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속기간 | 370년~670년 |
수도 | 카피사, 우다밤다, 사갈라 |
국가원수 | 불명 |
주요 군주 | 킹길라(430~490년), 미히라쿨라(515~540년) |
종교 | 힌두교(시바파), 불교, 조로아스터교 |
성립 이전 | 사산 제국, 굽타 제국, 키다라 |
멸망 이후 | 에프탈, 네자크 훈족. 튀르크 샤히, 말와 왕국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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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촌 훈족의 역사[1] |
알촌(αλχον(ν)ο)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있었던 유목민족이었다. 이전에 이들은 에프탈과 동일민족인 것으로 오인되었으나 현재는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두 민족이 별개의 유목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의 인도 아대륙 침공은 그들보다 약 1세기 앞서 있었던 키다라를 근절하고 굽타 제국의 몰락에 기여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고전 인도의 종말을 가져왔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의 야바나(인도-그리스 왕국), 서기 2세기의 샤카(인도-스키타이 왕국), 서기 3세기의 팔라바(인도-파르티아 왕국)과 쿠샤나(쿠샨 왕조)의 침공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그 영역은 펀자브에서부터 북인도를 넘어 인도 중부의 에란과 카우샴비에까지 이르렀다.
2. 역사
2.1. 초기
이들은 서기 356년의 로마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가 작성한 기록에서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그는 당시 사산 황제였던 샤푸르 2세가 동쪽 국경에서 '모든 야만부족들 가운데 가장 호전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이들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이후인 370년경에 알촌 훈족은 박트리아를 점령하고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키다라인들을 인도 방면으로 밀어냈다. 10년 뒤에는 카피사를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동부(카불리스탄)를 침공하여 사산 제국으로부터 그 지역을 탈취해갔으며 388년경에는 힌두쿠시 남부를 장악하였다.430년경이 되자 '킹길라'라는 왕이 등장하여, 키다라인을 몰아내고 힌두쿠시를 가로지르는 무역로를 점령하였다.[2] 이 시기를 다룬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에서는 그를 '인도의 왕'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460~470년 사이에 알촌인들은 간다라와 펀자브 지역을 점령하고[3] 굽타 제국의 북서부 영토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굽타인들은 이들의 침공이 나중에 인도에 어떤 재앙을 가져다 주는지를 알지 못했다.
서기 480년경부터 알촌 훈족이 인더스강 하구와 물탄 사이에 잇는 신드 지역을 점령했다고 추정되는데, 왜냐하면 당시 신드에서 주조되는 사산식 동전에 태양 상징물이나 훈족의 문장이 새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대개 '에프탈'의 침입의 산물로 묘사되며, 실제로 이 무렵 신드산 동전의 품질이 이전에 주조되었던 동전보다 훨씬 떨어지고 금 함유량 또한 상당히 감소된 것이 확인되었다.
5세기 말부터 알촌인들은 몇몇 부족장들의 지도 아래에서 점차 인도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한 인도 비문에 따르면 굽타 황제가 456년에서 457년 사이에 이름이 불분명한 이민족과 싸워서 이겼다고 한다.
2.2. 팽창
495~515년 사이에, 알촌 훈족은 토라마나 왕의 지도 아래 인도 영토 깊숙히 밀고 들어가서 인도 중부의 구자라트와 마디아프라데시까지 도달하여 굽타 제국을 완전히 몰락시켰다. 그들은 남쪽으로 적어도 구자라트 북부, 그리고 아마도 바루카차 항구까지 침략했으며, 동쪽으로는 중앙 인도를 넘어 훨씬 멀리까지ㅡ 토라마나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이 발견된 카우샴비[4]까지 침략했을 것이다. 이때 카우샴비에 있던 고시타라마 수도원은 파괴되어 잔해만 남았다.510년경, 말와에서 벌어진 에란 전투에서 토라마나는 황제 바누굽타를 물리치고 굽타 제국의 서부 영토를 통째로 장악했다. 6세기경의 불교 사료인 『대방광보살장문수사리근본의궤경(大方廣菩薩藏文殊師利根本儀軌經)』에서는 바누굽타가 마가다로 정복을 계속한 '수드라' 토라마나에게 말와를 상실했고, 그 후계자인 나라심하굽타 발라디티야를 벵골로 후퇴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토라마나는 '웅장한 위용과 위대한 군대를 지닌' 가우다의 성지를 정복했다고도 한다.
화려함과 광채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 토라마나의 한 해....
토라마나의 에란 맷돼지 비문 중 일부
토라마나의 에란 맷돼지 비문 중 일부
지구를 정복한 토라마나, 지상의 군주가 천국을 이긴다.
토라마나의 금화에 새겨진 문구
토라마나의 금화에 새겨진 문구
2.3. 쇠퇴와 멸망
토라마나의 뒤를 이은 미히라쿨라도 정복 활동을 계속해나갔으나, 그는 528년 손다니 전투에서 말와의 야쇼다르만과 굽타 황제 나라심하굽타가 이끄는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그 결과 542년까지 펀자브와 북인도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였다.이후 알촌 훈족들은 카슈미르 일대에 정착하여 1세기 가량 존속했으나, 서기 625년에 마지막 왕이 카르코타 왕조의 개창자에게 찬탈당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한편 알촌 훈족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또다른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일파였던 네자크 훈족이 정착하였다.
3. 불교 박해 및 살육
왕(미히라쿨라)은 국사가 잠시 한가해지자 부처님의 불법을 배우고자 하여, 스님들 가운데 덕이 높은 이를 천거하도록 하였으나 여러 승도들 가운데 아무도 따르는 이가 없었다...(중략) 이때 예전에 왕가의 종이었던 자가 있었는데, 출가한 지 이미 오래였으나 그의 논리가 청아하고 맑은 의미가 풍부하고 명민하였으므로, 대중들이 함께 그를 천거하고는 왕의 명령을 따르기로 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법을 존경하여 멀리 빼어난 스님을 찾았는데, 대중들이 이런 노예를 천거하여 나와 담론하게 하는구나. 무릇 승중이라 함은 현명한 자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많은 줄로 알았건만, 그런데 지금 와서 이것을 보니 어찌 존경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5인도국에 명을 내려 부처님의 법을 잇는 것은 모조리 멸하게 하였고 승도들은 모두 쫓아내어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게 하였다.
현장, 대당서역기 4권
왕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법을 존경하여 멀리 빼어난 스님을 찾았는데, 대중들이 이런 노예를 천거하여 나와 담론하게 하는구나. 무릇 승중이라 함은 현명한 자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많은 줄로 알았건만, 그런데 지금 와서 이것을 보니 어찌 존경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는 5인도국에 명을 내려 부처님의 법을 잇는 것은 모조리 멸하게 하였고 승도들은 모두 쫓아내어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게 하였다.
현장, 대당서역기 4권
그의 안에서, 북쪽 지방은 그대로 다른 죽음의 신에 이끌렸고, 경쟁심으로 인해 야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은 그의 군대의 손이 닿는 곳에서 죽임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먹기 위해 앞으로 날아가는 독수리와 까마귀, 그리고 다른 새들을 보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그 악마는 밤낮으로 수천 명을 살해했는데, 이는 심지어 그가 유흥을 즐길 때도 계속하였다. 이 끔찍한 인류의 적은 아이, 여자, 노인에 대한 존경심 따위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2세기의 인도 역사가 칼하나
12세기의 인도 역사가 칼하나
4. 의외의 기여
알촌 훈족은 간다라의 뛰어난 문화를 남쪽으로 전해주어 인도의 예술 양식이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바카타카 왕조가 축조한 아잔타 석굴은 후기로 갈수록 유난히 간다라 양식과 비슷한 특징이 많아지는데, 이는 알촌 훈족의 침공 시기와 아잔타 석굴의 확장 시기가 유사한 시기에 이루어져서 일지도 모른다.[1] Anwoo Mapping History의 영상.[2]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그가 주조한 동전이 카불 남동쪽 메스 아이낙이라는 유적지의 불교 사원에서 대거 출토되었다.[3] 알촌 훈족은 당시 간다라 지역의 학문 중심지였던 탁실라의 불교 사원과 스투파를 모조리 파괴해버렸는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수십년이 지나도 복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대제가 건립한 카니슈카 스투파 역시 완전히 파괴되어 이후에는 잔해조차 남지 않았다.[4] 카우샴비는 기원전 500년경에 건설된 도시로서 오랫동안 인도의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도시는 매우 번성하였고 수많은 백만장자 상인들이 그곳에 거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