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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 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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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고양문목왕(高陽文穆王) 원옹 | 元雍 | |
시호 | 문목왕(文穆王) |
작위 | 영천왕(潁川王) → 고양왕(高陽王) |
성 | 탁발(拓跋) → 원(元) |
휘 | 옹(雍) |
자 | 사목(思穆) |
생몰 | ? ~ 528년 5월 17일 |
출신 | 하남군(河南郡) 낙양현(洛陽縣) |
부모 | 부황 현조 헌문황제 모친 귀인 한씨(韓氏) |
형제자매 | 7남 5녀 중 5남 |
배우자 | 노씨(盧氏), 최씨(崔氏) |
자녀 | 10남 3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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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북위의 황자. 헌문황제 탁발홍의 5남. 효문황제 원굉의 이복동생. 고양효문왕 원태, 안덕문공 원단, 제북왕 원예, 창락문헌왕 원탄, 양평백 원늑차(元勒叉), 복양백 원긍(元亙), 무양백 원복타(元伏陀), 신양백 원미타(元彌陀), 돈구백 원승육(元僧育), 위백 원거라(元居羅)의 아버지.[1]2. 생애
탁발옹은 젊어서 기개가 크고, 자유분방하여 예측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다. 이에 효문제가 말하길,"짐도 이 아이의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진솔하고 소박한 태도를 보니, 어쩌면 나이가 들고 나서야 재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라고 하였다.태화 9년(485년) 3월, 효문제 탁발굉이 동생들을 왕작에 봉할 때, 탁발옹 또한 영천왕(潁川王)에 봉해졌고, 시중(侍中)•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탁발옹에게 말했다.
"다른 왕들은 모두 선비들을 대우하여 명성을 쌓고 있는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러지 않으십니까?"
이에 탁발옹이 답하길,"나는 천자(天子)의 아들로서, 여러 왕 중 한 사람으로 봉해졌다.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 하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는 중호군(中護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을 겸임하였다.태화 18년(494년) 11월, 효문제가 낙양(洛陽) 천도를 완료했을 때, 원옹은 고양왕(高陽王)으로 개봉되었다. 그는 구 도읍인 평성(平城)에 있는 칠묘(七廟)의 신주를 낙양으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오등작(五等爵)이 시작되면서 2,000호의 식읍을 받았다.
태화 20년(496년) 정월, 효문제가 조서를 내려 황족의 성씨인 탁발씨를 원(元)씨로 바꾸게 하였다.
태화 21년(497년) 9월, 효문제가 친히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벌하여 제나라를 쳤다. 원옹은 진군대장군(鎮軍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조정의 일을 총괄하였다. 이후 위위(衛尉)로 전임되어 산기상시(散騎常侍)의 지위가 더해졌다가, 다시 사지절(使持節)•진북장군(鎮北將軍)•상주자사(相州刺史)로 옮겨졌고, 산기상시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효문제는 부임지로 떠나는 원옹을 전송할 때, 그를 훈계하며 말했다.
"상주(相州)는 본래 옛 도읍이니, 덕망과 명성을 겸비한 조정의 현명한 이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자리다. 그래서 너를 그곳의 자사로 보낸 것이다. 자사가 된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쉽다.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니 이는 쉬운 것이다.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으니 이는 어려운 것이다. 또한, 현명한 선비를 아끼고, 신의를 지키며, 사람들의 말을 쉽게 믿고 경솔하게 임용하거나 파면하지 말아야 한다."
원옹이 상주자사로 부임한 후, 정북장군(征北將軍)으로 승진하였다.태화 23년(499년) 4월, 효문제가 승하하고 선무제 원각이 즉위하자, 원옹은 사지절•도독기상영3주제군사(都督冀相瀛三州諸軍事)•정북대장군•개부(開府)•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되었으며, 산기상시의 직책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원옹은 두 주(州)를 다스리는 동안 약간의 명성을 얻었다. 그 후 낙양의 조정으로 돌아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사주목(司州牧)으로 임명되었다. 선무제는 원옹의 집에 행차할 때마다 친족과 같은 예로 대하였다.
정시 2년(505년) 정월 23일[2], 원옹은 사공공(司空公)으로 승진하였으며, 법령을 논의하고 제정하는 데 참여하여 대의(大議)에 자주 참석하였다.
정시 4년(507년) 9월 3일[3], 원옹이 태위공(太尉公)으로 승진하고 시중(侍中)을 겸하였다. 당시 가뭄이 지속되자 원옹은 두 차례 상소를 올려 자신의 직위를 사임하고자 했으나, 선무제가 특별히 이를 거절하였다.
연창 2년(513년) 2월 24일[4], 선무제가 원옹을 태보(太保)로 삼았으며, 태위와 시중의 직책은 그대로 겸하게 하였다.
선무제가 관리들의 공과를 평가하고 승진과 강등시키는 법을 시행하자, 원옹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삼가 생각하건대, 3년마다 성과를 평가하는 제도는 역대 왕조에서 공통으로 따르던 규범입니다. 지금 직무를 맡아 상중(上中)의 등급을 받은 자는 3년마다 한 계급씩 승진하고, 산관(散官)으로 상등(上等)을 받은 자는 4년마다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한직(閑職)과 용직(冗職) 또한 본래 필요 없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혹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발탁하여 진급시키거나, 혹은 누적된 공로를 바탕으로 추천하여야 합니다. 만약 능력이 없다면, 이 높은 관직을 더럽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능력을 바탕으로 조정의 관직에 진출시켰다면, 어떤 이는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먼 변경에서 근무하거나,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하거나, 체납된 세금을 독촉하거나, 주와 진을 감독하고 조사하는 책임을 맡게 됩니다. 이들 모두가 산관으로서 중책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과의 평가와 승진에 있어 이들을 한직의 관원들과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산관(散官)을 점토해 보면, 능력이 없는 자들은 모두 열등한 위치에 있고, 실무를 담당하는 자들 또한 반드시 모두가 유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직의 관원들은 오랜 기간 동안 근무한 것을 기준으로 평가받고, 복잡한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짧은 기간의 성과로 평가받으니, 이는 위로는 하늘의 공평한 은택에 어긋나고, 아래로는 불공평한 고통을 낳게 됩니다.
또한 경명(景明) 연간의 제도를 살펴보면, 평가를 감점하거나 깎는 조항이 없었으며, 정시(正始) 연간의 상주문에서는 승진이나 강등의 등급에 대한 기준이 명시되었습니다. 평가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성스러운 황제의 자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제도를 변경하고 관행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담당 관청의 의견에 따른 것입니다. 또, 성과를 평가하는 상주문은 오로지 직무를 맡은 자의 손에만 맡겨졌으며, 노력과 성실을 평가하는 기준은 산관의 의견과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직무를 맡은 자들은 스스로의 성실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으나, 산관들은 자신의 의견을 펼칠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직책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명령과 규정의 판정으로 제한을 받으니, 가까이에서 황제를 모시는 금직(禁職)에 있는 자들도 억울함을 품고 고통스러운 말을 하게 되며, 황제를 경호하는 무관들조차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한을 품게 됩니다. 사방을 평정하려 한다면서, 이래서야 어찌 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산관이 직무에 종사하다가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큰 비난을 받게 되며, 임무를 수행하는 관료가 실수를 하면 조금의 차이만으로도 처벌받습니다. 징계의 사슬이 미치는 곳은 일의 중요성과는 상관없이 적용되며, 절기와 경사에 내려지는 포상은 낮은 봉급의 관원들에게는 더해지지 않습니다. 직무를 맡은 자들의 과오와, 처벌의 기준도 이와 다를 바 없으며, 성과의 평가와 승진의 기회는 근속 연수에 따라 평등하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께서 내리신 명령과 조치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고 하니, 그 기록이 법에 어긋난다면 후대에서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왕의 일은 끝이 없어, 잠시도 쉬지 못하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나, 이 엄중한 기록이 두렵구나.'라 하였습니다. 흔들리는 버드나무는 군사를 다스리는 고된 업무를 비유한 것이요, 내리는 눈과 비는 군대를 다시 일으키는 수고를 상징합니다. 만약 이런 고된 노력과 시간을 허비한다면, 〈채미(採薇)〉의 시가 사라지고, 〈저두(杕杜)〉의 노래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직무를 맡은 관료들은 경사(吉凶)로 인해 휴가를 요청하거나 부모님을 돌보고 절을 올리러 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이 열흘을 넘기고, 때로는 병이 무거워 장기간 휴가를 청하여 몇 달 혹은 1년씩 이어지기도 합니다. 원정 도중에 힘써 일하는 자들은 평소의 고단함보다 백 배 더 수고롭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즐거움의 차이는 직무를 맡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집에 있으면서 사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공적인 일에 헌신하는 날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업무의 중요성과 경중을 따질 때, 반드시 이를 조정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인(武人)은 본래 상등급에 해당하는 자는 우림(羽林)이 되고, 다음 등급에 해당하는 자는 호분(虎賁)이 되며, 하등급에 속하는 자는 직종(直從)이 됩니다. 어떤 이는 여러 해 동안 전장과 수비 임무를 수행하며 헤아릴 수 없는 곳을 거쳤고, 어떤 이는 몇 년 동안 갑옷을 입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천 리를 이동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쟁을 겪으며 부상을 입었으며, 어떤 이는 나이가 들어 쇠약해졌습니다. 지금 본래의 등급으로 돌아가게 하여 처음과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고 요구하면서, 이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계급을 강등하거나 지위를 박탈한다면, 이는 쇠약해지지 말라는 요구와 같으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번국(蕃國)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조정의 뛰어난 인재들 중에서 선발됩니다. 이들은 혹 천 리를 넘는 험난한 길을 지나거나 만 리를 넘는 위험한 여정을 밟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돌아오지 못할 슬픔을 품고 떠납니다. 이들은 혼과 뼈를 바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전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관직과 품계를 포상으로 내렸으나, 지금의 조정은 제도를 바꾸어 단순히 계급의 공로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과 평가로 대체하는 것은 사신의 기대에 어긋나며, 〈황화(皇華)〉의 사명감을 장려하고 〈사모(四牡)〉의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다시 정시(正始) 연간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일반적으로 직무를 맡아 상중(上中) 등급을 받은 자는 3년마다 한 계급씩 승진하며, 이전의 임무를 맡은 상중 등급자에 대해서는 6년마다 한 단계씩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3년에 한 번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보편적인 규범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는 이전의 임무를 맡은 경우 6년 만에 한 계급을 올리며, 과오가 없으면 두 배의 기간을 기준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이 제도를 따져보면, 분명히 과거의 평가 기준이 지금의 기준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 임명된 자는 단 하루 근무했더라도 계급의 영광을 동일하게 누리고, 하등급의 사람은 일반적 평가로 인해 상위로 승진하며, 반대로 상등급의 사람은 일반적 기준으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게 됩니다.
신은 또한 부위(部尉)의 자품(資品)이 본래 공식적인 품계에 속하지 않으며, 이는 이미 명령으로 공표되어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마을과 거리에서 도둑이 많아지고, 부위의 권위가 가볍게 여겨져 위엄을 세우지 못하니, 그 품계를 청류(清流)로 올려 악당들을 억누르고자 합니다. 과거 견침(甄琛)이 말하기를 '법은 시행하며 그 효과를 관찰하고, 적합하지 않으면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 말이 채택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성스러운 자애로 이를 살피시어 부위의 품계를 더 높이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성과 평가 기준이 막 발표되었으나,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제도를 빛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를 개정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원옹의 상소를 살펴본 선무제는 이내 그를 불러 함께 시무(時務)를 논의하였다.또한 경명(景明) 연간의 제도를 살펴보면, 평가를 감점하거나 깎는 조항이 없었으며, 정시(正始) 연간의 상주문에서는 승진이나 강등의 등급에 대한 기준이 명시되었습니다. 평가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성스러운 황제의 자애로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제도를 변경하고 관행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담당 관청의 의견에 따른 것입니다. 또, 성과를 평가하는 상주문은 오로지 직무를 맡은 자의 손에만 맡겨졌으며, 노력과 성실을 평가하는 기준은 산관의 의견과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직무를 맡은 자들은 스스로의 성실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었으나, 산관들은 자신의 의견을 펼칠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직책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명령과 규정의 판정으로 제한을 받으니, 가까이에서 황제를 모시는 금직(禁職)에 있는 자들도 억울함을 품고 고통스러운 말을 하게 되며, 황제를 경호하는 무관들조차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한을 품게 됩니다. 사방을 평정하려 한다면서, 이래서야 어찌 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산관이 직무에 종사하다가 작은 실수를 저지르면 큰 비난을 받게 되며, 임무를 수행하는 관료가 실수를 하면 조금의 차이만으로도 처벌받습니다. 징계의 사슬이 미치는 곳은 일의 중요성과는 상관없이 적용되며, 절기와 경사에 내려지는 포상은 낮은 봉급의 관원들에게는 더해지지 않습니다. 직무를 맡은 자들의 과오와, 처벌의 기준도 이와 다를 바 없으며, 성과의 평가와 승진의 기회는 근속 연수에 따라 평등하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임금께서 내리신 명령과 조치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고 하니, 그 기록이 법에 어긋난다면 후대에서 무엇을 본보기로 삼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왕의 일은 끝이 없어, 잠시도 쉬지 못하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어찌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나, 이 엄중한 기록이 두렵구나.'라 하였습니다. 흔들리는 버드나무는 군사를 다스리는 고된 업무를 비유한 것이요, 내리는 눈과 비는 군대를 다시 일으키는 수고를 상징합니다. 만약 이런 고된 노력과 시간을 허비한다면, 〈채미(採薇)〉의 시가 사라지고, 〈저두(杕杜)〉의 노래가 그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직무를 맡은 관료들은 경사(吉凶)로 인해 휴가를 요청하거나 부모님을 돌보고 절을 올리러 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이 열흘을 넘기고, 때로는 병이 무거워 장기간 휴가를 청하여 몇 달 혹은 1년씩 이어지기도 합니다. 원정 도중에 힘써 일하는 자들은 평소의 고단함보다 백 배 더 수고롭습니다. 이러한 고통과 즐거움의 차이는 직무를 맡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립니다. 집에 있으면서 사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공적인 일에 헌신하는 날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업무의 중요성과 경중을 따질 때, 반드시 이를 조정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인(武人)은 본래 상등급에 해당하는 자는 우림(羽林)이 되고, 다음 등급에 해당하는 자는 호분(虎賁)이 되며, 하등급에 속하는 자는 직종(直從)이 됩니다. 어떤 이는 여러 해 동안 전장과 수비 임무를 수행하며 헤아릴 수 없는 곳을 거쳤고, 어떤 이는 몇 년 동안 갑옷을 입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천 리를 이동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쟁을 겪으며 부상을 입었으며, 어떤 이는 나이가 들어 쇠약해졌습니다. 지금 본래의 등급으로 돌아가게 하여 처음과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고 요구하면서, 이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계급을 강등하거나 지위를 박탈한다면, 이는 쇠약해지지 말라는 요구와 같으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또한, 번국(蕃國)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조정의 뛰어난 인재들 중에서 선발됩니다. 이들은 혹 천 리를 넘는 험난한 길을 지나거나 만 리를 넘는 위험한 여정을 밟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돌아오지 못할 슬픔을 품고 떠납니다. 이들은 혼과 뼈를 바쳐 충성을 다하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합니다. 이전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관직과 품계를 포상으로 내렸으나, 지금의 조정은 제도를 바꾸어 단순히 계급의 공로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성과 평가로 대체하는 것은 사신의 기대에 어긋나며, 〈황화(皇華)〉의 사명감을 장려하고 〈사모(四牡)〉의 전통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다시 정시(正始) 연간의 제도를 살펴보건대, 일반적으로 직무를 맡아 상중(上中) 등급을 받은 자는 3년마다 한 계급씩 승진하며, 이전의 임무를 맡은 상중 등급자에 대해서는 6년마다 한 단계씩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3년에 한 번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예로부터 이어져 온 보편적인 규범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는 이전의 임무를 맡은 경우 6년 만에 한 계급을 올리며, 과오가 없으면 두 배의 기간을 기준으로 승진하게 됩니다. 이 제도를 따져보면, 분명히 과거의 평가 기준이 지금의 기준으로 대체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 임명된 자는 단 하루 근무했더라도 계급의 영광을 동일하게 누리고, 하등급의 사람은 일반적 평가로 인해 상위로 승진하며, 반대로 상등급의 사람은 일반적 기준으로 인해 오히려 퇴보하게 됩니다.
신은 또한 부위(部尉)의 자품(資品)이 본래 공식적인 품계에 속하지 않으며, 이는 이미 명령으로 공표되어 오랫동안 시행되어 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마을과 거리에서 도둑이 많아지고, 부위의 권위가 가볍게 여겨져 위엄을 세우지 못하니, 그 품계를 청류(清流)로 올려 악당들을 억누르고자 합니다. 과거 견침(甄琛)이 말하기를 '법은 시행하며 그 효과를 관찰하고, 적합하지 않으면 이를 개정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 말이 채택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라건대 성스러운 자애로 이를 살피시어 부위의 품계를 더 높이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의 성과 평가 기준이 막 발표되었으나,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라의 제도를 빛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 이를 개정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연창 4년(515년) 정월, 선무제가 붕어하고 아직 어린 효명제 원후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원옹을 태극궁(太極宮)의 서백당(西柏堂)에 머무르게 하고, 중요한 국정을 자문하고 결정하도록 하였으며, 친신(親信) 20명을 배속시켜 주었다. 또한, 원옹을 종사(宗師)로 삼고, 태부(太傅)•시중으로 직위를 올렸으며, 태위공(太尉公)을 겸임하게 하고, 왕의 지위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리고 별도의 명령으로 장작(將作)을 지휘하여 국자학사(國子學寺)를 건립하고, 그곳을 원옹의 거처로 제공하였다.
연창 4년(515년) 2월, 원옹이 권신이자 외척인 사도 고조를 암살하고 자살이라 공표하였다.
연창 4년(515년) 3월, 고조가 죽으면서 권력에 공백이 생기자, 영군장군 어충(於忠)이 권력을 전횡하며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이에 상서복야 곽조(郭祚)가 원옹에게 그를 제거할 것을 권하였는데, 이를 전해듣고 분노한 어충은 조서를 위조하여 곽조와 상서 배식(裴植)을 죽이고, 원옹을 왕작에서 폐위시켜 그의 저택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조정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황문랑(黃門郎)을 보내 원옹의 자문을 구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충은 다시 조서를 위조하여 원옹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시중 최광(崔光)과 상의할 때 최광이 강하게 거절하는 것을 보고 계획을 중단하였다.
연창 4년(515년) 9월, 영태후 호씨가 조정을 주관하게 되면서 어충을 익주(翼州) 자사로 좌천시켰다. 이에 원옹이 상소를 올려 말했다.
"신이 처음 백당(柏堂)에 들어갔을 때, 조정에서 발하는 조서와 지시가 문하성(門下省)을 통해 일원화되어 집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제대로 바로잡지 못하고, 명령이 나간 뒤에야 그 잘못을 깨달았을 뿐이니, 이는 신이 뜻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매번 이를 보며 마음이 상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며 참으로 끔찍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부당한지 깊이 깨달았으나, 이를 금지하거나 제지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신은 최근 내측의 중요한 자리와 사부(師傅)의 직책을 겸하여 맡아 폐하의 안위를 보호하고, 아침저녁으로 폐하를 따뜻하게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충(於忠)은 무사(武司)의 직책을 맡으면서도 금제를 자유롭게 어기고, 내외(內外)의 경계를 넘나들어, 조정에서의 조회와 알현은 끊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신은 황제의 거처와 침식(寢食)에 대해 어디에 계신지도 알지 못하였으며, 사직(社稷)의 안위에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백당(柏堂)에 출입하면서도 그저 서 있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어충이 계획하여 신을 죽이려 했으나, 다행히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를 막아주었습니다. 또한 어충은 복경(僕卿)과 함께 서로 짜고, 자신의 감정대로 승진과 강등을 결정하며, 관직을 옮기고 직책을 부여하는 일이 열흘을 넘기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현명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측근들만 등용하였으며, 그 위세가 온 조정과 관료들에게 떨쳤고, 그 세력이 조정 안팎으로 크게 기울었습니다. 신은 그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그를 옹주자사(雍州刺史)로 내보내어 관중(關中) 지역을 진정시키고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으나,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충에게 폐위되어 직책을 잃고 말았습니다. 신은 직책을 맡고도 녹봉만 받았으며, 폐하의 은혜를 저버린 채 믿음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선제(先帝)께서 승하하시고, 황태자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신 것은 군부(君父)의 변함없는 계책이자, 신하로서 영원히 따를 법칙이니, 이에 대해 포상을 내리는 것은 예로부터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어충은 이미 신하의 몸으로 선제께 은혜를 받았고, 국상(喪喪)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폐하를 동궁(東宮)에서 맞이한 것은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그가 그 일을 하지 않겠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어충은 의기(意氣)가 하늘을 찌를 듯하며, 앉아서 작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날 그를 억제하려 하였으나, 함께 있던 사람들은 화를 부를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신은 권신(權臣)이 원하는 것을 감히 바로 거스를 수 없었기에, 왕공(王公)과 경사(卿士)를 모아 그 포상의 정도를 논의하였습니다. 청하왕(清河王) 신(臣) 원역은 선제(先帝)의 존귀한 아우로, 식견이 너그럽고 밝으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대중 앞에서 먼저 의견을 내었는데, 어충을 부지런함으로 상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권신의 뜻을 거스르기를 꺼려하여 결국 그의 얼굴을 살피며 작위를 수여하였습니다. 신도 이를 옳지 않다고 알았으나 결국 따르고 말았으니, 이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어충은 권력을 잡고 문하성을 지배하였으며, 재집(宰執)의 자리에 있으면서 금군(禁軍)을 총괄하였습니다. 그가 숭훈궁(崇訓宮)의 위위(衛尉)를 맡아 내외를 겸직하며, 황궁의 안쪽과 바깥을 가로지르며 권력을 휘두르게 냅두었으니, 이것이 신의 다섯 번째 죄입니다.
옛날에는 중죄를 다룰 때 반드시 삼공(三公)을 소집하여 함께 논의하고, 열흘을 기한으로 삼아 심사하였으니, 이는 사형을 신중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제(先帝)께서 즉위하신 지 17년 동안, 비천한 자가 형벌을 받을지라도 법을 관대히 적용하셨으며, 조정의 고위 관리 중에서는 한 사람도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복야(僕射)와 상서(尚書)가 마치 풀 한 포기를 꺾듯 쉽게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어충(於忠)이 권력을 쥐고 조서를 위조하여, 임의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신이 이를 막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여섯 번째 죄입니다.
신은 스승이자 재상의 직위를 맡고 있었으나, 그 직무를 다하지 못한 채 나이가 다하도록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런 처지로 무슨 면목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무슨 낯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폐하의 은혜로 용서를 받더라도, 여전히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신은 사적으로 머물던 집으로 물러가, 모든 잘못을 사죄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영태후는 어충이 황제를 보호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의 죄를 묻지 않았다. 또, 원옹의 식읍을 1,000호 늘리고, 그를 다시 시중•태사(太師)로 임명하였다. 아울러 사지절을 추가로 수여하고, 본래 관직을 유지한 채 사주목(司州牧)을 겸임하게 하였다.신은 최근 내측의 중요한 자리와 사부(師傅)의 직책을 겸하여 맡아 폐하의 안위를 보호하고, 아침저녁으로 폐하를 따뜻하게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충(於忠)은 무사(武司)의 직책을 맡으면서도 금제를 자유롭게 어기고, 내외(內外)의 경계를 넘나들어, 조정에서의 조회와 알현은 끊어졌습니다. 이에 따라 신은 황제의 거처와 침식(寢食)에 대해 어디에 계신지도 알지 못하였으며, 사직(社稷)의 안위에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백당(柏堂)에 출입하면서도 그저 서 있을 뿐이었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어충이 계획하여 신을 죽이려 했으나, 다행히 직무를 맡은 이들이 이를 막아주었습니다. 또한 어충은 복경(僕卿)과 함께 서로 짜고, 자신의 감정대로 승진과 강등을 결정하며, 관직을 옮기고 직책을 부여하는 일이 열흘을 넘기지 않고 반복되었습니다. 그는 현명하고 훌륭한 인재들을 쫓아내고, 자신의 측근들만 등용하였으며, 그 위세가 온 조정과 관료들에게 떨쳤고, 그 세력이 조정 안팎으로 크게 기울었습니다. 신은 그의 이러한 행위를 보고, 그를 옹주자사(雍州刺史)로 내보내어 관중(關中) 지역을 진정시키고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으나,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충에게 폐위되어 직책을 잃고 말았습니다. 신은 직책을 맡고도 녹봉만 받았으며, 폐하의 은혜를 저버린 채 믿음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선제(先帝)께서 승하하시고, 황태자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신 것은 군부(君父)의 변함없는 계책이자, 신하로서 영원히 따를 법칙이니, 이에 대해 포상을 내리는 것은 예로부터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어충은 이미 신하의 몸으로 선제께 은혜를 받았고, 국상(喪喪)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폐하를 동궁(東宮)에서 맞이한 것은 신하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그가 그 일을 하지 않겠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어충은 의기(意氣)가 하늘을 찌를 듯하며, 앉아서 작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날 그를 억제하려 하였으나, 함께 있던 사람들은 화를 부를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신은 권신(權臣)이 원하는 것을 감히 바로 거스를 수 없었기에, 왕공(王公)과 경사(卿士)를 모아 그 포상의 정도를 논의하였습니다. 청하왕(清河王) 신(臣) 원역은 선제(先帝)의 존귀한 아우로, 식견이 너그럽고 밝으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대중 앞에서 먼저 의견을 내었는데, 어충을 부지런함으로 상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권신의 뜻을 거스르기를 꺼려하여 결국 그의 얼굴을 살피며 작위를 수여하였습니다. 신도 이를 옳지 않다고 알았으나 결국 따르고 말았으니, 이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어충은 권력을 잡고 문하성을 지배하였으며, 재집(宰執)의 자리에 있으면서 금군(禁軍)을 총괄하였습니다. 그가 숭훈궁(崇訓宮)의 위위(衛尉)를 맡아 내외를 겸직하며, 황궁의 안쪽과 바깥을 가로지르며 권력을 휘두르게 냅두었으니, 이것이 신의 다섯 번째 죄입니다.
옛날에는 중죄를 다룰 때 반드시 삼공(三公)을 소집하여 함께 논의하고, 열흘을 기한으로 삼아 심사하였으니, 이는 사형을 신중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선제(先帝)께서 즉위하신 지 17년 동안, 비천한 자가 형벌을 받을지라도 법을 관대히 적용하셨으며, 조정의 고위 관리 중에서는 한 사람도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반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복야(僕射)와 상서(尚書)가 마치 풀 한 포기를 꺾듯 쉽게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어충(於忠)이 권력을 쥐고 조서를 위조하여, 임의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신이 이를 막지 못했으니, 이것이 신의 여섯 번째 죄입니다.
신은 스승이자 재상의 직위를 맡고 있었으나, 그 직무를 다하지 못한 채 나이가 다하도록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런 처지로 무슨 면목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으며, 무슨 낯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비록 폐하의 은혜로 용서를 받더라도, 여전히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신은 사적으로 머물던 집으로 물러가, 모든 잘못을 사죄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한번은 원옹이 상소를 올려 청하길,
"왕공(王公) 이하의 천한 첩들은 모두 금실로 짜여진 비단이나 금·옥·진주·보석으로 된 물품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이를 어길 경우 명령을 위반한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또한, 노비는 비단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고, 거친 베로 만든 옷까지만 허용하며, 남자 노비는 무명옷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아울러 노비는 금·은으로 만든 비녀나 띠도 사용할 수 없게 하며, 이를 어길 시 채찍 100대로 처벌해야 합니다."
라 하였다. 영태후는 이를 따랐으나 오래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조서를 내려 원옹에게 걷거나 수레를 이용하여 궐의 협문(掖門)을 출입하도록 허락하고, 본래 관직을 유지한 채 상서성(尚書省)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원옹이 여러 차례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조서를 내려 시중(侍中)이 이를 직접 권유하고 설득하게 하였다. 또한, 원옹이 조석으로 효명제를 모시고 강론하도록 하였다.신귀 3년(520년) 7월, 원차가 영태후를 유폐시키고 조정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원옹을 무시하지 않고 예우하였다. 이로써 원옹은 조정의 내외를 총괄하며, 원차와 함께 모든 정무를 결정하였다.
정광 6년(525년) 4월, 원차의 예우에도 불구하고, 원옹은 원차를 축출하고 영태후가 다시 조정에 복귀하는 것을 도왔다. 그 공로로 그의 녹봉은 10,000여에 달하엿고, 쌀은 40,000석이 지급되었으며, 수많은 기녀와 시종들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의 여러 아들들 또한 높은 관직에 오르고 예우를 받으며, 그가 누린 영광과 부귀는 형제들 중에서 비할 데 없었다.
과거 원옹의 왕비 노씨(盧氏)가 사망한 후, 원옹은 다시 박릉(博陵) 사람 최현(崔顯)의 여동생을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매우 아름다워 총애를 받았다. 원옹은 그녀를 왕비로 삼고자 하였으나, 선무제가 최씨 가문은 "동최(東崔)"라 불리며, 지위가 낮고 명망이 부족하다 하여 이를 꺼렸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연창(延昌) 연간 이후 옹은 많은 기녀(妓女)들을 총애하여 그 수가 백여 명에 이르렀고, 최씨는 점차 소외되었다. 그는 최씨를 별도의 방에 가두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했고, 옷과 음식을 간신히 제공하였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주변에는 시중드는 하인도 없었으며, 최씨의 자녀들이 어머니를 만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허락을 받아야만 면회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씨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원옹이 폭력을 행사하여 그녀를 죽였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영태후는 원옹에게 기녀를 하사하는 허락하였는데, 아직 보내지 못한 상태에서 원옹은 자신이 거느린 환관 정아(丁鵝)를 궁으로 보내 네 명의 기녀를 임의로 선택하여 데리고 갔다. 이에 영태후가 그의 독단적인 행동을 질책하며 그 처분을 취소하였다.
효명제가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원복(元服)을 입게 되자, 원옹은 태보(太保)를 겸임하였으며, 태위 최광과 함께 성년식을 주관하였다. 효명제는 조서를 내려 원옹이 대사마문(大司馬門)을 수레로 출입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승상(丞相)으로 승진시키고, 우보(羽葆)와 고취(鼓吹)를 하사하였으며, 반검(班劍)을 배가하여 그에게 특별한 영예를 더하였다. 나머지 직책과 대우는 모두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원옹에게 비단 800필과 1,000명의 하인을 지급하며, 신속히 직책을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다. 그리고 제군순왕 원간의 태화(太和) 시절의 예를 따라, 조회가 끝난 후 특별히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고, 무릎 꿇고 엎드리는 예를 생략하게 하였다.
효창(525년 ~ 528년) 초에 효명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최근 재상의 부서가 열리지 않아, 음양의 조화가 바뀌지 못하였다. 왕은 뛰어난 지혜로 종실(宗室)을 주관하고, 공로와 명망이 높고 중하여, 도덕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위엄으로 중화와 주변 민족을 아우르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가문처럼 여기며, 몸소 절제의 덕을 지니고 있으니, 부(府)를 열어 보좌관을 둘 수 있다."
이후 사도(司徒)를 폐지하고 이를 승상부(丞相府)로 개편하였다. 원옹은 식견이 짧고 얕으며 학문에도 소양이 없었다. 비록 조정의 수장 자리에 있었으나, 당시의 여론과 인망을 얻지 못하였다. 친족으로서의 지위와 높은 신분으로 인해 재상직에 올랐으나, 조정의 정무가 무질서해지고 통제력을 잃었을 때, 정치를 바로잡거나 조정을 보좌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그저 순응하기만 하였다.효창 4년(528년) 2월, 영태후가 장성한 효명제와 권력을 두고 다투다가, 결국에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3세에 불과한 원조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효명제가 영태후를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이려 했던 진양(晋陽)의 이주영이 영태후를 따르길 거부하고, 거병하여 효장제 원자유를 옹립한 뒤에 낙양을 습격하였다.
건의 원년(528년) 4월 13일[5], 이주영이 하음(河陰)에서 영태후와 여러 북위의 황족들을 황하에 던져 수장시켰다. 이때 원옹도 수장당해 사망하였다. 사후 가황월(假黃鉞)•상국(相國)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목왕(文穆王)'이라 하였다. 적자인 원태(元泰)도 그와 함께 살해당했기에, 적손 원빈(元斌)이 고양왕 작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