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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3 01:29:25

기야스 웃 딘 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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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발반.jpg

1. 개요2. 생애
2.1. 20년간의 섭정2.2. 술탄 등극과 중앙 집권화2.3. 치세 후반
3. 기타

1. 개요

우르두어: غیاث الدین بلبن
힌디어: ग़ियास उद-दीन बलबन
영어 Ghiyas ud din Balban

재위 1266년 ~ 1287년
생몰 1216년 ~ 1287년

델리 술탄 왕조의 9대 술탄. 튀르크계[1] 맘루크로, 1246년 자신의 사위이자 일투트미쉬의 손자인 나시룻딘 마흐무드를 술탄에 옹립한 후 와지르 (재상)가 되어 실권을 행사하였다. 1266년 나시룻딘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스로 술탄에 오른 발반은, 당시 북인도를 위협하던 몽골 제국의 침공에 적절히 대응하고 사실상 자립한 상태이던 벵골을 재정복하였다. 또한 내정에 있어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인 그는 일투트미쉬와 함께 노예 왕조의 양대 명군 중 하나로서 델리 술탄국 체제를 공고히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후계자 선정은 실패하여 사후 3년 만에 노예 왕조는 무너지고 할지 왕조로 대체된다.

2. 생애

중앙아시아의 튀르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몽골군에 잡혀 노예로 팔렸고, 카와자 자말 웃딘 바스리가 그를 구매한 후 1232년 델리로 와서 술탄 일투트미쉬에게 팔았다. 물 운반인으로 일하던 발반은 술탄의 눈에 들어 비서 급인 카스다르로 승진하였고, 찰리사라 불린 델리의 40인 튀르크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 라지아 술타나의 치세에 발반은 요직 중 하나인 아미르-이-쉬카르 (사냥 대신)가 되었고, 처신을 잘하여 그녀가 폐위된 후에도 바흐람 샤에게서 레와리와 한시의 총독 (영주)으로 봉해지는 등 중용되었다. 다만 1241년 몽골군이 펀잡을 침공하여 라호르를 초토화시키고 돌아갔음에도 바흐람 샤가 대응하지 못하자 이듬해 발반을 포함한 40인의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그를 폐위하고 조카인 알라 웃딘 마수드 샤를 옹립하였다.

2.1. 20년간의 섭정

다만 마수드 샤가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려 하자 그들은 재차 정변을 일으켰고, 거사의 주동자로 활약한 발반은 마수드 샤의 사촌이자 자신의 사위인 나시룻딘 마흐무드 샤를 옹립하였다. (1246년) 발반은 와지르 (재상)에 올라 조정을 장악하였고, 동생 키슐루 칸과 사촌 셰르 칸은 각각 아미르-이-하집 (궁재)과 라호르 & 바틴다 총독에 봉해져 그를 보조하였다. 같은해 몽골군이 펀잡을 침공하여 우치를 포위했으나 발반이 나아가 격퇴하며 명성을 드높혔다. 또한 발반은 종종 대낮에도 델리를 약탈하던 메와트 (메오) 인들을 잔혹히 제압하였다. 파괴된 메와트 마을에는 군사 거점을 세워 아프간계 병사들을 배치하였고, 삼림 지대를 정리한 후 교통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델리의 남방을 안정시킨 발반은 더욱 남쪽으로 원정하였다.

이듬해 발반은 칼린자르의 라지푸트계 찰린다 왕공이 주도한 반란을 진압하였다. 라지푸트 세력과의 전쟁은 이어져 발반은 비록 라자스탄 동부의 란탐보어 성채를 함락하지는 못했지만, 중요 거점인 괄리오르를 수복하였다. 연이은 승전으로 발반의 권세는 더욱 공고해졌고, 이에 그를 반대하는 귀족들은 당파를 결성하여 맞섰다. 그들은 이마드 웃딘 라힌의 주도로 술탄에게 발반이 찬탈자라 고발하여 그와 일족을 해임시키기도 했으나, 발반은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1254년 술탄과 협상 끝에 역으로 이마드 웃딘을 해임시키고 재상으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1266년 2월 마흐무드 샤가 후사를 남기지 않은 채로 사망하자, 발반은 60세의 나이로 술탄에 올랐다.

2.2. 술탄 등극과 중앙 집권화

파일:발반 1.jpg

발반과 칼리파 알 무스타심이 새겨진 금화

즉위 후 발반은 40인 튀르크 귀족들로 구성되었던 차할가니를 해체하며 술탄의 권력을 강화하였고, 우마이야 왕조의 바리드와 같은 술탄 직속의 감찰 체계를 구축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을 감시하였다. 귀족들은 작은 잘못에도 큰 처벌을 받았고, 휘하 노예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 역시 처벌의 이유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총독 중 하나였던 하비트 칸은 자신이 죽인 노에 병사의 과부에게 처분권과 함께 넘겨졌다. 영지를 지닌 귀족인 이크타다르에 대해서도 몽골의 위협을 받는 전시 상황인 것을 들며 일투트미쉬 대부터 이어진 영지 세습과 은퇴 후 미반납의 관행을 깨고 현직 아미르들에만 토지를 지급하려 했으나 델리의 코트왈 (성주) 파르크 웃 딘의 반대와 기득권층의 강한 반발로 결국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튀르크 군부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자 했던 발반은 몽골의 위협을 이유로 들며 모든 카스트 계층으로 구성한 2개 라크 (군단) 규모의 부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발반의 귀족 억압 정책에 반발한 사촌 셰르 칸은 이후 다시는 델리를 방문하지 않았다가, 술탄의 지시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한다. 북방의 몽골, 즉 차가타이 칸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발반은 펀잡의 다섯 강줄기 중 4번째인 라비 강을 주요 방어선으로 선정하여 라호르 ~ 물탄 일대를 요새화하였다. 이는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본격화된 몽골의 인도 원정에서 술탄국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몽골은 인도의 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여 (패하지 않았을 때에도) 겨울에만 원정에 나섰기에 동계 기간 수성에만 전념한다면 격퇴할 수 있었다.

2.3. 치세 후반

1275년 벵골 총독 투그랄 투간 칸이 독립을 선포하자 발반은 아와드 총독에 진압을 명하였으나 진압에 실패하였고, 재차 파견한 토벌군 역시 격퇴되었다. 이에 발반은 1281년 친정에 나서 투그랄과 그 세력들을 죽였고, 당시 활약한 자신의 아들 나시룻딘 부그라 칸을 벵골 총독에 봉하였다. 고령에 이른 발반은 장남 무함마드 칸을 후계자로 정하였는데, 그는 1285년 3월 발반이 몽골군을 격파한 베아스 강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후계자의 죽음은 발반에게 큰 충격이었고, 2년 후 그의 사망에 영향을 주었다. 발반은 차남 부그라 칸을 델리로 소환하여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부왕의 엄격함에 실증이 나있던 그가 벵골 총독에 안위하며 술탄위에 야심을 보이지 않자 발반은 무함마드 칸의 아들인 장손 카이쿠스라우를 후계자로 삼았다. 다만 1287년 발반의 사후 귀족들은 부그라 칸의 아들인 무이즈 웃 딘 카이카바드를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3. 기타

파일:발반 묘.jpg
델리의 발반 영묘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검소했던 발반은 궁정 내에서 술과 도박을 엄금하였고, 이로써 조정 내에서는 활기나 웃음이 사라지고 엄숙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한다. 또한 발반의 대에 델리 궁정에는 술탄 접견 시의 시즈다 (부복)와 파이보스 (발등에 입을 맞춤) 등의 이란식 궁정 의례가 도입되었다. 북인도에 이란의 풍습인 노루즈 (니야바트-이-쿠다이)가 소개된 것도 발반에 의한 것이었다.

국정과 종교 활동에 몰두하던 발반의 유일한 향락은 사냥이었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의 경우 군사 훈련의 일환이었다 한다. 발반의 치세에 공정과 안정이 정립된 펀잡에서는 많은 평민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사후 발반은 오늘날 델리의 메흐라울리 유적 공원에 조성된 영묘에 매장되었다. 델리 술탄국 멸망 후 방치된 채로 세간의 기억에서 잊혀져 있던 발반의 영묘는 20세기 중반 '재발견'되어 2010년대 복원을 거쳤다.


[1] 일투트미쉬와 같은 일바리 부족 출신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