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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17대 황제 샤 알람 2세 علم شاه دوم | |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 알리 고하르 علم شاه دوم |
출생 | 1728년 6월 25일 |
무굴 제국 델리[1] | |
사망 | 1806년 11월 19일 (향년 78세) |
무굴 제국 델리[2]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1760년 10월 10일 ~ 1806년 11월 19일 (46년) | |
대관식 | 1760년 10월 10일 |
전임자 | (1차) 샤 자한 3세 (제16대, 칠촌) |
(2차) 샤 자한 4세 (제18대, 칠촌) | |
후임자 | (1차) 샤 자한 4세 (제18대, 칠촌) |
(2차) 악바르 2세 (제19대) | |
부모 | 아버지 : 알람기르 2세 황제 (15대, 1699 ~ 1759) 어머니 : 지낫 마할 |
자녀 | 악바르 2세 (19대, 1760 ~ 1837)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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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굴 제국의 제17대 황제. 샤 알람 1세는 바하두르 샤 1세다.말년 초상화에서 눈을 감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장님이었다. 원래부터 장님은 아니었고 1788년 신하였던 굴람 카디르가 반란을 일으켜 폐위당할 때 굴람 카디르가 칼로 눈을 찔러버려서 실명시킨 것이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평생 마라타 동맹이나 영국 동인도 회사, 신하들에게 휘둘렸던 유약한 황제였다. 그나마 재위 초반에 동부 벵골 지방을 되찾으려 군대를 일으켰지만 북사르 전투에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으며 결국 영국에게 패퇴당했고, 알라하바드 조약으로 벵골 지방의 세수권을 그대로 넘겨줬다. 유능한 사령관 미르자 나자프 칸 덕에 반짝 군대를 육성하나 싶었지만 미르자 나자프 칸이 죽자 온갖 실책을 저지르며 제국의 마지막 희망을 말아먹었다.
그가 임명했던 신하들은 제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열심이었고 심지어는 신하들 중 하나인 굴람 카디르가 반란을 일으켜 황궁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굴람 카디르는 황녀들을 능욕한 뒤 나신으로 제 앞에서 춤을 추게 시키고 늙은 샤 알람 2세의 수염을 잡아당기는 등 겪을 수 있는 모욕이란 모욕은 전부 저질렀다. 그는 샤 알람 2세의 눈을 뽑고 샤 자한 4세를 새 황제로 즉위시켰지만 보다못한 마라타 군대가 진주하면서 굴람 카디르도 쫓겨나고 샤 알람 2세도 복위한다. 그렇게 샤 알람 2세는 마라타 동맹의 피보호국으로 전락하는 제국의 현실을 지켜봐야했으며, 1803년 이후부터는 마라타 동맹을 내쫓고 들어온 영국의 바지사장이 되어 허수아비로 살다가 1806년 그대로 사망했다. 그가 죽을 무렵 무굴 제국은 수도 델리 일대만을 간신히 움켜쥔 지방정권에 불과했다.
2. 생애
샤 알람 2세는 1728년 6월 25일에 아지즈 웃딘 왕자, 후일의 알람기르 2세가 되는 인물의 아들로 태어난다. 태어날 당시 그의 이름은 알리 고하르 왕자였다. 당시 아지즈 웃딘 왕자가 쿠데타로 쫓겨나 폐위된 자한다르 샤 황제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자한다르 샤의 손자뻘 되는 알리 고하르 왕자 역시 델리 붉은 요새에 반쯤 감금당하다시피 살았다. 다만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대다수의 무굴 황족들이 완전히 바깥과 차단된 채로 아무 것도 못하고 폐인처럼 살았던 것과는 달리 고하르 왕자는 나름대로 바깥세계와 연락을 취하거나 요직을 맡기도 하면서 어느 정도 감각을 키웠다고 한다. 이후 무굴 제국이 혼란스럽게 붕괴되면서 마라타 동맹을 등에 업고 실권을 거머쥔 이마드 울물크 재상에 의하여 알람기르 2세가 즉위하자 알리 고하르 왕자 역시 아버지 아래에서 중역을 맡는다. 특히 모조리 퇴폐적인 퇴물로 전락한 나머지 황자들에 비하면 고하르 왕자가 굉장히 양호한 수준이었던 덕에 그는 왕세자 자리까지 올라갔다.이마드 울물크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와 이마드 울물크, 마라타 동맹과의 알력 다툼 끝에 목숨의 위협을 느낀 알리 고하르 왕자는 1759년 델리의 황궁에서 달아나 동쪽으로 도망쳤다. 알리 고하르 왕자는 왕세자라는 자리를 이용해 오디샤, 비하르, 벵골 등지에서 군사를 모아 다시 델리를 재수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것. 그러나 그가 도망친 직후 정계의 권력다툼에서 잠시 밀려났던 로힐랴족 출신의 나집 웃디울라 장군이 대군을 끌어모아 다시 델리로 진군했다. 그는 이마드 울물크가 알람기르 2세를 쫓아내고 바지사장으로 세워놓은 샤 자한 3세를 쫓아내고자 했다. 두라니 왕조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도움을 받아 제3차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동맹과 이마드 울물크를 무굴 일대에서 몰아낸 후, 나집 웃디울라와 두라니는 알리 고하르 왕자를 샤 알람 2세라는 이름으로 새 무굴 황제로 즉위시킨다.
2.1. 벵골 전쟁
1760년 들어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대인도 영향력은 점점 강화되고 있었다. 특히 샤 알람 2세가 즉위하기 이전, 영국인 로버트 클라이브가 원래 벵골의 나와브이던 시라지를 플라시 전투에서 대파하며 쫓아내고 영국에 붙은 미르 자파르를 새로운 벵골 나와브로 임명하면서 무굴 제국과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760년에 샤 알람 2세가 황제에 즉위해 어느 정도 제국이 안정을 되찾자 샤 알람 2세는 벵골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3만의 대군을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한다. 당시 무굴 제국의 바닥까지 긁어모아 겨우 만들어낸 3만 명의 대군에는 슈자 웃다울라, 나집 웃다울라가 이끄는 군대가 주를 이루었으며, 그리고 7년 전쟁 당시 인도인과 협력해 함께 영국에 맞서 싸웠던 200여 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샤 알람 2세가 벵골과 비하르의 파트나 지방으로 진군하며 그 군세는 무려 4만으로 불어났다. 4만 대군이 밀려오자 겁에 질린 미르 자파르는 당장 영국 동인도 회사의 로버트 클라이브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영국군이 파병되며 샤 알람 2세의 군대는 파트나 전투, 시르푸르 전투, 비르푸르 전투, 시완 전투 등 수많은 전투에서 대파되어 뿔뿔이 흩어지고야 만다. 다만 미르 자파르는 영국에 반기를 들려다 실패해 로버트 클라이브에 의해 쫓겨났고 무하마드 알리가 새 나와브로 옹립되었다. 하지만 무하마드 알리도 얼마 못가 급사하자 미르 카심을 새로운 벵골 나와브로 즉위했는데, 이 미르 카심도 영국인들을 못마땅해 영국에게만 독점되었던 관세 혜택을 철폐하고 파트나 지방에 무굴 제국군에 공급하기 위한 병기창을 짓는 등 영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들만을 골라했다. 미르 카심은 영국인들을 지긋지긋해했고 명목상으로나마 벵골의 지배자를 자처하던 샤 알람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북사르 전투.
미르 카심의 구원 요청을 받은 샤 알람 2세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영국을 벵골에서 추방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아와드의 나와브인 슈자 웃다울라, 벵골의 나와브 미르 카심의 도움을 받아 대군을 끌어모아 벵골로 다시한번 진군했다. 동인도회사는 무굴 제국의 침공을 막기 위해 영국에 머무르던 로버트 클라이브에게 벵골 총독과 인도 방면 영국군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기고 다시 인도로 파견했다. 클라이브는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헥터 문로 소령에게 7천 명의 병력을 맡겨 무굴 군대에 대적하게 했고, 1764년 10월 22일 갠지스 강 일대 북사르에서 영국군이 무굴 군대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무굴 제국이 품었던 벵골 회복의 꿈은 영영 날라간다. 이를 북사르 전투라고 부른다. 클라이브는 1765년 맺어진 알라하바드 조약에서 무굴 제국에게 벵골, 비하르, 오리사 지방의 징세권을 뜯어냈고 2천만이 넘는 부유한 벵골인들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권리를 얻어냈다.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무굴 제국의 행정구역이었지만 실질적인 권리는 모조리 영국이 쓸어간 것.
그렇게 알라하바드에서 영국과 굴욕적인 조약을 맺은 샤 알람 2세는 6년 정도 알라하바드에 계속 머물렀다. 영국과의 조약 내용 때문에 수도 델리로 돌아가지 못했던 것. 대신 나집 웃다울라가 델리에서 황제의 대리인을 자처했다. 1770년 나집 웃다울라가 사망하고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나집 웃다울라의 아들 자비타 칸이 자리를 이어받자 기회를 노리던 마라타 동맹의 마하다지 신데는 북인도를 침공하여 수도 델리를 정복했다. 이때 마하다지 신데는 명분을 갖추기 위해 무굴 황제를 델리로 데려가고자 했고, 샤 알람 2세는 마하다지 신데의 호송을 받아 1771년 5월에 알라하바드를 출발하여 1772년 1월 델리에 도착했다. 이때부터 샤 알람 2세는 델리에 앉아서 마라타 동맹의 포로로 잡힌 채로 쭉 살았고, 1788년에는 마라타 군대가 아예 영구적으로 델리에 둥지를 틀고 주둔하기 시작한다. 마라타 군대는 1800년대 초에 제2차 앵글로-마라타 전쟁이 일어나 영국군이 마라타 군대를 쫓아낼 때까지 10여 년 가까이 샤 알람 2세를 끼고 델리를 점거하고 있었다.
2.2. 패배와 치욕
무굴 제국이 영국 동인도 회사. 마라타 동맹 양쪽에서 허구한 날 얻어터지는 동안 자트족과 시크교 세력들이 끊임없이 무굴 제국을 공격하며 국력을 갉아먹었다. 아우랑제브 시절부터 무굴 제국을 싫어했던 자트족은 바라트푸르에 독립 왕국을 세우고 17세기, 18세기 내내 무굴을 공격했는데, 1757년에 마라타 군대가 무굴 제국을 공격하자 자트족의 지도자 수라즈 말은 이 틈을 노려 무굴 영토 상당수를 차지했다. 1761년 6월에는 심지어 대도시 아그라를 공격해 함락했고 타지마할을 약탈해 2개의 거대한 은제 문을 떼어가 녹여버리기도 했다. 자트족이 그렇게 무굴 제국의 골머리를 썩이던 사이 시크교도들도 가만 있지 않았다. 구루 테그 바하두르가 예전에 아우랑제브에게 살해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있던 시크교도들은 1764년 반란을 일으키고 매년 정례적으로 델리 인근까지 약탈하는 등 온갖 패악질을 부렸다. 그나마 유능했던 무굴 장군 미르자 나자프 칸이 군사개혁을 통해 1779년 5천이 넘는 시크 병사들을 죽이며 시크 군대를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못가 1782년 사망하자 무굴 군대는 이전보다도 더 약화된다.사실 미르자 나자프 칸이 군제개혁을 실시해 빠져나가는 세수를 통제하고 군대를 제대로 양성하면서 무굴 제국은 잠시나마 한숨돌릴 틈을 얻게 된다. 그는 부정부패의 끝판왕이던 당시 대재상과 신하들을 체포해 무려 2백만 개의 은화를 회수하고 5천이 넘는 시크 병사들을 죽여버리면서 일대의 혼란을 잠재운 것이다. 이렇게만 계속 나갔다면 무굴 제국은 이전만큼은 아니어도 북인도에 대한 영향력은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1782년 미르자 나자프 칸이 사망해버리고 말았다. 미르자 나자프 칸이 죽자 4명의 부관이 총사령관의 지위를 놓고 내분을 벌였는데, 마하다지 신데가 이에 개입하여 4명의 부관을 제압하고 무굴의 내란을 진정시킨다. 샤 알람 2세는 이에 따라 1784년 마하다지 신데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를 무굴의 섭정이자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힌두교도가 무굴 제국의 최고위직을 겸하는 상황에 무굴 궁정의 이슬람교도가 반발했고, 1787년 랄소트 전투에서 라지푸트족의 암베르-마르와르 연합군에 마하다지 신데가 패배하자 마하다지는 무굴 궁정에서 일시적으로 실각한다.
참고로 샤 알람 2세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거듭하며 기껏 미르자 나자프 칸이 다시 기강을 잡아놓은 군대를 망쳐놓았다. 미르자 나자프 칸의 조카 미르자 샤피라는 유능하고 검증된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인간들을 낙하산으로 군대에 꽂아넣었고, 심지어는 엄청난 비리를 저질러 경질된 마자드 웃다울라를 다시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실책을 반복했다. 마자드 웃다울라는 제국을 배신하고 시크교도들과 결탁해 2만에 달하던 대군을 5천 수준으로 줄여버렸고 이로 인해 무굴 제국의 국력은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미르자 나자프 칸은 죽기 직전까지도 군사적 현대화를 이룩하고, 펀자브의 시크교도와 전쟁에도 승리했으며 1779년에는 시크-로힐라 연합군을 물리치고 어느 정도 북인도에서의 영토적 지배권을 회복하였다. 이때 저멀리 남인도의 마이소르와 카르나타카 나와브도 무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할 정도로 무굴 제국이 부활하는 듯 싶었지만 미르자 나자프 칸이 죽자마자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라져버렸다.
마자드 웃다울라를 대재상으로 임명한 것은 정말 샤 알람 2세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최악의 실수였다.
실명한 뒤 제작된 초상화 |
심지어 피를 흘리는 황제를 시종들이 부축하려하자 그들의 목마저 베었다고 한다. 굴람 카디르는 황녀들의 옷을 벗긴 뒤 능욕하고 자신의 앞에서 나체로 춤을 추게 만들기도 했다.[3] 늙은 황제의 수염을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니 정말 무굴 황실의 권위가 밑바닥까지 추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샤 알람 2세를 폐위하고 샤 자한 4세를 새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버렸으나, 굴람 카디르가 이렇게까지 막나가자 실각되어있던 마하다지 신데가 1788년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굴람 카디르를 죽이고 샤 알람 2세를 복위시킨 뒤 무굴의 보호자를 자처했다.[4] 샤 알람 2세는 고마움을 표하고 그를 '무굴 제국의 보호자'라 불렀다.[5]
2.3. 죽음
샤 알람 2세로부터 인도 통치권을 양도한다는 서약을 받아내는 영국인들. |
1803년 델리 공성전에서 마라타 군대를 몰아내고 델리에 입성한 영국군은 샤 알람 2세를 나름대로 예를 갖추어 대했다. 물론 실권이나 실질적인 부나 재화는 단 하나도 주지 않았지만 명예직 정도로는 대접해 준 것. 샤 알람 2세에게는 그저 주둔군이 바뀌었을 뿐 다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무굴 황제의 타이틀을 교묘히 이용해 그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고 각지에 포고문을 선포하는 등 샤 알람 2세를 훌륭한 얼굴마담으로 활용했다. 인도 각지의 나와브와 수베다르들도 티무르 제국 시대부터 내려온 무굴 황실의 권위는 존중했던지 기도 시간에 그의 이름을 넣어 기도문을 읊거나 무굴 제국이 내린 칭호를 그대로 유지하는 등 무굴 제국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샤 알람 2세는 그렇게 말년에는 영국의 허수아비로 살다가 1806년 11월 19일 자연사로 험난한 생을 마감했다.
[1] 現 인도 델리.[2] 現 인도 델리.[3] 황녀들은 수치심을 이기지못해 야무나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4] 황제가 장님이 되어버렸다는 말을 듣고 동정심을 느낀 마하다지 신데는 굴람 카디르의 눈과 귀를 잘라 샤 알람 2세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5] 마하다지 신데의 강력한 권력이라면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샤 일람 황제를 페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었지만 신데는 의리를 중시하는 성격이라서 샤 알람 황제가 자신을 중용하고 신임하였던 은혜 때문에 제국의 사실상 지배자로 만족하고 만약에 찬탈을 시도하다가는 제국민들이 샤 알람 2세를 동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실상의 지배자로 만족한 것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