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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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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1]
점부디퍼
𑀚𑀁𑀩𑀼𑀤𑀻𑀧
जम्बुद्वीप[2](산스크리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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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의 최대 판도[3]
기원전 322년 ~ 기원전 184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십육대국 사타바하나 왕조
인도-그리스 왕국
난다 제국 슝가 왕조
위치 인도 아대륙[4], 아프가니스탄
수도 파탈리푸트라[5]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 원수 삼라트(황제)
주요 황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아소카
면적 5,000,000km2[6]
언어 산스크리트어
마가다 프라크리트어[7]
민족 인도아리아인, 드라비다인
인구 1,500만 명 ~ 3,000만 명
종교 브라만교, 불교, 자이나교, 아지비카교[8]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기원전 322년 난다 제국 정복
기원전 268년 아소카 대제 즉위
기원전 184년 브리하드라타 왕 암살
통화 파나
언어별 명칭
산스크리트어 मौर्यसाम्राज्यम्
힌디어 मौर्य राजवंश
구자라트어 મૌર્ય_વંશ
벵골어 মৌর্য্য সাম্রাজ্য
타밀어 மௌரியப் பேரரசு
펀자브어 ਮੌਰੀਆ_ਰਾਜਪਾਟ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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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Αυτοκρατορία των Μαουρύα
영어 Maurya Empire
중국어 孔雀王朝(공작왕조)
러시아어 Империя Маурьев
스페인어 imperio maurya
프랑스어 empire maurya
아랍어 امبراطورية موريا }}}

1. 개요2. 역사
2.1. 건국2.2. 찬드라굽타2.3. 아소카 대제2.4. 쇠퇴와 멸망
3. 정치4. 문화5. 종교6. 자연 보호 정책7. 그리스 세계와의 교류8. 역대 황제

[clearfix]

1. 개요

고대 인도제국. 인도사에서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대제국으로, 인도 역사에서 무굴 제국과 함께 손꼽힐 만큼 거대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9] 또한 영국령 인도 제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인도 아대륙 거의 전역을 통치했던 나라이다.[10]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22년 경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건국했다. 찬드라굽타는 이전까지 북인도의 패자였던 난다 제국을 무너뜨렸으며,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으로 사분오열된 북인도 동부 지방까지 빠르게 집어삼키면서 세를 불렸다.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인더스 강 동편의 영토를 인정받으며 북인도를 통일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남진 정책을 펼치며 인도 아대륙 상당수를 집어삼켰다. 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왕인 아소카 대제 시절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아소카 대제는 재위 초기에 최남단을 제외하면 인도 대륙을 통일하였으며, 재위 중후반기에는 불교를 받아들여 문화, 예술을 장려하고 불교를 전파하는 데에 힘썼다. 당대 마우리아 왕조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제국[11]이었으며, 37년에 달하는 아소카 대제 치세 내내 찬란한 고대 인도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러나 마우리아 왕조 역시 아소카 대제 사후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제국을 유지할 능력이 있던 5대 국왕인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50여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자 마우리아 왕조는 빠르게 무너졌다. 아소카 대제가 정복한 사타바하나 왕조 등을 포함한 남부 지방들이 독립해 떨어져 나갔고, 무능하고 포악한 암군들이 연이어 즉위하며 마우리아 왕조는 갈수록 수렁에 빠져들었다. 기원전 180년대 즈음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쳐들어와 인더스 강 동편에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우며 마우리아 왕조의 강역은 북인도 동부 일대로 축소되었다. 결국 기원전 184년에 최후의 왕인 브리하드라타 왕이 푸샤미트라 슝가 장군에게 살해당하면서 마우리아 왕조는 개국 139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이후 인도 북동부에는 슝가 왕조가 들어선다.

2. 역사

2.1.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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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드라굽타 차나키야 찬드라굽타와 대화하는 차나키야
마우리아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 북인도에서는 서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대가, 동쪽에는 강대한 난다 제국이 버티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왕의 지나치게 오랜 원정 때문에 병사들이 항의하자 결국 그리스 군대는 서쪽의 바빌론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12][13] 대신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점령한 인도 영토에 휘하 장군들을 사트라프[14]로 세워놓고 돌아갔다. 비록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회군했지만 그의 정복 전쟁 덕분에 북인도의 서부 지방에 있는 기존의 소왕국들은 죄다 당대 최강국들 중 하나였던 그리스 군대 앞에 쓸려나갔고, 이같은 불안정한 상황은 후일 들어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한편 마우리아 왕조의 건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차나키야'라는 인물이다.[15] 차나키야는 본디 탁실라 지방의 브라만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이미 베다 경전을 꿰뚫고 정치질에 능한 총명한 학자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처럼 총명한 머리를 타고났던 차나키야는 앞니가 깨진 데다가 절름발이였던지라 외모가 보기에 굉장히 흉측했다. 어느날 차나키야가 난다 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의식을 치르러 갔는데, 당시 난다 제국의 왕이었던 다나 난다는 차나키야의 볼품없는 외모를 보고 당장 그를 내쫓을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왕이 대놓고 자신을 모욕하자 이에 앙심을 품은 차나키야는 다나 난다와 난다 제국을 저주했고, 다나 난다를 쫓아낼 인물을 찾아 전 인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정처없이 인도를 떠돌아다니던 와중 차나키야는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키가 크고 잘생겨 한눈에 보기에도 튀는 아이 한 명이 왕 역할을 맡아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도둑 역할을 맡은 아이들의 다리를 잘랐다가 다시 붙이는 등[16]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내자 차나키야는 이 사람이다 싶어 바로 아이의 양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직접 데려가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비범한 아이가 바로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 마우리아(चन्द्रगुप्त मौर्य)다.[17]

찬드라굽타는 차나키야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으며 쑥쑥 성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북인도에서도 내로라하는 호걸로 성장한 찬드라굽타는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인근의 펀자브 지역을 집어삼키는 데 성공했다. 찬드라굽타는 알렉산드로스 때문에 잘게잘게 쪼개진 펀자브 지방의 소왕국들을 하나하나 정복했고, 덕분에 토착 군벌들과 그리스 잔존 세력들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다.[18]

펀자브를 집어삼킨 찬드라굽타는 이제 북인도의 패자였던 난다 제국을 노렸다. 비옥한 마가다 일대를 장악한 난다 제국을 집어삼킨다면 더이상 북인도에서 자신을 상대할 적수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찬드라굽타는 당시 난다의 왕이었던 다나 난다의 폭정에 반발하던 세력들을 모아 연합군을 꾸렸다. 찬드라굽타는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거주하는 호전적인 부족들[19]스키타이족, 페르시아인, 박트리아인들까지 싸그리 모아 연합군을 만들어 난다 제국을 야금야금 먹어치워갔다.[20]

파탈리푸트라 인근까지 진군한 찬드라굽타는 파탈리푸트라 함락을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동원했다. 도시 내부에 헛소문들을 퍼뜨려 왕자들이 서로 내전을 준비 중이라는 이야기를 내는 한편, 난다 제국의 왕위 계승자들을 하나하나 제거하면서 난다 제국의 왕인 다나 난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여론이 극도로 불리해지자 결국 다나 난다는 찬드라굽타에게 양위했고,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이렇게 북인도 최강국이었던 난다 제국을 무너뜨렸다.

2.2. 찬드라굽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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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왕조의 영토 확장 셀레우코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한 찬드라굽타
난다 제국을 무너뜨림으로써 북부 인도 최강자로 등극한 찬드라굽타는 거침없는 정복 활동을 펼쳐나갔다. 찬드라굽타는 인더스 강 유역과 인도 북서부를 장악했다. 한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젊은 나이로 사망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휘하 장군들에게 나뉘어졌는데 개중 인도 점령지를 포함한 페르시아의 영토는 셀레우코스 장군이 가져갔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세운 그리스계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라고 부른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필사적으로 인도의 점령지들을 지키려 들었으나, 페르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는 데도 버거웠던 셀레우코스 왕조가 머나먼 인도까지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무리였다.

찬드라굽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셀레우코스 왕조 휘하의 수많은 그리스계 소왕국들을 침공했고,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는 울며 겨자먹기로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포함한 북인도의 서부 지방들을 마우리아 왕조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마우리아 왕조는 기원전 303년 평화조약을 맺었으며[21][22] 이후 그리스인 사절이 파탈리푸트라에 방문하는 등 활발히 교류하기도 했다.[23]

마우리아 왕조를 개창한 찬드라굽타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펼쳤다. 찬드라굽타는 왕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를 완전히 재건설하여 왕의 위엄을 드높이는 한편, 행정구역들을 개편하고 인근 소왕국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등 마우리아 왕조의 기틀을 놓는 데 힘썼다. 당시 찬드라굽타는 파탈리푸트라에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고 전해지는데, 힌두 기록에 의하면 당시 파탈리푸트라에는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들이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24]

당시 파탈리푸트라를 직접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클라우디우스 아엘리아누스는 마우리아 왕조의 궁전들이 페르세폴리스슈쉬의 궁전들에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을 정도라고 극찬했는데, 정황상 이는 파탈리푸트라를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인도의 마키아벨리'라 불리는 명재상 차나키야[25]의 보좌와 멸망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정치제도 사례 참고, 그리스의 외교사절 메가스테네스의 도움에 힘입어 찬드라굽타는 마우리아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변모시켰고, 덕분에 마우리아 왕조는 몇 백여 년 동안 지속될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찬드라굽타의 활발한 정복 활동 덕분에 찬드라굽타 치하의 마우리아 왕조는 동쪽으로 벵골 만, 서쪽으로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다.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인더스 강 서쪽 영토들을 빼앗은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남진 정책을 폈다. 찬드라굽타는 데칸 고원으로 진군하면서 중부 인도, 남인도 지방들 대부분을 정복했고, 찬드라굽타 재위 말년의 마우리아 왕조는 인도 아대륙 거의 대부분을 다스리는 거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찬드라굽타의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머나먼 그리스인들이 그를 전인도의 황제로 부르면서 따로 기록에 남기기도 했을 정도였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으로 유명한 플루타르코스 등이 있다. 어찌됐든 찬드라굽타는 개수 사업을 실시하고 행정 제도 개편, 중앙정부에 장관회의를 설치하고 예술을 장려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 시기 내내 번영을 누렸다.

이토록 마우리아 왕조를 번영시킨 찬드라굽타의 말년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확실치 않다. 전설에 의하면 찬드라굽타의 지나치게 잔인한 정복 활동 때문에 제국에 12년에 걸친 기근과 가뭄이 닥쳤고, 이에 절망한 찬드라굽타가 결국 자이나교에 귀의하여 왕위를 아들 빈두사라에게 넘겨주고 남인도의 카르나타카 지방으로 내려가 조용히 은둔하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26]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어서 다른 내용도 있다. 당시 마우리아 왕조의 재상이던 차나키야는 독실한 자이나교 신자였는데, 왕이 지나치게 여색을 탐하고, 자이나 교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많이 하자 참회의 뜻에서 왕에게 자이나교로의 입문을 권했다는 것이다. 이후 왕은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고, 말년에 조용하게 지내다가 명상 도중 승천했다는 내용이다. 어디까지나 자이나 경전에 적혀 있는 내용이기에 곧이곧대로 믿을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찬드라굽타는 말년에 자이나교에 귀의했으며 이후 조용히 수행자로 지내다 죽었다는 것.

찬드라굽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찬드라굽타의 아들인 빈두사라였다. 빈두사라 역시 찬드라굽타와 비슷하게 확실하게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많지 않기에 그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는 불교, 힌두, 자이나 경전이나 설화에 의지하는 편이라 정확하지는 않다. 기원전 297년 빈두사라는 22세라는 어리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에 전 인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물려받았다. 빈두사라는 전대 왕인 찬드라굽타나 후계자인 아소카 대제에 비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적은 편이다. 아버지를 도와 마우리아 왕조를 세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차나키야는 빈두사라의 재위기에도 여전히 재상직을 맡아 왕을 보좌했다고 알려져 있다.

빈두사라는 평화적인 외교정책을 폈기에 서쪽의 그리스계 왕국들과 대사들을 주고받으며 셀레우코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도 교류했다. 또한 마우리아 왕조를 적대하지 않던 남인도의 촐라족, 체라족들의 소왕국들은 건드리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려 노력하기도 했다. 다만 소왕국들 모두 마우리아의 패권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빈두사라 시대의 마우리아 왕조는 여전히 전 인도를 다스리고 있었으며, 마우리아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지역은 남부의 타밀, 칼링가 지역 밖에 없었다.[27]

2.3. 아소카 대제

파일:EmperorAshoka029.jpg
파일:350px-Ashoka_pillar_at_Vaishali,_Bihar,_India.jpg
파일:아소카 인도.jpg
아소카 대제의 상상화 아소카의 기둥[28] 주두의 사자상
빈두사라 왕은 28년[29] 간의 재위 기간을 마치고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기원전 268년에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아소카가 왕위에 올랐다. 아소카 왕의 즉위 과정에 대해서는 역시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아소카는 빈두사라의 장자가 아니었는데, 첫째 아들인 수시마가 왕위에 오른 후 자신들을 해할 것을 두려워한 재상들이 미리 수시마를 칼로 쳐죽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가 병환에 빠진 틈을 타 아소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나머지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둘다 기록이 정확하지는 않으니 확실히 믿을 것은 못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소카 왕의 즉위 과정이 그다지 평화롭지는 못했다는 것. 어찌되었든 아소카는 기원전 268년에 대관을 치르고 마우리아의 3대 왕에 즉위하였으며, 그의 재위기 마우리아 왕조는 역대급 영토를 자랑하며 인도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달렸다.

먼치킨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아소카는 왕자 시절부터 이미 탁실라, 마디아프라데시 등에서 일어난 반란군을 격파하며 위용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뛰어난 군재는 어디가지 않았던지 아소카는 즉위 직후부터 남부의 소왕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우리아 왕조의 물량과 아소카의 탁월한 지휘가 합쳐진 마우리아 군대 앞에 대부분의 소왕국들은 가차없이 깨져나갔고, 마우리아 왕조는 얼마가지 않아 인도 최남단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 넓은 인도 대륙 전부를 정복하는 기염을 토했다.[30][31]

이렇게 위대한 정복활동을 펼친 아소카 왕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잔인하다'라는 말이었다. 사람들이 '아소카는 지옥에 내려가 고문 기술을 배워왔다'라고 수군거릴 정도로 아소카 왕의 손속은 대단히 잔인했다. 아소카 왕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에 도움을 준 공신들을 충성심을 시험한다는 이유로 몇 백여 명씩 죽여버렸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의 꽃을 땄다는 이유로 한 여인에게 500대의 채찍형을 가하는가 하면 아소카의 지옥이라는 고문용 궁전[32]을 만들어 각지에서 끌려온 포로들을 고문하는 심히 사디스틱한 취향을 갖고 있었다.

이토록 잔인하던 아소카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평화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니, 이유인즉슨 바로 아소카 왕이 불교로 개종했기 때문이었다. 아소카는 재위 8년에 고대 국가인 칼링가 왕국를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고, 15만 명이 마우리아로 포로로 잡혀갔다. 아소카 왕은 전투가 끝나고 적국 마을에 들어서니 피가 발목까지 들어차고, 아이들이 고아가 되어 죽은 가족들 때문에 미쳐버린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불교로 개종한다.[33]
파일:2d0786d4dea3a3674e5e5bd9260c00c1.jpg
칼링가 전쟁의 상상화
아소카의 치세는 그가 불교로 개종하기 전과 후로 나눌 정도로 그 차이가 극명했다. 개종 이전까지 호전적이기 짝이 없던 아소카 왕은 개종한 이후부터는 거의 모든 정복 활동을 삼갔으며, 불교 교리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전국에 스투파[34][35]와 사찰들이 들어섰고, 구전에 의하면 약 84,000개의 사찰들이 인도 곳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아소카 왕은 불교 교리와 그에 걸맞은 사회적, 도덕적 규범을 담은 《아소카의 칙령》을 반포했고, 인도 전역에 이 칙령의 내용을 새긴'아소카의 기둥'을 세웠다.[36] '법'과 '정의'라는 뜻을 포함한 다르마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각종 법조항들을 성문화했으며, 불교 교리에 따라 복지와 평등의 개념을 설파했다.

아소카 왕은 시민들을 위해 병원이나 약국을 지을 것을 명했고, 관리들에게 노인과 장애인들을 돕게 시켰다. 작게는 망고나 반얀 나무를 키우는 대농장을 도로로부터 최소한 800m 이상 떨어진 곳에 지을 것 등 세세한 부분까지 법령으로 만들어 전 국민들을 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소카 왕은 불교를 자신의 제국 안에만 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이 좋은걸 외국에도 전파해야겠다 싶었던 아소카는 전법사들을 스리랑카, 중국, 태국, 히말라야, 심지어는 저멀리 그리스에까지 파견했다. 덕분에 원산지인 인도 내부에만 머무르던 불교는 이를 기점으로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또 불교의 아힘사 사상을 깊이 따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와중에 비폭력, 비전쟁 법률을 제정하고 강제노동, 사냥 등을 금지시켰다. 또한 최초의 정신병원, 동물병원, 고아원, 양로원 등을 만들고 수의사 제도를 만들어 복지 제도를 크게 확충했다. 곡식을 매우 싼 이자에 빌려주고 물이 없는 마을에 노동력을 동원해 우물을 파는 등 인프라를 확립하기도 했다. 아소카 왕은 각국에 외교 사절단을 파견해 불교 전파와 동시에 마우리아 왕조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애썼다.

아소카 대제는 특히 서쪽에 있는 그리스계 왕국들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전국에 박아놓은 '아소카의 기둥'에 새겨진 안티오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알렉산드로스헬레니즘 지역의 통치자 이름도 발견된다. 확실치는 않으나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키레네의 왕 마가스가 보낸 친선 사절단을 알현했다는 기록도 전해내려온다. 아소카 왕이 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기에 대왕의 칭호를 붙여 보통 아소카 대제라고 부른다.

2.4. 쇠퇴와 멸망

장장 37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재위한 아소카 대제는 72세를 일기로 기원전 232년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37] 탁월한 군재(軍才)로 인도를 휘어잡던 아소카 왕이 사망한 이후, 마우리아 왕조는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한다. 아소카 왕이 당시 기준으로 워낙 오래 살았기에 아들들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장자인 마힌다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순례를 떠나버렸고, 쿠날라 마우리아는 장님이었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티발라는 아버지보다도 먼저 죽었다. 때문에 아소카 사후 왕위에 오른 인물은 아소카의 손자였던 다사라타 마우리아였다.

다사라타 마우리아 치하의 마우리아 왕조는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황제의 숙부인 잘라우카 마우리아가 카슈미르 지방에 독립 왕국을 세워 떨어져나가는가 하면 간다라 지방에서는 왕자들 중 하나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서 먼 지방들부터 잃어갔다. 가장 먼저 아소카 대제 시절 점령한 남인도와 중부 인도의 토착 세력들, 가장 대표적으로 사타바하나 왕조가 마우리아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독립해나갔다. 또한 헬레니즘 왕국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인더스 강 유역에 대한 마우리아의 영향력도 점차 약해졌다고 한다.

기원전 224년에 다사라타 마우리아가 사망하자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왕이 되었다. 삼프라티 마우리아는 장님이었기에 왕이 되지 못했던 쿠날라 마우리아의 아들로, 아소카 대제 사후 유일하게 명군 축에 낄 수 있는 군주였다. 삼프라티는 선왕 다사라타 시절 잃어버린 영토들 중 상당수를 재정복했고, 마하라슈트라, 마이소르, 안드라, 구자라트 남부 지방들을 다시 마우리아 아래에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자이나교의 철저한 신봉자였던 삼프라티는 할아버지 아소카 대제의 불교 장려 정책을 폐지하고 자이나교 위주의 종교 정책을 펼쳤다. 다만 불교나 자이나교나 해외로의 선교사 파견만큼은 멈추지 않았던지 인도의 불교, 자이나교 포교는 삼프라티 마우리아 시기까지 쭉 계속되었다고 한다. 삼프라티는 9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고, 삼프라티 재위기 마우리아 왕조는 파멸적인 재앙이나 대전쟁은 겪지 않았으나 서서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느린 속도로 쇠락한다.

기원전 215년에는 살리수카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13년 동안 재위했다는 것, 그리고 상당한 암군에 성격도 좋지 못했고 잔인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많지 않다. 기원전 202년에 왕위에 오른 데바바르만 마우리아 역시 전임자를 그대로 닮았다고 한다. 손속이 잔인하고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니 수많은 세력들이 마우리아 왕조에게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갔다. 삼프라티 마우리아가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던 마우리아 왕조의 막대한 영토는 갈수록 쪼그라들어갔고, 아소카 대제 시절 대제국의 영광은 찾아볼 수도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재앙에 가까웠던 데바바르만 왕의 7년 치세가 끝난 이후 기원전 195년 사타단반 마우리아가 새 왕에 즉위했다. 사타단반 마우리아 역시 별다른 업적은 남기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8년이라는 짧은 세월 밖에 통치하지 못했다. 기원전 187년에는 마우리아 최후의 왕인 브리하드라타 왕이 즉위했다.

브리하드라타 왕은 즉위 직후부터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력이 약해지면서[38]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의 비좁은 산악 통로, 즉 페샤와르의 방비 역시 자연스레 허술해졌다. 서쪽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이 기회다 싶어 마우리아를 침공했고,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인도 북동부 지방을 먹어치우고 기원전 180년 즈음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39] 결국 기원전 185년에 휘하 장군이었던 푸시야미트라 슝가가 쿠데타를 일으켜 브리하드라타를 죽이고 슝가 왕조를 세우면서 마우리아 왕조는 139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40]

새롭게 들어선 슝가 왕조는 마우리아 왕조가 차지하고 있었던 인도 북동부 지방의 광활한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참고로 푸시야미트라는 약 36년을 재위했고, 왕위를 아들인 아그니미트라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아그니미트라 사후 슝가 왕조는 빠르게 쇠퇴했고, 마우리아 시절의 남인도와 서인도 지방은 아예 모조리 잃어버렸다. 게다가 북동부 인도 지방에서도 사실상 대부분의 행정구역들이 독자적으로 행세하면서 슝가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기원전 75년 경에 마지막 왕 데바후티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힌다는 이유로 슝가 왕조의 대신(大臣) 바스데바에게 암살당하면서 멸망한다. 슝가 왕조 이후 칸바 왕조가 수도인 파탈리푸트라를 물려받는다.

3. 정치

마우리아 제국은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기준으로 크게 4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었다. 각각의 행정구역마다 주도가 따로 있었는데 동쪽에는 토살리, 서쪽의 우자인, 남쪽의 수바르나기리, 북쪽의 탁실라가 각각 지방행정의 중심이었다고. 각각의 행정구역에는 '쿠마라'라고 해서 왕족 출신 총독들이 파견됐다. 이렇게 중앙에서 파견된 총독들이 지방 토후들을 데리고 행정을 책임지는 식이었다. 한편 파탈리푸트라의 중앙정부에서는 황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귀족들의 회의체인 '만트리파리샤드'가 황제를 보좌했고 마우리아 왕조의 황권은 역대 인도 국가들 중에서도 상당히 강력한 편이었다.

차나키야는 마우리아 왕조를 두고 '도시 위생부터 국제 무역까지 모든 것을 관리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마우리아 왕조는 당시치고는 매우 정교한 관료제 체제였다. 마우리아 왕조는 보병 60만명, 기병 3만명, 전차 8천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 등을 보유했고 이는 당시 고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군대들 중 하나였다.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대제의 정복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이 막대한 대군을 계속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대륙이나 다름없는 인도 특성상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멀어질수록 황제의 영향력은 크게 떨어졌고, 황제의 칙령 역시 제국 전역에 고르게 미치지 못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우리아 시대를 '사유화된 군주제', '국가 사회주의', 혹은 더 과장해서 '세계 최초의 복지 국가'로 묘사하기도 한다. 당시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개인의 토지 소유가 금지됐고 모든 땅은 오직 황제에게만 귀속됐다. 그 대가로 황제는 노동자들에게 농산물, 종자, 도구, 짐승, 공공재를 제공하는 식이었다. 물론 이같은 이상적인 상황은 아소카 대제의 전성기 시절 한정이었고 아소카 사후 황권이 급격히 약해지며 사유지 금지 법령은 사문화되어버렸다고.

당시 도시에는 30명의 위원들이 6개의 위원회를 구성해서 자치정부를 운영했다. 제1위원회는 노동자 임금과 상품 가격을 통제했고, 제2위원회는 외국 인사들을 맞이하는 등 외교 분야를 담당했다. 제3위원회는 기록과 행정을, 제4위원회는 생산품 생산을, 제5위원회는 무역과 통행증, 자격증, 측량을 담당했고 마지막 제6위원회가 도로, 시장, 병원, 학교 같은 공공재들을 담당했다.

마우리아 왕조 아래의 도시들은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특히 북부의 최대 중심 도시인 탁실라의 경우 아예 자체적으로 동전을 발행할 수 있는 권리까지 있었다. 도시의 최고 행정 책임자는 '나가리카', 마을의 최고 행정 책임자는 '그라미카'라고 불렀다. 이 나가리카와 그라미카가 하는 일은 명목상으로는 귀족, 상인, 농부, 수공업자 등 여러 계급들 간의 불화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일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냥 세금 걷는 것, 즉 세리였다. 나가리카와 그라미카는 중앙에서 파견된 총독들을 견제하며 상호 간에 권력의 균형을 맞췄다.

4.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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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의 대(大) 스투파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불교 전파 경로
마우리아 왕조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 아대륙 전체를 정치적으로 강력하게 통일하면서 교역이 흥성해지자 인도는 상당한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수 백개의 소규모 왕국과 제후국들, 토후국과 군벌들이 조각조각 나뉘어 국경을 닫아걸고 허구한 날 전쟁을 치르며 약탈과 방화를 반복했던 반면, 마우리아 왕조 시기의 인도에서는 자유로운 무역과 통행의 자유가 보장되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대제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을 바탕으로 길거리에 쏘다니던 강도들과 사병들을 진압하는 데 큰 노력을 쏟았고, 인도의 상인들은 옛날보다 훨씬 안전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의 유력자들과 군사적으로 경쟁하거나 군비를 추가적으로 확충할 필요도 없었으니 농민들에게 물리던 세금이 낮아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여전히 고세율이었고 지역에 따라, 그리고 토착 토후들의 마음에 따라 세율이 천차만별이긴 했으나 아소카 대제 이래 자비와 긍휼이라는 불교적 덕목을 강조하면서 인도의 세율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낮아진 편이었다고 한다. 세율이 낮아지니 경제적 교류와 무역, 그리고 시장이 폭발적으로 커졌고, 마우리아 왕조 치하의 인도인들은 경제 호황을 누렸다.

국제 무역도 증가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존속 기간 대부분 동안 서쪽의 그리스계 왕국들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때문에 마우리아 왕조 내부에서는 서쪽에서 건너온 진기한 지중해권의 문물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편이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잇는 험준한 산악통로, 즉 카이버 패스를 중심으로 서양권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의 상인들은 그리스의 올리브, 도자기, 페르시아의 값비싼 사치품들 등을 가져다 팔았으며, 인도의 상인들은 이들에게 인도의 향신료, 비단, 이색 물품, 금괴와 은괴 등을 그 대가로 수출했다. 마우리아 왕조는 서구 세계 뿐만 아니라 말레이 반도의 동남아 쪽 소왕국들, 심지어는 히말라야 너머 중국과도 무역을 전개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처럼 마우리아 왕조는 수많은 국가들과 무역을 전개했고, 후기에 이르자 기본적인 형태의 민간 소유의 기업들이 등장할 정도로 경제구조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건축 방면으로도 많은 유산을 남겼다.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 인도의 국장에도 들어가있는 '아소카의 기둥' 머리부분을 장식했던 유명한 사자 석상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3마리의 사자들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의 사자 석상은 사르나트의 폐허에서 발굴한 석상을 복원한 것으로, 3마리가 아니라 1마리가 올라가 있는 것도 있다.[41]

아소카의 기둥들 외에도 이 시기에 축조된 스투파들도 유명한데, 대표적으로 산치의 거대한 스투파가 있다. 거대한 돔, 즉 반구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안에 부처의 사리나 고승들의 사리를 넣어 봉안했다. 돔 주위는 정교한 장식을 새긴 석조 울타리와 탑문들로 장식했다. 이 스투파들은 마우리아 특유의 기하학적 조형성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때문에 마우리아 건축을 이야기할 때는 아소카의 기둥과 스투파가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초대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 2대 왕 빈두사라는 힌두교, 3대 왕 아소카 대제는 불교에 귀의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시대는 확실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아소카 왕은 왕자를 이웃 나라 스리랑카으로 보낸 일을 비롯해 상좌부 불교동남아시아에 전파하였다. 대승 불교상좌부 불교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대승 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중요시하였고, 상좌부 불교는 개인의 해탈을 중요시하였다. 인도 불교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인 산치 불교 유적도 마우리아 왕조 시기인 기원전 3세기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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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레우코스 군대를 격파하는 마우리아 군대
건국 초기부터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왕조답게 마우리아 왕조는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박트리아 왕국헬레니즘 문화권과의 교류 역시 매우 활발했다. 기원전 305년에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창립자인 셀레우코스 1세와 결혼동맹을 맺었고,[42] 셀레우코스 1세는 딸과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힌두쿠시 산맥 등을 포함한 막대한 영토를 마우리아 왕조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참고로 찬드라굽타는 그 대가로 500마리의 코끼리를 친선의 의미로 셀레우코스 1세에게 넘겨주었다.

어찌되었든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 인도로 건너온 그리스인들은 아소카 대제의 시절까지 나름의 공동체를 이루며 인도 북서부 지방에서 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아소카 대제의 칙령에도 그리스인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며, 이후에도 박트리아의 왕인 에우디메데스 2세와 친선 관계를 갱신했다는 말도 있다.[43] 아소카 대제는 이 같은 친선 관계를 이용해 그리스와 지중해권에 불교를 포교하기 위한 사절단들도 대거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5.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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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 불교의 상징 '산치의 대 스투파'
보통 마우리아 왕조라고 하면 불교아소카 대제만이 유명하지만, 사실 마우리아 왕조에서 가장 보편적인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애초에 제국의 개국시조인 찬드라굽타부터가 독실한 브라만교 신자였고, 마우리아 왕조 자체가 브라만교 사제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세워진 나라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찬드라굽타는 재위 기간 내내 정기적으로 브라만교 의식을 치렀고 브라만교 사원들을 세우는 등 브라만교를 크게 후원했다. 말년에는 자이나교에 입문하기도 했다.

자이나교 역시 브라만교 못지않게 중요시되었던 종교였다. 찬드라굽타는 말년에 자이나교에 귀의해 왕좌와 모든 것을 버리고 자이나 승려들에 합류하며 속세를 떠났다. 그는 카르나타카 지방에서 정화 의식을 치르는 등 죽을 때까지 자이나교에 심취했고, 찬드라굽타는 자이나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찬드라굽타가 죽은 이후에도 자이나교의 위세는 여전했다. 아소카 대제의 손자 삼프라티 역시 자이나교를 후원했다. 그는 수하스틴 같은 자이나 고승들의 설법을 즐겨 들었고 인도 전역에 125,000여 개의 자이나 사원을 지었다.[44] 삼프라티는 자이나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 중동, 페르시아 등지로 자이나 선교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설명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종교가 바로 불교다. 애초에 마우리아 왕조가 세워진 마가다 지방은 불교의 발상지였고, 마우리아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아소카 대제는 처음에는 브라만교 신자였으나 말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활발한 정복 전쟁을 펼치던 아소카 대제는 칼링가 전쟁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하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이에 평화와 자비를 중시하는 불교에 입문했던 것이다.

아소카는 불교를 여러 곳에 전파하는 데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 마힌다와 상하미타를 스리랑카로 파견해 불교를 포교하도록 시켰을 정도였다. 당시 스리랑카를 다스리던 티사 왕 역시 불교에 감화되어 마힌다와 상하미타를 받아들이고 불교를 나라의 국교로 삼았다고. 단순히 스리랑카 뿐만 아니라 저멀리 서아시아, 그리스, 동남아시아까지 널리 승려들을 파견하면서 불교를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알리는 업적을 남겼다. 만약 불교를 인도 외부 세계로 널리 전파시킨 마우리아 왕조와 아소카 대제가 아니었다면 불교는 지금만큼 널리 융성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소카 대제는 인도 전역에 거대한 사찰들과 84,000여 개의 스투파들을 지었다. 개중 가장 잘 남아있는 것은 산치의 대 스투파와 마하보디 사원. 뿐만 아니라 불교 학교들의 설립과 불교 문학을 장려하며 불교의 전폭적인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아소카는 단순히 불교의 양적 확산 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아소카는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제3차 결집을 열어 티르티카, 즉 이단적인 불교도들을 걸러내고 승가의 부정부패를 일소하려 들었다. 아소카 대제 본인이 직접 공의회에 참석해서 사상이 의심스러운 승려들에게 잘못된 믿음에 대해 추궁했다고 한다. 이 공의회로 인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45]와 이를 부정하는 분별설부(分別說部)가 분열되었다고 본다.

6. 자연 보호 정책

인도의 최초 동물 보호 정책은 바로 이 마우리아 왕조 치하에서 이루어졌다.

마우리아 왕조 역시 처음에는 숲을 그저 자연자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숲에 대한 보호 의식이 생겨났는데, 그 원인은 다름아닌 코끼리였다. 당시 코끼리는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들 중 하나였다. 그 당시 전투용 코끼리는 인도군의 전력에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셀레우코스 왕조가 찬드라굽타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전투용 코끼리의 존재 때문이 컸다. 특히 그냥 야생 코끼리를 잡아서 길들이는 것이, 굳이 코끼리를 어릴 때부터 기르고 사육하는 것보다 더 쉽고 싸게 먹혔기 때문에 야생 코끼리 개체수를 보호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로 인해 야생 코끼리와 그 코끼리들이 사는 숲을 보호할 필요성이 대두했고 이로써 숲에 대한 관리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코끼리 숲의 수호자'라는 관직을 만들어 숲을 벌목꾼이나 나무꾼들로부터 따로 보호했다.
숲의 경계에 산림 관리인이 코끼리를 보호하기 위한 숲을 만들어야 한다. 코끼리 산림 관리장은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모든 곳에서 코끼리를 보호해야 한다. 코끼리를 죽이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아르타샤스트라》
마우리아 왕조는 코끼리 뿐만 아니라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별도의 숲을 지정했다. 또한 가죽으로 쓰기 위해 자주 사냥되던 사자와 호랑이도 보호 조치에 들어갔다. 또한 '동물의 수호자'라는 관직을 따로 만들어서 밀렵꾼을 제거하고 호랑이 및 기타 상위 포식자들을의 수를 조절해서 염소 등 사육용 가축들을 안전하게 방목할 수 있게 숲을 조성하는 데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마우리아 왕조는 동물 보호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국가들 중 하나였다. 아소카 대제는 말년에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 동물 보호에 지대한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심지어 당시 야생 황소, 코끼리, 코뿔소, 숫양 등의 동물들의 싸움 경연 대회인 사마자를 비롯한 왕실 사냥을 포기하는 등 엄청난 대변혁을 일으켰다. 아마 아소카 대제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야생동물 보호 조치를 옹호한 통치자였을 것이다. 아소카 대제는 심지어 그 유명한 '아소카의 칙령'에도 그 규칙을 새겨놨다. 칙령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물 도살을 포기하는 왕의 모범을 따랐다고 선언하였으며, 그들 중 하나는 자랑스럽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왕은 동물을 거의 죽이지 않았다.

— 아소카의 칙령
또한 이들 정책에 대한 언급은 돌기둥 담마 칙령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비로운 아소카 왕은 이 담마칙령을 새기도록 하였다.

여기(내 영토 안에서는) 생명 있는 것들은 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사마자를 열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비로운 아소카 왕은 이와 같은 사마자의 모임에서 여러 가지의 악함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비로운 아소카 왕은 어떤 사마자는 허락한 것도 있다.

전에는 자비로운 아소카 왕의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매일 수많은 동물들이 도살되었다. 그러나 이 담마칙령이 씌여진 지금에는 단지 세 마리의 동물만이 음식을 만들기 위해 도살된다.: 즉 두 마리의 공작새, 그리고 한 마리의 사슴이다. 그러나 이 한 마리의 사슴조차도 정기적으로 도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세 가지 동물들도 장차 도살되지 않을 것이다.

바위 담마 칙령 No.1
자비로운 아소카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왕위에 오른지 26년이 되었을 때 나는 다음의 동물을 죽이는 것을 금하였다.: 앵무새, 살리카(구관조), 아루나(붉은 새의 일종), 붉은 거위, 야생 거위, 낭디무카, 겔라타, 박쥐, 여왕개미, 민물거북이, 뼈 없는 물고기, 웨다웨야카, 갠지스 강의 푸푸타카, 홍어, 바다거북, 호저, 다람쥐, 숫사슴, 야생 황소, 집에서 기르는 동물, 코뿔소, 하얀 비둘기, 집비둘기, 유용하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는 네 발 가진 동물, 그리고 젖을 먹이거나 새끼 밴 또는 새끼 딸린 암염소, 암양, 암퇘지와 6개월도 안 된 어린 가축은 죽이는 것을 금한다. 수탉은 거세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존재들이 숨어 있는 깍지(더미)를 불태우지 않으며,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죽이기 위해 숲을 불태워서는 안 된다. 동물에게 다른 동물을 먹이로 주어서는 안 된다.

— 돌기둥 담마칙령 No.5
아소카는 육류 섭취를 위해서 필수적으로 죽일 수 밖에 없는 동물들의 숫자마저도 줄일 것을 명령했고, 이때문에 당시 인도의 육류 섭취량은 한시적으로 감소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거세처럼 동물들의 숫자 조절을 위해 당연히 이루어지던 행위들마저 제재하면서까지 동물 보호에 관심이 많았다고.

다만 이러한 마우리아 왕조의 자연보호 정책에도 한계점은 당연히 존재한다. 아소카의 칙령은 현실성보다는 아소카 대제의 개인적인 욕구를 더 많이 반영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왕실 사냥터에서 사슴을 밀렵하는 경우 벌금으로 '파나'(주화) 100개를 납부하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는 걸 보아 동물 보호 칙령을 위반하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아소카 대제가 동물을 함부로 죽이면 안되고 숲을 함부로 벌목해서도 안된다는 등 지나치게 빡세게 자연 보호 정책을 걸어놓은 탓에 일반 평민들의 삶은 더더욱 고달파졌다고 한다.

7. 그리스 세계와의 교류

산드로코투스는 어렸을 때 알렉산드로스를 만났고, 우리는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의 저속함과 낮은 출생으로 인해 미움과 경멸을 받았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는 것을 간신히 놓쳤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62-4
마우리아 제국은 의외로 역대 인도 왕조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헬레니즘 세계와 활발히 교류하던 왕조들 중 하나로 꼽힌다. 일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원정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아 그리스인들의 영향력이 인도에 아직 강하게 남아있었고, 알렉산드로스 사후에도 그리스의 대인도 영향력이 바로 쇠하지 않은 채 셀레우코스 왕조 등 그리스계 왕국들이 여전히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찬드라굽타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만났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대강 인도 북서쪽에 위치한 탁실라 근처에서 찬드라굽타가 알렉산드로스를 만났다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그리스인들의 점령지에는 수많은 그리스계 군소왕국들과 군벌들이 득세했다. 이들은 인도인을 피정복층으로 삼고 그리스 문화를 유지했는데, 이들을 쫒아내려 시도한 인물이 바로 찬드라굽타였다. 찬드라굽타는 인도인들의 반감을 교묘히 이용해 그리스인들을 빠르게 격퇴했다. 펀자브 지방의 총독 에우다모스가 기원전 317년에 몰락했고, 기원전 316년에는 인더스 강 유역의 그리스인 식민지들을 총괄하던 파이톤이 인도인들에게 패배해 바빌론으로 도망쳤다.

파이톤이 바빌론으로 도망침에 따라 인도 북서부, 즉 인도 본토 지방에는 그리스계 왕국들이 대부분 몰락했다. 하지만 저멀리 서아시아 지방, 즉 페르시아 땅에는 여전히 셀레우코스 왕조라는 거대한 헬레니즘 세력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워낙 땅덩이도 컸고 아직 세력도 강성해서 아무리 찬드라굽타라고 해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찬드라굽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소수의 그리스인으로 방대한 영토를 통치했기에 기반이 취약한 셀레우코스 왕조와는 달리 찬드라굽타의 인도군은 쌩쌩한 상태였다. 셀레우코스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결국 셀레우코스 1세는 기원전 305년 마우리아 왕조에게 아프가니스탄 동부, 발루치스탄을 할양해줄 수 밖에 없었다.
파일:터키 디아도코이.png
동쪽의 마우리아 왕조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셀레우코스 왕조와 타 디아도코이 왕국들
마우리아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기원전 303년, 양 측은 결혼 동맹을 통해 국경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힌두쿠시, 아프가니스탄, 발루치스탄 등 광대한 영토를 할양받는 대신에 500여 마리에 달하는 전투 코끼리를 선물했다.[46] 셀레우코스 1세는 메가스테네스를 대사로 파견했고, 찬드라굽타가 죽은 이후에도 데이마코스를 또다시 파견해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특사 자격으로 머물도록 했다. 그만큼 마우리아 왕조와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 저멀리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 2세도 마우리아 왕조에 대사를 파견했다고 한다.

그리스계 왕국들은 모두 찬드라굽타에게 멸망당해 사라졌지만 그리스계 주민들은 여전히 인도 땅에 남아있었다. 아소카 대제 시절까지만 해도 상당한 수의 그리스계 유민들이 인도 북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남아있었다고. 아소카의 칙령들을 새긴 '아소카의 기둥' 이것만 봐도 일부 비문이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으며 그 내용은 자기 영토 내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이 불교로 개종했다는 내용이다. 아소카 대제는 서방에 있는 헬레니즘 왕조들을 개종의 대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활발히 약초와 사절단 등을 서방으로 보내며 포교를 하곤 했는데 의외로 그리스인들이 더 포교에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다만 아소카 대제가 이렇게 보낸 포교단들이 실제로 받아들여졌는지, 헬레니즘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리스어로 쓰인 칙령들과 비문들이 칸다하르 지방 곳곳에서 발견되는 걸 보면 당시 인도-헬레니즘 공동체가 고도의 정교함을 지녔으며 그리스인들과 인도인들과의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인도 문화에 대단히 익숙했던 칸다하르의 그리스인들이 레우키아,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펠라 또는 키레네에서 차례로 인도 사상을 지중해 세계의 헬레니즘 철학계에 전달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8.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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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힌디어로는 'मौर्य राजवंश'. 쉽게 마우리아 제국(मौर्यसाम्राज्यम्)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 아소카 왕의 비문에 쓰여진 브라흐미 문자로 점부디퍼(Jaṃbudīpa). 이는 프라크리트어 발음이며 산스크리트어로 옮기면 점부드위퍼(Jambudvīpa). 당시의 인도를 가리키는 명칭. 해석하자면 ‘잠부나무의 땅’ 정도인데, 잠부나무는 지금도 인도를 상징하는 나무 중 하나이다. 한자 음역은 염부제비파(閻浮提鞞波).[3] 밑 부분의 조그만 옅은 주황색 영역은 타밀 족의 나라였던 판디야 왕조와 촐라 왕조. 이들은 조공을 바치는 대신 마우리아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 다만 불교로 유명한 정복군주 아소카 왕이 전쟁의 참극에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손쉽게 정복되었을 수 있다.[4] 현대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부탄, 네팔 등을 포함한다.[5] 현대 비하르 주의 주도인 파트나 지역.[6] 워낙 옛날 국가라 정확하지는 않다. 학자에 따라 3,400,000km2에서 5,000,000km2까지 꽤 큰 폭으로 갈린다.[7] 베다 산스크리트어가 인도 각지에 전파되며 방언화된 인도아리아계 방언들 중 하나. 마가다 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사용되었다.[8] 불교, 자이나교와 마찬가지로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갈라져나온 슈라마나 계열 종교의 일파로 고대에 소멸.[9] 무굴 제국과 마우리아 왕조 중 누가 더 영토가 넓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 영토는 약 4,000,000km2이지만, 마우리아 왕조는 워낙 옛날 국가였던 탓에 영토 면적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 면적은 학계에 따라 3,400,000km2에서 5,000,000km2까지 다양하게 갈린다.[10] 무굴 제국은 최대 판도를 이루었던 아우랑제브 시절에도 최남단의 마라타 동맹 등 힌두 소왕국들의 결사적인 투쟁으로 인도 통일에는 실패했다. 반면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대제 시절 최남단의 소왕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인도 대륙 전체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11] 이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유럽과 중동은 디아도코이의 시대로 분열되어 있었다.[12] 마케도니아의 병사들이 베아스 강은 더 이상 못 건넌다며 파업을 하게 되고,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20만 보병, 6만 기병, 8천 전차부대, 6천 마리의 코끼리 부대의 무지무지한 물량을 상대할 자신도 없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철군하게 된다.[13] 참고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 철군에서 엄청난 수의 군사를 잃었다. 보급을 담당했던 네아르코스의 해군 함대가 인도양의 몬순에 떠밀려간 것이 원인.[14]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점령지를 다스리도록 한 총독. 태수로도 많이 번역한다.[15] चाणक्य(Chanakya). 차나키아라고도 하고 차나캬라고도 한다. 카우틸랴와 비슈누굽타라는 필명도 있다. 차나키야와 관련된 내용들은 공식 문서나 역사서가 아닌 대부분 민간 설화나 경전에 수록되어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불교 버전, 자이나교 버전, 카슈미르 버전, 산스크리트어 버전 등이 있는데 본 문단에 서술하는 내용은 모두 불교 경전에 수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16] 어디까지나 불교 설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인만큼 적당히 걸러들으면 된다.[17] 참고로 찬드라굽타의 출생이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본디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의 고귀한 혈통이었으나 아버지가 전쟁에 휩쓸려 고아가 되었고 결국 양치기에게 입양되었다는 말도 있으며, 절에서 머물던 천한 출신의 평민이라는 말도 있다.[18] 그리스 잔존 세력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기원전 317년 경까지 인더스 강 일대를 다스린 에우데무스 장군이나 페이톤 장군 등이 있다.[19] 이들이 포루스 왕의 세력이라는 말도 있다.[20] 기록에 의하면 찬드라굽타는 난다 제국을 침공할때 처음에는 수도인 파탈리푸트라를 곧바로 노렸다고 한다. 그러나 인도 최강 세력들 중 하나였던 난다의 정예군이 겹겹이 지키고 있던 파탈리푸트라를 함락하는 것은 무리였다. 구전설화에 의하면 파탈리푸트라 함락에 실패하고 낙심한 찬드라굽타는 다음과 같은 일을 목격한다. 그가 길을 걷던 도중, 찬드라굽타는 한 여인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본다. 아기가 제 손에 든 떡을 중간 부분만 먹고 테두리 부분은 모조리 땅에 버리자, 여인은 아기에게 '이 찬드라굽타 같은 아이야, 어찌 이토록 이치를 모르느냐?'라고 꾸짖었다. 이를 보고 찬드라굽타가 난다 제국의 변방부터 공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21] 셀레우코스 1세는 지금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땅까지 모조리 털어서 넘겨주고 반강제로 마우리아의 동맹국이 되었으며, 딸을 찬드라굽타에게 넘겨줘야 했는데, 찬드라굽타는 그 대가로 500마리의 코끼리만을 선물했다.[22] 기록상으로는 마음이 맞아서 서로 이해한뒤 협상을 맺었다곤 하지만 영토를 떼어준거나 이야기를 보면 공격했다가 졌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러나 이게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제법 있다. 자세한건 디아도코이 문서 참고.[23] 셀레우코스 왕조를 꺾고 북인도의 패자로 등극한 마우리아 왕조의 명성은 널리 퍼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 그리스 등 지중해 세계 각지에서 외교사절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4] 물론 수를 과장하기 좋아하는 인도 특성상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25]아르타 샤스트라》(अर्थशास्त्रम्)라는, 현존하는 인도 전근대 유일의 정치서를 저술했는데, '아르타'(실리)라는 이름부터 느껴지는 이 책은 중앙집권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각종 법령, 장관의 발탁 방법과 임무 부과, 첩자의 운용, 전쟁과 외교, 세금의 부과와 활용 방법)와 심히 세속적인 내용(민간인 사찰 장려, 요인 암살 장려) 등으로 막스 베버에게 《군주론》이 울고 갈 진정한 마키아벨리주의라는 평가를 받았다.[26] 기근을 예언했던 성자인 바드라바후를 따라 수행자가 된 후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자이나교는 금욕을 극히 중시하고 아사를 덕목으로 여길 정도였으니 왕이 굶어죽었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27] 이같은 상황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남인도의 소왕국들이 모두 마우리아의 패권을 순순히 인정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가능했다. 게다가 빈두사라 역시 호전적인 성향은 아니었기에 굳이 더이상의 침략 전쟁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이다.[28] 인도 비하르 주 바이샬리의 유적. 현존하는 기둥들 중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는 기둥이다. 사진속 기둥의 주두에는 1개의 사자만이 올라가 있지만, 3마리의 사자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모습의 기둥머리 장식이 더 유명하다. 인도의 국장이기도 하다.[29] 25년이라는 말도 있다.[30] 이 최남단에 옹기종기 모인 힌두교 소왕국들 모두 마우리아의 패권을 인정했기에 사실상 전부를 정복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31] 아소카 왕이 한창 전쟁활동을 벌이던 기원전 265년경,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32] 이 궁전 외관에는 꽃과 대리석 등으로 장식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아름답고 멋있는 궁전처럼 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정작 궁전 내부의 방들 안은 온갖 고문기구들과 죽어가는 포로들로 가득한 지옥이었다고.[33] 아소카 왕이 불교로 개종한 자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불경들마다 내용이 다르다. 스리랑카 경전에는 종교적 안식을 구하던 아소카가 형식적인 힌두교나 타 종교에서 안식을 찾지 못해 불교로 향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다른 이야기들도 많다. 어느날 아소카 왕은 자신의 형제이자 가장 강력한 왕위경쟁자였던 장자 수시마의 아들이 젊은 중으로 나타난 것을 발견한다. 젊은 중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불교 교리의 심오함에 감탄한 아소카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 또 아소카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중 오직 한 노승만이 기적을 일으켜 유유히 빠져나온 것을 보고 아소카가 불교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34] 불타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 기념물[35] 가장 유명한 산치의 스투파가 이때 지어졌다.[36] 이 기둥에는 심지어 동물 복지의 개념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4개의 다리를 가진 모든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며, 사냥이나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것 역시 금했다.[37] 아소카 왕의 죽음에 관련해 얽힌 이야기가 있다. 죽음이 가까워짐을 직감한 아소카 왕은 국고를 봉인하고 사재를 털어 사찰들에 대규모 기부를 퍼부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부처에게 바쳤기에 죽기 직전의 아소카 왕에게 남은 것은 가자나무 열매 반쪽 뿐이었다고 한다. 아소카 왕은 이 열매 반쪽마저 자신의 마지막 보시(布施)로 삼아 부처에게 바쳤다. 왕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7일 밤낮으로 화장되었다.[38] 몇몇 학자들은 평화주의를 중시한 불교 신자 아소카 대제 때문에 마우리아의 군사력이 약화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9] 이들은 불교를 장려하는 등 나름대로 원주민들과 융화하면서 살아갔으나 기원전 70년 경 인도-스키타이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40] 구전에 의하면 푸시야미트라는 일부러 브리하드라타 왕을 전 군대가 보고있는 사열식 행사 도중 죽여버렸다고 한다. 병사들 앞에서 대놓고 왕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이다.[41] 참고로 아소카 대제는 각지에 40여 개에 달하는 기둥을 세웠으나 남아있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것은 비하르 주에 위치한 기둥.[42] 말로만 동맹이지만 사실상 패배선언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이 동맹을 기점으로 인더스 강 동편에 대한 영유권을 모조리 포기한다.[43] 멸망할 즈음 되면 박트리아의 내분으로 인해 인도-그리스 왕국이라는 인도-헬레니즘 문화가 융합한 나라도 나온다.[44] 이 자이나 사원들 중 몇몇개는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대부분은 아흐메다바드, 비람감, 우자인, 팔리타나 지방을 위주로 분포되어있다.[45] 부파불교 시대의 종파들 중 가장 유력했던 종파. "설일체유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모든 법(一切法)이 존재하다(有)고 설명하는 부파(部)로, "과거, 현재, 미래의 3세에 걸쳐 법의 실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법의 실체는 항상 존재한다"라는 뜻의 삼세실유법체항유(三世實有法體恒有)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대표하는 명제이다.[46] 이 전투 코끼리들은 기원전 301년 치러진 입소스 전투에서 상당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