여년 만에 델리 술탄국령으로 수복하여 델리를 다시 북인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489년 바흐룰 칸의 사후 계승한 아들 시칸다르 칸 로디는 1500년, 속국이던 괄리오르의 토마르 왕조가 델리에서 역모를 꾀하고 도망간 이들의 망명을 받아주자 전쟁에 나섰다. 1503년, 델리와 괄리오르 사이에 병영 도시 아그라를 세운 그는 여러 시도 끝에 주변 요새들을 함락했지만 괄리오르 자체는 얻지 못한 채로 1517년 병사했다. 한편 시칸다르 칸은 알라 웃 딘 할지처럼 강력한 이슬람 우선주의 및 샤리아 적용 정책으로 힌두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그를 계승한 아들 이브라힘 칸 로디는 1523년 부왕의 숙원 사업이던 괄리오르 정복을 완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명한 동생 잘랄 칸이 델리로 돌아오자 사면해주었다.

다만 부왕 시절 대신들 대신 젊은 귀족들을 새 집권층으로 세우려 하자 전자가 반발했고, 1519년부터 펀자브를 약탈하던 카불의 티무르 왕공 바부르와 내통하였다. 따라서 1524년, 손쉽게 펀자브를 접수한 바부르는 델리 진격을 앞두고 우즈베크 족이 카불을 침공했다는 소식에 회군했다. 그러면서 바부르는 이브라힘 칸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합류한 그의 삼촌 알라 웃 딘에게 3만 대군을 주어 델리를 점령하게 했는데, 이브라힘 칸에게 격퇴되었다. (1525년 가을) 이에 카불에서 돌아온 바부르는 직접 2만 정예병과 함께 델리로 나아갔고, 이브라힘 칸 역시 7만 대군과 함께 출정했다. 1526년 4월, 양측은 델리에서 100여 km 떨어진 곳에서 파니파트 전투를 치렀다. 결과는 로디 군을 포위 섬멸한 바부르의 대승이었고, 이브라힘 칸은 전사했다. 그후 델리에 무혈 입성한 바부르는 술탄을 칭하며 무굴 제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5.8. 무굴 제국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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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윤이 건설한 딘파나. 현재는 힌디어로 '옛 성채'란 뜻인 푸라나 킬라로 통용된다. 아래는 북문인 털라키 다르와자.

바부르는 델리가 야무나 강에서 멀고 혼잡하다고 여겨 로디 왕조 말기부터 제2의 수도 역할을 했던 야무나 강변의 아그라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북인도를 통일하려던 바부르는 힌두스탄의 아프간 귀족들에게서 명목상의 충성만을 받은 채로 1530년에 사망했고, 젊은 아들 후마윤이 계승하자 각지에서 그에게 도전하는 세력이 생겼다. 델리의 귀족들마저 후마윤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고, 다른 형제를 새로운 황제로 올리려 하기도 했다.

1538년, 후마윤이 구자라트 원정에 이어 힌두스탄의 셰르 샤 수리를 궁지에 몰고 있을 무렵 동생 힌달 미르자가 수도 아그라를 장악하고 술탄을 칭하였다. 이에 후마윤은 델리 북쪽, 피로자바드 남쪽 (현 뉴델리 도심부)의 옛 인드라프라스타 터에 새로운 왕성을 세우고 '신앙의 피난처'란 뜻인 딘파나 (현 푸라나 킬라)라 명명하였다. 하지만 공사가 제대로 진척되기도 전에 정세가 급변하였다.

5.9. 수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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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가르의 셰르 샤 성문 (랄 다르와자, 피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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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르 샤가 딘파나 내에 세운 킬라 쿠흐나 모스크

후마윤이 회군하자 벵골을 정복하여 재기한 셰르 샤는 1539년, 약속을 깨고 아그라로 회군하던 후마윤의 후위를 공격해 격파하며 더욱 날을 세웠다. 이에 후마윤이 재정비 후 4만 대군을 모아 반격에 나섰으나 1540년 5월 카나우지 전투에서 대패했다. 그후 수르 군대에게 추격을 당한 후마윤은 델리를 거쳐 라호르로 도주했고, 북인도의 패권을 장악한 셰르 샤는 델리를 수도로 하여 수르 왕조를 세웠다. 셰르 샤는 딘파나 북서쪽에 새 도시를 세웠고 총독이 거주할 성채를 더하여 셰르가르라 명명하였다. 그는 또한 성내에도 모스크, 궁전 등을 세웠고 자트 족이 위협하던 델리와 라호르 간의 도로를 안정시켜 무역을 증진했다. 힌두교도에 대한 관용과 경제 활성화로 여론의 지지를 받던 셰르 샤는 1545년 사망했다. 그를 계승한 아들 이슬람 샤 (살림 샤)는 1546년, 피로자바드 북쪽의 야무나 강변 (현 붉은 성채 옆)에 새 왕성인 살림가르를 세워 최초로 올드 델리 일대를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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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샤가 세운 살림가르 성채. 1555년, 델리 수복을 앞둔 후마윤이 3일간 주둔하며 '누르가르'로 개칭했다.

하지만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쇠퇴의 징조가 보였고, 1554년 11월 이슬람 샤가 12세의 아들을 남긴채 사망하자 내전이 본격화되었다. 우선 이슬람 샤의 사촌 무함마드 아딜 샤가 집권했으나 1555년 아그라 총독인 매부 이브라힘 샤가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군을 격파한 후 델리를 장악했다. 다만 그 역시 한달 만에 무함마드 아딜 샤의 다른 매부인 라호르 총독 시칸다르 샤에게 델리를 상실했다. (1555년 2월) 이후 수르 왕조는 델리-아그라의 시칸다르 샤, 힌두스탄의 무함마드 아딜 샤, 벵골의 무함마드 샤, 히마찰의 이브라힘 샤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렇듯 3달간 델리의 군주가 4번이나 교체되자, 사파비 제국에게서 병력을 얻어낸 후마윤은 1555년 2월 라호르와 데팔푸르를 점령하며 북인도 재정복에 나섰다. 그해 봄, 마츠히와라 전투와 시르힌드 전투에서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르 균대를 연달아 격파한 후마윤은 15년만에 델리를 수복하였다. (1555년 7월)

5.10. 무굴 제국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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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파나 (푸라나 킬라)의 델리 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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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 딘파나 (셰르가르) 내에 세워진 셰르 만달. 후마윤은 이를 도서관으로 활용했다가, 결국 그곳에서 실족사한다.

1555년 12월, 벵골의 무함마드 샤가 델리를 목표로 진격했지만 힌두스탄 평원을 지나다 무함마드 아딜 샤의 부관이자 이슬람 샤 시절 델리의 시장 담당관이던 브라만 출신의 힌두 장군 헤무에게 패배하고 죽었다.[24] 동시에 후마윤은 힌두스탄 서부 역시 수복했다. 하지만 미처 북쪽과 동쪽의 아프간 세력 및 벵골은 정복하지 못했고[25] 1556년 1월, 델리를 수복한지 불과 6개월 여만에 딘파나의 셰르 만달 도서관에서 사고로 사망했다. 후마윤의 아들이자 후계자 악바르는 불과 11세였고, 섭정 바이람 칸과 펀자브에서 시칸다르 샤와 대치하느라 델리로 향하지 못했다. 그러자 무함마드 아딜 샤의 벵골 병합을 도운 헤무는 수르 왕조 복원을 목표로 약 6개월에 걸쳐 힌두스탄 서부를 평정한 후 아그라로 진격하였다.

아그라 총독은 싸우지도 않은채 델리로 도주했고, 델리의 총독 타르디 베그는 잘란다르의 악바르에게 사태를 알린 후 원군을 청했다. 다만 정예 병력은 펀자브에서 시칸다르 샤와 대결 중이던 상황이기에 바이람 칸은 피르 무함마드 샤르와니에게 예비대 정도를 주어 델리로 보냈다. 타르디 베그 역시 델리 인근의 영주들에게 최대한 병력을 모으게 했고, 장군들과 논의한 끝에 델리의 외곽 요새 역할을 하던 투글라카바드 아래에서의 일전을 결정했다. 아그라 총독을 추격하던 헤무와 5만 대군[26]은 1556년 10월, 투글루카바드에서 좀더 적은 수의 무굴 군대와 조우했다.

이어진 전투에서 무굴측 선봉과 좌익의 튀르크 기병대가 헤무측 전열을 붕괴시키자[27], 승리했다고 여긴 무굴 병사들은 적진의 약탈에 치중하였다. 하지만 3백여 코끼리 부대 및 예비대로 차출한 정예 기병대와 함께 후방에서 전황을 주시하던 헤무는, 적장 타르디 베그가 소수의 병력과 전장에 남겨진 것을 보자 그대로 돌격하였다. 코끼리의 굉음과 함께 예상치 못한 적의 반격을 받은 무굴 군대는 놀라 흩어져 도주했고, 저항하던 타르디 베그 역시 잘란다르 본영까지 도망갔다가 바이람 칸에게 처형되었다. 약탈 후 돌아온 무굴 기병대 역시 마침 헤무측 원군마저 당도하자 저항을 포기하며 도주했고, 22번째로 승리한 헤무는 같은날 델리에 입성하여 딘파나에서 전통적인 힌두 왕호인 비크라마디타를 칭했다. 이로써 비록 명목상 수르 왕조 하이긴 했지만 델리는 3세기 반만에 힌두 군주의 지배 하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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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의 대표적인 무굴 영묘 건축인 후마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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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 랄코트에 세워진 악바르의 장군 아담 칸의 영묘

한편 딘 파나에 묻혔던 후마윤의 시신은, 헤무의 델리 점령 시에 철수하던 무굴 군대가 파내어 펀자브의 악바르 진영으로 가져갔다. 델리 상실 소식에 놀란 악바르와 바이람 칸은 곧장 원정을 준비했다. 1만의 기병대와 함께 선발대로 파견된 알리 쿨리 칸 샤이바니는 적은 호위만을 대동한 채로 운반되던 헤무 측의 대포들을 탈취했다. 뒤이어 무굴 본대와 헤무의 3만여[28] 병력은 30년 전 바부르가 승리했던 파니파트에서 조우했다. (1556년 11월) 악바르와 바이람 칸이 후방에 있던 것과 달리 헤무는 직접 전투 코끼리에 올라 전투를 지휘했고, 격전 끝에 코끼리 부대에 밀려 무굴 진영의 양익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승부의 추가 기울던 그때, 선두에서 무굴측 중앙을 공격하던 헤무는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이를 목격한 그의 군대는 순식간에 사기를 잃고 5천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했다. 무굴 군대는 추격으로 전환해 더 많은 수를 베었다.[29]

겨우 승리한 악바르는 바이람 칸의 권유로 의식을 잃은 채로 사로잡힌 헤무를 참수했다. 헤무의 머리와 몸체는 각각 카불과 딘파나의 성문에 효수되었고, 13세의 악바르는 델리를 포함해 힌두스탄 주요부를 수복하며 제국을 재건해 나갔다. 한편 후마윤의 아내 베가 베굼은 해방 델리 수복 후, 딘파나 남쪽에 후마윤 영묘를 조성했다. 그리고 1556년 12월, 악바르와 바이람 칸은 델리에서 출정해 펀자브 동부에 남아있던 시칸다르 샤를 축출한 후 이듬해 히마찰에서 항복시켰다. 1557년에는 벵골 술탄국이 무함마드 아딜 샤를 전사시키며 수르 왕조 잔당을 멸하고, 무굴 제국에 명목상 복속했다.[30] 이후로도 악바르는 구자라트, 말와, 벵골 등을 원정해 북인도를 석권했다. 다만 1560년 그는 조부 바부르처럼 아그라를 제국의 수도로 삼았고, 다시 파테푸리 시크라-라호르-아그라 순으로 이어지는 80여년간 델리는 최대 도시로만 남았다.

5.10.1. 올드 델리: 무굴 제국의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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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요새의 라호르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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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성벽의 남문인 델리 문

제국이 안정되자 악바르는 카불에 있던 황족 모두를 델리로 이주시켰다. 이는 이제 무굴 제국의 중심지가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북인도라는 것을 상징하는 일이었다. 악바르 사후 즉위한 자한기르는 자신의 계승에 반대한 귀족들 중 일부를 델리의 쿠니 성문에서 처형하였다. 한세기 가량 아그라에 이은 제2의 도시로 여겨지던 델리는 샤 자한 시기에 재차 수도가 되어 이번에는 무굴 제국의 멸망 시까지 중심지로 남았다. 1638년, 샤 자한은 기존 딘 파나 (푸라나 킬라) 북쪽에 현재의 올드 델리가 될 새 도시의 건설을 명하였다. 우스타드 아흐마드 라호리의 설계 하에 1638-49년간 성벽, 붉은 성채, 찬드니 초우크 등 도시 전반부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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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년, 파테푸르 시크리 출신의 왕비가 세운 파테푸리 모스크. 델리에서 두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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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0~56년에 세워진 자마 마스지드 (대사원)의 모습

이 도시는 단순 왕성이 아닌 왕성 (붉은 성채)을 포함하는 거대한 도성으로, 높이 7.9m에 폭이 3.7m에 이르는 장엄한 성벽은 6km에 달했고 13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었다.[31] 1648년, 이 신도시는 샤자하나바드로 명명되었고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본래 진흙 벽돌로 구성되었던 성벽은 1657년 붉은 사암으로 보강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다만 샤 자한은 샤자하나바드 건설 후에도 주로 아그라에 머물며 실질적인 수도 기능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한편 1657년 그가 와병하던 틈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아우랑제브는 1658년 6월, 사무가르 전투에서 동생 다라 시코를 격파한 후 후자가 가족들과 도주한 델리로 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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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6년 찬디 초우크에 세워진 스리 디감바르 자인 랄 만디르. 델리에서 가장 오래된 자이나교 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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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3년에 세워져 1658년 여름, 아우랑제브가 대관식을 연 샬리마르 정원의 쉬쉬 마할 (수정궁)

아우랑제브는 아그라에서 부왕을 폐위시킨 후 델리는 무혈 접수했고, 도주한 다라 시코를 죽이며 집권했다. 그는 부친을 유폐한 아그라 대신 붉은 성채에 주로 머물렀고, 이로써 델리는 실질적으로도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는 지나친 이슬람 중심 정책으로 타종교를 박해했고, 1675년에는 시크교 지도자인 구르 테그 바하두르를 델리의 찬드니 초우크로 압송하여 기적을 행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세 수행원을 잔혹히 죽인 후 그 역시 처형했다.[32] 아우랑제브의 무리한 원정과 종교 탄압은 마라타 동맹의 성립 등 무수한 반란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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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바하두르 샤 1세가 옛 랄코트 (뉴델리 남쪽의 메흐라울리)에 세운 모티 마스지드 (진주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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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년, 자이푸르의 창건자인 마하라자 자이 싱 2세가 현 뉴델리 일대에 세운 천문대인 잔타르 만타르[33]

그러던 1712년, 아우랑제브의 후계자 바하두르 샤 1세의 사후 무굴 제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1713년 2월, 파루크시야르는 부친의 원수인 백부 자한다르 샤의 수급을 코끼리의 장대에 높이 매단 채로 델리에 입성하며 집권했다. 그는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며 사로잡은 시크교 지도자 반다 바하두르 및 2백여 일행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한 후 거부하자 1716년 6월, 델리에서 모두 처형했다. 파루크시야르의 노력으로 무굴 제국은 마라타 전선을 제외하면 어느정도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을 이간질 시키다가 모두에게 미움을 샀고, 결국 말와의 나와브 아짓 싱이 사이드 가문의 후세인 알리 칸 & 압둘라 칸 형제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마라타 동맹 역시 반군을 지원했다.

1719년 2월 28일, 반군은 델리의 붉은 요새를 공격해 하룻밤의 전투 끝에 황궁을 함락했다. 아짓 싱은 모후 및 후궁들과 함께 하렘에 숨어있다가 붙잡힌 파루크시야르를 저잣거리로 끌어내어 바늘로 실명시키고 고문한 후 죽였다. 이로써 무굴 제국의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고, 뒤이은 두 황제들은 연달아 병사했다. 사이드 가문에 의해 옹립된 무함마드 샤는 근왕 세력을 모아 1720년, 압둘라 칸을 델리로 압송한 후 2년 뒤에 죽이며 황권을 회복했다. 이후 그는 마라타 동맹과 전쟁을 벌였으나 말와를 내주며 패배했고, 1737년 바지라오 1세가 이끄는 마라타 군대가 델리까지 진격했다. 다만 델리만큼은 무굴 군대가 결사 항전하여 지켜냈고, 바지라오 1세는 현상유지의 휴전을 맺은 후 회군했다.
5.10.1.1. 나디르 샤의 파괴 (17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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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이 열리던 붉은 성채 내부의 디완-이-카스. 공작왕좌 등이 있었으나 나디르 샤에 의해 철저히 약탈되었다.

하지만 그 무렵, 무함마드 샤는 아프가니스탄의 호타키 왕조 잔당을 수용하며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와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후자가 보낸 항의 사절이 델리 궁전에 억류되고 다음 사신은 목이 잘린 채로 돌아오자,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나디르 샤는 5만 5천 병력과 함께 인도 원정에 나섰다. 따라서 무굴 제국은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에서 숨돌릴 틈도 없이 바로 다음해에 당시 최강의 군주로 여겨지던 나디르 샤에 맞서게 되었고, 불과 7개월만에 카불 ~ 라호르 일대가 전부 함락되었다. 경악한 무함마드 샤는 총동원령을 내려 30만 대군을 모아 델리 북쪽에서 카르날 전투를 치렀지만, 3시간 만에 대패하고 델리로 패퇴하였다.
오랫동안, 거리에는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시든 꽃이나 잎에 덮인 정원의 길처럼. 평원은 불에 구워졌다.
패배한 무함마드 샤는 주력군이 남아있는데도 협상을 통해 나디르 샤에게 항복한 후 스스로 수도 델리의 열쇠를 그에게 넘겨주고 포로 신분으로 함께 델리로 입성했다. 본래 손님이라 칭하며 얌전히 델리를 관광하던 나디르 샤는, 며칠 후 그가 암살당했다는 헛소문과 함께 델리 주민들이 일부 페르시아 병사들을 공격해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격노했다. 나디르 샤는 3만에 달하는의 델리 시민들을 학살했고, 무함마드 샤와 재상 아사프 자흐 1세가 애원하며 사과한 이후에야 학살을 멈췄다. 이후 나디르 샤는 델리를 무자비하게 약탈했고, 공작좌와 코이누르 등의 국보와 황궁 수장고에 들어있던 막대한 양의 재화를 싹 털어갔다. 또한 단순히 금은보화 뿐만 아니라 코끼리, 말이나 군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져갔다.[34] 모든 걸 얻어낸 그는 막대한 재화와 함께 돌아갔다.
5.10.1.2. 마라타-아프간 패권 다툼 속 수난

경제적, 군사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무굴 제국은 북인도의 패권마저 상실했다. 엄청난 학살과 약탈로 쇠락한 수도 델리는 더욱 대대적으로 반란에 나선 지방 호족들의 공격 목적지로 전락했다. 이는 특히 무함마드 샤의 후계자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대에 심해졌다. 1752년에는 마라타 동맹이 무굴 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아하마디야 조약) 아그라까지 점령하여 델리 턱밑까지 당도했다.[36] 마라타 동맹은 이제 여차하면 바로 델리에 군사 개입을 할 수 있었다. 여기에 같은해 무굴 제국은 1748년부터 펀자브를 침공하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에게 펀자브를 할양하며 더욱 약화되어 갔다. 한편 1753년 3월 아흐마드 샤는 아와드의 나와브이자 재상인 사프다르 장을 견제하여 해임했는데, 후자는 보복에 나서 5월에 추종 세력 및 바라트푸르 왕국의 자트족과 반란을 일으켰다. 사프다르 장은 자트 족에게 델리 시가지를 약탈하게 했고, 그들이 여러 곳에 불을 지르자 주민들은 남쪽의 딘파나 혹은 자한파나 등 요새화된 옛 왕성들로 피신했다.

자트 족은 10만 루피 상당의 전리품을 얻었고, 사프다르 장은 환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아크바르 아딜 샤라 칭하기까지 했다. 그후 붉은 요새의 근왕 병력과 함께 한달 가량 시가전이 이어졌고, 사프다르 장이 승기를 잡았으나 아프간계 로힐라 족과 마라타 왕국이 아흐마드 샤를 구원하며 전세를 역전했다. 반군이 델리 밖으로 밀려난 후에도 전투가 장기화되자, 아흐마드 샤는 델리에 제후들이 모인 가운데 자이푸르 왕공 마도 싱의 중재 하에 사프다르 장과 휴전을 맺었다. (1754년 말) 하지만 무려 8만의 대군이 반년 이상 델리에 주둔한 대가로 황실은 무려 1680만 루피의 빚을 지게 되었고, 아흐마드 샤는 보물을 팔아봤지만 20만 루피를 마련하는데 그쳤다. 여기에 사프다르 장 이후의 재상 이마드 울물크[37]는 더욱 권력욕이 많은 인물이었고, 이에 아흐마드 샤가 사프다르 장과 함께 황권을 회복하려 하자 이마드 울물크는 황제를 궁전에 가두어버리고 마라타 동맹과 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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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4년에 세워진 사프다르 장 영묘

사프다르 장이 델리 근교로 진격하자 아흐마드 샤도 궁전을 탈출해 군대를 편성했으나, 1754년 시칸다라바드에서 마라타 군에 대패했다. 황족들마저 버리고 델리로 후퇴한 아흐마드 샤는 마라타 군대와 돌아온 이마드 울물크의 의해 재차 연금되었고,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결국 눈이 뽑힌 후 폐위되었다. 아흐마드 샤를 누르가르 (살림가르) 요새에 유폐한 이마드 울물크는 알람기르 2세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다. 한편 아흐마드 샤는 요새에 무려 21년간 감금 생활을 하다가 사망한다. 그리고 이마드 울물크가 마라타 동맹을 등에 업고 부정부패와 사치스러운 권력농단을 이어가던 1756년 말엽, 이번에는 두라니 왕조의 아흐마드 샤가 나디르 샤를 본받아 델리를 목표로 진격했다. 본래 델리에는 5만의 마라타 군이 있었으나, 데칸 원정에 차출되어 당시에는 총독 안타지 만케슈와르 휘하의 3천 4백의 병력만이 남아있었다. 1757년 1월, 델리 외곽에서 무굴-마라타 군대는 두라니 군에 맞섰으나 밤중에 나집 웃 다울라 휘하 로힐라 아프간 부대가 배신하고 동족들에게 합류하며 패퇴하였다.

델리에 입성한 아흐마드 샤는 협박을 통해 이마드 울물크를 몰아내고 나집 웃 다울라를 델리의 실권자로 삼아 매년 2백만 루피의 연공을 내게 했다. 그 과정에서 알람기르 2세는 유폐되었다. 다만 그해 4월, 아흐마드 샤가 회군하자 이마드 울물크가 마라타 동맹에 지원을 청하여 라구나트가 이끄는 4만 군대와 함께 델리로 돌아왔다. 1757년 8월, 마라타 대군이 당도하여 붉은 성채의 야무나 강 맞은편에 주둔했다. 보병 2천 5백, 기병 5천만이 있던 나집 웃 다울라는 성채에서 농성했으나 결국 항복하여 사로잡혔다. 그는 델리로 돌아오거나 마라타 동맹을 적대하지 않겠다는 서약 후에 풀려났고, 마라타 군대는 붉은 요새를 비롯하여 델리를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알람기르 2세는 보복을 두려워하며 바라트푸르 왕국으로 도망쳤고, 마라타에 이어 자트족이 한번 더 델리를 약탈한 후에야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던 1758-59년, 마라타 군대가 두라니령 펀자브의 일부를 점령했다. 힌두 마라타 세력이 인도 대륙 상당부를 석권하자, 불안해진 북인도 무슬림들은 아흐마드 샤에게 개입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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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 자한다르 샤의 황후 랄 쿤와르와 딸 베굼 잔이 안장된 영묘인 랄 방글라

1759년 말엽, 라호르를 거쳐 남하한 아흐마드 샤는 재차 델리에 당도하여 소수의 마라타 주둔군을 격파한 후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힌두스탄 방면으로 나아가자 아와드의 나와브 슈자 웃 딘, 로힐라 왕공 나집 웃 다울라 등이 합류하였다. 이에 바지라오 1세의 조카 사다쉬브라오 바우가 마라타 및 바라트푸르 군대를 모아 북상했고, 같은해 12월에 아프간 수비대를 격파하며 델리를 재점령했다. 마라타 군대와 함께 재집권한 이마드 울물크는 알람기르 2세에게 힌두교 성인이 알현을 요청한다고 속여 그를 궁궐 밖으로 꾀어낸 후, 암살자를 시켜 시해했다. 그후 마라타의 페슈와 발라지 바지라오는 자신의 아들을 무굴 황위에 옹립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샤 자한 3세를 옹립했다. 한편 아와드가 두라니 측에 넘어가며 보급품이 부족했던 마라타 군대는 이미 피폐했던 델리를 더욱 약탈했고, 델리 왕궁과 모스크 내부를 장식한 보석마저 쓸어갔다. 특히 사다쉬브라오 바우는 델리와 아그라 일대의 무굴 시기 모스크 및 영묘들을 훼손했다.[38]

다만 승리 후 그가 오만해지자 바라트푸르 왕국의 자트 족이 이탈했고, 쿠트브 칸 휘하의 무굴 군대가 델리 북쪽 부라리 가트의 마라타 진영을 습격해 대장군 다타지 라오를 전사시키는 등 일부 반격했다. (1760년 초엽) 그후 양측은 일전을 준비했고, 10월의 쿤즈푸라 전투에서 쿠트브 칸 등 1만 5천의 두라니 선발대를 전멸시킨 사다쉬브라오 바우는 지연전을 펼치라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한 채 전면전을 결정했다. 마라타 군이 파니파트를 선점, 두라니측 퇴로를 끊자 아흐마드 샤는 파니파트와 델리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마라타 진영을 점차 포위했다. 1760년 10월에는 나집 웃 다울라가 로힐라 부대와 델리를 기습 점령하고 두라니 샤의 인가 하에 2년 전 이마드 울물크를 피해 알라하바드로 피신해 있던 알리 고하르를 새 황제인 샤 알람 2세로 선포했다.

그리고 1761년 1월, 아사 직전에 놓인 마라타 군은 포위망을 뚫으려 총공격에 나섰다. 두라니측 우익을 붕괴시키며 우위를 점하던 마라타 군은 수적, 체력적 열세와 아프간 중무장 기병대의 반격에 결국 패퇴하였다. 다만 아프간측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본토를 오래 비울 수 없던 아흐마드 샤는 마라타 페슈와에 화의를 청했다. 결국 그는 델리를 넘보지 않고 펀자브 지배에 만족하는 조건 하에 회군했고, 델리는 무굴 령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미 크게 약화된 무굴 제국은 델리마저 제대로 간수할 수 없었고, 재상 나집 웃 다울라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에 바빴다. 1763년 12월, 나집 웃 다울라는바라트푸르 군주 수라즈 말을 쏘아 죽였다. 뒤를 이은 아들 자우하르 싱은 복수를 위해 자트족 및 시크 군과 델리로 진군, 시가지를 점령한 후 약탈했다. 다만 붉은 성채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764년 11월)
5.10.1.3. 시크교 세력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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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던 델리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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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최후의 중흥기를 이끈 재상 미르자 나자프 칸의 영묘. 무굴 제국의 마지막 대규모 영묘 건축이다.

시크 군에게 패배한 나집 웃 다울라는 부관 아프잘 칸에게 델리 수비를 맡겼지만 1766년 시크 군대는 델리 외곽을 약탈했다. 이후로도 시크 군은 연이어 무굴-로힐라 군대를 격파하고 델리 및 그 근교를 공격했다. 한편 즉위 후에도 샤 알람 2세는 기존의 거점 알라하바드에서 벵골 회복을 위해 1761-65년 무굴-영국 전쟁을 치렀으나 패배했고, 알라하바드 조약에 의거하여 영국측 세폐 (260만 루피)를 받을 겸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39] 따라서 델리는 12년간 이어진 황제의 부재동안 태자 미르자 자한 바크트와 재상 나집 웃 다울라가 통치했다. 그러던 1770년 나집 웃다울라가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나집 웃다울라의 아들 자비타 칸이 자리를 이어받자, 시크 군대가 재차 델리를 습격했다.

기회를 노리던 마라타 동맹의 마하다지 신데는 1771년 2월에 델리로 진격했다. 이에 무굴 지휘관 샤피 웃 딘 무함마드 칸이 협상하여 도시의 무혈 항복을 이끌어내어 3천의 마라타 기병대가 입성했다. 다만 성채의 자비타 칸은 저항하다가 성벽에 균열이 생기자 도주했다. 마라타 동맹은 4백만 루피와 메루트 할양 및 재상 미만 관료 임명권을 대가로 샤 알람의 보호자가 되었다. 또한 마하다지 신데는 명분을 갖추기 위해 무굴 황제를 델리로 데려오고자 했다. 이에 샤 알람은 1771년 5월에 알라하바드를 출발, 마하다지 신데의 호송을 받아 1772년 1월 델리에 도착했다.[40] 같은해 샤 알람은 마라타 군의 도움으로 자비타 칸을 격파하고 로힐칸드 일대를 수복했다. 다만 시크 세력의 침입은 계속되어 1774년 1월에도 델리 외곽의 샤다라 정원이 약탈되었다.

마침 마라타 동맹은 영국과 전쟁을 벌이며 정신이 없었고[41], 여기에 축출된 자비타 칸이 시크 측과 동맹하며 상황은 악화되었다. 1778년 10월에는 싱 크로라 미슬의 군주 바겔 싱이 이끄는 시크 군대가 무굴 군대를 격파한 후 아예 델리를 점령, 구르드와라를 개조한 모스크를 파괴하고 한달간 주둔했다. 이러한 혼란은 1779년, 재상 미르자 나자프 칸의 신식 군대가 자비타 칸과 시크 군을 격파했다. 1781년 4월, 시크 군대가 델리 근교를 대대적으로 약탈했지만 시내로 진입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한 후 시크 군대는 재차 델리 근교를 약탈했고 4명의 부관이 사령관의 지위를 얻기 위해 내분을 벌이며 무굴 제국의 짧은 부흥기는 막을 내렸다. 1783년 3월에는 바겔 싱의 4만 시크 군대가 델리를 장악하여 시가지 일부에 방화하고 격전 끝에 붉은 성채를 함락했다. 이때 시크 왕공 자사 싱 아흘루왈리아가 델리 왕좌에 앉았으나 곧 샤 알람을 복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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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 테그 바하두르가 거처하던 곳에 세워진 구루드와라 방글라 사힙. 델리의 대표적인 시크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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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루 테그 바하두르의 형장에 조성된 구르드와라 시스 간즈 사힙. 두 성지 모두 1783년에 세워져 1979년 증축되었다.

대신 시크 군은 아우랑제브의 왕좌를 코끼리에 실어 암리차르 황금사원에 봉안했다. 그후 협정에 따라 무굴 측은 30만 루피를 납부했고, 바겔 싱은 4천 병력과 남아 구르드와라를 건설했다. 하지만 바겔 싱이 회군한 후에도 4인방의 권력투쟁은 계속되었고, 재상 마자드 웃 다울라는 시크 측과 결탁해 군대 규모를 2만에서 5천으로 줄이기까지 했다. 1784년에야 마하다지 신데가 4인방을 제압하여 내란을 진정시켰고, 이에 샤 알람 2세는 그를 제국의 섭정이자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무굴 사상 최초로 힌두교도가 2인자인 바킬-이-무틀라크에 오른 것. 1784년 12월에는 미르자 나자프 칸의 아들 나자프 콜리 칸이 사주한 시크 군대가 델리 외곽을 습격했지만 곧 철수했다. 1786년 1월에도 시크 군대가 외곽을 공격했지만, 마라타 군이 반격에 나서자 후퇴했다.

델리의 상대적 안정은 1787년 마하다지 신데가 라지푸트족 연합군에 패배한 후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하며 종식되었고, 1787 ~ 1787년간의 극심한 혼란기로 이어졌다.[42] 우선 1787년 7월, 시크 군대가 아그라 ~ 델리 일대를 약탈했고 혼란기를 틈타 나집 웃 다울라의 손자 굴람 카디르가 시크 군대와 함께 8월에 델리에 입성했다. 다만 무굴 군대를 격파한 후 샤다라 정원을 약탈하던 시크 군대는 마라타 군의 반격으로 철수했다. 잠시 물러났던 굴람 카디르는 9월에 재차 델리를 장악했고, 10월에 붉은 성채를 공격했다. 1788년 초에도 시크 군대는 델리 인근을 습격했다. 3월에는 나자프 콜리 칸이 시크 군대와 샤 알람 2세의 진영을 습격해 무굴 군대를 학살했고, 황제는 겨우 피신했다. 난세가 이어지던 1788년 7월, 굴람 카디르는 완전히 델리를 장악했다. 시크 군대의 압박 하에 황제는 굴람 카디르를 재상으로 삼았다.[43]

그는 즉시 황실의 보물을 찾아 궁전들을 약탈했고, 예상했던 2.5억 루피에 이르지 못한 차에 친위 쿠데타 시도까지 있자 분노하여 아프간 검으로 샤 알람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든 후 폐위했다. (1788년 8월) 이후 살림가르 성채에 갇혀 있던 한 왕자가 샤 자한 4세로 옹립되었다. 여기에 굴람 카디르는 황녀들을 자신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게 했고, 수치심을 못이긴 황녀들이 야무나 강에 투신해 자살하였다. 그해 9월 말엽, 보다못한 마라타 군이 델리로 진격해 시가지를 장악했고 2주 가량 저항하던 굴람 카디르는 샤 자한 4세와 도주했다. 다만 그들이 도주한 미라트 요새도 곧 함락되었고, 마라타령 마투라에 구금되었던 굴람 카디르는 1789년 샤 알람의 부탁으로 차례대로 신체가 절단되며 처형된 후 그중 눈과 귀 등이 델리로 보내졌다. 샤 자한 4세는 다시 살림가르 성채에 갇혔다가 1790년 샤 알람에 의해 암살되었다.
5.10.1.4. 마라타-영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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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델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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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수피 성인 쿠트붓딘 바크티야르 카키 수도원 옆의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샤 알람 2세, 악바르 2세가 안장된 영묘

마라타 군대는 1775년부터 1803년에 제2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15년여간 델리를 점거했다. 연맹체인 마라타 지배 하에서 델리는 푸네의 페슈와가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닌 괄리오르의 스킨디아 가문 마하라자들이 대대로 무굴 재상에 임명되어 관리했다. 1794년 마하다지 신데의 사후 종손 다울라트 라오가 계승하여 델리 ~ 괄리오르 일대를 통치했다. 다만 1800년대 들어 페슈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영국에 대해 마라타 왕공들은 다울라트 라오를 중심으로 반발하여, 1803년 제2차 마라타-영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인도 중부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둔 영국군은 기세를 몰아 델리를 노렸고, 9월 초엽 제라드 레이크 휘하 4천 5백의 병력이 야무나 강 동안에 나타났다.

이에 다울라트 라오는 1만 7천의 마라타-시크 군대와 나아가자, 제라드 레이크는 거짓 후퇴 후 반격을 가하여 격파하였다. 영국군의 총검 돌격에 마라타 군은 강을 건너 도망가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결과는 영국군 5백여, 마라타군 3천여 손실이었다. 이후 마라타 군은 델리에서 농성하려 했지만, 3일 만에 철수하였다. 이로써 영국군은 델리를 점령했고, 맹인 황제 샤 알람에게 명목상 복속을 표했다. 같은해 12월, 다울라트 라오가는 수르지 조약으로 야무나 ~ 갠지스 일대를 포기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유약한 페슈와를 축출하고 마라타 연맹의 실권을 쥐고 있던 인도르의 마하라자 야슈완트라오 홀카르가 1804년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후 델리로 진격했다. 10월, 그는 무려 6만 기병 및 1만 5천의 보병을 이끌고 델리를 포위했다.

당시 델리 주둔 영국군은 350여에 그쳤다. 하지만 다시 힌두 지배 하에 놓이기 싫었던 황제 샤 알람이 무굴 군대를 지원하며 델리 총독 데이비드 오치터로니는 수성전을 펼칠 수 있었다. 마라타 군대는 아지메르 문, 카슈미르 문, 라호르 문을 집중 공격했지만 일주일 넘게 함락하지 못했다. 결국 제라드 레이크가 이끄는 구원 병력이 당도해 기습을 가하자 야슈완트라오는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이후 바라트푸르 왕국과 함께 몇 차례 영국군을 격파하며 위엄을 보이던 야슈완트라오는 결국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시크 왕국에 망명했다가, 나폴레옹 전선에 집중하고 싶던 영국과 복위를 대가로 1805년 휴전했다. 이로써 조각조각 난 마라타 연맹은 대부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1817-18년 대대적인 독립 투쟁을 벌였으나 (제3차 마라타-영국 전쟁) 실패하고 멸망했다. 그 틈에 펀자브를 석권한 시크 왕국의 란지트 싱 역시 영국의 동맹이었기에 인도 전역은 사실상 영국 패권 하에 놓였다.

5.11. 영국 지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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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 ~ 1836년에 세워진 세인트 제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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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48년, 옛 랄코트 (뉴델리 남쪽의 메흐라울리)에 바하두르 샤 2세의 여름 별궁으로 지어진 자파르 마할. 무굴 제국의 마지막 주요 건축물이다.

영국 지배기에 델리의 북쪽 외곽에는 영국인 거주지인 시빌 라인즈가 세워졌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티무르 제국부터 전해 내려온 무굴 황실의 권위를 인정했고 붉은 요새에 머무르게 하면서 매달 연금을 지급했다. 한편 장님이던 샤 알람을 대신하여 정무를 보던 아들 악바르 2세는 1806년 그의 사후 황제로 즉위했다. 다만 황제의 권력은 명목상에 그쳤고, 악바르 2세는 영국인들을 주종관계로 대하다가 영국측 분노를 사 칭호가 '인도의 황제'에서 '델리의 왕'으로 격하되었다. 악바르 2세는 본래 장남 미르자 자한기르를 태자로 정했으나, 그가 붉은 요새 내의 영국 동인도 회사 숙소를 습격한 후 영국의 압력 하에 태자는 차남 자파르에게 돌아갔다.

1837년, 악바르 2세의 사후 자파르 왕자는 바하두르 샤 2세로 즉위했다. 그와 별개로 델리는 영국 지배 하에서 치안이 안정되며 평화를 누렸다. 1830년 도시 서쪽에 사르다르 바자르가 세워졌고, 이는 후일 남쪽으로 확장되어 현 파하르간즈의 모태가 되었다. 1840년에는 수공업품 시장인 차우리 바자르가 세워졌고 1850년에는 건과일, 향신료, 허브 등을 파는 카리 바올리 시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영국의 인도에 대한 수탈과 차별은 점차 반영 감정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5.11.1. 세포이 항쟁 (델리 전투, 18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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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델리 전투 묘사도

1850년경 영국은 고령의 바하두르 2세에게 그가 마지막 황제임을 공지했다. 그러던 1857년 5월 메루트 시작으로 영국의 인도인 용병들인 세포이들이 봉기, 델리로 진군했다. (세포이 항쟁) 당시 델리에는 영국인 부대가 없었기에 도시는 수월히 장악되었고, 세포이들은 바하두르 2세에게 지도자가 되어 달라고 청했지만 그는 확답을 하지 않았다. 세포이들은 군중과 함께 영국인들을 학살하고 바자르를 약탈했다. 무기고에서는 9명의 유럽인이 5시간 동안 항전했으나 결국 자폭하여 1천여 공격자들과 산화했다. 5월 11일 하루동안 델리 내의 서양인 중 절반이 죽었고, 생존자들은 도시 서북쪽 외곽의 신호탑을 거쳐 카르날로 피신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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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성문 근처에 있던 무기고 (매거진)의 잔존부

다음날, 마침내 바하두르 2세는 공개 조정 (두르바르)을 열고 봉기 지지를 선포했다. 4일 후에는 영국인 포로 52명이 처형되었다. 반격에 나선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사령관 조지 앤슨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했고, 5월 말부터 델리 외곽에서 전초전을 벌였다. 도중 조지 앤슨이 병사했지만, 부관 헨리 바르나드가 승계하여 6월에 바하두르 2세의 아들 키지르 칸이 이끄는 세포이 군을 격파한 후 델리 성벽 북쪽에 진영을 세웠다. 다만 병력이 3천에 불과했기에 헨리는 원군을 기다리기로 했고, 버려진 건물들을 요새화하여 델리로 몰려든 무자헤딘들의 공격을 견뎌냈다. 무더위와 역병 속에서 지휘관이 연이어 병사 혹은 교체되는 악조건 속에서도 영국군은 진지에서 버텨내었다. 한편 바하두르 2세는 노련한 군인 바크트 칸을 지휘관으로 임명했고, 자주 살림가르 성채로 나아가 전략 회의를 하거나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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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후 파괴된 카슈미르 문 일대의 성벽

그러던 8월, 펀자브 주둔 영국군 4천여 병력이 공성 병기와 함께 당도하며 영국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기타 증원 병력까지 합쳐 9천의 영국군은 9월 들어 본격적으로 포위망을 구축했고, 일주일 간의 포격전 끝에 성내의 화약이 거의 소진되자 총공세에 나섰다. (9월 14일) 격전 끝에 일단의 결사대가 카슈미르 문 쪽에 폭탄을 터뜨려 성벽을 붕괴시켰고, 이로써 생긴 틈으로 영국군이 돌격했다. 카불 문 쪽에서는 수비대가 반격에 나서 역으로 영국군 진영을 점령할 뻔하고, 성벽을 넘은 영국군도 한때 역습을 당해 세인트 제임스 교회로 몰리며 존 니콜슨 준장이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다만 수비대 역시 보급품 및 명령 체계의 부족으로 제대로 적을 일소하지 못했고, 약탈한 술로 취해있던 영국군은 지휘관이 모든 알코올을 태운 후에야 진격하여 16일에 무기고를 점령했다.

18일에 대사원이 점령되자 바하두르 2세는 궁전을 포기했고, 다음날 궁전 및 살림가르 요새가 점령되었다. 20일에는 후마윤 영묘에 피신해 있던 바하두르 2세 일가가 체포되었고, 영국군은 그의 장남 미르자 무굴과 차남 미르자 키즈르 술탄 등 3인을 델리 남쪽 외곽의 '피의 문'에서 권총으로 처형했다.[45] 대세가 기울자 세포이 및 무자헤딘들은 영국군이 성문을 다 접수해서 갇히기 전에 대부분 델리를 탈출했고, 21일에 영국군은 델리를 완전 장악한 후 바하두르 2세의 폐위를 선포했다.[46] 델리 시가지는 4일간 약탈되었고, 포로 및 세포이 부역자 등 수백여 명이 즉결 처형되었다. 명목상이긴 했지만 구심점이던 황제가 항복한 델리 전투로 세포이 항쟁의 기세는 크게 꺾였고, 이듬해 러크나우와 칸푸르 등도 제압되며 완전히 진압되었다.

5.11.2. 근현대: 뉴델리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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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건설 시의 모습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은 동인도회사 대신 영국 군주가 무굴 황제를 대신하는 인도의 황제가 되어 통치하는 인도 제국 체제를 수립한다. 인도 제국 하에서 델리는 비록 캘커타에 이은 제2의 도시로 밀려나긴 했지만, 안정을 누리며 성장했다. 1864년 캘커타 및 라호르와의 북인도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고, 1869년에는 만디 (꽃) 시장이 생겨났다.

그러던 1911년 12월, 조지 5세가 주최한 델리 더르바르 (공개 조정)에서 인도 제국은 다시 델리를 수도로 결정했다. 다만 기존 올드 델리 대신 그 북쪽의 시빌 라인에 1912년부터 관공서 등 신도시가 조성되었고, 1차 대전 시기의 공사 중단 후 1920년대에는 올드 델리와 자한파나 & 메흐라울리 사이에 새로운 도시가 세워졌다. 1921-31년간에는 1차 대전에 참전한 인도 군인들을 기리는 인도의 문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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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슈트라파티 바반 (정부 청사) 단지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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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세워진 델리 대학교

이러한 신도시는 설계자의 이름을 따서 '루티언스 델리'로 불리다가 1927년, '뉴델리'로 명명되었고 1931년에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뉴델리는 인도의 중심지로 남았다. 2차 대전 (태평양 전쟁)기에는 영국령 남아시아에 거주하는 2천여 일본 국적자들이 푸라나 킬라 및 라자스탄의 데올리에 분산수용되었다.[47]

그리고 1947년 여름 ~ 1948년 봄의 인도-파키스탄 분할 당시, 델리를 떠나 파키스탄으로 향하는 15-20만의 무슬림 주민들은 푸라나 킬라에 임시 수용되었다.[48] 1948년에는 무슬림-힌두 간 통합을 호소하러 델리에 머물던 마하트마 간디가 뉴델리에서 힌두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되어 올드 델리 동남쪽의 라즈 가트에서 화장되었다.

5.12.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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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게이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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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델리의 찬드니 초우크 일대

1947-48년, 최대 30만의 무슬림 주민이 떠난 자리에 50만에 달하는 힌두-시크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인구의 40%를 이루게 된 그들은 대부분 펀자브인이었기에 델리는 더욱 힌두-펀자브 색채가 강해졌고, 남은 무슬림 주민들은 수세기 만에 비주류로 전락했다. 19세기 말엽 이슬람 42%, 힌두교 55%로 호각세를 이루던 종교 비율은 20세기 후반 이슬람 13%, 힌두교 82%로 크게 번화했다.

20세기 후반들어 델리는 힌두 중심주의에 반발한 무슬림들의 반발로 인한 종교 갈등에 시달렸다. 1973년, 인도-파키스탄 전쟁기의 폭동이 벌어져 18명의 경찰이 사망하고 50만 루피의 손실이 발생했다. 이듬해에도 폭동으로 11명이 사망, 92명이 다쳤다. 그리고 1984년, 인디라 간디 암살 직후 벌어진 반-시키 폭동으로 최소 2천 8백여명의 시크교도가 학살되었다.

2001년에는 의회 건물에 대한 공격으로 6명이 사망하자 인도 측이 파키스탄 배후설을 주장해 양국간 외교 분쟁이 일었다. 2005년과 2008년에도 테러가 발생해 총 92명이 사망했고, 2020년 델리 폭동 시에는 힌두교도 군중이 무슬림들을 공격해 양측은 합산 53명이 사망했다.[49]

6.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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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조사한 델리 대도시권의 경제 규모. GDP(국내총생산)가 2,936억 달러로 총 38위를 차지하였다. 충칭시자카르타처럼 인구는 많아서 경제력은 적지 않지만 그 반동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만 달러를 갓 넘는다.

7. 관광

명색이 인도의 수도이니만큼 인프라는 인도에서 가장 잘 되어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50] 인도에 처음 여행 온 사람으로서는 뉴델리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리는 혼란의 도가니에 기가 빠질 지경일지도 모르지만, 인도 국내를 쭉 돌고 나면 가장 마음이 편했던 도시는 델리였다고 말하는 여행자들도 꽤 많다. 그래도 인도 내에서는 한국 대도시에 근접한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나 인프라를 접할 수 있고, 지하철과 버스가 잘 되어 있어 릭샤꾼들과 요금으로 씨름할 필요가 없고, 가장 도시적인 분위기가 흐르기 때문이다.

인도 특유의 볼 거리와 관광 뿐 아니라 하나의 '도시'를 체험하고 싶을 때에 델리는 그래도 가장 적절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마음 편해 하는 패스트푸드점이나 스타벅스 등도 있고, 수도인 만큼 인도 전국의 요리를 접해볼 수도 있다. 인도 음식이 맞지 않는다면 한식당을 고를 수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51] 코넛 플레이스는 쇼핑을 하기에 적당하다. 공항 바로 앞에 있는 신도시인 에어로시티(Aerocity)에는 인도라고 생각들지 않을 정도의 최첨단 도시도 들어섰다. 또한 델리 자체가 역사가 오래되고 격랑의 역사를 지닌 도시다 보니 유적지도 많다. 그러다 보니 유네스코 세계유산도 3개나 있는데, 레드 포트(Red Fort), 꾸뜹 미나르(Qutub Minar), 후마윤의 묘지(Humayun's Tomb)이 그것들이다. 요약하자면 볼거리, 편의시설, 다양한 먹거리가 많아 인도 내에서는 여행하기 제일 편한 도시다.

7.1. 올드 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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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웃딘 칸 영묘 및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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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마드라사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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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델리 일대의 유적은 대부분 17세기 것이다.

7.2. 북부 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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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쉬마할 (수정궁, 좌)와 마크바라 파이크 (전령의 무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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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의 카라반사라이인 바들리 사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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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히 모스크의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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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리 (12개의 문)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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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뉴델리
















오래된 유적은 아니지만 유명 건축물로 인디아 게이트(India Gate) 가 있다. 파리 개선문을 본 따 1931년에 지어진 건축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희생된 9만 명의 인도 군인들을 위한 높이 42 m의 위령탑이다. 인디아 게이트에서 라슈트라파티 바반(Rashtrapati Bhavan 인도 대통령 관저)까지 이르는 대로를 라즈 파트(Raj Path)라고 부르는데 직역하면 '왕의 길'이란 뜻이다. 이 대로에는 인도 정부 부서들과 국회의사당 등이 밀집해 있다. 인도군열병식과 같은 중요한 국가 행사들이 이 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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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게이트의 야경.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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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하이교의 연꽃 사원

그 밖에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 자한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인도의 이슬람 성원 중 가장 큰 성원인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 성원, 마하트마 간디를 기념하는 검은 대리석 제단이 있는 라즈 가트(Raj Ghat), 인도의 국화인 연꽃을 형상화한 바하이교 사원(Bahai Temple), 인도 최대이자 세계 최대 힌두교 사원 악셔드햄(Akshardham)이 유명하다. 그리고 언급한 관광지들이 델리 메트로로 모두 연결되어 있어 이동하기도 편하다.[52]

여행자들에게 잘 알려진 거리인 빠하르간지 (Paharganj) 가 유명하다. 파하르간즈, 한국 한정으로 줄여서 빠간이라고도 한다. 델리 구시가지와 뉴델리 사이에 위치해 있다. 호텔, 호스텔, 환전소 등 여행자에게 필요한 시설들이 밀집해있고 온갖 상점들로 가득차 있으며 전세계에서 온 배낭여행자들이 우글거리는 공간이다. 인도에 여행온 배낭여행자들은 거의 대부분 한번 쯤 들르는 곳. 무질서하고 혼란스럽지만 인도 특유의 정취가 있는 곳이다. 물론 사기꾼과 소매치기도 우글거리니 조심해야 한다.

7.3.1. 남부 델리

랄코트 & 킬라 라이 피토라, 시리, 투글루카바드, 자한파나, 하우즈 카스 등 10 ~ 14세기 유적들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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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미상의 영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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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바올리 (계단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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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남부 델리 일대를 거닐다 보면 주택가나 공원에 방치된 유적들이 정말 많다. 꼭 로마나 이스탄불이 연상될 정도이다.

7.4. 열악한 유적 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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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이나 국가였으면 국가 지정 문화재 급일 이런 중세 건축도 시지정 문화재이긴 하지만 이름도 없이 (혹은 틀린 이름이 붙은 채로) 사실상 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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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메흐라울리 유적 공원처럼 넓은 곳은 주요 유적 외에는 관리가 아예 안된다. 기야스 웃 딘 발반 영묘처럼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곳도 여름에는 수풀로 덮혀 있고, 관리인이 담장을 조심히 넘어 들어가라는 수준이다. 위의 모스크처럼 제대로 조사도 되지 않아 이름도 모르는 유적도 널렸으며, 입장료라도 받고 관리를 체계적으로 하면 좋겠지만 이미 힌두 중심주의가 득세한 인도 정부는 이슬람 유적을 홍보하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다.

8. 환경 문제

델리는 이처럼 유구한 역사의 도시지만 뉴델리 수도권인 데다가 인도의 수도인 만큼 각종 산업시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업시설 태반이 공해산업인지라 199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도시 순위에서 10위 안에 들었다. 특히, 대기오염이 심한데 뉴델리 인근지역 화전민들이 엄청난 양의 볏짚을 태우는데다 자동차 매연도 심하고 대기가 정체되어 있어서 공기 질 문제가 중국보다 심하다. 그래서 시에서는 버스와 택시에 CNG(압축 천연가스)를 이용하도록 하고 유연가솔린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정화 노력이 진행되는 중. 지하철망이 안 깔린 건 아니고 상당한 수준으로 깔려있기는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노선수가 늘고 있지만[53] 아직까지도 델리 도시권 곳곳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오토릭샤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대체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평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델리는 전세계 주요 도시들 중 공기가 가장 심한 도시로 미세먼지 농도가 중국의 수도 베이징시의 몇 배에 달한다. 따라서 이 지역을 여행시 심한 가래와 호흡기 질환에 시달릴 수도 있다. 날씨가 추워지는 시기에 델리에 있으면 오염된 공기 때문에 코딱지와 가래가 새까매진다. 때문에 마스크는 필수이다.

2016년 11월부터 심한 대기오염에 시달리고 있으며, 현재 휴교령이 들어간 상태이다. WHO PM 2.5 기준치(24시간 평균 25㎍/㎥)의 29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관련 기사

2017년 11월 12일에는 미세먼지 수치가 WHO PM 2.5 기준치(24시간 평균 25㎍/㎥)의 40배인 1000㎍/㎥의 수치를 기록했다. 이 정도면 거의 가스실 수준.

물 문제도 심각하다. 상수도는 갖춰져 있으나 하수도 및 쓰레기 처리체계가 아직 미비해 상수도를 오염시키는 상황이다. 일부 호텔에서는 양치질용으로 생수까지 화장실에 비치할 정도이다(수돗물로 양치질을 할 경우 수인성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이 있다고).

당연히 뉴델리 시민들이 정부의 미세먼지를 줄이는 대책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의 삽질과 화전을 하는 지역 탓을 하는 관료들이 문제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심지어 공해 배출업소를 폐쇄하거나 강제로 먼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공산당 일당독재의 중국을 부러워할 정도.

9. 교통

도시철도망으로 델리 메트로가 있으며 델리교통공사(DTC)가 운영하는 시내버스가 시내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9.1. 주요 철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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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정션역(Delhi Jn Stn)

5개의 주요 철도역이 있고 시내 곳곳에 조그마한 철도역[54]이 있으니 구글지도를 참조하고 이용하자.

9.2. 공항

인도 북부권역의 최대 국제공항인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55], 에어인디아가 직항편을 운영중인데 아시아나항공과 에어인디아는 양 항공사의 델리행 노선 및 에어 인디아의 델리발 인도 국내선 노선[56]공동운항을 시행하고 있다는 이점이 있으며, 이로 인해 아시아나항공은 월, 수, 금요일 운항, 에어인디아는 화, 목, 토, 일요일 운항을 하고 있어 아시아나항공과 에어인디아는 인천 - 델리 노선을 사실상 매일 운항을 한다는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경유편의 경우 가장 저렴한 루트인 중국 경유노선이 코로나 19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중국동방항공상하이 경유산둥항공지난 / 쿤밍 경유 그리고 인도의 인디고 항공이 중국 - 인도 양국을 오갔지만 1962년 이후 심화된 중국-인도 국경분쟁에 따라 양국간의 직항편이 모조리 끊기면서 다른 국가를 경유해서 와야하는데 다음과 같은 경로가 있다.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의 경우 비자를 받은 한국인의 입국은 쉬운 편이나, 공항 출구로 한 번 나가면 재입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항 내에서 노숙하거나, ATM 이용, 환전, 유심 구입 등 불 일이 남아 있다면, 절대로 공항 출입문을 통해 외부로 나가면 안 된다. 이는 인도 전역 공항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으로, 테러 방지 및 잡상인 등의 출입 통제를 위한 것이다. 공항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몇 시간 이내 탑승 예정인 비행기 티켓(e티켓 가능)이나 공항 입장권(별도 판매)이 필요하다(외국인의 경우 공항 출입문에서 여권을 제시해야 할 수도 있다). 간혹 이를 모르고 공항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다가 흡연이나 바람쐬기 등을 이유로 잠깐 밖에 나갔다가 그대로 못 들어오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고 있으니 주의할 것.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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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식 수도는 연방구역 내의 뉴델리이다.[2] 1946년 이전의 경기도 서울시가 있던 시절의 경기도와 비슷하다.[3] 하리아나 주는 펀자브의 힌디어 사용 지역을 독립 후에 분할한 것이다.[4]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유치전에서 인도 올림픽 협회장 수레시 칼마디는 "델리가 뉴델리고 뉴델리가 델리다. 같은 도시일 뿐이다." 라고 말했다. # 해당 발언의 배경에는 발표 순서를 뒤를 미루기 위한 계획이 있긴 했지만, 그만큼 델리라는 개념이 넓게 쓰인다는 뜻이기도 하다.[5]대한민국보다 인구 밀도가 2배 가량 높은 셈이다. 인구는 대한민국과 비슷한데, 면적이 1/2이기 때문이다.[6] 힌디어로 마디아(मध्य)는 중앙(中央) 이라는 뜻이 있다.[7] 똑같은 시안이지만 서주의 호경, 의 함양, 전한의 장안, 의 장안이 서로 위치가 조금씩 다른 것과 비슷하다.[점선••] [점선--] [영묘일대] [11] 부상자까지 죽였다고.[12] 힌두 주민들은 신상 보존을 대가로 금 1천 조각을 제안했으나 거절되었다. 이후 그 잔해는 쿠와툴 이슬람 모스크의 정문 부재로 쓰였다.[13] 그중에는 후일 개종하여 권신이 되는 말리크 카푸르, 바겔라 여왕 카말라 데비 등이 있었다.[14] 정확히는 일부 병사들이 전리품 양을 속이거나 숨기려 하자 꾸지람을 듣거나, 소금물을 마시게 되거나, 막대와 주먹으로 구타를 당하는 등 벌을 받았다.[15] 특히 누스라트 칸은 동생을 죽인 자들의 처자식을 직접 처리, 아이들을 보는 앞에서 조각내 죽인 후 병사들에게 부인들을 강간하게 하여 창녀로 만들었다고. 이때부터 북인도에 연좌죄가 도입되었다 한다.[16] 오히려 펀잡의 데팔푸르 총독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가 칸다하르, 카불, 가즈니 등을 습격해 연공을 받아내었다. 후자의 경우 알라 웃 딘의 명의로 금요 예배를 진행하는 등 델리 술탄국에 복속했다고도 한다.[17] 이후에는 알라 웃 딘의 압제에 시달리던 여론을 힘에 입어 자체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18] 이때 1305년 암로하 전투 당시 항복한 알리 베그와 타르타크 역시 죽었다.[19] 다만 무갈푸르란 행정 구역명은 한동안 남았다고. 그러고 2백여년이 흐른 후, 몽골 피가 섞인 무굴 제국이 델리에 들어선다.[20] 또한 힌두 주민들을 수탈하여 힌두 측의 적개심을 샀다.[21] 증설된 병원의 의료진들을 대상으로는 당시 선진 의술로 여겨지던 유나니 (그리스) 의학이 장려되었다.[22] 이는 고대 제왕에 대한 동경 의식의 일환을 보인다.[23] 코끼리는 의외로 쉽게 놀라는 성격이다.[24] 이후 헤무의 델리 원정을 틈타 무함마드 샤의 아들 바하두르 샤가 자립했고, 1557년 무함마드 아딜 샤를 전사시켜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25] 아요디아 & 자운푸르 까지만 정복[26] 대부분 기병. 여기에 전투코끼리 1천마리, 대형 포 51문, 소형 포 500문[27] 코끼리 4백마리 탈취, 수르 군대 3천여 전사[28] 역시 저번 델리 전투에서 손실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코끼리 수도 반절인 5백마리로 줄었다. 여기에 이번에는 포병대도 없었다.[29] 한편 생포된 120마리의 코끼리들은 코끼리 부대 돌격의 위세를 제대로 경험한 무굴 군대에 의해 곧바로 영입되었다.[30] 이후 힌두스탄 동부 영유했고, 무굴 제국은 1564년에야 자운푸르, 1567년경 바라나시, 1574년 벵골을 정복하며 북인도를 평정한다.[31] 그중 5개가 남아있다.[32] 세 수행원 중 바이 마티 다스는 톱으로 세로로 썰렸고, 바이 다얄 다스는 팽형에 처해졌으며 바이 사티 다스는 여러 조각났다.[33] 델리 외에도 자이푸르, 웃잔, 마투라, 바라나시에도 세워졌다.[34] 심지어 무함마드 샤의 딸을 막내아들에게 주기도 했다.[2번] [36] 아그라 및 아지메르 할양을 대가로 두라니 조의 팽창 막아준다는 것[37] 하이데라바드 초대 니잠인 아사프 자흐 1세의 손자[38] 특히 아그라의 모티 마스지드를 대대적으로 약탈 및 모욕함[39] 그는 왕자 시절인 1759년 델리에서 탈출한 후 모은 3만 병력과 함께 알라하바드에서 일종의 조정을 꾸리고 있었다.[40] 한편 이후로도 영국령 동인도회사는 형식상 무굴 제국의 대리인으로써 벵골을 통치하다가 마라타 동맹의 델리 정복 후인 1793년에야 완전히 병합하였다.[41] 1775 ~ 1782년 제1차 마라타-영국 전쟁, 마라타 군의 승리[42] 마라타 세력이 잠시 물러나자 라자스탄의 아지메르가 자립을 위해 무굴 측에 형식상 복속하기도 했다.[43] 이는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아프간 (파슈툰) 세력이 델리를 장악한 사례로 남아있다.[44] 그 과정에서 일부는 추가로 현지인들에게 피살되었다.[45] 이미 대세가 기운 걸 안 황후 지낫 마할은 황제가 델리를 탈출하지 않고 영국에 투항하면 황제와 황후 자신, 황후 본인이 낳은 세 황자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영국군과 거래했다. 이때 나머지 황자들의 신원보장은 약속되지 않았다.[46] 존 니콜슨은 그 다음날 사망했다.[47] 그중 대부분은 싱가포르 출신이었다.[48] 그중 1만 2천명이 공무원이었다.[49] 사망자 중 1/3이 힌두, 2/3이 무슬림[50] 인도 최대 도시인 뭄바이는 의외로 대중교통이 처참하다.[51] 인도에도 한국 문화가 많이 알려져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식당 외에도 인도인이 유튜브 등으로 한식을 배워 장사하는 식당도 있다.[52] 인디아 게이트는 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예외.[53] 대다수 역이 지상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사실 반쯤 지상철에 가깝다.[54] 주요 철도역보다 혼잡도가 낮은편이다.[55] 2024년부터 하계 시즌 운휴[56] 아마다바드, 콜카타, 코친, 하이데라바드[57] 태국과 인도는 오래전부터 교류가 많았으며 현재도 뱅골만기술협력체(BIMSTEC) 회원국으로 태국당국은 인도인에 대해 2024년 5월까지 상호적으로 무비자정책을 취하고 있으며 인도의 경우 BIMSTEC 회원국 국민의 경우 여러 관광지에서 입장료를 대폭 깎아주는등 양국간의 교류가 많은편이라 항공편이 많다.[58] 다만 이러한 해외 인명을 딴 도로들은 주로 외국 공관들이 많이 위치한 남부 델리에서 많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