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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9 13:22:29

인도-그리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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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그리스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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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그리스 왕국의 최대 강역
존속기간 기원전 180년 ~ 기원후 10년
수도 카프카스의 알렉산드리아[1]
탁실라
사갈라
국가원수 바실레우스
주요 군주 메난드로스(기원전 155?~기원전 130)
언어 코이네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종교 고대 그리스 신앙
불교
조로아스터교
브라만교
성립 이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마우리아 왕조
멸망 이후 인도-파르티아, 인도-스키타이

1. 개요2. 배경
2.1. 그리스인의 인도 진출2.2.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발전2.3. 슝가 제국의 부상
3. 역사4. 문화

[clearfix]

1. 개요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건설한 헬레니즘 제국이 쇠퇴하면서 떨어져나간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이 인도 아대륙의 서북부 지역으로 넘어와 세운 왕국들을 통틀어서 지칭하는 말이다.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 초까지 펀자브를 중심으로 존재했고, 간다라 문화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메난드로스 왕의 사후 차츰 쇠퇴하여 서북 방면에서 몰려온 사카족들에 의해 멸망했다. 인도-그리스 왕국의 그리스인들은 고대 인도인들로부터 그리스의 별칭인 '이오니아'(Ἰωνία)에서 유래한 요나(𑀬𑁄𑀦, Yoṇa) 또는 야바나(𑀬𑀯𑀦, Yavana)라고 불렸다.

2. 배경

2.1. 그리스인의 인도 진출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대부터 인도 아대륙의 북서부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나[2] 대대적인 이주가 이루어진 것은 기원전 4세기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더스강 유역까지 진출한 이후부터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6년에 히파시스 강을 포함한 인도 아대륙의 북서부를 점령했으며, 나아가 그곳에 속주(사트라피)를 설립하고 부케팔라를 비롯한 여러 정착지들을 세운 후에 회군하였다.

기원전 322년, 그리스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반란에 동참하여 난다 왕조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까지 쳐들어갔다. 《무드라락샤사》나 《파리시타파르반》과 같은 서사시에서는 찬드라굽타가 야바나(그리스인), 캄보자, 샤카(스키타이), 키라타(네팔인), 파라시카(페르시아인), 바흐리카(박트리아인)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를 거느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펀자브 지역에 있던 인더스 속주는 321년 바빌론 조약에 따라 포루스타크실레스[3] 사이에 분할되었고, 남은 영토는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이었던 에우데모스[4]와 페이톤[5]이 각각 통치하게 되었다. 이후 에우데모스는 탁실라를 잠시 점령하였으나 기원전 316년경에 페이톤과 함께 인도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더스 속주는 마우리아 왕조의 영토로 편입되게 된다.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 제국셀레우코스 1세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협정(Ἐπιγαμία)'을 맺어 마우리아 왕조의 인더스~아라코시아 지배를 인정하는 댓가로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받았다.[6] 또한 자신의 딸을 마우리아 왕실에 시집보내기도 했다.[7][8]
인도인들은 과거 페르시아에 속해 있던 인더스 강을 따라 위치한 몇몇 나라들을 차지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인들로부터 그곳을 빼앗고 (그 지역에) 자신의 정착지들을 세웠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니카토르는 협정의 대가로 그것들을 산드로코토스(Σανδροκόττος)에게 주고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았다.
스트라본
찬드라굽타파우사야바나술루바의 딸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는 불교도들과 야바나인들을 모두 다스렸다. 그는 60년 동안 통치했다. (그로부터) 빈두사라라는 아들이 태어나 아버지와 똑같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아들은 아소카였다.
고전 인도 서사시 《프라티사르가 파르바》

찬드라굽타의 손자 아소카 시대에는 인도에서 불교가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는 기원전 250년경부터 인도 너머의 헬레니즘 세계로 불교를 전파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가 반포한 아소카 칙령과 여러 비문에 따르면, 아소카는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비문을 아람어[9]그리스어로 새겼고 사절단을 아시아와 지중해의 여러 그리스 왕국들에게 파견했다고 한다. 이때 세워진 비문에는 그리스 세계에 대한 언급이 드러난다.
다르마의 정복은 이곳과 국경, 심지어 그리스 왕 안티오코스가 통치하는 600 요자나[10]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다. 그 너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알렉산드로스라는 네 명의 왕들이 있고, (우리의) 남쪽에는 촐라, 판디아, 탐라파르니 등이 있다.
아소카 칙령 비문 중 하나
따라서 가장 유용한 철학은 고대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번성하였고 이후 여러 나라들에서 빛을 발했으며, 나중에 가서야 그리스에 도착했다. 이집트의 선지자, 아시리아칼데아인, 갈리아드루이드, 박트리아스라마나("Σαρμαναίοι Βάκτρων"), 켈트의 철학자, 그리고 구세주의 탄생을 예견하고 별의 인도를 받아 유대 땅에 당도한 페르시아의 마기들이 거기에 합류했다. 인도의 짐노소피스트[11]들과 다른 야만 철학자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스라마나(Σαρμάναι)라고 불리고, 다른 하나는 브라만(Βραφμαναι)이라고 불린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교리학자 클레멘트, 서기 2세기경

기원전 206년, 셀레우코스 황제인 안티오코스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불 계곡으로 가서 그곳의 왕이었던 소파가세노스로부터 전쟁 코끼리와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인더스 강 유역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왕조의 통치 하에 각각 나뉘어져 있었다.
(안티오코스는) 카프카스 인디쿠스[12]를 건넜다. 그리고 그는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의 우정을 다시 쌓았다. 그로부터 코끼리를 많이 받아 총 150마리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군대를 먹이고 직접 다시 출발하여, 그가 자신에게 넘겨주기로 한 보물을 가져오는 임무를 키지쿠스의 안드로테네스에게 맡겼다. 아라코시아를 가로질러 에니만투스 강을 건넌 그는 드랑기아나를 거쳐 카르마니아에 이르렀고...(중략)
폴리비오스

2.2.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발전

파일:PhilosopherBust.jpg
기원전 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 하눔의 한 동상. 노년 철학자를 묘사한 듯한 모습이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하기 전에 정복했던 박트리아 일대에도 여러 속주들과 정착지들을 세워놓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카프카스의 알렉산드리아아이 하눔(옥수스의 알렉산드리아) 등이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후,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창건한 셀레우코스 1세의 지배 하에 들어갔으나 곧 박트리아 총독이었던 디오토도스 1세가 기원전 250년경에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우고는 독립해나갔다.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의 시리아 전쟁에 골몰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아시아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이웃한 파르티아의 사트라프이자 자칭 왕이었던 안드라고라스가 아르사케스 1세에 의해 정복당하고, 그 자리에 파르티아 제국이 세워지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더욱 독립성을 띠게 되었다.[13] 특히 왕국의 중심지였던 박트리아는 고도로 도시화되어 있었으며 동양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했다. 일설에는 '천개의 도시를 가진 번영하는 박트리아 제국'이라고 불리웠다고도 한다.

디오도토스 1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인 디오도토스 2세가 즉위하였다. 디오도토스 2세는 자신의 지배권을 확고히 구축했고, 파르티아 왕국의 창시자인 아르사케스 1세와 평화조약을 맺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디오도토스, 박트리아의 1,000개의 도시의 총독은 그곳에서 스스로를 왕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주변의 다른 도시들도 그(의 선례)를 따라 마케도니아에서 독립해나갔다...(중략)

얼마 지나지 않아, 디오도토스의 죽음으로 안도한 아르사케스는 평화를 체결하고 디오도토스라는 이름의 아들과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그는 반란을 처벌하러 온 셀레우코스인들과 싸워 승리했다. 파르티아인들은 이 날을 그들의 자유의 시작을 알린 날로써 기념했다[...]
유스티누스
박트리아의 면적은 광대하다. 이 나라의 토양은 올리브 재배를 제외한 모든 경작에 적합하다. 반란을 일으켜 셀레우코스로부터 독립한 그리스인들은 그 나라의 비옥함 덕분에 매우 강력해져서, 아르테미타의 아폴로도로스가 말했듯이 아리아나뿐만 아니라 인도의 주인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보다 더 많은 부족들이 그들에게 정복당했다[...] 그곳에는 박트라와 다랍사, 그리고 여러 다른 도시들이 있으며, 그중에는 통치자의 이름을 딴 에우크라티데아도 있다.
스트라본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소그디아나의 사트라프였던 에우튀데모스가 기원전 230년경에 디오도토스 2세를 죽이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의 영향력은 페르가나의 알렉산드리아 에샤테를 넘어 소그디아나까지 확장되었다. 에우튀데모스는 기원전 210년경에 안티오코스 3세가 이끄는 셀레우코스 군대의 침공을 받았지만, 3년간 저항한 끝에 그와 타협하여 박트리아의 총독으로 계속 부임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와 결혼 동맹도 맺었다.[14] 셀레우코스 군대가 떠난 후에 에우튀데모스는 다시 팽창 정책을 시작한다. 기원전 200년경이 되면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파르티아를 복속시키고 트라시아네와 타푸리아[15]까지, 북쪽으로는 소그디아나를 넘어 페르가나카슈가르, 우루무치까지 이르렀다.[16]

한 무제의 명을 받고 흉노에 대항할 동맹을 찾고자 중앙아시아로 파견된 사절 장건은 기원전 126년경에 박트리아를 방문했으며, 이들이 인도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이후 여러 중국 사절단들이 중앙아시아로 파견되어 기원전 2세기 말부터 실크로드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파일:코린트식 기둥.jpg
기원전 2세기경에 만들어진 코린트식 기둥.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것이다.

2.3. 슝가 제국의 부상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183년경 군대 총사령관이자 브라만이었던 푸시야미트라 슝가가 마지막 마우리아 황제였던 브리하드라타를 암살하면서 멸망하였다. 이후 푸시야미트라는 왕위에 올라 슝가 왕조를 개창하였고, 동쪽으로는 벵골에서부터 서쪽으로는 펀자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소카바다나》와 같은 불교 소식통들은 푸시야미트라가 불교에 대단히 적대적이었으며 신앙을 박해했다고 종종 언급한다. 마우리아 왕조 시기에 번성했던 날란다, 보드가야, 사르나트, 마투라에 있던 불교 대학과 수도원들이 강제로 브라만교 사원으로 바뀌었다고도 하였다. 세속 사료에 따르면 이때 불교와 브라만교가 경쟁하고 있었고, 마우리아 왕조는 전자를 선호했지만 슝가 왕조는 후자를 선호했다고 한다.[17]
찬드라굽타, 빈두사라, 아소카의 통치 이후, 이 시기에 브라흐마 중 최고의 인물이었던 칸야쿠바는 아르붓다라는 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다. 베다만트라에서 영감을 받아 야즈나(희생제)를 거행하자 네 명의 크샤트리아가 나타났다[...] 그들은 아소카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모든 불교도들을 전멸시켰다. (그들에 의해 사망한) 불교도의 수가 대략 400만 명에 달했으며...(중략)
고전 인도 서사시 《프라티사르가 파르바》

3. 역사

본래 이 왕국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헬레니즘 제국에서 쪼개진 셀레우코스 제국속주들이었다. 그러다가 셀레우코스 제국이 휘청거리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남겨두고 간 그리스인들이 박트리아 지방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에우튀데모스 왕조의 데메트리오스 1세의 집권기 때, 인도 서북지역을 넘어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던 마우리아 왕조를 몰아냈다. 그러나 에우튀데모스 왕조는 에우크라티데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본거지인 박트리아 지역을 내주고, 인도 서북지역으로 피신하여, 이곳에 피난 왕조를 세웠다. 이것이 인도-그리스 왕국이었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단순히 나라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 지역의 그리스 계열 왕국들을 통틀어서 부르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탁실라(Taxila), 카피사(Kapisa), 판차나다(Panchanada), 아라코시아(Arachosia), 푸슈칼라바티(Puskalavati), 사갈라(Sakala) 등이 있었다. 인도에 진출한 이들 그리스인들이 인도의 풍습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들을 인도-그리스인 또는 박트리아-그리스인이라고도 부른다. 이들이 인도화되면서 그리스인들이 세운 왕국은 박트리아와 인도로 점차 나뉘게 되었다.

인도-그리스 왕국의 힘이 가장 강성했을 때는 인도 신화에서 비슈누 신의 성지였던 파탈리푸트라와 인도 서북부 해안의 여러 도시들이 이들의 지배를 받았다. 즉 인도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이 그리스인들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이들 인도-그리스 왕국들은 그리스 신화를 주로 믿었는데 이중 사갈라 왕국의 메난드로스 왕의 경우, 《밀린다왕문경》(Milinda Panho)( =《나선비구경》)에 의하면 수준 높은 불교적 담론까지 나눌 수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역사적인 근거는 없다.[18]

인도-그리스 왕국의 인도 유입은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리스에서 주조한 화폐들이 이 시기에 많이 유입되어 후에 인도 역사의 연대를 규정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인도-그리스인들은 자신들만의 금화를 주조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월지계 쿠샨 왕조에서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거기다 이들의 침입으로 인도 서북 지역에서는 간다라 양식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헬레니즘 문화가 성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인도-그리스 왕국들은 월지인들에게 쫓겨온 사카족[19]의 침입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사카족들의 국가인 인도-스키타이가 들어섰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서기 3, 4세기에도 야바나인[20]의 정치집단이 확인되며, 9세기까지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주화에 그리스어를 기입한 사례가 존재한다.

4. 문화

그리스인들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가 섞인 헬레니즘 문화가 성행했다. 이의 영향으로 간다라 양식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작품이나 건축, 석굴상 등이 제작되기도 했다. 통치자의 초상을 새긴 주화가 북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그리스인 장인들에 의해 주조되었으며, 통치 및 행정 언어도 인도-스키타이 왕국 시대까지는 그리스어로 남아서, 이 시기에 인도를 여행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에서 인도까지의 기나긴 육로를 그리스어만 사용해 여행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인도의 천문학 발전에 기여했는데, 산스크리트어로 점성술을 뜻하는 “호라샤스트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천문과 시간 관측을 뜻하는 “흐로스코포스”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헬레니즘 문화 문서를 참조.


[1] 고대 그리스인들은 험준한 힌두쿠시 산맥을 두고 '인도의 카프카스(Καύκασος Ινδικός)'라고도 하였으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남동부에 위치해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 대개는 페르시아 당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본보기로 저멀리 유배당하는 수준이었다.[3] 탁실라의 왕이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 하다.[4] 인더스 상류[5] 인더스 하류[6] 나중에 셀레우코스 1세는 입소스 전투에서 이 전투 코끼리들을 요긴하게 써먹어 안티고노스 1세로부터 승리한다.[7] 때문에 일부 인도 기록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인 아소카를 '½ 그리스인' 또는 ¼ 그리스인'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8] 양측은 꽤 자주 선물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마우리아 궁정에는 자주 방문하는 그리스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응대하는 신하들이 따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북인도 전역에서는 이 시기의 헬레니즘식 도자기가 꽤 자주 발견되기도 한다.[9] 당시 중동의 공용어였다.[10] 고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사용된 거리 단위. 1요자나는 대략 12~15km이다.[11] 고대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현자, 혹은 "벌거벗은 철학자"를 의미하는 "김노스피스타이(γυμνοσοφισταί )"에서 유래한 용어이다.[12] 파로파미사다이.[13] 다만 지중해 세계의 그리스인들과의 교류, 특히 육로 무역은 사실상 거의 끊기게 되었다. 대신에 이집트와의 해상 무역은 계속해서 발전했다고 하는데, 중앙아시아 내륙에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어떻게 이집트와 해상 무역을 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14] 안티오코스 3세는 처음에는 박트리아를 무시하면서 쳐들어갔지만 나중에 이기지 못하자 '에우튀데모스가 반란군인 디오도토스 왕조를 전복시킨 공로가 있고, 중앙아시아를 유목민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있다'면서 칭찬하였다.[15] 오늘날 이란의 마잔다란주[16] 이때 중국과 서양 간의 최초의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스트라본은 "그들은 제국을 세레스와 프리니까지 확장시켰다"라고도 하였고, 톈산산맥 인근의 중국 관문에서는 그리스 군인들을 묘사한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17] 몇몇 학자들은 슝가 왕조의 불교 박해가 대체로 과장된 면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푸라나》와 《프라티사르가 파르바》와 같은 일부 서사시들에서도 슝가 왕조의 불교 박해와 관련된 내용이 종종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무조건 과장되었다고만 볼 수는 없을 수도 있다.[18] 《나선비구경》은 역사적인 대화를 엮은 책이 아니라, '가상인물'인 나가세나와 '전설화가 된' 메난드로스 왕을 내세운 '교리문답서'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와 같은 《나선비구경》의 내용은 형식적인 면에서조차 ‘대론서’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밀린다와 나가세나라는 두 사람의 이름을 빌려 《나선비구경》이 성립할 당시, 불교 교단의 안과 밖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교리적인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한 곳에 모아 문답의 형식을 취해 풀어나간 일종의 논서(論書) 성격을 지닌 교리문답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21] 메난드로스는 그리스계 인도 군인 출신으로, 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밀린다빵하》(Milindapañha)를 일본어로 번역한 하야시마 교쇼(早島鏡正) 역시 메난드로스를 “불교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고, 게다가 인도 문화권 밖에 있는 헬레니즘 문화권 가운데서 자란 그리스 왕”이라고 소개했다.[22] 같은 책에서 저자는 메난드로스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말을 '소문'으로 일축했다.[19] 스키타이계 민족[20] 인도인이 그리스인을 불렀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