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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12 17:39:07

이브라힘 칸 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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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치세3. 기타

1. 개요

우르두어: ابراہیم لودھی
힌디어: इब्राहिम लोदी
영어 Ibrahim Khan Lodi

재위 1517년 11월 21일 ~ 1526년 4월 21일
생몰 1480년 ~ 1526년 4월 21일
델리 술탄국의 31대 술탄. 부친보다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 1520년 동생 잘랄 칸의 반란을 진압하고 1523년 괄리오르를 마침내 병합하며 활약하였다. 하지만 정치 능력이 결여되었던 이브라힘 칸은 젊은 아미르들을 기용하여 기득권층 귀족들의 반감을 사던 끝에 1526년, 종친 귀족들이 끌어들인 바부르에 의해 파니파트 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로써 로디 왕조가 멸망하고 무굴 제국이 세워졌다.

2. 치세

시칸다르 칸 로디의 아들로, 1517년 부왕의 사망 후 계승하였다. 하지만 그는 1520년 동생이자 후계자인 잘랄 칸이 자운푸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잘랄 칸이 델리로 진격해오자 이브라힘 칸은 나머지 동생들인 이스마일, 후세인, 다울라트, 마흐무드를 펀자브의 한시 성채에 감금한 후 대군을 편성하여 아와드로 남하하였다. 이어진 전투에서 패배한 잘랄 칸은 토마르 왕조의 비크라마디타에게 망명하였고, 이브라힘 칸은 아잠 후세인 사르와니에게 3만 기병과 3백 마리의 코끼리를 주어 괄리오르를 포위하게 하였다. 포위 도중 잘랄 칸은 더이상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말와 술탄국으로 재차 망명하였고, 중과부적이라 여긴 비크라마디타는 협상에 나섰다. 이브라힘 칸은 괄리오르 양도를 대가로 비크라마디타에게 힌두스탄의 샴사바드를 영지를 제안하였고, 수용되었다. 이로써 이브라힘 칸은 부왕의 염원이던 괄리오르 정복을 완수하였다.

그후 망명했던 잘랄 칸이 델리로 돌아오자 그를 용서하고 재차 자운푸르와 러크나우 총독으로 선임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브라힘 칸은 (왕족들을 포함한) 기존의 나이든 귀족들을 자신에 충성하는 젊은 귀족들로 대체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전자의 세력이 카불의 군주 바부르에게 개입을 청하였다. 1524년 바부르는 펀잡 총독 다울라트 칸의 도움으로 라호르와 데팔푸르를 점령하였고, 로디 왕족인 알람 칸과 다울라트 칸에게 3만 병력을 주어 델리를 점령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브라힘 칸은 이들을 격파하였고, 다울라트 칸이 항복하자 역시 용서하였다. (1525년 가을) 이에 1526년 봄, 바부르는 친정에 나섰고 다울라트 칸은 재차 그의 편에 붙었다. 이에 이브라힘 칸은 7만 대군을 이끌고 델리 북쪽으로 나아가 파니파트 전투에서 바부르의 2만 대군과 대결했으나, 첫 패배를 기록하며 전사하였다. 이때 봉신 비크라마디타 역시 함께 전사하였다.[1]

3. 기타

파일:파니파트1.jpg
파니파트에 남아있는 이브라힘 칸 무덤. 1866년 영국 당국이 도로 건설을 위해 기존의 위치에서 근처로 이전하였다.

사후 동생 마흐무드 칸이 술탄을 칭하며 로디 왕조의 잔당을 규합하여 바부르에 맞섰다. 1527년 마흐무드 칸은 4천 파슈툰 군대를 모아 라나 상가와 연합하였으나 카나와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동쪽으로 도주한 마흐무드 칸은 1529년 카그라 전투에서 재차 바부르에 맞섰으나 역시 패배하였다. 이로써 로디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1] 이때 이브라힘 칸에 항복한 후 충성스러운 봉신으로 있었다. 이후 토마르 왕조 잔당 세력은 괄리오르를 수복하려 했으나 바부르의 장군 라힘다드에 의해 저지되었고, 1556년 수르 왕조 하의 총독 빌 칸이 비크라마디타의 아들 람 샤에게 괄리오르를 넘겼으나 악바르 대제가 보낸 키야 칸에게 축출되었다. 이후 말와에 망명했던 람 샤는 1576년 할디가티 전투에서 아들 샬리한 싱을 비롯한 300여 토마르 왕족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로써 2세기간 이어진 토마르 가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