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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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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수근
金壽根[1] | Kim Swoo-Geun
파일:Kim Swoo-Geun.jpg
본관 영양 김씨(英陽 金氏)[2]
출생 1931년 2월 20일
함경북도 청진부 신암동
(現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3]
사망 1986년 6월 14일 (향년 5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건축가, 교수, 잡지 발행인
학력 청진 천마소학교 (전학)
경성교동공립심상소학교 (졸업)
경기공립중학교 (졸업 / 46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4] / 중퇴[5])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학 / 학사)
도쿄대학 대학원 (건축학 / 석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
링크 공간그룹 김수근문화재단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가족 아버지 김용환, 어머니 김우수달
배우자 야지마 미치코[6](1958년 결혼)
경력 1961년 '김수근 건축연구소'[7] 설립
1961년 홍익미술대학 건축미술학과 교수
1962년 아시아반공연맹 자유센터 설치위원회 건설분과 위원장
1965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부사장
1966년 월간지 《공간(空間)》 발행
1968년-1969년 제2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
1971년 '공간사옥' 건립
1972년 건국대학교 교수
1974년 국토건설종합계획 심의회위원
1975년 세계건축가연맹 이사
1975년 국민대학교 초빙 교수
1976년-1978년 제10대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79년 국민대학교 조형대학 초대 학장
1980년 환경디자인연구소 설립
1982년 미국건축가협회 명예회원
1982년 서울특별시 한강종합개발사업 시민자문위원회 위원
1984년 서울특별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
수훈 1970년 국민포장
1971년 범태평양 건축상
1976년 보관문화훈장
1979년 이탈리아 문화공로훈장
1984년 철탑산업훈장
1986년 은탑산업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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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활동
3.1. 초기3.2. 국립부여박물관 설계와 왜색 논란3.3. 이후
4. 논란과 비판
4.1. 독재정권 부역4.2. 김수근 사단
5. 주요 작품
5.1. 종교 건축5.2. 한국적인 건축5.3. 고층 빌딩5.4. 목록

[clearfix]

1. 개요

파일:김수근 서울올림픽주경기장.jpg
자신이 설계한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 서있는 김수근
대한민국건축가.

김중업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한 인물 중 하나지만 행적에선 후술되어 있듯 논란과 비판이 있어 평단에서의 평가도 많이 갈리는 인물이며 여러모로 김중업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근은 여러모로 독재 정권에 밉보이지 않아 국가 사업을 도맡았으며 심지어 서울의 남영동 대공분실을 직접 설계했을 정도로 독재 정권의 철권 통치에도 영합한 건축가였다. 반면 김중업은 박정희 정권에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정권과 늘 싸우고 불화하여 급기야 해외로 쫒겨나기까지 했다.

2. 생애

1931년 2월 20일 함경북도 청진부(現 청진시) 신암동에서 아버지 김용환(金龍煥)과 어머니 김우수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청진 천마소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2학기 때 경기도 경성부로 이사해 경성교동공립심상소학교에 전학했다. 이후 경기공립중학교(現 경기고등학교)로 진학했는데 이 때 건축학을 전공한 미군 병사에게서 영어를 배운 인연으로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1950년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교수였던 김중업을 만나기도 했으나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병으로 징집되었다. 이후 휴가를 받아 부산에 갔다가 누나 김순자(1928~2021)[8]의 도움으로 탈영하여 일본으로 밀항했는데 이는 그기 설계한 자택을 다룬 기사에서 누나 김순자가 언급한 내용이다. 1958년 도쿄예술대학 미술학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3월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홍익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했다. 1972년 건국대학교 공과대학 교수에 부임했고 1975년부터 1986년까지 국민대학교 조형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1985년에 간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다가 1986년에 타계했다.

3. 활동

3.1. 초기

파일:external/cfs.tistory.com/1173298573.jpg

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

대학원 재학 당시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자는 설계 공모가 있었는데 여기서 1등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있던 조선신궁을 허물었는데 터가 탄탄해서 이걸 재활용한 것이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백지화되고 우리가 알다시피 현재의 국회의사당여의도에 있다. 현재 이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여의도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초기 여의도 입체도시 설계안에서부터 그의 은사인 단게 겐조의 영향력이 은연중에 비춰진다. 종로-마포-여의도-영등포-인천으로 이어지는 도시계획안은 단게의 도쿄계획 1960과 판박이였기 때문이다. 사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계 태동기를 이끈 인물이고 이들 이전에는 사실상 선배 건축가가 없다시피한 게 당시 한국의 실정이었다 보니 제대로 된 건축학개론서 하나 없던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그나마 현대건축이란 걸 배워 온 김수근이 중용되었다.

1961년 김수근건축연구소를 세우고 워커힐 관광사업 시설 설계에 참여하면서 힐탑바[9] 등을 설계하여 김종필과 인연을 맺게 되고 1963년 자유센터 등을 설계했다. 김종필은 이후에도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정부주도로 설립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참여하여 여의도 종합개발, 김포공항 종합개발, 경부고속도로 기본 계획, 포항제철 입지 선정, 종로 3가 종합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1966년에는 김종필에게서 받은 200만원[10]으로 건축잡지 월간 '공간'(空間)을 창간했다.

3.2. 국립부여박물관 설계와 왜색 논란

파일:부여구관.png

그런데 1967년 그가 설계한 구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이 왜색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건물이 한국 전통 건축을 바탕으로 지은 것이라는데 보면 일본 신사를 닮았다. 구 부여박물관의 처마는 거의 땅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오는 독특한 형식이었는데 이것이 묘하게 일본의 일부 고대 신사를 닮았으며 정문은 신사의 토리이를 닮았다. 그러한 이유로 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백제토기무늬', '역수입' 이런 말은 기자의 말일뿐 본인의 것이 아니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일본의 것과 비슷하게 보도된 사진은 사진기술이 들어간 것으로 건축은 시각이 아니라 스케일로 보아야 하는 예술이라고 했으며 이는 '백제양식도 일본양식도 아닌 현대건축을 전공한 김수근 본인의 것'이라고 했다.1967년 9월 5일 동아일보

한국건축학회는 이 일로 세미나를 열어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그는 '건축가간의 대화는 작품으로 이루어진다'며 공사중인 사진들을 제출하였다. 세미나에는 김중업도 참가하여 의견을 제시했는데 '설계도를 보면 일본인만이 가질 수 있는 디테일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1967년 9월 14일 동아일보 이후 부여박물관 건축심의위원회는 "일본적인 감각을 풍기는 인상이 없지는 않으나 정형적인 일본의 신사건축은 아니다."라고 결론을 짓고 설계자가 알아서 수정하라고 권고했다. 부여박물관은 이 때문에 완공이 늦어져 건축비가 처음 예산보다 2배 이상 불어났다고 한다.

한편 국립부여박물관 사태는 잘나가던 그를 끌어내리려는 타 건축가들의 소행이었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은데 당시 그의 연령대는 고작 30대였는데 이렇게 젊은 나이에 박정희 정부에서 건축가로서 부역대형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잘나가자 업계에서 알게 모르게 반발심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냐는 해석이 존재한다. 게다가 왜색 논란은 그만 해당되는건 아니었다. 몇몇 건축가를 제외하고 한국의 근대 건축은 해방 이전까지는 일본의 교육 체계하에 있었고 50년대는 성찰의 여유가 없는 전후 복구기간이었던 만큼 60년대 와서도 많은 건축가들은 일본 건축학의 영향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서울대학교홍익대학교에서 나름 배운 후 건설부에 있던 고급 관료나 학자들조차도 일본 출장 가서 구해온 도시 건축 관련한 서적을 독학하여 현장 행정에 그대로 적용해버리던 주먹구구식 시대가 이 시절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받는 이유는 이런 왜색 논란을 넘어 후술되어 있듯 독재정권에 영합했다는 것도 있어서 무조건 불쌍하다고 하기도 뭐한 점이 있지만.

3.3. 이후

이 사건은 한국 건축의 맥을 한 번 트는 계기가 되었다. 한옥처럼 지어서 왜색 논란을 빚자 이후 외관에 한옥을 접목하는 사례는 거의 사라진다. 이 사건으로 타격을 입은 김수근부터 외관에 한옥을 접목하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에는 빨간 벽돌로 지은 현대적인 건축에 집중했다. 아쉬운 것은 부여박물관은 외관이 '왜색', 즉 일본 건축물 같다고 욕을 먹은 것이지 조잡해서 욕 먹은 건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색만 제거하고 계속 한옥의 모습을 따왔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덕분에 이후엔 한옥 외관을 따 오려면 세종문화회관처럼 거석구조로 만들어 한옥의 특징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예술의 전당처럼 건축이 아니라 처럼 건축이 아닌 그 무엇으로부터 따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문화예술의 후원자로 나서는데 1977년엔 타임지가 그를 로렌초 메디치에 비유했을 정도였다. 공간 사옥 지하에 소극장 "공간사랑"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공옥진의 병신춤과 김덕수의 사물놀이가 탄생하여 건축 이외의 예술에도 족적을 남기게 되며 더 나아가 한국 문화예술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교를 지을 계획도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 부지도 구입했고 학교 건물의 설계도 해 놓았지만 한창 나이인 만 55살에 그가 간암으로 사망하면서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11]

4. 논란과 비판

4.1. 독재정권 부역

그는 독재정권에 영합한 건축가로 비판받는다. 그의 스승인 단게 겐조도 일제 시절 군국주의 관련 건축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데 이에 대해 그가 대놓고 표현한 적은 없다. 그런데 김수근은 박정희의 측근 중 한 명이자 불도저 시장으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과 친분이 있어서 독재정권 시절 국가 사업을 도맡았고 이 건축들 중 상당수는 당시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건축인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 김중업은 김현옥을 비판하다가 정권에 찍혀 해외로 강제추방 당하는 곤욕을 겪기도 한다.

그의 독재정권 영합과 관련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건축물이 바로 1970년대 세워진 구 치안본부(현 경찰청) 산하인 서울의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파일:/image/277/2012/11/30/2012112912200110396_1_59_20121130132108.jpg파일:/image/277/2012/11/30/2012112912200110396_5_59_20121130132108.jpg

대공분실 건물은 기능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고문에 최적화되어 있다. 고문실로 사용된 5층의 창문들은 극단적으로 좁게 설계되어 있는데 투신자살 방지와 최소한의 태양광을 채광하기 위해 사람 어깨의 1/3 정도만을 냈다고 한다. 복도를 따라 마주보는 방의 출입문들이 서로 어긋나게 열리도록 되어 있는데 고문받는 사람이 나가면서 맞은편 방의 동지들과 서로 신호를 주고받아 입을 다물 수도 있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다. 모든 방에 욕조를 설치하여 물고문 수단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욕조를 가진 가정집도 매우 드문데 피의자의 편의(목욕) 따위를 위해 설치했을 리가 당연히 없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설계되어 피고문자가 몇 층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효과를 주었다. 외부에서 내부를 감시하기 위해 방문마다 거꾸로 뚫은 외시경(방범렌즈)에는 나름대로 예술성을 부여하고자 무늬를 새겼다. KBS역사저널 그날

그의 공간 사무소에서 일한 바 있는 건축가 승효상은 "김수근 선생이 설마 사람을 고문할 용도인 줄 알고 설계를 맡았겠느냐"며 선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당시 김수근은 일개 건축가가 아니라 문화예술계의 대표적 후원자이자 당대의 유명인이었으며 건축계의 '큰 손'이기도 했다. 그가 1961년에 자신의 건축 사무소를 차리고 독립한 후 그의 건축 사무소에 매년 서울대 건축과 출신의 전도유망한 건축학도들이 줄줄이 입사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는 1974년부터 국민대학교에서 건축과 교수로 재임하며 10월 유신과 유신 반대 투쟁을 대학 학내에서 목격했다. 특히 1979년부터는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의 학장으로 재임하면서 서울의 봄12·12 군사반란을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을 모두 가까이에서 경험했으니 대공분실에서 고문이 행해지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설계도와 설계도상의 시방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기로 유명했으므로 끔찍한 고문을 위해 준비된 이 모든 구조와 장치들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의 손에서 치밀하게 기획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각 취조실마다 배치된 물고문용 욕조의 위치와 크기 하나하나도 의도된 것이다. 천재가 악마를 위해 짓다

대공분실 건물은 'OO해양연구소'로 불렸는데 나선형 철제 계단은 철거하면 상층부로 화물을 오르내릴 수 있는 실내 크레인을 사용할 수도 있는 수직 공간이다. 고문실에서 어느 고문자가 교회당에 길다란 창문을 고문실 창문에서 연상하는 장면이 어느 영화에 나온다.

그가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동참한 또 다른 예시로 한국자유총연맹이 쓰고 있는 자유센터가 있다. 북을 향해 돌진할 듯 한 파도의 형상을 담아냈으며 이 건물을 짓기 위해 발견된 한양도성 돌들을 전부 축대로 사용하는 문화재 파괴를 저질렀다.# (그 와중에 건물의 디자인은 르 코르뷔지에 표절이다.인도 찬디가르 Palace of Assembly)

이렇듯 그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가 건축을 통해서 독재정권의 이념과 사상을 구현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시민과 문화재를 파괴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4.2. 김수근 사단

이것은 그만의 문제로 보긴 어렵지만 그의 제자 건축가들이 한국 건축계의 주류가 되면서 한국 건축계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변질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문제가 있던 그의 건축물들을 한결같이 무비판적으로 옹호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한국의 건축계가 능력보다 인맥이 성공에 크게 결정되는 부조리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나마 2010년대 이후에는 그가 아닌 해외파 건축가들도 늘어나면서 많이 옅어졌지만 김수근과 그 제자들이 한국 건축계를 잡고 있을 땐 세운상가 시리즈의 세자만 꺼내도 역풍을 맞을 정도로 그 세가 거셌다. 세운상가를 비롯한 건축물들이 연속된 기괴한 실내구조를 가진 데다 위치 선정도 대단히 부적절하여 서울 강북의 슬럼화를 부추겨 버렸을 뿐만 아니라 종묘 등의 유명 사적지를 가려 버리는 등 결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12]

5. 주요 작품

5.1. 종교 건축

그가 설계한 종교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을 꼽으라면 서울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인 경동교회를 들 수 있다. 창문 하나 없이 깨어진 벽돌로 만들어진 투박한 외형과 건조하지만 신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암굴 같은 내부 공간을 통해 신성함 경건함을 표현한 수작이다. 전체적인 조형은 기도하는 손 모양에서 떠올렸다고 한다.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건물에서 고트프리트 뵘의 순례교회를, 자유센터와 KIST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찬디가르 의사당과 라 투레뜨 수도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건축처럼 벽돌을 쪼개는 것은 일거리도 많이 늘었지만 무엇보다 상당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서투르게 쪼개면 나머지 반쪽은 쓸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의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근데 벽돌을 쪼개는 건 김수근이 아니라 현장 미장이 아저씨들이잖아 한국의 우수한 미장이 아저씨들에게 박수를

성당 건축물도 2개 설계했는데 하나는 천주교 마산교구 주교좌성당인 양덕동 성당, 또 하나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불광동 성당이다.

5.2. 한국적인 건축

왜색 논란으로 곤욕을 치른 후 그는 한국적 건축에 관심을 가지는데 그의 한국적 건축에 대한 집약은 공간 사옥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의 전통적 건축 양식과 근, 현대적 양식이 함께 나타나 있는 공간 사옥은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공간의 경영난으로 사옥을 매각한 후에는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아라리오 뮤지엄'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학로의 샘터도 그의 설계인데 한국적인 골목길과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5.3. 고층 빌딩

파일:external/mw2.google.com/29918124.jpg

서울역 동편에 위치한 흰색 고층빌딩인 '게이트웨이 타워'는 그의 마지막 설계작이다. 그의 작품치고는 독특한 유선형의 외관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비슷한 시기에 설계된 그의 또 다른 작품인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과도 많이 닮아 있다.

5.4. 목록


[1] 대성그룹의 창업주인 김수근 회장과는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다.[2] 봉화창평파 28세. 족보명은 김이찬(金理瓚).[3] #[4] 당시에는 건축공학과였다. 건축학과로 바뀐 것은 1975년이다.[5] 당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통역관으로 근무 중 휴가로 간 부산에서 탈영하였고 곧 일본으로 밀항하게 된다.[6] 矢島道子. 한국 이름은 '김명자'였다.[7] 현재 공간그룹(공간종합건축사사무소)의 전신이다.[8] 나중에 궁중의상 디자이너로 활동했다.[9] 지금의 피자힐 건물[10] 당시로는 집을 한채 사고도 남을 큰돈이었다.[11] 생전에 대단한 애주가였다고 한다. 이 애주가 성향이 간암의 원인이 된 것이다.[12] 세운상가 자체의 문제점과 이와 관련된 한국 건축계의 문제점은 유현준 건축가도 <한국에서 건드려선 안 되는 'OO상가'>라는 영상으로 비판한 적 있다.#[13]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인도찬디가르 국회의사당과 거의 유사하게 생겼다. 노출 콘크리트로 건축된 건물인데 페인트를 덧칠한 점이 아쉬움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