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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2:08:45

원회(광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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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추존 황제
원회 | 元懷
출생 488년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517년 5월 2일
북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미상
재위기간 북위 광평왕(廣平王)
497년 9월 19일 ~ 517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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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C143C><colcolor=#ece5b6> 성씨 하남 원씨
회(懷)
선의(宣義)
부모 부황 고조 효문제
모후 문소황후
형제자매 7남 7녀 중 5남
배우자 무목황후
자녀 3남 3녀
종교 불교
작호 광평왕(廣平王)
시호 무목황제(武穆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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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4. 참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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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위의 황자. 효문제의 5남. 문소황후로 추존된 고조용(高照容)의 소생. 아들인 효무제가 즉위하자 무목황제(武穆皇帝)로 추존되었다.

2. 생애

태화 21년(497년) 8월 7일[1], 효문제가 자신의 아들인 원회를 광평왕(廣平王)에 봉하였다.

정시 3년(506년) 10월, 친형인 선무제 원각 치세기에, 원회는 이복형인 경조왕 원유와 사치를 겨루면서 교만하고 방종하여 공공연히 청탁을 행하였다. 이에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중위 최량(崔亮)으로 하여금 이를 끝까지 조사하게 하니, 여기에 연좌되어 처형된 자만 30여 명이었고, 처형되지 않은 자들은 남김없이 제명되어 평민이 되었다. 오직 원회에게 충성스럽게 간언을 한 우상시 양욱(楊昱)과 문학 최해(崔楷)만이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의 주요 당사자인 원회 역시 조정으로 소환되어 화림원(華林園) 별관에 유폐되어 함부로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그곳에서 사문박사 동징(董徵)에게 강제로 경전 수업을 들어야만 하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선무제가 붕어한 후에야 비로소 풀려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선무제가 붕어한 지 이틀째가 되던 날, 원회는 친형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병을 무릅쓰고 곧바로 태극전(太極殿) 서쪽 행랑으로 가서 슬픔에 겨워 통곡하였다. 원회는 시중(侍中), 황문(黃門), 영군(領軍), 이위(二衛)의 관원들을 불러, 웃어른인 고영, 선무영황후 호씨를 무시한 채
"나는 전각에 올라가 대행황제(大行皇帝)를 위하여 곡을 한 뒤에 주상(효명제)을 알현하겠다."
고 하였다. 이에 두 태후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은 놀라며 서로를 쳐다보았고,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와중에, 시중 최광(崔光)이 홀로 상복을 고쳐 입고 지팡이를 힘차게 휘두르며 원회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과거 한나라의 광무제가 붕어했을 때 태위 조희가 칼을 들고 계단 앞을 가로막아 친왕의 행동을 저지한 고사를 인용하며, 단호한 태도로 엄격하게 원회를 꾸짖었고, 그 언사와 표정이 매우 엄중하였다. 결국 원회는 최광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이내 사죄하였다.[2]

희평 2년(517년) 3월 26일[3], 원회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30세. 조정에서는 그를 사지절(使持節)•가황월(假黃鉞)•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태사(太師)•영 태위공(領太尉公)•시중(侍中)으로 추증하였고, 왕의 작위는 그대로 하였다. 시호는 '무목왕(武穆王)'.

희평 2년(517년) 8월 20일[4], 원회의 시신이 낙양성 서쪽 교외에 안장되었고, 영태후도 이때 친히 참석하였다.

훗날 셋째 아들인 원수(효무제)가 즉위하자 무목황제(武穆皇帝)로 추존되었다.

3. 가족

4. 참고문서



[1] 정축년 기유월 임술일. 음력으로는 8월 7일이고, 양력으로 9월 19일이다.[2] 전근대 중국에선 황제의 장례식엔 모든 친족이 참여할 수 있었으나 가까이서 주관할 수 있는 자들은 죽은 황제의 황후, 차기 황제 등 황실의 웃어른 및 계승자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러한 법도를 어긴 것을 최광은 지적한 것이며, 조희의 고사는 번왕들이 계승자(명제)와 동격(同格)으로 장례를 주관하려 하는 등 무질서한 모습에 분개하여 칼을 빼들어 번왕을 하전시켰다는 내용이다.[3] 정유년 갑진월 정해일.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고, 양력으로 5월 2일이다.[4] 정유년 기유월 기유일. 음력으로는 8월 20일이고, 양력으로 9월 21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