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랍어: جزية영어: Jizya
튀르키예어: Cizye
قَاتِلُوا الَّذِينَ لَا يُؤْمِنُونَ بِاللَّهِ وَلَا بِالْيَوْمِ الْآخِرِ وَلَا يُحَرِّمُونَ مَا حَرَّمَ اللَّهُ وَرَسُولُهُ وَلَا يَدِينُونَ دِينَ الْحَقِّ مِنَ الَّذِينَ أُوتُوا الْكِتَابَ حَتَّىٰ يُعْطُوا الْجِزْيَةَ عَن يَدٍ وَهُمْ صَاغِرُونَ
하나님(알라)도 종말의 날도 믿지 않는 자들과 싸워라. 또한 하나님과 사도로부터 금지된 것을 지키지 말고, 계전을 받으면서도 진리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1]에게는 그들이 자진해서 세금(지즈야)을 내고 굴복할 때까지 싸워라. 쿠란 9:29
하나님(알라)도 종말의 날도 믿지 않는 자들과 싸워라. 또한 하나님과 사도로부터 금지된 것을 지키지 말고, 계전을 받으면서도 진리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1]에게는 그들이 자진해서 세금(지즈야)을 내고 굴복할 때까지 싸워라. 쿠란 9:29
이슬람권에서 피지배대상인 이교도에게 부과한 일종의 재산세. 뜻은 딤미[2]들이 납부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지즈야는 (무슬림 여부 상관 없이) 제후국이 종주국에게 바치는 조공 혹은 연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랍어 역사 자료를 읽다 보면 후자가 더 흔히 보일 것이다. 좀 오래된 책에서는 인두세로 번역하만 부자와 빈자가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는 것은 아니고 미성년자와 노인, 과부, 장애인 등은 원칙적으로 면제되었기 때문에 누진세의 개념이 강했다.
2. 배경
사실 이슬람권의 이교도들은 지즈야 부담과 동시에 병역의 의무 및 무슬림들이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의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3] 일종의 보호비인 면이 더 강했다. 그래서 무슬림이 아니더라도 군인이 되면 지즈야가 면제되기도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방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이슬람 학자들에 따르면 이슬람 세력에게 보호받는 이교도들이 해야 할 의무로 쿠란과 하디스에 명시되었다고 한다. 지즈야를 납부하는 이교도들은 법의 보호를 받으며 생업에 있어 무슬림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며 절대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쿠란과 하디스에서는 지즈야에 대한 납세액 규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대와 나라, 지역에 따라 기준이 다르다. 지즈야를 납부하지 못하는 이교도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히 널럴했던 오스만 제국 시절을 기준으로 하면, 연간 수입액이 기준량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면제받거나 만약 그가 영주에 속한 농노인 경우 영주가 대신 내 주도록 되어 있었다.이슬람 발흥 당시 무슬림은 소수에 불과했으므로 민심을 잡고 효율적인 통치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 다수인 이교도들을 포용해야만 했다.[4] 그와 동시에 점차적으로 이교도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켜 나갔다. 처음에는 지즈야가 동로마 제국 등이 부과하던 세금에 비해서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별다른 반발 없이 받아들여졌고[5] 아바스 왕조 초기까지 무슬림은 인구의 10% 이하에 그쳤다. 무함마드 시대에는 일반 이교도는 1년에 10다르함을 내게 되었는데 이는 한 가족의 10일치 생계비 수준이었고 이후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에 의해 이슬람 제국의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부자나 예멘 등 잘사는 지역 사람들은 이보다 많이 내야 했지만 여전히 널럴했다. 당시 이슬람 제국의 팽창이 급속히 이루어진 것에는 이러한 널널한 세금이 한몫했다. 특히 이집트가 손쉽게 이슬람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간 것은 칼케돈 공의회 이후로 이단시돼 축출된 탓도 있지만 동로마가 이집트를 경제적으로 착취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로는 우스만에 의해서 지즈야 납세액 기준이 상향되기 시작했고[6] 우마이야 왕조나 오스만 제국 등 여러 이슬람 지도자들은 오히려 이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걸 꺼렸다고 하며 일시적으로 개종을 금지한 적도 있었다고도 한다. 개종하면 세금을 덜 내기 때문. 특히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기껏 개종한 마왈리도 지즈야를 내도록 해서 반발을 사기도 했고 이것이 우마이야 왕조가 100년도 안되어서 단명한 이유이기도 했는데[7] 아바스 왕조 때는 마왈리에 대한 차별규정을 철폐해서 무슬림의 인구비율이 급속히 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서히 중동 지방에 무슬림 비율이 늘어나고 개종을 촉진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지즈야를 급격히 인상한데다 포악한 통치자들이 지즈야 자체를 착취 수단으로 삼아서 비싼 세금을 빌미로 이교도를 노예로 삼는다는 식의 횡포를 부리는 사건이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간간히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도시 외 지역에서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급격히 늘어나 기독교인의 비중이 줄어들었다. 다만 도시에 거주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에게는 영향이 크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이슬람 국가가 이교도의 개종을 목표(아마도)하고 부과한 세금이었지만 19세기 무렵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서방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는데 이 중에서는 종교에 상관없이 평등을 실천하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탄지마트와 하티 후마윤 칙령 등을 통해 법적으로는 지즈야가 사라지고 다른 지역에서도 서방의 지배로 점차 사라졌다. 현재 대다수 무슬림의 지즈야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유물 정도이며 공식적으로 지즈야를 거두는 이슬람 국가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평등은 서방의 압력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와중에 이들이 갈구는 주 대상은 애꿎은 중동의 토착 기독교인들이다. 상이집트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콥트 정교회 집안을 약탈하고 지즈야를 징수한다고 설치고 있다.[8]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는 아예 지즈야를 부활시켰는데 택도 없이 높아서 개종 아니면 죽으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9] 과거 지즈야는 오히려 무슬림이 내는 세율보다 낮은 경우도 있었다. 다만 대부분 연 수입의 40%를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3. 납세대상
무슬림이 아닌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책정한다. 오스만 제국의 사례를 들면 지즈야는 오로지 노동인구에 해당하는 이교도 자유인 남성에게만 부과될 수 있으며 노예, 어린이, 여성, 비노동인구, 1년에 6개월 이상 병이 들어 활동이 불가능한 남성, 장애인, 60세 이상의 노인은 지즈야 납세대상에서 제외되었다.[10] 지즈야를 내면 해당 남성의 재산권과 사업권은 무슬림과 동일하게 간주되어야 하며 이를 차별할 시 처벌하는 규정이 존재했다. 오스만 제국 법에 규정하는 바에 따르면 지즈야는 무슬림에게 부과되는 자카트(연수입의 최소 1/40을 납부하는 종교세) 및 병역의무와 동일하며 지즈야를 내는 비무슬림은 병역면제권이 부여되어 징집되지 않았다.시대에 따라 지즈야의 비율은 일정하지 않지만 오스만 제국의 사례를 보면 빈민자는 매월 1디르헴(약 40g)의 은이나 0.5g의 금, 중산층은 2디르헴의 은이나 1g의 금, 부유층은 4디르헴의 은이나 2g의 금에 해당하는 돈이나 이에 상응하는 물품을 매달 말일 지즈예다르(Cizyedar)에게 납부했다.[11]
여기서 빈민층과 중산층, 부유층의 기준은 연간 수입에 따르는데 부유층의 기준은 가정 전체가 연간 1만 디르헴 이상의 은을 버는 가정, 중산층의 기준은 가정 전체가 연간 200 디르헴 이상 1만 디르헴 이하의 은을 버는 가정을 의미한다. 과세기준은 사람이지만 각 계층의 분류기준은 가구 단위임을 주의할 것. 예를 들면 10인 가족중 노동인구가 3명이고 이 셋이서 버는 연간수입이 350 디르헴의 은에 상응한다면 이 가정이 납부할 지즈야는 매달 6디르헴의 은 혹은 3g의 금에 상응한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72디르헴의 은 혹은 36g의 금에 해당된다.
이슬람으로 개종한다고 해도 무조건적인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일단 개종하면 빈민층에게는 큰 세금 혜택이 주어지지만 부유층에게는 오히려 손해다. 일단 무슬림에게 해당되는 수입세인 자카트는 비율이 연수입의 1/40으로 고정되어 있다. 위 가정을 예로 들자면 이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할 경우 연간 8.50 디르헴의 은만 납부하면 그만이다. [12] 하지만 부유층은 부유층의 최소기준인 연수입 1만 디르헴을 기준으로 노동인구가 10명이나 된다고 치더라도 매달 40 디르헴, 연간 480 디르헴을 지즈야로 납부한다. 이 가정의 연간수입에 비하면 10%가 채 안 되는 금액인 셈이다. 결국 오스만 제국 시기 딤미들은 하층민들은 대거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중산층 부유층의 개종률이 낮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편으론 빈민층에나 중산층에게도 그리 좋은 정책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단 자신의 종교 때문에 세금을 매긴다는 것부터 불만이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한푼이라도 덜 내고 싶어하는 마인드는 항상 존재하는데 종교 때문에 세금을 낸다면 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다. 당시 이슬람 문화권에선 상인의 비율도 높긴 했지만 대부분 납세자들은 농부들이었다. 농부들은 어느 동네든 머릿수가 많으면 농사가 좀 더 편해지기 때문에 자식들의 수도 많았다. 빈민층, 중산층에게 다르게 부여되었다는 것은 사실 함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 농부들은 세금 하나 내겠다고 도심까지 가서 수확물을 금으로 바꿔 손해를 보면서까지 세금을 지불할 바에야 개종하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후반부쯤 되면 아예 지즈야를 납세할 농부들이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사실상 지즈야가 유명무실해지다가 1855년의 세금제도 개혁과 동시에 사라졌다. 1690-1691년 오늘날의 디야르바크르와 그 근방 지역의 지즈야 납세기록을 보면 납세자의 대부분은 농부가 아닌 도시민들이었으며 이들의 직업은 약 25%가 재봉사, 23%가 소작농, 8%가 머슴, 4%는 금융업자, 3%는 제화(신발)사, 2%는 자가농 및 부농, 1%가 목공업자였고 나머지 34%는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납세자 중 27%가 빈민층, 60%가 중산층, 13%가 부유층으로 분류되어 빈민층으로부터 972 쿠루쉬, 중산층으로부터 3604쿠루쉬 20파라, 부유층으로부터 1824쿠루쉬 30파라를 거두어 합계 6401쿠루쉬 10파라를 거두었다.[13]
[1] 유대인과 기독교인[2] 이슬람권에서 공존이 허락되었던 이교도들. 원래는 쿠란에서 이른바 '성서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만 해당되었지만 추후에 페르시아, 인도, 동남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이 전파되자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조로아스터교, 힌두교, 불교도 등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서의 백성들'보다는 더 낮은 대우를 받았다.[3] 하지만 십자군 전쟁 시기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교도들은 지즈야뿐 아니라 무슬림 군인을 위한 무기를 살 돈도 따로 납부해야 했다.[4] 아바스 왕조 초기까지 무슬림의 인구 비율은 10% 이하에 불과했으며 이집트는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에서 500년 가까이 지난 십자군 시대에 와서야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비율이 역전되기 시작했다.[5] 예루살렘 총대주교 요한 7세(John VII, 재임 964~966)의 경우 무슬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크시드 왕조의 총독 무함마드의 공납 요구에 시달리다 무함마드의 사주를 받은 무슬림 폭도들에 의해 성묘 교회 마당에서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동로마 황제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에게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보호해 달라"고 서신을 보냈다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과 그리스도교인들이 나서서 "잘 살고 있는데 뭐하는 짓이냐"며 요안네스를 끌어내 죽였다고도 한다. 양쪽 모두 설은 나뉘지만 화형당했다는 건 똑같다. 다만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는 970년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통치했던 적이 없으니 후자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6] 우스만은 재정을 체계화하면서 세수를 안정적으로 거두고 이를 바탕으로 국력을 건실히 키워나가는 데 성공했지만 이 때문에 세수부담이 과중해지고 무슬림 사이에서조차 빈부격차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민심의 이반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살해당하는 계기가 되었다.[7] 이교도 입장에서는 지즈야란 이름으로 수탈이나 당하고 마왈리는 기껏 개종했더니 이교도와 똑같이 지즈야 내라고 하고 무슬림은 지즈야 맛에만 들려 이슬람 전도에 성의가 없다며 싫어했다.[8] 물론 이는 교리 운운하는것은 개소리이고 실상은 조폭이 보호비를 삥뜯는 짓과 비슷한 짓거리다.[9] 그나마 나머지는 다행인 편인데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지즈야를 내면 종교의 자유는 있었고 못 내겠으면 개종할 자유라도 있었지 야지디족들은 종교의 자유니 개종이니 그런 거 없고 남자는 학살, 여자는 강간의 대상이 되었다.[10] 특이하게도 오스만 제국에서는 교회의 헌금과 십일조의 일부로 생활하는 정교회, 가톨릭,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성직자들도 지즈야가 면제되었는데 자기 땅과 소득 수단이 없으니 세금도 없다는 논리였다. 그 때문에 성직 외에 다른 일도 종사하는 유대교 랍비들에게는 지즈야가 부여되었다.[11] 지즈예다르는 고대 로마나 중근세 유럽에서도 볼 수 있던 세리들을 말하는데 정부로부터 미리 파악된 이교도 시민들의 목록을 받고 정부 대신 지즈야를 수납받도록 고용된 사람이었다. 이들의 월급도 거둬 들인 지즈야 세금에서 정부에 바치고 남은 돈으로 받았다.[12] 군대에 간다는 게 오스만 제국의 확장기에는 손해라고 보긴 힘들었는데 일단 제국이 땅을 정복하면 최소한 휘하 병졸들에게 보너스 급료가 주어지거나 상급을 받거나 하다못해 정복지를 약탈해 전리품을 얻을 기회도 있었으므로 신분상승의 기회가 다른 직업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로 들어간 후에는 이러한 메리트가 떨어졌으며 국경과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는 병역이라는 게 그냥 마을 민병대나 향토방위대 수준으로 널널하기도 했다.[13] 위의 출처는 튀르키예 사학자 쥘피예 코착(Zülfiye Koçak) 교수의 "H. 1102 (M. 1690-1691) TARİHLİ DİYARBEKİR EYALETİ CİZYE DEFTERİNİN TANITIMI VE TAHLİLİ" (히즈리력 1102년 디야르바크르 에얄레트 지즈야 기록의 소개 및 분석)" 논문에서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