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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3:22:12

카르날 전투

나디르 샤의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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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_of_Karnal.gif

카르날 전투 당시 사다트 칸(Sa'daat Khan)이 나디르 샤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1. 개요2. 배경3. 전투 준비4. 전투 경과
4.1. 줄줄이 끌려오는 먹잇감4.2. 전진하는 무굴 제국군4.3. 섬멸전4.4. 내부로부터의 붕괴
5. 결과6. 여담

1. 개요

이란과 인도의 전쟁 중 나디르 샤 인생 최고의 순간~무함마드 샤 인생 최악의 순간~이자 단순한 전술을 넘어 정치적 요소와 운빨까지 겹친 복합적인 결과물에 해당되는 전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카르날 전투(Battle of Karnal)는 1739년 2월 23일에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과 술탄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위치는 인도의 도시 카르날(Karnal) 지역 북부였으며, 무굴 제국은 홈 그라운드의 이점과 병력의 숫자 이외에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군대였으며, 이에 대한 비효율성이 드러난 전투이기도 했다.

2. 배경

길자이 포로 문제를 계기로, 나디르 샤는 인도 원정을 결정하였고 한 차례 승리를 거둔 뒤 펀자브 지역을 쓸며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무굴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 샤 또한 최대한 유력 귀족들과 병력을 끌어모았으며, 대군을 구성하여 나디르 샤를 격파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은 진격속도가 현저히 느렸는데, 특히 귀족들간의 갈등으로 진격이 늦어졌다고 한다. 1738년 12월 13일에 수도 델리에서 출발했는데 고작 수십 킬로미터 이동하는데 1달은 넘게 소모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으니...

3. 전투 준비

1739년 2월 6일, 나디르 샤는 무굴 제국군이 카르날 근처에 도착하였으며, 무굴 제국군의 규모는 총 30만명에 전투 코끼리 2000마리와 대포 3000문에 달했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심지어 아직 사다트 칸(Sa'daat Khan) 휘하의 병사들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물론 정황상 30만명 중에서 각종 노예들이나 상인들의 비중이 커서 실질적인 전투병은 8만~10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나디르 샤는 먼저 쿠르드계 병사들 6천명을 따로 뽑아 무굴 제국군의 전반적인 것들을 정찰하게 하였으며, 가능하다면 무굴 제국군 내에서 몇명을 납치해라는 지시도 내렸다. 쿠르드계 병사들은 2월 16일 밤에 급습하여 무굴 제국군 포로를 몇 명 낚아채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아마도 정보를 빼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쿠르드계 정찰병 6000명과 잡아온 포로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우선, 무굴 제국군이 도시 카르날 바로 북쪽에 임시 요새화 캠프를 설치하였으며, 그 요새화 캠프가 흙 벽으로 쌓여서 포격으로 깨부수기도 쉽지 않다는 것, 그리고 대략적인 요새화 캠프의 구조에 대해서도 얼추 정보가 생긴듯 하였다.

1739년 2월 22일, 나디르 샤는 주력군을 이끌고 남하하였으며, 운하를 건넌 뒤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무굴 제국군의 동쪽에 병력을 배치하고 캠프를 세웠다. 무굴 제국군과 페르시아군은 운하 하나를 두고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파일:Karnal_battle_based_on_Axworthy's_interpretation.jpg

카르날 전투의 배치도. 파란색이 페르시아군, 붉은색이 무굴 제국군이다.

1739년 2월 24일, 나디르 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우익은 타흐마스프 칸에게, 중앙은 모르타자에게, 좌익은 칸 카야니와 알리 칸에게 주었으며, 나디르 샤 본인은 경기병 1천명을 직접 이끌기로 했다. 당시 페르시아군의 전력은 최대 16만 정도이며, 순수 전투병은 5만~6만 정도로 추정된다.

무굴 제국군 측에선 아직 사다트 칸(Sa'daat Khan)의 병력 2만명이 도착하지 않았었는데, 이는 사전에 나디르 샤가 기병대를 보내 지연전을 펼친 이유도 있었다. 어찌어찌 기병대를 피한 사다트 칸의 군대가 무굴 제국군의 요새화 캠프에 도착하였다.

4.1. 줄줄이 끌려오는 먹잇감

나디르 샤는 사다트 칸의 군사행렬이 너무 길어 후위가 아직 캠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고는 앞서 지연전을 위해 보냈던 기병대에게 후위를 약탈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기병대가 무굴 제국군의 후위를 공격하여 수많은 물자를 노획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는 곧 사다트 칸에게 알려지게 된다.

사다트 칸은 빼앗긴 물자도 찾을 겸 명성을 위해 직접 갑옷을 입고 코끼리에 올라타 2천명의 병력[1]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며, 뒤에 4천명의 병력을 추가로 따라오게 하였다.

사다트 칸은 출전하자마자 전방에 배치된 소수의 페르시아 보병대를 밀어붙였으며, 이걸 승세라 착각한 사다트 칸은 요새화 캠프로 서신을 보내 다른 귀족들과 장군들에게도 같이 싸우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니잠 울 물크는 거절하였으며, 칸 도우란(Khan Dowran) 또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를 보다못한 무굴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 샤는 칸 도우란을 질책하였으며, 이에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칸 도우란 또한 보란듯이 갑옷을 입고 코끼리에 올라타 9천명의 병력과 함께 출전하였는데, 다수의 귀족 출신 기병들과 소수 대포, 그리고 로켓 무기까지 뒤따랐다고 한다.

4.2. 전진하는 무굴 제국군

사다트 칸(Sa'daat Khan)의 병사 6천명과 칸 도우란(Khan Dowran)의 병사 9천명이 캠프를 나오는 모습을 발견한 나디르 샤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으며, 페르시아군 좌익 근처에 있던 쿤즈푸라(Kunjpura) 마을에 잠버라크 포병 수백기를 숨겨 매복시켰으며, 1천명의 Jajayerchi 엘리트 머스킷 보병대를 500명씩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하나는 사다트 칸을, 또 하나는 칸 도우란을 따로따로 유인해오도록 지시하였다.

사다트 칸과 칸 도우란은 각각 무굴 제국의 유력한 귀족 세력들로, 서로 견제하는 관계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힘을 합치지 않고 따로 진군하였다. 이는 나디르 샤가 의도한 "함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매우 적합하였으며, 그렇게 사다트 칸과 칸 도우란의 병사들은 무굴 제국군의 포병 사거리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4.3. 섬멸전

파일:Camel_artillery_iran.jpg

잠버라크(Zamburak) 포병의 모습

칸 도우란(Khan Dowran)은 페르시아군의 유인에 걸려 계속 동진하다가 어느덧 쿤즈푸라 마을 근처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다 물러나던 소수 보병대가 반격을 시작하였으며, 더불어 마을에 숨어있던 잠버라크 포병 수백기와 머스킷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내 일제히 포격을 퍼부었다. 잠버라크의 압도적인 화력에 무굴 제국군은 그야말로 박살나버렸으며, 칸 도우란과 같이 참전했던 다수의 귀족 기병들 대부분이 죽거나 잡히고 말았다. 칸 다우런의 자식들도 대부분 죽거나 잡혔으며, 본인은 심하게 부상당하는 바람에 하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전장을 빠져나갔~고 얼마후에 죽었~다.

사다트 칸(Sa'daat Khan)의 병사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사다트 칸은 페르시아군 중앙으로 계속 다가가다가 페르시아군 중앙의 일제사격에 정신차리지 못했으며, 설상가상 페르시아군 우익과 중앙이 같이 사다트 칸을 포위하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결국 열심히 분전하던 사다트 칸은 페르시아 측의 권유로 항복하고 말았다.

이 날의 전투로 무굴 제국군 1만 5천명은 1만의 손실을 입어 사실상 전멸하였으며, 반면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1100명에 그쳤다. 사다트 칸과 칸 다우런이 당하는 와중에 니잠 울 물크는 무굴 제국군의 주력을 캠프 동쪽과 운하 사이에 배치하였으나, 굳이 둘을 돕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2] 비록 이날의 전술적 승리는 무굴 제국군의 일부만 격파한 것이지만, 이 한번의 승리가 큰 파장을 몰고오게 되는데...

4.4. 내부로부터의 붕괴

칸 다우런(Khan Dowran)과 사다트 칸(Sa'daat Khan)의 패배로 인해 격파된 무굴 제국군은 1만 정도이며, 아직도 8만이 넘는 전투병들이 건재했었다. 그러나, 멀쩡해보이는 겉과는 달리 속은 곧 붕괴되기 시작한다.

전투가 이루어진 날[3] 밤에 포로 신세인 사다트 칸이 나디르 샤에게 자신을 무굴 제국군의 캠프로 보내준다면 술탄을 설득해보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나디르 샤의 부하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리고 다음날(2월 25일) 저녁에 니잠 울 물크가 나디르 샤의 캠프로 와서 협상하였으며, 나디르 샤의 상당한 요구에 일단 동의하였다고 한다.

파일:1280px-7_Muhammad_Shah_and_Nadir_Shah._1740,_Musee_Guimet,_Paris.jpg

무함마드 샤(좌)와 나디르 샤(우)의 만남

1739년 2월 26일, 니잠 울 물크의 주선(?)으로 무굴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 샤나디르 샤가 직접 만나게 되었다. 나디르 샤는 무함마드 샤를 매우 신사적이고 훌륭하게 접대해주었으며, 둘 사이에 여러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둘의 만남은 무굴 제국군 수뇌부를 결정적으로 혼란에 빠뜨렸다. 안그래도 나디르 샤의 책략에 걸려들어 죽거나 붙잡힌 귀족들과 장교들이 너무 많아서 무굴 제국군 수뇌부의 공백이 어마어마한데, 그 자리를 두고 남은 귀족들끼리 분열이 발생한 것이다. 무함마드 샤는 어떻게든 분열을 막아보려고 핵심세력이자 지방 총독인 니잠 울 물크를 총사령관으로 삼았으나,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이 증가하였다[4]. 니잠 울 물크가 자신의 자식들을 빈자리에 채운것에 반대하는 것도 덤.

결국 무굴 제국군 수뇌부의 엄청난 공백, 그걸 두고 발생한 거대한 분열, 그리고 페르시아군의 포위에 의해 꼼짝없이 갇혀버린 무굴 제국군, 캠프에 갇혀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사태까지 겹쳐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결국, 3월 7일에 성사된 두번째 만남에서 이야기가 끝났는지 무굴 제국군은 해산되었으며, 무함마드 샤는 직접 길잡이가 되어 나디르 샤를 델리에 인도하기로 하였다.

5. 결과

무굴 제국군의 해산 과정에서 병사들은 들고온 재물의 절반만 가지고 돌아갔는데, 각자 흩어져 돌아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페르시아 갱단에게 강도당해 약탈당하거나 죽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렇게 무굴 제국군의 총 사상자는 최대 30000명에 달했으며, 페르시아군의 손실은 2000명을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여진다.

카르날 전투는 나디르 샤가 끌어들이기식 종심 전술을 다시한번 발휘하여 전술적으로 한차례 압승을 거두었고,이러한 전술적 승리를 바탕으로 무굴 제국군 수뇌부의 정치적 상황을 크게 악화시켜 승리를 쟁취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전멸당한 사다트 칸과 칸 도우란의 병사들 중에서 귀족들이 매우 많았으며, 사다트 칸과 칸 도우란 또한 유력한 세력들이었음을 감안하면, 30만명에 달하는 무굴 제국군의 총 인력을 컨트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점도 있었다.

의외로 나디르 샤에게 운빨도 따라주었는데, 무굴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 샤가 칸 도우란을 질책한 덕분에 칸 도우란과 딸려온 수많은 귀족들까지 박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팀킬한 샘이다.~

한편 무굴 제국은 전쟁 이후 큰 치명타를 입었으며 사실상 국가구실도 못할 정도로 몰락했다.

6. 여담

나디르 샤의 말에 의하면, 당시 무굴 제국군은 생각보다 용감하게 싸웠으나 "화살은 총알에게 저항하지 못한다."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는 화약무기에 비중이 큰 페르시아군의 효율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무함마드 샤가 병력을 모집할때 여러 지방 총독들에게 참전을 권유하였는데, 이때 바지라오 1세도 서신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지라오 1세는 병력만 보내주었고 직접 오지는 않았던 덕에 나디르 샤 vs 바지라오 1세라는 희대의 드림 매치는 물건너갔다...


[1] 보병, 기병 각각 1천명[2] 술탄 무함마드 샤의 지시가 있었음에도 거절한 채 찻잔만 훓쩍인 것으로 보아 나디르 샤의 의도를 알아챈 것으로 보인다.[3] 1739년 2월 24일[4] 특히 포로신세인 사다트 칸은 그 소식을 듣고 열받아서 아예 자신의 남은 군대를 전부 이끌고 나디르 샤에게 투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