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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6 10:46:10

스리나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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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룸 강과 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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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 마스지드 (대사원)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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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프라밧 성채와 설산


1. 개요2. 역사3. 볼거리
3.1.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3.2. 정원과 별궁3.3. 하리프라밧 성채3.4. 기타 종교 건축

1. 개요

힌디어 श्रीनगर
카슈미르어 سِریٖنَگَر
우르두어 سری نگر
영어 Srinagar

인도 잠무 카슈미르 연방 직할지의 도시. 잠무에서 북쪽으로 130km 떨어진 젤룸 강 양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30만명으로, 카슈미르 최대의 도시이다. 지명은 힌두교의 태양신 수리야 혹은 미의 신 락슈미 (스리)의 도시란 뜻이다. 카슈미르 협곡 분지의 중앙부에 입지하여 과거부터 교통의 요충지였고, 중세 (힌두계) 로하라 왕조와 카슈미르 술탄국 (샤 미르, 차크 왕조)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따라서 시가지 내외에는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특히 강 북안의 구도심에는 14세기에 카슈미르 양식으로 세워져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대사원과 칸카-에-물라 등의 이슬람 관련 유적이 많다.

시가지 주변에는 호수가 여럿 있는데, 그중 동쪽의 달 호수가 유명하다. 달 호수 남안의 9세기 힌두 사원인 샨카르차르야와 동안의 무굴 제국기 정원인 피리 마할 역시 유명 관광지이다.[1] 인도에서 가장 무슬림 비중이 높은 도시로, 무려 96%에 달한다. 힌두교, 시크교도가 각각 3%와 1%로 나머지를 구성한다. 따라서 카슈미르 전쟁 당시 파키스탄의 최우선 목표였지만 점령에 실패하였다. 도시 남서쪽 외곽에 스리나가르 국제공항이 있다. 철도역도 있으나, 카슈미르 분지 외부로 연결되지 않아 거의 현지인들만 이용한다. 또한 스리나가르는 레알 카슈미르 FC의 연고지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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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경에 세워진 샨카라차르야 사원 8세기 경에 세워진 판드레탄 시바 사원

칼하나의 라자타랑기니에 따르면 아소카 대왕이 카슈미르에 중심 도시로써 '스리나가리'란 도시를 세웠고, 이는 '옛 수도'란 뜻인 푸라나디스타나로도 불렸으며 현 시가지의 동남쪽에 있었다 한다. 그러다 6세기 들어 알촌 훈족의 군주 프라바세나에 의해 '새 수도'란 뜻인 파르바푸라가 현 시가지인 젤룸 강 동안의 하리 파르바트 언덕 기슭에 세워졌을 때에 스리나가리 지명이 옮겨와 쓰였다 한다. 새 도시에는 여러 시장, 저택, 대사원, 목조 주택들, 운하들이 있었다 한다. 프라바세나는 도시를 홍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젤룸 강변에 제방을 쌓았고, 그중 일부는 현존한다.

631년 일대를 방문한 당나라 구법승 현장법사 역시 카슈미르 협곡에 인접한 두 중심 도시가 있다고 기록했다. 670년 알촌 훈족의 멸망 후 카슈미르 분지에는 여러 왕성들이 세워졌다. 7-9세기의 카라코타 왕조는 서쪽의 하리파스푸르, 9-10세기의 우트팔라 왕조는 동남쪽의 아반티푸르를 수도로 삼았다. 그러다 1003년에 세워진 로하라 왕조가 다시 스리나가르를 수도로 삼고, 3세기 가랑 지속되며 스리나가르는 카슈미르 지역의 중심지로 굳어졌다. 시가지의 각 구역들은 각자의 수호신을 두었고, 현재까지도 힌두 카슈미리들이 추앙한다. 8세기에 방문한 베다 철학자 아디 샨카라는 옛 제슈테슈와라 신전 자리에 샨카라차르야 신전을 세웠다. 중세 들어 시가지는 점차 젤룸 강 서안으로 확정되었고, 12세기 초엽에는 왕궁도 서안으로 옮겨졌다.

2.1. 카슈미르 술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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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5세기에 형성된 구도심과 자이나 카달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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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자이눌 아비딘 샤히 칸과 그의 모친이 안장된 영묘

13세기 말 들어 로하라 왕조는 내분으로 쇠퇴했고, 14세기 초엽 마하라자 수하데바는 라하라 총독 람찬드라와 대립했다. 그 무렵 라하라에 당도한 라다크인 불교도 상인 린찬 보티는 노예 무역[2]으로 부를 축적했고, 1319년 차가타이 칸국의 장군 줄추가 침공해 8개월간 학살을 자행하는 혼란을 틈타 사병을 조직했다. 몽골 침공 당시 수하데바는 키슈트와르로 피신한 것에 반해 린찬은 다르디스탄 출신 튀르크 무슬림 장군인 샤 미르와 함께 저항을 이어갔다. 줄추의 회군 후 여론의 지지를 받게 된 린찬은 1320년 가을 라하라를 장악, 람찬드라를 죽였고 수하데바마저 격파한 후 카슈미르의 군주가 되었다. 기존 왕비이던 코타 라니와 결혼하고 샤 미르를 재상에 봉한 린찬은 같은해 12월, 위구르인 수흐하와르디 수피 불불 샤 (세이드 샤라프 웃딘 압델레흐만 샤)를 접견한 후 이슬람으로 개종하며 '사드르 웃딘 샤'가 되었다. 법치를 회복한 린찬은 1323년, 암살 미수 후 부상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와 코타 라니와의 아들 하이다르는 어렸기에 코타 라니는 수하데바의 동생인 우다야나데바를 불러 결혼하고 공동 통치했다. 1338년 우다야나데바의 사후 코타 라니는 카슈미르 사상 유일한 여왕이 되어 통치했다. 그녀는 샤 미르 대신 바타 비크샤나를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이에 반발한 샤 미르는 1389년 7월에 정변을 일으켜 코타 라니와 강제로 결혼하고 술탄이 되었다. 샤 미르는 샴스 웃딘이라 칭하며 본격적으로 카슈미르 술탄국을 개창했다. 비록 그 역시 3년 후에 사망했으나 샤 미르 왕조는 2세기 가량 이어졌다. 술탄국 시기에 도시는 카슈미르 그 자체로 불리게 되었고, 스리나가르 지명은 점차 잊혀졌다. 1354 ~ 1373년간 재위한 쉬하브 웃딘 샤 미르는 스와트 등 다르디스탄 지역을 정복하고 시알코트, 길기트 발티스탄, 라다크 등지를 원정해 티베트 및 모굴리스탄 칸국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그는 델리 방면으로 남하, 술테즈 강변에서 술탄 피루즈 샤와 휴전을 체결하며 시르힌드 및 아톡 일대까지의 지배권을 얻으며 카슈미르 칸국을 제국 수준으로 확장시켰다.

1380년대 쿠트브 웃딘 힌달의 재위기에는 쿠브라위야 수피 미르 사이드 알리 함다니가 방문해 설교했다. 1389년 ~ 1413년간 재위한 시칸다르 샤 싱가라는 강력한 이슬람 중심 정책을 펼쳐 우선 칸카-에-물라를 세웠고, 1402년에는 노와타에 대사원 (자미 마스지드)을 세웠다. 그는 또한 힌두 사원을 강제로 모스크로 전환했다. 다만 뒤를 이어 1420년 ~ 1470년 간에 장기 재위한 자이눌 아비딘 (기야스 웃딘 샤) 샤히 칸은 지즈야를 폐지하고, 소 도축을 금하는 등 힌두교도들을 존중하는 관용 정책을 펼쳤다.[3] 그는 또한 젤룸 강 양안의 시가지를 잇는 자이나카달 다리, 마르 운하, 달 호수 내의 두 섬 (소나 란크, 루파 란크), 스승 마딘 사힙과 모후를 위한 영묘를 세웠다. 후자는 힌두 사원 유적의 자재들을 티무르-카슈미르 양식으로 건설했고, 샤히 칸 본인도 묻혔다. 또한 샤히 칸의 치세에 스리나가르는 숄과 카펫 제작, 종이 세공 및 목공예 산업이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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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 ~ 1402년에 세워진 자미아 마스지드 (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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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에 세워진 칸카-에-물라와 구시가지

1484년, 샤히 칸의 아들 하산 샤가 사망한 후 카슈미르 칸국은 내전에 돌입하며 쇠퇴했다. 1486년부터 1517년까지 사촌지간인 무함마드 샤와 파테흐 샤가 6차례나 서로 차탈하며 치열히 대립했고, 결국 전자가 집권했다. 1527년 무굴 제국의 창건자 바부르는 쿠차크 베그와 샤이크 알리 베그를 카슈미르로 보내 술탄을 칭한 시칸다르 샤 2세의 반란을 도왔으나, 무함마드 샤는 다르드인 카지 차크 등의 도움으로 나우샤흐라에서 무굴 군대를 격파했다.[4] 1531년 후마윤의 동생 캄란 미르자가 카슈미르를 재침하여 스리나가르까지 점령했으나 카지 차크가 격퇴했다. 1533년에는 야르칸드 칸국이 술탄 사이드 칸이 하이다르 두글라트를 보내 카슈미르를 공격해 몇 차례 승리했으나, 결국 패배해 휴전을 맺고 돌아갔다. 1540년 11월, 이번에는 (당시 펀잡에 있던) 후마윤에 복속한 하이다르 두글라트가 카슈미르를 재침해 이듬달에 마치내 정복했다. 그는 사이드 나주크 샤를 술탄으로 옹립한 채로 후마윤에 충성했고, 1544년 카지 차크도 죽었다.

다만 1551년 하이다르 두글라트는 다울라트 차크에게 패한 후 죽었고, 이로써 샤 미르 왕조가 복구되었으나 차크 가문이 실권을 휘둘렀다. 1552년에는 수르 제국의 하이바트 칸 니아지가 카슈미르를 침공했으나 카지 차크의 아들 가지 차크에게 격퇴되었다. 이로써 권력을 강화한 가지 차크는 1561년 하빕 샤를 폐위시키고, 가지 샤가 되어 차크 왕조를 세웠다. 무굴 황제 악바르는 찬탈을 인정하지 않으며 3차례 토벌군을 보냈으나 모두 격퇴되었고, 당시 북인도 평정에 바빴기에 결국 휴전했다. 1563년 ~ 1578년간 후사인 샤와 알리 샤 형제는 카슈미르 대부분 지역에 지배력을 확립하고 관용적 통치를 하며 안정을 이어갔다. 하지만 1579년 술탄 유수프 샤 차크에 대해 숙부 압달 차크가 반란을 일으키며 내전이 발발했고, 재상이던 사이드 무함마드가 집권하며 왕조가 끊기기도 했다. 이듬해 유수프 샤는 무굴 제국의 병력을 빌려 재집권했고, 악바르에 복속했다.

다만 이후로도 차크 가문이 내분은 지속되었고, 악바르는 유수프 샤가 친조를 거부하자 1585년에 라자 바그완트 다스 휘하 5천 병력을 보냈다. 대치 끝에 유수프 샤는 항복했고, 악바르는 약속과 달리 그를 감금했다. 한편 카슈미르 인들은 유수프 샤의 아들 야쿱 샤 차크를 옹립해 저항을 이어갔다. 다만 야쿱 샤는 시아파였고, 시아파 정책을 추진하자 샴스 차크 등 수니파 귀족들이 반발했다. 그러던 1586년 악바르가 카심 칸 휘하 2만 대군을 보내자 많은 부대들이 이탈했고, 절망한 아쿱 샤는 처가인 키슈트와르로 피신했다. 이후 샴스 차크는 1만 병력을 모아 하스타반즈 전투에서 무굴 군대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그해 10월 카심 칸은 스리나가르에 입성했다. 돌아온 야쿱 샤는 샴스 차크와 화해하고 병력을 합쳐 여러 차례 카심 칸을 패배시켰고, 이에 고무된 스리나가르 주민들이 무굴 주둔군을 죽이기도 했다. 하지만 야쿱 샤는 인기가 있던 후사인 차크를 위협으로 간주해 죽이는 실책을 저질러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켰고, 새로 부임한 카슈미르 총독 유수프 리즈비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1589년 6월, 악바르가 친히 스리나가르에 당도하고 샴스 차크가 항복하자 그해 8월 야쿱 샤 역시 항복하며 카슈미르 술탄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2.2. 무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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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바르가 세운 하리프라밧 성채와 함자 마크둠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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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자한이 세운 니샤트 바그

정복 직후 카슈미르는 카불 수바흐 (주)에 속했고, '샤흐르-에-카슈미르' (카슈미르 도시)라 불렸다. 악바르는 야쿱 차크의 항복을 받은 1589년을 시작으로 3차례 스리나가르를 방문했다. 1592년 2번째로 방문한 악바르는 성대한 디왈리 행사를 열었고, 마지막 방문 때에는 첫 유럽인 인사들을 대동했다. 악바르는 하리 프라바트 언덕에 성채를 세웠고, 그 기슭에 리쉬 수피 종단의 성인 함자 막크둠의 성지를 건설했으며 나가르 나가르 시가지를 조성했다.

자한기르 황제는 카슈미르를 자주 방문했고, 1619년 샬리마르 바그를 조성했다. 황후 누르 자한은 1623년 칸카-에-물라의 젤룸 강 건너편에 파타르 모스크를 세웠고 1633년에는 달 호수 동안에 니샤트 바그를 세웠다. 자한기르와 누르자한 부부는 최소 13차례나 하계 조정을 꾸리는 등 시원한 스리나가르를 매우 좋아했다. 스리나가르는 다시 번영하게 되었고, 샤 자한은 1638년 스리나가르를 주도로 하는 카슈미르 수바흐를 신설했다. 아우랑제브는 아알리 마스지드와 사파 카달 다리, 무함마드의 머리카락인 모이 무캇다스를 봉헌한 궁전인 하즈라트발 다르가 등을 건설했다.

2.3. 두라니 제국 & 시크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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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호수 동북쪽의 샬리마르 정원. 무굴 제국 이후로도 손님 접객용으로 활용되며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번영하던 도시는 18세기 들어 내전의 여파로 쇠퇴했다가, 1753년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제국령이 되었다. 아흐마드 샤 두라니는 셰르가리의 옛 궁전을 재활용 하여 새 궁전을 세워고, 하리 프라바트 성채를 보수했다. 두라니 지배 하에 도시는 재건되긴 했으나 힌두-무슬림, 순니-쉬아간 갈등이 커져 폭동이 일기도 했고 판디트 (브라만) 계층에 대한 당국의 박해도 있었다. 그러던 1819년, 시크 왕국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정복하며 5세기만에 스리나가르 지명이 회복되었다. 란지트 싱은 샬리마르 정원을 유럽인 사절 접대용으로 활용했다. 시크 지배기에 스리나가르는 쇠락을 지속했고, 1837년 순니-쉬아 폭동이 벌어졌다. 또한 시크 당국은 이슬람 신앙 표현을 제한했고, 자미 마스지드는 1843년까지 폐쇄되어 있었다.

2.4. 잠무 카슈미르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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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1년 두라니 시기에 옛 로하라 왕궁 터에 세워져, 도그라 시기에 서양식으로 중건된 셰르가리 궁전

시크 제국의 번국으로써 잠무를 수도로 카슈미르 남부를 통치하던 도그라 왕국은 1846년 암리차르 조약으로 시크 제국이 해체되자 카슈미르 전역의 지배권을 얻었고, 스리나가르로 천도했다. 도그라 지배 하에서 세금이 인상되었고 비단, 사프란, 종이, 담배, 포도주, 소금의 생산 및 곡물의 판매가 국유화되어 독점 경제가 형성되었다. 소 도축은 최대 사형까지 선고되었고, 1920년대에야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1860년에는 젤룸 강변에 라구나트 힌두 사원이 세워졌다. 1877-79년의 대기근 후 스리나가르는 홍수, 콜레라 창궐, 지진 등을 겪으며 인구 절반이 감소하는 피해를 겪었다. 기근과 농촌의 강제 노동을 겪으며 많은 농민들이 스리나가르로 이주했고, 도시가 과밀화되고 더럽다 여긴 마하라자 란비르 싱은 1872년부터 잠무를 동계 수도로 지정해 6개월마다 조정을 옮겼다. 19세기 말엽 카슈미르의 특산물인 숄의 거래량이 세계적으로 감소하며 스리나가르는 경제 침체를 겪었다.

그 무렵 스리나가르에는 영국 정치국이 들어서며 영국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했고, 도로가 개설되며 펀잡과의 교역이 늘었다. 1886년에는 공식적으로 시가 되었고, 공원이 조성되는 등 위생 및 도시 계획이 시행되었다. 1900년을 전후로 많은 영국인 장교들이 달 호수의 선박 가옥에서 피서를 즐기기 위해 스리나가르를 즐겨 찾았고, 마하라자 프라탑 싱은 셰르가리 궁전을 네오르네상스 풍으로 개조했다. 시가지는 점차 확대되었고, 경제와 위생 조건이 나아지며 이촌향도로 인구가 늘었다. 직물 및 관광 산업 덕에 발전한 도시에는 많은 펀잡인들이 상업과 행정 등의 직무를 수행하며 정착했다. 20세기 중반 들어 하리 싱은 사실상 잠무를 수도로 고정했고, 카슈미르 인들은 도그라 왕조를 외세 지배로 여겨 혐오했다. 1940년대 스리나가르에서는 셰이크 압둘라의 국민의회가 95%에 달하는 무슬림 주민들을 대표하는 단체로 떠올랐다.

2.5. 현대

1947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발발과 함께 10월 27일, 인도군이 스리나가르에 진주했다. 이듬해에는 자와할랄 네루가 도시를 방문해 민병대를 사열했다. 1963-64년에는 하즈라트발의 성유물이 사라져 혼란이 일었고, 그후 1968-79년에 걸쳐 성지는 무굴 양식으로 중건되었다. 1989년 들어 스리나가르에서는 카슈미리 판디트로 대표되는 힌두 주민들에 대한 박해가 일었고, 이듬해 10만에 달하는 힌두 주민들이 잠무 등지로 피신했다. 그 과정에서 50여명이 피살되었고, 이후 힌두 주민의 비율은 8%에서 3%로 낮아졌다. 인도 정부는 시가지 주변에 검문소와 벙커를 설치했고, 현재까지도 많은 군병력이 배치되어 있다.

2008년, 2010년, 2013년, 2016년에 주민들은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2019년 8월, 잠무 카슈미르의 특별 자치권이 박탈되고 연방 직할주로 개편된 이후 인도군은 스리나가르 등지에 봉쇄를 내리는 등 통제를 가했다. 한편 인도 정부는 카슈미르로의 교통 확보를 위해 2008년 스리나가르 역을 건설한 후, 스리나가르 ~ 잠무간 철도 공사에 나서 2024년 12월에 시운전을 마쳤다. 또한 2027년 완공을 목표로 스리나가르 지하철 1,2호선 건설 역시 추진 중이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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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달 호 수.jpg호수에서 설산을 보며 전통 배인 쉬카르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관광객이 많다. 카슈미르를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이다. 호숫가에 정박해 있는 큰 배들은 숙식 용으로도 쓰인다. 선상 가옥용 선박들 중에는 세계 유일의 선상 우체국도 있어 관광객들이 편지를 보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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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 전반부

3.1. 자미 마스지드 (대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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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리나가르 7.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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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1402년 카슈미르 술탄국의 6대 군주 시칸다르 샤에 의해 세워졌다. 1819년 시크 왕국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점령한 후 폐쇄되었다가, 1843년 금요일 한정으로 예배가 허락되었고 1854년에야 기존의 모스크 기능을 회복하였다. 1931년 잠무 카슈미르의 경찰이 모스크 내에서 발포하여 22명이 사망하였고, 이로써 하리 싱에 대한 무슬림들의 불만이 증폭되었다. 1947년 이후로는 카슈미르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지목되어 2008년부터 인도 당국에 의해 종종 예배 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2019년의 경우 136일에 달하였다.

3.2. 정원과 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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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리마할2.jpg피르 마할로도 불리며, 요정의 궁이란 뜻이다. 무굴 제국기 별궁 건축의 걸작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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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체슈메 샤히.jpg파리 마할 인근의 무굴 제국기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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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샬리마르 2.jpg
달 호수 서북안의 무굴 시기 정원으로, 페르시아 정원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분수만 410개에 이르며, 라호르와 델리의 샬리마르 바그의 원조격이다.

3.3. 하리프라밧 성채

파일:하리6.jpg

파일:하리 3.jpg

파일:하리 1.jpg

파일:스리나가 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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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슈미르 현지에서는 코히 마란으로 불린다. 1590년 악바르 대제가 세웠고, 1808년 두라니 제국의 총독 아타 모하메드 칸이 현재의 규모로 증축하였다. 2000년을 전후로 보수 공사를 거쳐 2007년 재개장하였다.

3.4. 기타 종교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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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샨카라차르 야.jpg시바 신을 모시는 9세기 무렵의 힌도 사원. 카슈미르 힌두교도들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이다.

파일:Hazratbal_shrine.jpg
파일:하르자트발.jpg카슈미르 최대의 이슬람 성지로, 무함마드의 머리카락을 봉안하고 있다. 17세기에 처음 조성되었고 현 구조물은 1968-79년에 세워졌다. 호수 서안의 카슈미르 대학 옆에 위치한다.

파일:크파타르모스.png샤 자한 대인 1623년 세워졌으나, 사원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져 다른 용도로 쓰이다 1930년대가 되어서야 모스크가 되었다.

파일:Ziyarat_Naqshband_Sahab_Shrine.jpg
파일:아알리 마스짇.jpg
[1] 스리나가르에는 그외에도 무굴 제국기 정원이 여럿 있다[2] 카슈미르 인들을 라다크로 팔았다..[3] 이는 후일 카슈미르 특유의 공존인 카슈미리야트의 근원으로 평가된다[4] 포로로 잡힌 시칸다르 샤 2세는 실명된 후 감옥으로 보내져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