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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8대 황제 바하두르 샤 1세 بہادر شاه اول | |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 무함마드 무아잠 محمد معظم |
출생 | 1643년 10월 14일 |
무굴 제국 부르한푸르[1] | |
사망 | 1712년 2월 27일 (향년 68세) |
무굴 제국 라호르[2]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1707년 6월 19일 ~ 1712년 2월 27일 (5년) | |
대관식 | 1707년 6월 19일 |
전임자 | 무함마드 아잠 샤 (제7대, 이복동생) |
후임자 | 자한다르 샤 (제9대) |
부모 | 아버지 : 아우랑제브 황제 (1618 ~ 1707) 어머니 : 나와브 바이 (? ~ 1691) |
자녀 | 슬하 7남 1녀 장남 자한다르 샤 (1661 ~ 1713) |
종교 | 이슬람 시아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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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굴 제국의 제8대 황제. 본래 이름은 무함마드 무아잠. 제6대 황제인 아우랑제브의 삼남.2. 생애
1643년 10월에 아우랑제브 황제와 나와브 바이 황후의 아들로 부르한푸르에서 태어났다. 제위에 즉위하기 전까지는 무함마드 무아잠, 줄여서 무아잠 왕자로 불렀다. 그는 샤 자한의 재위기에는 1653년부터 1659년까지 샤 자한에 의해 라호르의 총독이자 재상으로 일했고, 1663년에는 샤이스타 칸을 이어 데칸 지방을 다스리는 부왕으로 승진했다. 그가 데칸 총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남인도의 힌두 왕국 마라타 동맹의 시바지 본슬레가 직접 군대를 몰고 데칸으로 쳐들어와 아마드나가르 일대를 약탈했다. 무아잠 왕자는 이에 소극적으로 대처했고 피해는 날로 불어갔다. 소문을 듣고 분노한 아우랑제브는 대군을 보내 시바지 본슬레를 압박했고, 결국 푸란다르 조약을 체결해 시바지 본슬레를 완전히 몰아냈다.무아잠 왕자는 시바지 본슬레가 쫒겨나간 이후에도 쭉 데칸의 총독으로 남았다. 그러나 1670년에는 아버지 아우랑제브 황제를 쫒아내고 제가 직접 황위에 오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스스로 무굴 황제를 자칭하며 아버지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무아잠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전해들은 아우랑제브는 왕자의 어머니인 나와브 바이 황후를 보내 그를 설득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에 넘어간 무아잠 왕자는 결국 군대를 해산하고 몇 년동안 아우랑제브의 감시 하에서 연금 생활을 보냈다. 1680년에도 아우랑제브의 청야전술에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지만 또다시 아우랑제브의 설득에 넘어가 항복했다. 아우랑제브는 2번이나 아들의 반란을 용서해준 다음 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다만 겉으로 보기에 아우랑제브와 무아잠 왕자의 관계는 썩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681년부터 1687년까지 무아잠 왕자는 '마지못해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수준에 그쳤다. 아우랑제브가 아직 정정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지 그의 힘이 조금만 약해지면 바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아우랑제브의 또다른 왕자들 중 하나였던 악바르[4]가 반란에 실패하고 도망치자 아우랑제브가 무아잠 왕자더러 그의 탈출을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고의적으로 탈출을 방관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랑제브는 그를 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1687년에는 골콘다 지방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무아잠이 정신을 못차리고 골콘다의 토후들과 연합해 자신에 대대적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자 결국 아우랑제브도 그를 가두어버렸다. 게다가 왕자와 친했던 친구들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며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궁정에서 내쳤다.[5]
자식 이기는 부모 없었던지 아우랑제브는 몇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무아잠 왕자를 1694년 연금에서 풀어주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감시만큼은 계속했는데, 그의 하렘에 스파이를 보내거나 신하들 중에 첩자를 심어 자신에게 항시 보고하게 하는 등 아들에 대한 경계는 절대 풀지 않았다. 무아잠 왕자가 불안정한 데칸 일대에 있으면 지역민들을 선동해 세를 불릴 것을 우려한 아우랑제브는 그를 안정적인 북인도로 보냈고 죽을 때까지 데칸에 부르지 않았다. 1695년에는 펀자브로 원정을 떠나 시크교 신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평화적으로 제압했고 곧 악바라바드의 총독을 거쳐 대도시 라호르의 총독직에 다시 올랐다. 이후 카불의 총독이던 아민 칸이 죽자 라호르 총독을 겸해 카불의 총독까지 겸하면서 웬만한 왕자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권력을 손에 틀어쥐었고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가 죽을 때까지 카불의 총독으로 재임했다.
2.1. 통치
2.1.1. 계승 전쟁
아잠 샤와 그의 아들마저 싹 쓸어버리는 데 성공한 무아잠 왕자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바하두르 샤 1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했다. 그때 이미 그의 나이 63세였다. 하지만 무굴 황제에 오른 직후부터 바하두르 샤 1세에게는 온갖 난관들만이 앞에 남아있었다. 무력으로 각지의 반란들을 찍어누르던 아우랑제브가 사라지자 제국 전역에서 반란이 주구장창 일어났기 때문. 게다가 아우랑제브가 폭압적인 종교 정책을 피면서 힌두교도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기에 무굴 제국에 대한 반감은 그 어떤 때보다 심한 상황이었다. 특히 아직도 또다른 경쟁자인 바크쉬 왕자는 여전히 황위를 참칭하면서 그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바크쉬 왕자를 처리하지 않으면 반란이고 뭐고 제국 자체가 뒤집힐 위험이 컸기 때문에 바하두르 샤 1세는 가장 먼저 바크쉬 왕자부터 처리하기로 결심한다.
바크쉬 왕자 아래에는 크게 2명의 신하가 있었다. 하나가 타카루브 칸과 아샨 칸이었는데, 이 둘은 서로 2인자 자리를 노리면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하지만 아샨 칸은 바크쉬 왕자의 허락을 맡지 않고 비자푸르에 면세 시장을 개설하는 등 틈틈이 그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고, 그러던 중 결정적으로 타카루브 칸이 왕자에게 아샨 칸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허위로 밀고하면서 아샨 칸은 처형되고 말았다. 1708년에는 바하두르 샤 1세가 보낸 사절 역시 바크쉬 왕자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다고 여겨 이 사절마저 죽여버리면서 바하두르 샤 1세와 바크쉬 왕자 사이는 더이상 회복 불가할 정도로 멀어졌다. 그러나 바크쉬 왕자는 각종 실책을 반복하며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그는 병사들이 탈주하는 와중에도 신에게 기도 따위나 올리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결국 1708년 12월에 바하두르 샤 1세가 그를 사로잡아 처형시켜버렸다.[6]
바크쉬 왕자를 처리하면서 유일한 무굴 제국의 황제로서 지위를 굳힌 바하두르 샤 1세는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는 데 힘썼다. 물론 1707년 제위를 계승한 직후부터 이미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한 곳으로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그는 아우랑제브 죽음 직후 반란을 일으켰던 라지푸트 왕국들을 재복속했다. 그는 계승전쟁 때 아잠 샤를 지원했던 앰버 지방의 조드푸르의 자이 싱을 몰아내고 대신 그의 동생 비자이 싱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 외에도 우다이푸르 역시 재정복해야 했다. 우다이푸르는 1576년 악바르 대제 시절 정복하고 거의 130년 동안 무굴에 충성을 다했지만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마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드푸르가 쉽게 재합병당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 우다이푸르는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무굴 제국에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2.1.2. 시크교도들의 반란
무굴 제국에서도 가장 반란 기질이 강한 세력이 바로 시크교 신자들이었다. 특히 아우랑제브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크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구루를 고문하다가 생매장해 죽여버렸으니 무굴 제국에 대한 시크교도들의 증오감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1707년, 강력한 군사력을 휘두르던 아우랑제브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시크교도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펀자브 지방에 많이 거주하던 시크교도들은 히사르 지방에서 봉기를 준비했고, 1709년 11월 도시 사마나를 공격해 마을을 약탈했다. 당시 시크교도들의 반란을 주동하던 반다 바하두르는 사마나를 함락시킨 후 샤하바드, 사드하우라, 바누르 등 여러 대도시들을 쓸어버렸고, 무굴 제국군은 시크교도들에게 패배했다. 결국 12월에 이르자 반다 바하두르와 시크교도들은 시르힌드 지방을 포함해 펀자브 일대 상당수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시르힌드 지방을 먹은 시크교도들의 다음 목표는 갠지스 강 일대였다. 반다 바하두르는 차례차례 사하란푸르, 베하트 등 이슬람 강압 정책이 심했던 나와브들이 다스리는 구역들 위주로 공격했고, 그동안 탄압받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의 열렬한 호응과 함께 엄청난 영토를 집어삼켰다. 베하트의 총독을 잡아죽인[7] 반다 바하두르는 자랄라바드의 나와브 잘랄 칸이 시크교 신자들을 잡아넣고 무자비하게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자랄라바드로 향했다. 그는 잘랄 칸에게 평화롭게 항복하고 시크교도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잘랄 칸은 반란군의 요구 따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결국 반다 바하두르는 자랄라바드를 공성했지만 인근 크리슈나 강에서 홍수가 나면서 실패하고 물러난다.
시크교도들은 펀자브 일대에서 무굴 제국을 완전히 몰아내는 게 최종 목표였다. 특히 시크교 최대 성지인 암리차르가 펀자브 지방에 있었고 시크교도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곳도 펀자브였기에 아예 무굴 제국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는 것이 최종 목표였던 것. 시크교도들은 당시 펀자브의 대도시 잘란다르의 총독 샤마스 칸을 협박해 종교 개혁을 시행할 것과 동시에 제국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재화들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샤마스 칸은 일단 시크교도들에게 굴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세를 추스르자마자 바로 성전 지하드를 선포하고 시크교도들을 공격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시크교도들은 달아났고, 군대를 수습한 다음 1710년 라혼 요새를 공격해 빼앗았다. 한편 시크교도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던 암리차르에는 8,000여 명의 시크 군대가 모여 주변을 장악하고 심지어 제국의 핵심 대도시들 중 하나인 라호르마저 공격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라가 위태로운 수준에 이르렀고, 바하두르 샤 1세가 직접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2.1.3. 시크 반란 진압
시크교도들이 라호르까지 침략하면서 펀자브 주 대부분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악한 바하두르 샤 1세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데칸 일대의 원정을 마무리 짓고 빠른 속도로 북상해 델리, 라호르, 앰버 등의 총독들을 불러모아 대군을 구성했다. 그는 1710년 6월에 펀자브에 도착해 민심을 수습한 다음 소니파트, 카이탈, 파니파트 등의 대도시들을 회복했다. 바하두르 샤는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눈에 보이는 족족 반란군들을 죽였고 이들의 머리를 잘라 창 끝에 꽂고 행진했다. 강행군 끝에 1710년 11월에는 카르날에 도착하여 시르힌드와 타네사르 일대의 지리 정보를 확보했다. 무굴 제국의 대공세 끝에 12월 7일 시르힌드가 다시 무굴 제국에 재복속되었다. 바하두르 샤 1세는 크게 기뻐하며 시르힌드 공성전을 승리로 이끈 모하마드 아민 칸 바하두르 장군에게 황금으로 만든 열쇠를 하사하기도 했다.시르힌드를 탈환하면서 시크교도 반란의 세를 한풀 꺾은 바하두르 샤 1세는 반란의 주동자 반다 바하두르가 숨어있는 로가르 요새로 진군했다. 1차로 로가르 요새를 공성하는 시도가 실패하자 황제가 친히 11월 30일 대군을 이끌고 총공세를 펼쳤고, 요새에 머무르던 반란군들은 대부분이 살해당했으며 반다 바하두르는 겨우 몇 백여 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도망쳤다.[8] 도망친 반다 바하두르가 다른 곳에서 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한 바하두르 샤 1세는 인근 모든 부왕과 총독들에게 긴급 명령을 내려 그를 잡으면 반드시 황제에게 데리고 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바하두르 샤 1세는 반란을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슈칸 칸 바하두르[9] 장군과 히멧 딜러 칸 장군을 라호르로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패배해 돌아오자 5,000여 명의 군대를 더 얹어서 다시 라호르를 공략했다.
당시 반다 바하두르는 라호르에서 11km 떨어진 알할라브에 숨어있었다. 무굴 제국의 인부들이 알할라브 지방의 무너진 다리를 보수하기 위해 공사를 벌이는 동안, 반다 바하두르의 추종자들은 일부러 무굴 제국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반다 바하두르가 아즈메르 지방을 통해 저 멀리 델리로 갈 것이라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렸다. 무굴 제국이 그를 찾느라 다른 곳을 뒤지고 있는 동안 반다 바하두르는 알할라브에서 군대를 모아 1711년 4월에 파테하바드를 공격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하두르 샤 1세는 궁병을 데리고 그의 군대를 쳤고 반다 바하두르는 또다시 패배해 달아났다. 그렇게 계속 무굴 제국이 반다 바하두르를 공격하면 그가 패배해 달아나는 일이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바하두르 샤 1세마저도 반다 바하두르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잡히지 않는 것인가 의심할 정도였다. 1711년 10월에도 또다시 전투에서 패배해 히마찰프라데시 주로 도망갔다. 그렇게 반다 바하두르를 체포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일단 바하두르 샤 1세는 시크교도들의 반란을 잠재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2.2. 죽음
델리의 모티 마스지드. '진주 모스크'라는 뜻이며 바하두르 샤 1세의 무덤이다.
그렇게 반다 바하두르를 저 멀리 히말라야산맥 쪽으로 몰아내며 일단 부분적으로나마 시크교도들을 억누르는 데 성공하고 무굴 제국을 유지했던 바하두르 샤 1세는 안타깝게도 즉위 후 오래 살지 못했다. 그는 1712년 1월 라호르에서 급격히 병세가 나빠졌고, 2월 24일에 공식 석상에 나온 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대중들 앞에 나온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미 고령이었던 황제는 몸이 갈수록 안좋아졌고 27일~28일 사이의 밤에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68세. 기록에 의하면 비장이 부은 것이 사인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4월 11일 델리로 보내졌고, 5월 15일 그가 직접 지은 델리의 모티 마스지드 모스크에 잠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자한다르 샤가 새로운 무굴 황제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나마 있는 능력으로 무굴 제국을 붙잡던 바하두르 샤 1세가 사망한 후 무굴 제국은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3. 가계
바하두르 샤 1세 이후의 황제들의 가계는 잦은 반란으로 인해 매우 복잡하다. 바하두르 샤 1세 이후 샤 자한 3세를 제외한 무굴 제국 황제들이 대부분이 그의 후손이였다. 손자만 무려 5명이 황제인 황제부자(?)이다. 황실 입장에선 영토도 잃고 영향력도 마라타 제국에 뺏기는 대혼란의 시기지만.- 부황: 아우랑제브 (1618 ~ 1707): 6대 황제
4. 기타
- 수니파 무슬림이 다수이던 무굴 제국에서 시아파로 개종한 황제였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종교를 수니파에서 시아파로 개종했고 이는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특히 그는 델리의 아잔에 시아파 교리를 끼워넣으려 했는데 이때문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뻔하기까지 했다.
- 바하두르 샤 1세 역시 전임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동전과 금화들을 발행했다. 특히 아우랑제브 시대에 주조된 동전들을 녹여 제 이름으로 바꾸고 다시 시장에 뿌렸다고 한다.
- 개인적으로 교양있고 공손한 성격이였다고 한다. 전임인 아버지인 아우랑제브의 막장적인 통치를 바로잡으려 노력을 하였고 무굴 제국내에 반란을 진압하려 노력하였다. 만일 바하두르 샤가 오래 살았더라면 무굴 제국의 붕괴를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였다.
- 그의 풀네임은 '아불-나스르 사이이드 쿠트브 웃딘 무함마드 샤 알람 바하두르 샤 바하두르'였다. 여기서 '사이이드'라는 칭호는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만이 쓰던 칭호였는데, 바하두르 샤 1세의 외증조부가 무함마드의 후손이었던 덕분에 가능했던 것. 그는 20명의 무굴 황제들 중 유일하게 '사이이드'라는 칭호가 붙은 황제다.
[1] 現 인도 마디아프라데시.[2] 現 파키스탄 라호르.[3] 수니파가 주류였던 인도에서 즉위하자마자 시아파로 개종했고, 이때문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4] 그 악바르 대제와는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다.[5] 이번만큼은 아우랑제브도 봐줄 수 없었던지 6개월 간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걸 금지하는 등 제대로 벌을 내렸다. 또 아무리 더운 날씨에도 차가운 물을 마시는 것을 금지했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 역시 허락해주지 않았다. 왕자가 누굴 만나기 전에는 무조건 아우랑제브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6] 바크쉬 왕자는 죽기 직전까지 신이 자신을 기적적으로 도와 승리할거라 믿었다.[7] 이 인간은 대놓고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는 소를 죽이는 등 패악질을 부리며 악명이 자자했다.[8] 그의 최측근이었던 굴라브 싱이 반다 바하두르처럼 차려입고 무굴 군대의 이목을 끄는 사이에 탈주했다고 한다.[9] '바하두르'란 '용감한', 혹은 '용사'라는 의미로 당대 인도에서 꽤나 흔한 칭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