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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1 15:38:55

우충(북위)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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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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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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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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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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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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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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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영수무경공(靈壽武敬公)
于忠 | 우충
시호 무경공(武敬公)
작호 위군 개국공(魏郡開國公)
상산군 개국공(常山郡開國公)
→ 영수현 개국공(靈壽縣開國公)
만뉴우(萬忸于) → 우(于)
충(忠)/등(登)
천년(千年) → 사현(思賢)
생몰 460년 ~ 518년 3월
부친 우열(于烈)
출신 대군(代郡) 상건현(桑乾縣)
형제자매 5남 중 차남
아내 범양군군(範陽郡君)
양자 우번(于翻)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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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의 인물. 선비족. 거록공 우열의 아들. 본래 성씨는 '만뉴우(萬忸于)'이었으나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인해 그의 집안은 모두 '우(于)'로 바뀌었다.

2. 생애

우충은 약관의 나이에 시어중산(侍御中散)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황제인 효문제 탁발굉이 너무 어려 문명태후가 섭정하고 있었는데, 형벌과 정치가 매우 엄격하여 곁에 있던 신하들조차 작은 잘못으로 죄를 받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우충은 순박하고 정직하며 말이 적어, 끝내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태화 연간(477년 ~ 500년)에 우충은 무기시랑(武騎侍郎)으로 전임되었고, 이때 '등(登)'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는 태자우군교위(太子羽軍校尉)로 승진하였다.

태화 23년(499년) 4월, 선무제 원각이 즉위하자, 우충은 장수교위(長水校尉)로 승진하였다. 곧이어 그는 좌우시랑장(左右侍郎將)으로 임명되었으며, 직침(直寢)을 맡아 황제의 침소를 보호하였다.

경명 2년(501년) 5월, 함양왕 원희가 반란을 모의했을 때, 무흥왕 양집(楊集)이 북망(北邙)으로 달려가 이를 고하였다. 당시 선무제는 사냥 중이었고, 좌우가 흩어져 직위(直衛)의 병력이 거의 없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변란이 갑자기 발생하여 모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우충이 나아가 말했다.
"신(臣)은 대대로 특별한 은혜를 입어 왕실에 충성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신의 부친 우열은 영군(領軍)으로서 도읍을 지키는 중책을 맡고 있으니, 대비와 방어책이 확고하여 결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선무제는 즉시 우충에게 말을 타고 실정을 정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우열은 병력을 나누어 엄격히 대비하고 있었으며, 우충의 말처럼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 있었다. 선무제가 궁으로 돌아와 우충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경(卿)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비단 500필을 하사하며 덧붙여 말했다.
"선제(先帝)께서 경에게 '등(登)'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신 것은 실로 훌륭한 결정이었다. 하나, 짐은 경의 충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에 기뻐하여, 이제 경의 이름을 '충(忠)'으로 바꾸고자 한다. 이는 경의 굳센 성품을 나타내며, 이름과 실질이 서로 부합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명 2년(501년) 8월, 우열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사망하자, 우충은 부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래의 관직으로 복귀하였고, 이후 사공 장사(司空長史)로 승진하였다.

경명 2년(501년) 11월, 당시 태부와 녹상서의 직책을 겸하고 있던 북해왕 원상은 존귀한 신분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장작대장 왕우(王遇)는 자주 북해왕의 뜻에 따라 자재와 물자를 제공하였다. 어느 날, 공무와 관련하여 우충이 원상 면전에서 왕우를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는 나라의 주공(周公)과 같아 왕실을 돕고 보필하는 위치에 계시므로, 필요한 자재와 물자는 마땅히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첨하며 권세에 붙어 공적인 물자를 손상시키고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한단 말입니까?"
이 말을 듣고 왕우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으나, 원상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우충에게 사과하였다. 이후 우충은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승진하였고, 이전의 관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우충은 과거 원희의 반란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위군 개국공(魏郡開國公)에 봉해졌고, 식읍 900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무위장군(武衛將軍)의 직책까지 겸하게 되었다.

우충은 언제나 강직한 성품과 바른 언행으로 인해 결국 북해왕 원상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원상은 우충을 면전에서 책망하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죽는 모습을 보게 될까 걱정하지, 그대가 내 죽는 모습을 보는 일을 걱정하지 않는다."
우충이 대답하였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각자 정해진 운명이 있는 법입니다. 만약 제가 왕의 손에 죽도록 정해져 있다면 피할 수도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왕께서도 저를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상은 우충의 이 표연한 태도를 보고, 마침 우충이 자신의 작위를 양보하고자 표문을 올린 것을 기회로 삼아 은밀히 선무제에게 우충을 열경(列卿)으로 삼아 측근 업무에서 물러나게 하고 작위를 사양하게 하자고 권하였다. 이에 선무제는 우충의 책봉을 중단하고, 대신 그를 태부경(太府卿)으로 우대하여 승진시켰다.

정시 2년(505년) 가을, 조정은 우충의 본래의 관직을 유지한 채, 사지절(使持節)•시중(侍中)으로 임명하여 서도대사(西道大使)의 임무를 맡겼다.[1] 그는 자사(刺史)와 진장(鎮將) 가운데 탐욕과 부패가 드러난 자들의 죄상을 조사하여 보고하고, 군현(郡縣)의 태수(太守) 이하 관리들에 대해서는 즉각 판결을 내릴 권한을 부여받았다. 우충은 상서 이숭(李崇)과 각각 두 갈래로 나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우충은 병주(并州) 자사 고총(高聰)의 200여 가지 부패 행위를 탄핵하여 대형(大刑)에 처하도록 논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우충은 평서장군(平西將軍)•화주자사(華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계모의 상을 당해 부임하지 않았다.

복상 후, 우충은 다시 안북장군(安北將軍)•상주자사(相州刺史)로 임명되었고, 이후 위위경(衛尉卿), 하남읍중정(河南邑中正)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 시기에 선무제는 우충에게 이부상서 원휘, 탁지상서 원광, 하남윤 무장(無萇) 등과 함께 대방(代方) 지역의 성씨와 족속을 평가하여 확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당시 외척이자 권신인 고조는 우충의 인격과 능력을 시기하여 은밀히 그를 외직으로 내보낼 계책을 세웠다. 그는 선무제에게 중산(中山)이 요충지이니 이를 방어하려면 적합한 인재가 필요하다고 건의하며, 우충의 재능이 이 임무에 적합하다고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선무제는 우충을 안북장군•정주자사(定州刺史)로 삼아 부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선무제는 곧 이를 후회하고 다시 그를 위위경•좌위장군(左衛將軍)•항주대중정(恆州大中正)으로 임명하여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하였다. 아울러 선무제는 밀사를 보내 조서를 내리며 우충에게 말하길,
"최근 나라의 기둥 같은 신하들이 멀리 배치되면서, 짐의 신뢰를 맡길 자가 없어지고 있다. 지금 경에게 맡긴 직책이 비록 중하지만, 이와 비교하면 가볍다. 따라서 외직을 중단케 하고 내부의 업무를 맡기니, 반드시 부지런히 일하여 짐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라 하였다.

연창 원년(512년), 우충은 도관상서(都官尚書)로 임명되었고, 평남장군(平南將軍)•좌위장군•산기상시의 칙책을 겸하였으며, 중정의 직위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어느 날, 연회 중에 선무제는 우충에게 검과 지팡이를 하사하며 술잔을 들어 그를 향해 말했다.
"경은 대대로 굳은 마음과 절개를 지켜왔기에, 항상 금위(禁衛)를 맡아왔다. 이전에는 경의 행실이 충성스럽기에 '충(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이제는 경의 재능이 능히 외적을 막을 만하니, 짐이 사용하던 검과 지팡이를 경에게 하사하노라. 이는 이름에 맞게 그 의미를 다하며, 가벼운 뜻으로 내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출입과 거동에 항상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하라."
우충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그 후 우충은 시중•영군장군(領軍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우충은 황제의 면전에서 직책을 사양하며 아뢰었다.
"신은 학식이 부족하여 문무(文武)를 겸하는 임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에 선무제가 말했다.
"당대에 학식과 문재(文才)를 가진 이들은 적지 않으나, 그들의 마음이 경만큼 정직하지는 않소. 짐이 경에게 아랫사람들을 위해 수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짐이 위에서 염려하지 않기 위함이오."

연창 4년(515년) 정월, 선무제가 붕어하자, 우충은 밤중에 시중 최광(崔光)과 함께 우위장군 후강(侯剛)을 보내 동궁(東宮)에 있던 원후를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후 우충은 문하성(門下省)의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제안하였다.
"폐하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시어 정무를 직접 다루기 어려우십니다. 태위(太尉)인 고양왕(高陽王) 원옹은 존귀하고 명망이 높으니, 서백당(西柏堂)에 거처하며 조정을 통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임성왕(任城王) 원징은 덕망이 높고, 황족이므로 상서령(尚書令)으로 임명하여 모든 정무를 총괄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우충은 이 내용을 중궁(中宮)에 상주하면서 조속히 명령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

연창 4년(515년) 2월, 어사중위 왕현(王顯)은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 자신의 간사한 계략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는 급사중 손복련(孫伏連) 등과 결탁하여 엄한 태도로 이를 거부하고, 문하성의 상주를 억눌렀다. 또한, 궁중의 시중(侍中)과 황문(黃門) 관료들에게 육보(六輔)의 성씨와 명단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손복련 등은 태후의 명을 위조하여 고조에게 상서녹사(尚書錄事)를 맡기고, 왕현과 고맹(高猛)을 시중으로 임명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에 우충은 곧바로 전각(殿中)에서 왕현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연창 4년(515년) 3월, 고양왕 원옹에 의해 외척 고조가 살해당하면서 그 세력이 와해되니, 우충은 문하성을 장악한 데에 더하여 금위(禁衛)까지 총괄하면서 조정의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그의 권세는 당대에 크게 떨쳤다. 과거 태화 연간에 군국(軍國)의 일이 많아, 효문제는 재정 부족을 이유로 백관의 녹봉을 4분의 1 감축한 바 있었다. 우충은 권력을 잡은 뒤, 관료들에게 혜택을 베풂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감축된 녹봉을 모두 회복시키고, 관리들에게 한 계급씩 승진을 부여하였다. 또, 당시 제도에 의하면 백성들은 비단과 천 한 필 외에 면마(綿麻) 8량을 징수당하였으나, 우충은 이를 모두 면제하여 파격적인 감세 정책까지 시행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우충은 고양왕 원옹에게 선무제가 자신을 후하게 대우해줄 것이라 약조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보정을 담당하던 원옹은 우충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의 뜻을 따랐고, 이내 우충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승진시켰다.

우충은 스스로 새 정권과 구 정권의 과도기에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다고 여기며, 백관들을 은근히 설득하여 자신에게 상을 더하도록 하였다. 이에 태위 원옹, 청하왕 원역, 광평왕 원회는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우충을 상산군개국공(常山郡開國公)에 봉하고, 식읍 2,000호를 하사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는데, 조정의 백관은 모두 이에 동의하였다. 우충은 상을 홀로 받는 것을 꺼려 조정을 설득하여, 자신과 함께 문하성에 있는 자들에게도 봉읍(封邑)을 추가로 주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문하성 소속인 상서좌복야 곽조(郭祚)와 상서 배식(裴植)은 우충의 권세가 날로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 원옹에게 우충을 외직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충은 이 소식을 듣고, 관련 관청을 협박하여 이들의 죄를 날조해 상주하게 하였다. 곽조는 황제의 스승으로서 오랜 은혜가 있었고, 배식은 귀순하여 자신의 영지를 조정에 바친 공로가 있었으나, 우충은 결국 조서를 위조하여 이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에 조정과 백성들 모두 분노하며 이를 갈았으나, 왕공(王公) 이하 모든 이들이 그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대하지 못하고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우충은 더 나아가 고양왕 원옹까지 제거하려 하였으나, 시중 최광이 강력히 반대하자 이를 중단하였고, 대신 원옹의 태위 직책을 박탈하고 왕의 신분을 유지한 채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연창 4년(515년) 7월, 그 후로부터 조정의 조서와 생살여탈권은 모두 우충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우충은 황후 호씨를 황태후로 높이고, 숭훈궁(崇訓宮)에 거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의동삼사(儀同三司)•상서령(尚書令)•숭훈위위(崇訓衛尉)에 오르고, 영군장군과 시중의 직책은 유지하였다.

연창 4년(515년) 9월, 영태후 호씨가 섭정을 시작하자, 그녀는 우충의 시중, 영군장군, 숭훈위위 직책을 박탈하고, 상서령과 의동삼사의 직위만 남겨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중을 다시 더하여 직책을 조정하였다.

우충이 상서령을 맡은 지 10여 일이 지났을 때, 영태후는 문하성의 시종과 관리들을 숭훈궁으로 불러 물었다.
"우충은 조정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데, 그의 평판은 어떠한가?"
그러자 모두가 대답하기를,
"그 직위에 걸맞지 않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영태후는 우충을 사지절(使持節)•도독기·정·영3주제군사(都督冀定瀛三州諸軍事)•정북대장군(征北大將軍)•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하여 외직으로 내보냈다. 이때 태부•청하왕 원역 등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제(先帝)께서 붕어하시고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사해(四海)는 태평하고 온 천하는 고요하며 평화로웠습니다. 승여(乘輿)를 맞이하고, 궁궐을 호위하며, 관청과 궁문을 지키는 것은 신하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본분이며, 직책상의 당연한 이치이니, 이를 공으로 삼아 함부로 식읍을 하사받는 것은 부당합니다. 신(臣)들이 이전에 모토(茅土)를 대거 설치할 것을 논의한 것은, 바로 권세에 위압당해 억지로 논의에 동의하여 폭력적인 행위를 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중의(中議)의 과정에서, 13일 밤의 입궁은 아무런 공로가 없는 행위였습니다. 다만, 조작된 명령을 거부하고 간사한 자들을 억누르며 제거한 점만은 약간 칭찬하고 기록할 만합니다. 이전에 시중(侍中) 신하 우충이 문무(文武)를 총괄하고, 시중 신하 최광이 오랫동안 추밀(樞密)에 있어 그 뜻을 보좌하고 찬성하였으므로, 두 사람만을 포상하였습니다. 이제 상서(尚書) 신하 원소 등이 끝없는 상소를 올렸으므로, 조칙을 받들어 다시 중의(重議)하도록 하였습니다.

조사해 보니, 왕현(王顯)은 몰래 간사한 무리들과 결탁하여 불순한 의도를 품었으며, 고조(高肇)는 멀리서 흉악한 반역에 동조하며 재난의 단초를 초래하였습니다. 장수로서의 죄를 저지른 자들은 본래 참혹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나, 우충 등이 그들의 죄를 다스릴 때, 오직 그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었을 뿐 가족까지 연좌하지 않았으며, 또한 죄인을 모두 엄밀히 조사하여 끝까지 다스리지도 않았습니다. 법률과 규범에 비추어 보건대, 이 사건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황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성후(聖后)가 별궁으로 옮겨져 모자(母子)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고, 온정과 예의가 단절된 것은 모두 우충 등의 잘못 때문입니다. 잘못이 그 공로를 넘어섰으니, 공은 적고 죄는 큽니다. 또한, 우충은 권력을 독점한 이후, 마음대로 추밀(樞密)을 죽이고 신하를 파면하였으며, 재보(宰輔)를 멋대로 폐출하여 조정과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멀리서도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공과(功過)를 상쇄해 보면, 결코 포상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포상을 철회할 것을 청합니다."
영태후는 이를 받아들였다.

희평 원년(516년) 봄, 어사중위 원광이 상주하여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임금을 섬기는 자는 외적 상황에 따라 그 마음을 바꾸지 않고, 주군을 받드는 자는 이익과 손실에 따라 절개를 잃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포서가 진왕(秦王)의 궁전에서 통곡하며 초나라를 다시 세운 공로는 이미 컸고, 전주가 여룡(廬龍)에 올라 노력하여 위나라를 넓힌 공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신포서는 공로에 대한 포상을 사양하였으니, 군자는 이를 의롭게 여겼고, 전주는 임금의 명을 사양하였으니, 훌륭한 사관들이 이를 아름답다 칭송하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천자가 붕어하고 하늘과 인간의 질서가 바뀌는 시점은 바로 충신(忠臣)과 효자(孝子)가 절의를 다할 때입니다. 전(前) 영군장군 신하 우충은 명성과 행실을 닦지 못하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다가 마침내 조칙을 위조하고, 권한을 남용하여 관직과 임무를 멋대로 주고받았으니, 이는 높은 지위와 요직으로 몇 개월 동안 스스로를 높이려 한 행위입니다. 신들은 변방에 있을 때에도 나라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질책이 오가고, 분노가 쌓여 죄악이 되었으니, 예의를 훼손하고 덕을 무너뜨린 책임은 바로 신하 우충에게 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하 우충은 대대로 큰 공적과 높은 덕을 쌓아 여러 조정에서 은혜를 받아 왔으며, 출입할 때는 승명전(承明殿)의 일을 맡고, 가까이서 황제를 보좌하며 기밀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큰 재난이 닥쳤을 때,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조정의 명령을 독단적으로 행하였고,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난 일로 인해 배식과 곽조가 억울한 누명을 썼으며, 재보(宰輔)들이 밝은 시대에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스스로 조칙을 위조하여, 의동삼사(儀同三司), 상서령(尚書令), 숭훈위위(崇訓衛尉)의 직위를 얻었으니, 그 의도를 살펴보건대 이는 곧 자신을 폐하 위에 두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일은 은혜를 배신한 뒤에 발생한 것이니, 마땅히 엄중한 처벌을 가해야 합니다. 어사(御史) 한 사람과 영사(令史) 한 사람을 파견하여 해당 주(州)에서 직접 형을 집행할 것을 청합니다.

최광과 우충이 비록 함께 소환을 받았으나, 최광은 이미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아 조정의 예를 숭상하는 중심 인물이었으므로, 그는 마음을 비우고 세속적인 일에 거리를 두며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충은 최광의 높은 명망과 존경받는 위치를 이용하여 그를 압박하였고, 최광이 우충의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 위태로운 재앙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두 성상(二聖)께서는 지혜로우시어 깊은 자비와 용서를 베푸십니다. 지난해 정월 13일 세종(世宗)께서 붕어하신 이후부터 8월 1일 황태후께서 직접 정무를 보시기 전까지, 모든 계급 절차를 거치지 않고 권신(權臣)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 또는 문하성(門下省)의 조서를 발하거나 중서성(中書省)을 통해 명령을 선포하고 멋대로 관직을 임명하거나 파면한 행위는 이미 은혜로 용서되었으니, 다만 그 도적질과 같은 부당함에 대한 처벌은 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미 시대의 명망도 없고,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관직에 오른 자들은 모두 그 직위를 박탈할 것을 청합니다."
영태후가 명하였다.
"바른 법도에 따라 바로잡는 것은 참으로 조정의 법칙에 부합하는 바이다. 하나 우충의 일은 이미 특별히 용서받고 관대한 처분을 받았으니, 다시 그 죄를 추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나머지는 상주한 대로 시행하라."
그리고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우충은 지난 해에 대위(大諱) 시기에 봉읍(封邑)을 넓혔으나, 그 공로에 대한 보상이 이치에 어긋난 바 있어, 관계 관청이 이를 회수하였다. 어찌 한 번의 잘못으로 인해 그의 나머지 공로까지 모두 부정할 수 있겠는가? 단지 우충은 금위(禁衛)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왔으며, 그의 충성과 절개는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마땅히 산하(山河)에 비할 만한 포상을 내려 그의 명망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그를 영수현 개국공(靈壽縣開國公)에 봉하고, 식읍 500호를 하사하라."

당초 선무제가 붕어하였을 때, 황후 고영영태후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유등(劉騰)이 이 사실을 후강에게 알렸고, 후강은 이를 우충에게 보고하였다. 우충이 최광에게 대책을 물으니, 최광이 말했다.
"귀빈 호씨를 다른 곳에 옮겨 엄격히 경계하고 보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며,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방책입니다."
우충 등이 이를 따랐고, 이러한 뜻을 상세히 영태후에게 보고하니, 영태후가 안심하였다. 이 때문에 영태후는 유등 등 네 사람에게 깊은 은혜를 느껴 특별히 총애하며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우충은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이 많아 화를 피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경사(京師)로 돌아가 스스로 구할 방도를 마련하고자 하였지만, 영태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희평 2년(517년) 4월, 우충은 마침내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로 임명되어 조정으로 복귀하였고, 시중의 직위를 추가로 받았으며, 기존의 장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신귀 원년(518년) 3월, 우충은 다시 의동삼사로 임명되었으나, 병이 심하여 직책을 받들지 못하였다. 그는 곽조와 배식의 원령이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고 느끼며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였다. 그는 표문을 올려 말했다.
"선제(先帝)께서는 신(臣)의 부자(父子)의 한결같은 충성을 인정하시고, 신의 가문의 대대로 이어온 공직 수행의 절개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로 인해 신의 가문과 혼인을 맺어 주시고, 높은 작위와 녹봉으로 대우해 주셨으며, 마침내 신의 위치를 삼괴(三槐)의 반열에 올리시고, 구명(九命)의 지위에 자리하게 하셨습니다. 스스로 대명(大明)의 이익과 명성을 처음 얻고, 백관(百官)이 모두 새롭게 직무를 맡았을 때, 신은 다시금 주제넘게도 금군(禁軍)을 감독하고, 내외를 안정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사직(社稷)의 영험함과 백성의 복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어찌 신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폐하께서 예명(睿明)으로써 천하를 다스리시고, 황태후께서 성스러운 선함으로 조정을 이끄시며, 신하들을 모두 소홀히 하지 않으셨고, 미천한 자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에 다시금 저를 특별히 총애하시어 내외로 신임해 주셨고, 궁궐의 여러 일에 영광을 베풀어 주셨으며, 외적으로는 양하(兩河)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기셨고, 내적으로는 백규(百揆)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요사스러운 일을 깨닫고, 스스로를 살피며 잘못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이 방종함을 삼가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러 병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질(痢疾)을 앓아 지금까지 이어졌으며, 온갖 약과 치료를 다 해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병세가 심해질 뿐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올해 들어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약간의 숨을 고르는 것도 어렵고, 몸을 가누는 것조차 매우 힘들어졌습니다. 큰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채, 병상에 엎드려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신은 복이 적어 아들이 없으니, 남은 몸을 이어갈 후사도 없으므로, 남은 생을 탐내며, 삼가 지난날의 억눌린 심정을 아룁니다. 신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넷째 동생의 둘째 아들인 사도연(司徒掾) 우번(于翻)을 양자로 삼아 길렀으니,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합니다. 그를 정식으로 적자로 삼아 신의 봉읍을 이어받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영태후가 명하였다.
"우충의 상소 내용이 이와 같다. 이미 그의 공로는 기록할 만하고, 또한 자식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 위급한 상황에서 간청한 것이니, 이를 거절할 수 없으므로, 특별히 그의 청을 허락하여 그 특별한 공적을 드러내도록 하라."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충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세. 영태후는 그에게 동원(東園)의 비기(秘器)와 조복(朝服) 한 벌, 의복 한 벌, 금전 20만 전, 포 700필, 밀랍 300근을 하사하고, 그를 시중•사공공(司空公)으로 추증해주었다.

우충 사후, 그의 시호를 정할 때, 관련 관청에서 조정에 아뢰었다.
"태상소경(太常少卿) 원단은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습니다.
우충은 강직하나 성급하고 폭력적이며 독단적이고 잔혹한 면이 있습니다. 시법(謚法)에 따르면 '강하고 이치에 맞으며 곧다'는 것은 '무(武)'라 하고,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추(醜)'라 하니, '무추공(武醜公)'이라 시호를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상경(太常卿) 원수의는 다음과 같이 논의하였습니다.
우충은 충성을 다해 임금을 섬기며 흉악하고 반역적인 무리를 제거하였습니다. 시법에 따르면 '거짓을 제거하고 진실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武)'라 하고, '아침저녁으로 공경스럽게 섬긴다'는 것은 '경(敬)'이라 하니, '무경공(武敬公)'이라 시호를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두 경(卿)의 의견이 서로 다릅니다."
이에 대해 영태후가 명하였다.
"정경(正卿, 원수의)의 논의를 따르라."
이로써 우충의 시호는 '무경공(武敬公)'이라 하였다.

양자 우번이 작위를 이었다.

우(于)씨 가문은 증조부터 4대에 걸쳐 귀하게 되었으며, 황후 한 명, 삼공(三公)으로 추증된 네 명, 영군(領軍)과 상서령(尚書令), 세 명의 개국공(開國公)을 배출한 북위의 명문 가문이었다. 우충은 성격이 의심이 많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았으며, 오직 직각장군 장초괴(章初瑰)와 천우비신 양보원(楊保元)만을 절친한 친구로 삼아 금석지교(斷金之交)를 맺었다. 한번은 이세철(李世哲)이라는 인물이 우충에게서 총애를 얻고자 금은보화와 귀한 물품을 장초괴와 양보원에게 사사로이 바쳤다. 장초괴와 양보원이 이를 이야기하자, 우충은 이세철을 더욱 총애하며 심복으로 삼았다. 이후로 우충이 권력을 남용하여 인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고, 숭훈궁을 세운 것 모두 이세철의 계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한다.

우충의 후처는 중산왕 원희의 딸로, 약간의 《시경(詩)》과 《서경(書)》을 익혔다. 영태후가 섭정하던 시기에, 그녀는 여시중(女侍中)으로 임명되었고, 범양군군(範陽郡君)의 칭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1] 우충을 미워하던 북해왕 원상은 이 시기에는 이미 모반 혐의를 받다가 사망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