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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23 11:54:02

임시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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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입지 조건3. 목록
3.1. 현존3.2. 과거
3.2.1. 한국사3.2.2. 중국사3.2.3. 기타
3.3. 한때의 후보3.4. 대중 매체
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한 나라에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불가피한 사정이 발생해 기존의 수도가 심각한 위험[1]에 처했을 때 정부가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수도를 잠시 옮겼을 때 정부가 이전한 곳을 말한다. 전통적인 중국 왕조 시절에는 행재(行在)라고 불렀다. 여기서 좀 더 상황이 나빠지면 영토를 모두 잃고 아예 해외로 망명한 망명정부가 된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는 6.25 전쟁 당시 부산서울을 대신해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임시수도 정부청사(現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와 경무대 역할을 대신했던 이승만 관저[2] 등 임시수도 당시 주요 시설이 모여있는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에는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부민사거리까지 이어지는 임시수도기념로를 조성해 이를 기리고 있으며 2016년부터 피란수도 부산야행 행사를 매 년마다 진행 중이다.

2. 입지 조건

기본적으로 정부의 기능을 해야 하므로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 전쟁 중에 적과 대치하는 것도 힘든데 기반시설까지 따로 만드는 건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당시 부산에는 규모 큰 관청 건물이 많았으므로 경상남도청사가 임시수도 정부청사[3]로, 그 외 구 부산시청사[4], 중부산세무소[5], 부산지방법원[6], 부산극장[7] 등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러나 임시수도까지 차릴 정도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닐 때가 많기에 가능한 선에서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을 택하는 것이 최선이다.

임시수도가 반드시 대도시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존 대도시로 피난을 가는 경우 원래 주민들과 자원을 나눠써야 하므로 민심이 불안정해질 수 있다.

3. 목록

3.1. 현존

3.2. 과거

3.2.1. 한국사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

3.2.2. 중국사

3.2.3. 기타

3.3. 한때의 후보

3.4. 대중 매체

4. 여담

5. 관련 문서


[1] 예를 들어 전쟁의 경우 함락 또는 그 직전 상황에 해당한다.[2] 현 임시수도 기념관 건물.[3] 대통령비서실, 국무총리실, 내무부, 외무부, 국방부, 법무부, 국무회의소, 총무처, 공보처, 법제처, 기획처, 농림부 등이 입주했다.[4]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위치. 문교부, 보건부, 사회부, 서울시청 등이 입주했다.[5] 재무부, 기획처가 입주했다.[6]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지방법원 등이 입주했다.[7] 국회가 입주했다. 이후 도청부속 구 무덕전 건물(현재 철거됨)로 옮겼다.[8] 수도 플리머스뿐만 아니라 플리머스를 포함한 섬의 남쪽 절반 전체가 화산 폭발로 인해 출입 금지 지역이 되었다.[9] 임시수도라기보다는 고대 한반도 수도 특유의 전시성~평시성 체제에 가깝다. 수도 바로 근처에 전시에 농성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는 것.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도 국내성(평시성)과 환도산성(전시성) 이중 구조였고 한성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북성(평시성)과 남성(전시성) 이중 구조였으며 신라의 명활산성도 그런 역할을 하는 성이다.[10] 그래도 낙동강 방어선 전투 도중 인민군이 현재의 대구광역시 관내에 해당하는 달성군 등지에서 낙동강을 도하해 대구 점령을 시도하거나 대구역 등지에 인민군이 발사한 포탄이 떨어지는 일이 있기도 했다.[11] 휴전 직전인 6월부터 정부부처가 단계적으로 서울로 복귀한 이후 8월 15일에 8.15 광복 기념식과 함께 정식으로 환도를 선언했다. 마지막으로 국회가 9월 1일에 환도했다.[12]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가 신의주시로 이동한다고 선전했다.[13] 지금도 평야지대인 탓에 유사시 방어하기 힘든 평양 대신 개마고원 안쪽의 후방 강계가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14] '수도'를 의미[15] 물론 베이징을 행재로 고쳤을 때에도 황제들은 베이징에 머물렀다.[16] 임안(臨安)이라고도 불렀다.[17] 사실 임시수도라는 인식조차 없어서 지나치기 쉬운데 촉한도 성도는 임시수도 취급했다. 그 증거로 수도라고 하는데 성도를 성도윤으로 승급하지 않고 끝까지 촉군으로 놔뒀고 법적 수도는 전한의 수도인 장안이었다. 후한의 수도인 낙양이 아닌 이유는 촉한과 오가 위에 대항해 동맹을 체결하면서 장차 양국이 위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할 때 삼하(하남(낙양), 하내, 하동) 지역을 오의 영토로 합의했기 때문.[18] 1229년에서 1244년 기간 동안에는 예루살렘이 불완전하게나마 회복되었다.[19] 소방청은 중부 관구리숀 레치욘 에 있고 교도청은 중부 관구람라 에 있다.[20] 1980년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루살렘 관구에 상주하는 대사급 외교공관들의 철수를 요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78호에 따라 국제사회의 주권국가들 가운데 약 50개국(미국, 러시아, 독일, 체코, 바누아투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행정수도로 탈바꿈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21] 서울 집중으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대표적으로 상하수도 문제)는 당시 정부에서도 큰 골칫거리라 서울 편입 예정지였던 지금의 광명시 북부마저도 최규하 정부까지는 서울 편입을 보류했다가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배제했을 정도였다.[22] 천안(당시 천원군) 목천 지역은 훗날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된다.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참여했던 김재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독립기념관 입지 선정에도 관여하면서 교통과 지세가 좋아 행정수도 후보지 중 하나로 삼았던 목천 지역(행정수도 이전계획 당시 명칭은 '천원지구')에 독립기념관이 들어서게 했다.[23] 정부종합청사·국회·대법원 등 수도 기능이 입지할 부지의 중심부가 당시 행정구역으로 공주군 장기면(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 해당되어 '장기지구'란 이름이 붙었다. 이때의 부지는 현재의 공주시 신관동·월송동, 우성면·의당면 각 일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서부, 연기면·금남면 각 일부 등에 해당됐다. 즉, 당시 임시행정수도 계획의 동쪽 지역은 오늘날 세종특별자치시(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내지는 중심부에 해당된다. 공주군 장기면의 대부분은 세종시에 흡수되었으며 남은 3개리는 월송동에 편입되었다.[24] 장기지구는 원래 초기 검토 대상에는 없었으며 '공주지구'와 '대평지구'라는 2개의 지구의 각 일부였다. 이 중 대평지구는 공교롭게도 오늘날 행정중심복합도시와 거의 일치한다(!). 선견지명? 그런데 정작 당시 선정위원들의 최종평가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가 그 옆의 공주지구(현재의 공주시 시가지에 더 가까운 부지로, 역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음)와 절충해 만든 장기지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어 최종 확정됐다.[25] 심지어 1996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주경기장을 포함한 스포츠타운 부지까지 지정되어 있었다.[26] 박정희 정부(대한민국 제3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에 테크노크라트로 유명한 오원철이 프로젝트를 총괄했으며 참여한 전문가들로 경제학자이자 관료인 김재익·박승·김만제, 건축가 김수근, 건축·도시계획가이자 전 국회의원인 김진애 등이 있다. 특히 도시계획, 건축 등의 분야에서는 국가적인 대규모 프로젝트였음을 반영하듯 당시 한국 최고의 전문가들(앞서 언급된 김수근을 비롯해 엄덕문, 윤장섭, 박병주, 주종원, 강병기, 황용주 등)이 대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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