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09:42:05

진자앙

1. 개요2. 생애3. 대표작
3.1. 등유주대가
4. 작품의 특징

1. 개요

陳子昻, 661 ~ 700[1]
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시인으로, 초당 시기 시인. 자는 백옥(伯玉), 사천성 서홍현 출신이다.

2. 생애

당 고종 시기인 659년 사천성 서홍 현의 부유한 지주 집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까지 술에 취해 살았기 때문에 글을 전혀 몰랐다. 후에 검술로 사람을 다치게 한 후에야 무술을 버리고 글을 따르겠다는 뜻을 개연히 세우고 옛 친구를 사양하고 공부하며 많은 책을 읽고 경사에 깊이 파고들었고 몇 년 되지 않아 백가를 섭렵하였다. 그러면서 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상에서 공로를 얻고자 하였다.

679년 삼협을 나와 장안으로 상경하여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국자감에 입학하여 681년 과거시험을 치렀지만 낙방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김화산에서 공부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년간 경사백가를 두루 섭렵했다.

682년에는 다시 입경하여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당 예종 시기인 684년 진사에 급제하여 관인대정자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언을 올렸다. 이후 무측천이 집권하자 무측천은 혹리들을 등용해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였음에도 누차 간언을 올렸다. 무측천이 촉산을 굴착해 야주도를 거쳐 생강족을 공격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며 백성과의 휴식을 주장했다. 그의 말은 직설적이어서 자주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때는 투옥되기도 했다.

686년에는 좌보궐 교지의 군대를 따라 서북 거연해, 장액하 일대에 이르렀다.

696년 거란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건안왕 무유의의 참모로 활동한다.[2]

698년에는 아버지가 노쇠하자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했으나 곧 아버지가 죽었다. 장례 기간 동안 권신 무삼사는 사홍현령 단간으로 하여금 그를 박해하게 했다.

700년 41세의 나이로 억울하게 옥사했다.

3. 대표작

3.1. 등유주대가

진자앙이 무유의의 참모로 있을 때 지은 시이다. 무유의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여 왕효걸과 소굉휘가 이끄는 군대가 패하고 왕효걸은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유의는 진자앙을 일개 서생이라는 이유로 무시했고 결국 강등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울분을 표현한 시이다.

현대중국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진자앙의 유일한 작품이다. 중학생 때 배운다.

4. 작품의 특징


[1] 659년 출생하여 700년 죽었다는 설과 658년 출생하여 699년에 사망했다는 설 또는 661년 출생하여 702년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2] 이 때가 진자앙이 <등유주대가>를 쓴 계기가 된다.[3] 시세에 대한 감개를 어두운 필치로 읊은 것으로, 조위 시절 완적의 《영회》 82수를 이어받은 것이다. 조정의 폐단을 비판하고 변방의 군인과 백성들의 고통을 반영했으며, 재능은 있으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비애감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