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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lāl-ud-Dīn khaljī
(1220년 ~ 1296년, 향년 7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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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델리 술탄국 중에서 한 왕조인 할지 왕조의 창시자. 노예 왕조의 왕위계승 문제로 반란을 일으키고, 1290년에 할지왕조를 창건하나, 1296년에 조카인 알라 웃 딘 할지에게 살해되었다.2. 왕위 찬탈
1286년, 노예 왕조의 술탄인 발반이 죽고, 발반의 손자 카이카바드가 술탄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카이카바드가 어렸기에 왕위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문제가 일어나고, 튀르크계 귀족들 사이에서 내분이 발생하자 이 틈을 타 1290년 잘랄 웃딘 할지가 카이카바드를 폐위시켜서 노예 왕조를 멸망시키고는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여 할지 왕조를 세운다.3. 즉위 후
잘랄 웃딘 할지는 이전의 노예 왕조의 술탄 발반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인이나 타 인도계 무슬림들에게 높은 관직을 제공하는 등 노예 왕조와는 보다 관용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기존의 튀르크계 귀족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하는 등 폭넓은 등용정책으로 잘랄 웃딘 할지는 델리 술탄 왕조의 여러 민족들에게 환심을 사게 된다. 술탄으로서 재위한 6년 동안에 노예 왕조의 술탄 발반의 가혹한 정책과는 달리 백성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완화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인도인들은 이슬람보다는 힌두교를 신봉하고 있었는데 잘랄 웃딘 할지는 이들에게도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4. 최후
하지만 이런 관용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는 무슬림들도 존재하였고 대표적인 인물로 잘랄 웃딘 할지의 조카이자 양아들이던 알라 웃 딘 할지가 있었다. 아와드의 총독이었던 알라 웃딘은 잘랄 웃딘의 관용정책에 반발하였는데, 잘랄 웃딘이 카라를 방문하던 중에 조카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5. 기타
보통 잘랄 웃 딘 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아버지 이름이 알라 웃 딘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6. 대충 매체에서
징기스칸 4에서는 두번째 시나리오가 다루는 시간대의 북인도가 노예 왕조 말기라 등장 할 법도 하지만 이 사람의 조카에 양아들이고 원수이자 후임 술탄인 알라 웃 딘 할지는 등장[1]하는 데에 반해서 아쉽게도 본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잘랄이 폐위시킨 카이카바드도 등장하고 그가 총애하였던 시인 아미르 호스로우[2]도 등장하여 더더욱 아쉽다.산제이 릴라 반살리감독의 2018년 영화인 파드마바티에서 등장한다. 배우는 발리우드의 다작배우 라자 무라드[3]. 실제 역사에서는 타 종교인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치고 기록에 의하면 인상도 인자한 할아버지 상이라고 전해지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이미지를 부각시켜 무자비한 폭군으로 그려진다. 딱히 감독의 역사왜곡이라고 하기는 뭐한게 다른 사극에서도 이 정도의 각색은 흔하고 더욱이 인도 영화시장은 특성상 선역과 악역을 평면적으로 연출하여서 다양한 계층의 직관적으로 관객들에게 어필하는데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다.[4] 하지만 아쉽게도 극의 메인빌런이 조카 알라웃딘[5]인 관계로 초중반부에 조카의 경험치 셔틀로 칼을 맞고 퇴장한다.
[1] 그것도 전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도 문화권 무장 중 능력치 총합이 가장 높은, 소위 말하는 세계구급 능력치로 출연한다.[2] 인도의 앵무새라고 불리는 인도 문학사의 상징적인 시인으로 노예왕조 시절과 잘랄의 사후에도 잘 나갔지만 잘랄의 전폭적인 지지로 궁정에 초대를 받아 전성기를 맞이하여 그를 '세계의 왕'이라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3] IMDb기준으로 배우 크레딧을 받은 작품이 600개에 조금 못미친다.[4] 인도 영화에서도 특히나 힌디어권 사극들은 무슬림계열 왕조를 작품의 주인공 세력이거나 공공의 적인 대영제국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밑도끝도 없는 악역으로 많이 그린다.[5] 란비르 싱이 연기하였다. 사족으로 메인 히로인을 연기한 배우는 란비르의 아내인 디피카 파두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