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0)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로 헌제의 장남.200년 가을 7월에 남양왕이 되었다가 사망했다.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그 아버지인 헌제가 181년생임을 감안하면 유풍은 사망 당시에도 아주 어렸을 것이다.
헌제가 아들인 유풍, 유지가 죽은 일로 인해 이를 불쌍히 여겨 계절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공융에게 참석하게 했는데, 공융은 이를 좋은 일이라 하면서도 양회왕(한문제의 4남), 임강민왕(한경제의 장남), 제애왕[1], 임회회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이들에 대해 제도를 고쳐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양회왕, 임강민왕, 제애왕, 임회회왕 등이 어려서 세상을 떠났기에 이를 슬퍼해 예를 갖추고 시호를 더했을 것이며, 주상의 은혜를 가늠해 제사를 마친 후에는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고 고작 한 살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선대의 황제들이 남긴 법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면서 반대했다.
삼국지평화에서 등장하지는 않지만 유풍의 포지션인 헌제의 적자로 나온 헌제의 아들이 천하의 관리들에게 관직을 봉하고 상을 내린다는 것을 헌제의 장남과 여러 관리들이 쑥덕거리고 있다는 것을 가후가 조조에게 알리면서 그 헌제의 아들을 조조가 저잣거리에서 참수했다. 하지만 헌제가 당시 20대에 불과했던 걸로 보면 그 아들이 관리들과 노닥거릴 수는 없다.
2. 창작물에서
소설 비열한 성자 조조에서는 조조가 자신에 대한 암살 모의로 동귀인을 끌어낼 때 복황후가 이를 막아내려고 했고 그 와중에 궁녀가 유풍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고 해서 복황후가 유풍을 살릴 어의를 찾으려 했다. 헌제도 어의를 부르려 했지만 호분시랑이 조조의 막내 아들이 병에 걸려 지습이 모든 어의를 이끌고 야전사령부로 갔다는 보고를 했으며, 결국 어의를 찾지 못하고 유풍은 사망했다.삼국지톡에서는 공교롭게도 의대조 사건을 전후하여 돌연사했다고 설정되어, 마치 조조가 어린 황자를 시해한 것 같은 암시를 준다.
[1] 고제의 손자며 제도혜왕의 장남, 광무제의 조카로 제무왕의 장남 두 제애왕이 있는데 둘 다 후사가 있으므로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