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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2:39:51

무함마드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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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13대 황제
무함마드 샤
ناصرالدین محمد شاه
파일:무함마드_샤_초상화.pn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미르자 나시르 웃딘 무함마드 샤 바하두르 가지
ناصرالدین محمد شاه
출생 1702년 8월 7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가즈니[1]
사망 1748년 4월 26일 (향년 45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델리[2]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719년 9월 27일 ~ 1748년 4월 26일 (29년)
대관식 1719년 9월 27일
전임자 샤 자한 2세 (제12대, 사촌형)
후임자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제14대)
부모 아버지 : 자한 샤[3] (1673 ~ 1712)
어머니 : 파크르 운 니사 베굼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통치
2.1.1. 사이드 가문 축출2.1.2.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2.1.3. 나디르 샤의 침략
2.2. 죽음
3. 기타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13대 황제.

실권을 좌지우지하던 사이드 형제들을 몰아내고 황제권을 굳히는 등 능력도 있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명군이었지만 하필이면 재위 시기가 너무 안좋았다. 이미 무굴 제국은 선대 황제 시절부터 무너지고 있었는데 남쪽에서는 마라타 동맹의 정복군주 바지라오 1세가, 북쪽에서는 아프샤르 왕조의 전쟁 기계 나디르 샤가 쳐들어오면서 무굴 제국은 양면으로 공격을 받고 빠르게 쇠퇴한다. 아우랑제브 황제 시절부터 몇 십여년 동안 마라타인들과 전쟁을 치러왔는데 무굴 제국은 날로 약해지는 반면 마라타 동맹은 갈수록 강해졌고, 마라타 군대는 구자라트, 신드, 심지어는 수도 델리 인근까지 쳐들어올 정도로 무굴 제국 전역을 짓밟고 다녔다.

그래도 아직 대제국의 틀은 유지하고 있던 무굴 제국은 이 시기 결정적으로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치명타를 맞는다. 200여 년간 점령당한 적이 없던 수도 델리가 며칠 동안 참혹하게 약탈당하고 말았고, 황제가 앉던 공작좌와 코이누르 등을 포함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재화가 뜯겨나갔다. 델리의 약탈 이후 무굴 제국은 다시는 그 피해를 회복하지 못했다. 무굴 제국의 약점이 만천하에 까발려지자 전역에서 반란독립 시도가 잇따랐고 이미 무너진 제국은 이를 수습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했다. 특히 인도에서 가장 부유했던 벵골 지방의 독립은 그야말로 무굴 제국 재정을 반쯤 고사시켜버리기도 했다. 인도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서의 무굴 제국은 그의 재위기에 거의 완전히 끝장난다. 사실상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로, 그 이후의 껍데기만 남은 무굴 제국은 제14대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부터 마지막 제20대 바하두르 샤 2세까지 마라타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있다가 대영제국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생애

2.1. 통치

2.1.1. 사이드 가문 축출

무함마드 샤는 1719년 9월 29일 무굴 제국의 제13대 황제로 즉위한다. 그러나 그가 막 즉위할 시점의 무굴 제국은 나라가 위태위태한 상황이었으니, 사이드 형제[4]들이 선대 파루크시야르 황제를 죽여버리고 제 마음대로 꼭두각시 황제들을 옹립하고 다녔던 것이다. 무함마드 샤 역시 사이드 형제들이 반강제로 즉위시킨 허수아비 황제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함마드 샤는 허수아비 따위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고 즉위하자마자 사이드 가문을 축출하려 시도했다. 당시 무굴 제국의 재상직을 꿰차고 있던 사이드 가문의 압둘라 칸은 무함마드 샤가 아사프 자흐 1세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조짐이 보이자 바로 무함마드 샤를 쫒아내고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키려 들었다. 압둘라 칸은 미숙한 무함마드 이브라힘 왕자를 허수아비로 세웠지만 1720년 11월에 친황제파에게 제압당했다.

1720년 10월에는 이미 사이드 형제들 중 하나였던 후세인 알리 칸이 황제가 보낸 군사에게 암살당해버렸고, 무함마드 샤는 압둘라 칸이 틀어쥐고 있던 군권을 확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신하였던 아사프 자흐 1세데칸을 포함해 제국의 여러 행정구역들을 확보하며 사이드 형제들이 더이상 달아나지 못하도록 세력을 억누르는 데 주력했다. 무함마드 샤는 무함마드 이브라힘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우고 있던 압둘라 칸도 한꺼번에 제압했다. 결국 압둘라 칸은 1720년 수도 델리로 끌려왔고 약 2년 후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무함마드 샤는 그동안 제국을 좌지우지하던 사이드 가문을 몰아내고 즉위한 지 불과 1년 만에 황제권을 되찾게 된다.

1721년에는 선황 파루크시야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 후 자신의 즉위에 큰 도움을 준 아사프 자흐 1세를 제국의 재상으로 임명했고, 아사프 자흐 1세는 무함마드 샤의 후광을 뒤에 업고 개혁 정치를 펴보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미 전대 시절부터 지나치게 썩어있던 무굴 궁정과 경직된 사회 구조 때문에 아사프 자흐의 개혁은 실패했다. 게다가 무함마드 샤 역시 아사프 자흐 1세의 개혁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자 아사프 자흐는 크게 실망해 1723년에 재상직을 그만두고 데칸으로 낙향했다. 1724년 아사프 자흐 1세는 당시 데칸 총독이던 무바리즈 칸과 전투를 벌여 그를 쫒아내고, 하이데라바드를 도읍으로 정하면서 하이데라바드 왕국을 세웠다. 아사프 자흐는 스스로 니잠의 칭호를 칭하며 사실상 무굴 제국에게서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2.1.2.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

파일:mughalemp1720.gif
1720년 경 무굴 제국의 영토. 당시에는 아직 북인도 지방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국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굴 제국은 착실하게 망해가고 있었다. 특히 아우랑제브 시대부터 무굴의 최대 적국이었던 힌두교 세력인 마라타 동맹이 끈질기게 무굴 제국을 남쪽에서부터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방갈로르 지방에서는 반란이 허구한 날 터져나왔고 이들이 마라타 동맹의 지원을 받으면서 세력이 종양처럼 커지자 무굴 제국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막대한 전비를 투입해야 했다. 1723년 아사프 자흐 1세가 하이데라바드로 내려갈 무렵 이미 마라타 동맹은 데칸 반도 일대의 무굴 요새들을 대부분 깨부수고 인도 중북부의 말와 지방까지 공격하는 상태였다. 마라타 군대는 세를 몰아 말와 지방의 주도였던 우자인까지 공성했지만, 남쪽에서 명목상으로나마 무굴 제국의 봉신국을 자처하던 하이데라바드 번왕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하이데라바드 번왕국도 한창 세가 오르던 마라타 동맹을 제압하기에는 무리였다. 1728년 에 아사프 자흐 1세는 팔크헤드 전투에서 마라타 군대에게 대패했고, 남부의 위협을 없애버린 마라타 동맹의 페슈와[5] 바지라오 1세는 바로 북상해 말와 지방을 재공격했다. 무함마드 샤는 대군을 모아 바지라오 1세를 막도록 했지만 암즈헤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와 지방은 무주공산 지대가 되어버렸다. 간신히 주도인 우자인은 성벽을 거점삼아 함락되는 것은 피했지만 마라타 군대는 지키는 병사들이 없는 말와 지방을 마음껏 휩쓸고 다녔다. 1731년 아사프 자흐 1세는 마라타 동맹 내부에서 동조자를 규합해 바지라오 1세를 몰아내려 시도했지만 바지라오 1세에게 무참히 깨지면서 이마저도 실패한다. 이후 바지라오 1세는 무굴 제국에게서 구자라트 지방을 빼앗아갔다.

1737년에 아사프 자흐 1세는 무굴 대군을 이끌고 보팔 지방의 나와브[6]를 돕기 위해 8만 명에 달하는 마라타 군대에 맞섰다. 끈질긴 농성전 끝에 결국 무굴 제국과 마라타 동맹과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는데, 대충 내용은 마라타 동맹에게 말와 지방을 바친다는 내용이었다. 무굴 제국이 완벽히 마라타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던 조약이었던 것. 바지라오 1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737년에는 수도 델리까지 쳐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델리가 제국의 핵심부였다보니 정예군들이 뛰쳐나와 바지라오 1세에 맞서면서 함락까지는 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바지라오 1세가 일단 남쪽으로 물러나 세를 추스르고 있자 무함마드 샤는 그에게 전령을 보내어 평화 조약을 재체결할 것을 제안했고, 바지라오 1세가 말와 지방에 만족하고 내려가며 전쟁은 일단락된다.

하지만 북인도 지방에서 무굴 제국과 마라타 동맹과의 충돌이 일시적으로 중지되었을 뿐 정작 남인도와 중부 인도 지방에서는 여전히 치열하게 양측 군대가 치고 받고 싸우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카르나틱 지방의 나와브였던 도스트 알리 칸은 샤후 1세의 마라타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분투했지만 그해 5월에 목숨을 잃고 사망했다. 대도시 아르콧이 마라타 동맹에게 점령되어 약탈당했고, 무굴 관리들은 사타라 요새에 구금되었다. 이후 아사프 자흐 1세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끈질기게 수적으로 압도적인 마라타 군대를 물고 늘어지면서 카르나틱 지방 대부분을 다시 무굴 제국으로 편입시켰고, 아르콧까지도 되찾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747년에 마라타 동맹이 무굴에서 가장 부유한 벵골 지방까지 쳐들어오면서 제국은 또다시 치명타를 입는다. 벵골의 나와브 알리바디 칸은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결국 실패했고, 4년 후에는 오리사 지방이 마라타에게 넘어갔다.

한편 시크교 신자들도 끊임없이 무굴 제국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시크교 전사들은 게릴라 전술을 사용해 치고빠지면서 무굴 군대를 공격했고 병사들은 얼마 안가 기진맥진하게 된다. 아지메르에서는 달아난 아짓 싱이 세력을 규합해 마라타 동맹과 연합을 맺고 무함마드 샤에 대항했으며, 그와중에 데칸 지방은 이미 거의 마라타 동맹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사실상 샤 자한보다도 훨씬 이전 상태의 영토로 축소되어 버린 것. 1737년에는 마라타 동맹의 바지라오 1세구자라트와 말와, 분델칸트 일대를 모조리 쓸어갔고 심지어는 제국의 핵심 대도시 중 하나이자 수도에 준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던 델리를 함락했다. 수도가 마라타 동맹에게 따일 정도로 당시 무굴 제국이 얼마나 국력이 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부분.

2.1.3. 나디르 샤의 침략

파일:nadershahinvasion1.jpg파일:800px-Nader_Shah_afshar.jpg
나디르 샤 카르날 전투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무굴 제국은 여전히 마라타 동맹과 함께 인도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양대 세력의 한 축으로 자리하면서 국제적으로도 사실상 인도를 대표하는 대제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아무리 전성기가 지나버려서 마라타 동맹에게 깨지고는 있었다지만 어쨌든 국제적 위상은 옛 명성을 이어받고 있었던 것.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상황을 뒤엎어버릴 거대한 변수가 등장한다. 그 변수의 이름은 바로 나디르 샤. 저 서쪽의 페르시아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위대한 정복군주로, 전쟁기계에 가까울 만큼 천재적인 군재를 자랑하며 몇 백여년을 내려온 사파비 왕조를 무너뜨린 후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나디르 샤는 사파비 왕조 격파에 이어 서쪽의 오스만 제국에게도 승리를 거두며 서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동쪽 인도의 무굴 제국 뿐이었다.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을 공격하고 제국에 쌓인 막대한 부를 가져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 시작한다.

사실 전쟁의 발단은 무굴 제국이 제공한 게 맞다. 당시 나디르 샤는 제 영토인 칸다하르에서 날뛰던 아프간 부족 반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는데, 이 반군들이 진압을 할라치면 자꾸 무굴 제국의 영토인 카불인더스 강 계곡 인근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면서 골치를 썩고 있었다. 나디르 샤는 무함마드 샤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이 왔다갔다하지 못하게 국경 봉쇄를 요청했고, 무함마드 샤는 이를 승인했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전혀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무굴 제국의 총독들과 지방 토후들이 내심상 반군들을 응원하면서 페르시아인들이 칸다하르에 주둔하는 것을 꼴보기 싫어했기 때문.[7] 아무런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자 화가 난 나디르 샤는 다시 사신을 보내 약속 이행과 반군 송환을 촉구했지만 이번에는 무함마드 샤가 아예 1년 가까이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나디르 샤는 이를 빌미로 대군을 일으켜 1738년 무굴 제국을 침공한다.[8]

나디르 샤는 말그대로 물밀듯이 무굴 제국으로 치고 들어왔다. 1738년 5월에는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고 같은 달에 가즈니를 함락, 6월에는 카불을 함락했다. 9월에는 잘랄라바드가 그의 손에 떨어졌고 11월에 이르자 카이베르 고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페샤와르의 요새마저 함락하면서 카이버 패스 일대 전역을 무려 6개월 만에 장악하게 된다. 1739년 1월에는 2만 5천의 무굴 대군을 격파하고 무굴 제국의 핵심 대도시였던 라호르가 함락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하자 경악한 무함마드 샤는 총동원령을 내려 나디르 샤를 막도록 지시했다. 나디르 샤가 단순히 이전의 침략자나 마라타 동맹처럼 단순히 변방 약탈로 끝날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디르 샤는 구자라트신드 지방을 싸그리 약탈하고 완전히 불태우며 진군했고 1739년 2월에는 시르힌드를 떨어뜨렸다. 결국 무함마드 샤가 직접 군대를 끌고 카르날 전투에서 나디르 샤와 격돌했지만 3시간 만에 대파당하면서 무굴 제국은 완전히 끝장나게 된다.

카르날 전투에서 나디르 샤에게 대패한 무함마드 샤는 최악의 결정을 내린다. 나디르 샤와 직접 담판을 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담판은 오히려 무굴 제국 수뇌부 내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왔고 무굴 귀족들에게 자칫하면 제 몫을 챙기지도 못하겠다는 의심을 들게 했다. 안그래도 전투에서 대패해 사기가 땅에 떨어진 와중에 수뇌부마저 분열이 일어나니 무굴 군대는 완전히 자멸한다. 심지어 주력군이 남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전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무함마드 샤는 심지어 이 담판에서 나디르 샤에게 항복한 후 스스로 수도 델리의 열쇠를 그에게 넘겨주고 포로 신분으로 잡혀 나디르 샤와 함께 델리로 입성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무굴 제국에 최악의 대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처음에 나디르 샤가 막 델리에 입성할 때까지만 해도 도시 전체를 싸그리 약탈하지는 않았다. 일단 델리의 성문을 열어준 것도 포로로 잡힌 무함마드 샤 황제였고 자신은 초대를 받아 들어온 손님 신분이었기 때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재앙이 일어난다. 며칠 동안 나디르 샤가 델리에 머무르는 도중 그가 암살당했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흥분한 델리 시민들이 일부 페르시아 병사들을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격노한 나디르 샤는 병사들을 시켜 3만 명의 델리 시민들을 학살했고 무함마드 샤와 아사프 자흐 1세가 애원에 가깝게 사과한 이후에야 학살극을 멈췄다. 이후 나디르 샤는 델리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황궁 붉은 요새의 공작좌, 황궁 수장고에 들어있던 막대한 양의 재화를 싹 털어갔다. 정말 이때 나디르 샤는 델리를 싸그리 털어먹을 정도로 막대한 부를 끌어갔는데, 단순히 금은보화 뿐만 아니라 코끼리, 이나 페르시아 군대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지 모조리 가져갔다. 심지어 무함마드 샤는 제 을 나디르 샤의 막내아들에게 바쳐야 할 정도였다. 모든 걸 다 얻어낸 나디르 샤는 인더스 강 서쪽의 영토를 모두 할양한다는 각서까지 받아낸 후 막대한 재화를 끌고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문헌에서 이렇게 비유하였다.
오랫동안, 거리에는 시신이 산란하고 있었다. 마치, 시든 꽃이나 잎에 덮인 것처럼 통정원의 길처럼. 평원은 근처 일면, 불에 구워졌다.

나디르 샤의 침공은 안그래도 흔들리던 무굴 제국의 숨통을 완벽히 끝장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때 200여 년 동안 무굴 제국이 델리에 쌓아오던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부와 재화가 모조리 페르시아로 날아가버렸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무굴 제국의 국력은 치명타를 입었으며 무굴 제국은 멸망할 때까지 이 피해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단순히 델리의 부가 약탈당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나마 아우랑제브 황제 이래 무굴 제국이 보유하고 있던 인도 최대의 대제국이라는 타이틀이 불과 30년만에 사라져버린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직까지 무굴 제국의 군사력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던 인도 전역의 토후들이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나버린 무굴 제국을 만만하게 보기 시작했고, 나디르 샤가 돌아간 직후부터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이는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영국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역시 나디르 샤의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무굴의 모습에 크게 놀랐고, 이후 본격적으로 인도의 식민화 작업에 들어간다.

2.2. 죽음

무함마드 샤는 나디르 샤의 침공 이후 급속도로 허약해졌다. 사실상 무굴 제국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던 일이었으니 당연한 일. 그나마 나디르 샤가 인도를 침공하는 동안 서쪽의 오스만 제국이 페르시아 군대가 모두 인도에 몰려있는 동안 빈집털이를 시도하자 이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오스만 제국 역시 그에게 응답하여 오스만 대사를 파견하는 등 서로 외교적 교류를 하며 지냈다. 한편 나디르 샤가 암살되어 사망하자 아프가니스탄 지방에서는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페르시아에 독립을 선포하고 두라니 왕조를 세웠다. 그는 영토를 넓히기 위해 지난 침공으로 심각하게 약화된 무굴 제국으로 치고 들어왔는데, 이를 가만히 좌시할 수는 없었기에 1748년 2월 아흐마드 샤 바하두르 왕자가 이끄는 무굴 제국군이 두라니 군대와 격돌했다.

마니푸르 전투에서 무굴 제국은 두라니 군대를 패퇴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마니푸르 전투는 무굴 제국에게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는데, 전투 도중 입은 피해 때문에 자중지란하느라 후퇴하는 두라니 군대를 쫒지도 못할 정도였다. 특히 황제에게 신임받던 미르 무함마드 파질이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마니푸르 전투의 결과와 파질의 죽음은 일시적으로 비밀에 부쳐졌지만, 결국 파질이 죽었다는 소식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무함마드 샤는 무려 3일 동안 그의 죽음을 울면서 애도했다고 한다.[9] 안그래도 나디르 샤의 침공 이후 몸시 쇠약하던 무함마드 샤는 슬픔에 빠져 병세가 빠르게 악화했고, 결국 1748년 2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메카에서 온 이맘들이 참석했다.

3. 기타


[1]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가즈니.[2]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델리.[3] 바하두르 샤 1세 황제의 4남.[4] 사이드 가문의 형제. 압둘라 칸과 후세인 알리 칸이 그 주인공이다.[5] 마라타 동맹에서 황제에 대응되는 칭호였다.[6] 무굴 제국의 총독직을 일컫는 단어.[7] 원래 칸다하르는 무굴 제국의 영토였지만 샤 자한 시기에 빼앗겼다.[8] 물론 단순히 이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디르 샤는 지난 몇 백여년 간 북인도를 다스리면서 막대한 부를 쌓은 무굴 제국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 부를 약탈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다.[9] 근위병들은 문이 닫힌 황제의 침실 너머로 '어떻게 내가 그처럼 신실한 사람을 죽게 만들었는가!'라고 울면서 비통히 외치는 황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