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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7 18:34:34

이표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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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5cfd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제기(帝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서기(序記)」 2권 「태조기(太祖紀)」 3권 「태종기(太宗紀)」
탁발부 · 대나라 탁발규 탁발사
4권 「세조·공종기(世祖恭宗紀)」 5권 「고종기(高宗紀)」 6권 「현조기(顯祖紀)」
탁발도 · 탁발황 탁발준(浚) 탁발홍
7권 「고조기(高祖紀)」 8권 「세종기(世宗紀)」 9권 「숙종기(肅宗紀)」
원굉 원각 원후
10권 「효장제기(孝莊帝紀)」 11권 「폐출삼제기(廢出三帝紀)」 12권 「효정제기(孝靜帝紀)」
원자유 원공 · 원랑 · 원수 원선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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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열전(列傳)]
13권 「황후전(皇后傳)」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도무선목황후 · 명원소애황후 · 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경목공황후 · 문성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풍폐후 · 효문유황후 · 효문소황후 · 선무순황후 · 선무황후 · 선무영황후
효명황후 · 효정황후
14권 「신원·평문제제자손전(神元平文諸帝子孫傳)」
탁발흘라 ,탁발제,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진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15권 「소성자손전(昭成子孫傳)」 16권 「도무7왕전(道武七王傳)」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虔) · 탁발순 · 탁발의열
탁발굴돌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17권 「명원6왕전(明元六王傳)」 18권 「태무5왕전(太武五王傳)」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9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20권 「문성5왕전(文成五王傳)」 21권 「헌문6왕전(獻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 · 탁발간(簡) · 탁발약 · 탁발맹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22권 「효문5왕전(孝文五王傳)」 23권 「위조등전(衛操等傳)」 24권 「연봉등전(燕鳳等傳)」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위조 · 막함 · 유고인 연봉 · 허겸 · 장곤 · 최현백 · 등연
25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26권 「장손비등전(長孫肥等傳)」 27권 「목숭전(穆崇傳)」
장손숭 · 장손도생 장손비 · 울고진 목숭
28권 「화발등전(和跋等傳)」 29권 「해근등전(奚斤等傳)」
화발 · 해목 · 막제 · 유업연 · 하적간 · 이율 · 유결 · 고필 · 장려 해근 · 숙손건
30권 「왕건등전(王建等傳)」
왕건 · 안동 · 누복련 · 구퇴 · 아청 · 유니 · 해권 · 차이락 · 숙석 · 내대천 · 주기 · 두대전 · 주관 · 염대비 · 울발 · 육진 · 여락발
31권 「우율제전(于栗磾傳)」 32권 「고호등전(高湖等傳)」
우율제 고호 · 최영 · 봉의
33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왕헌 ·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설제
34권 「왕낙아등전(王洛兒等傳)」 35권 「최호전(崔浩傳)」 36권 「이순전(李順傳)」
왕낙아 · 차노두 · 노노원 · 진건 · 만안국 최호 이순
37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38권 「조옹등전(刁雍等傳)」 39권 「이보전(李寶傳)」
사마휴지 · 사마초지 · 사마경지 · 사마숙번
사마천조
조옹(刁雍) · 왕혜룡 · 한연지 · 원식 이보
40권 「육사전(陸俟傳)」 41권 「원하전(源賀傳)」 42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육사 원하 설변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43권 「엄릉등전(嚴棱等傳)」 44권 「나결등전(羅結等傳)」
엄릉 · 모수지 · 당화 · 유휴빈 · 방법수 나결 · 이발 · 을괴 · 화기노 · 순퇴 · 설야저 · 우문복 · 비우 · 맹위
45권 「위랑등전(韋閬等傳)」 46권 「두근등전(竇瑾等傳)」 47권 「노현전(盧玄傳)」
위랑 · 두전 · 배준 · 신소선 · 유숭 두근 · 허언 · 이흔 노현
48권 「고윤전(高允傳)」 49권 「이령등전(李靈等傳)」 50권 「울원등전(尉元等傳)」
고윤 이령 · 최감 울원 · 모용백요
51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52권 「조일등전(趙逸等傳)」
조일 · 호방회 · 호수 · 송요 · 장담 · 종흠 · 단승근 · 감인 · 유병 · 조유 · 색창 · 음중달
53권 「이효백등전(李孝伯等傳)」 5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55권 「유명근등전(游明根等傳)」
이효백 · 이형 유아 · 고려 유명근 · 유방
56권 「정희등전(鄭羲等傳)」 57권 「고우등전(高祐等傳)」 58권 「양파전(楊播傳)」
정희 · 최변 고우 · 최정 양파
59권 「유창등전(劉昶等傳)」 6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61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한기린 · 정준 설안도 · 필중경 · 심문수 · 장당 · 전익종 · 맹표
62권 「이표등전(李彪等傳)」 63권 「왕숙등전(王肅等傳)」 64권 「곽조등전(郭祚等傳)」
이표 · 고도열 왕숙 · 송변 곽조 · 장이
65권 「형만등전(邢巒等傳)」 66권 「이숭등전(李崇等傳)」 67권 「최광전(崔光傳)」
형만 · 이평 이숭 · 최량 최광
68권 「견침등전(甄琛等傳)」 69권 「최휴등전(崔休等傳)」 70권 「유조등전(劉藻等傳)」
견침 · 고총 최휴 · 배정준 · 원번 유조 · 부영 · 부수안 · 이신
71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72권 「양니등전(陽尼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이묘 양니 · 가사백 · 이숙호 · 노시경 · 방량 ·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73권 「해강생등전(奚康生等傳)」 74권 「이주영전(爾朱榮傳)」 75권 「이주조등전(爾朱兆等傳)」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이주영 이주조 · 이주언백 · 이주도율 · 이주천광
76권 「노동등전(盧同等傳)」 77권 「송번등전(宋翻等傳)」 78권 「손소등전(孫紹等傳)」
노동 · 장열 송번 · 신웅 · 양심 · 양기 · 고숭 손소(孫紹) · 장보혜
79권 「성엄등전(成淹等傳)」 80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성엄 · 범소 · 유도부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 녹여 · 장습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하발승 · 후막진열 · 후연
81권 「기준등전(綦儁等傳)」 82권 「이염지등전(李琰之等傳)」
기준 · 산위 · 유인지 · 우문충지 이염지 · 조영 · 상경
83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유나신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고조 · 우경 · 호국진 · 이연실
84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상상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조충 · 노경유 · 이동궤 · 이흥업
85권 「문원전(文苑傳)」
원요 · 배경헌 · 노관 · 봉숙 · 형장 · 배백무 · 형흔 · 온자승
86권 「효감전(孝感傳)」
조염 · 장손려 · 걸복보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87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우제 · 마룡팔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88권 「양리전(良吏傳)」
장순 · 녹생 · 장응 · 송세경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배타 · 두원 · 양돈 · 소숙
89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이 · 이홍지 · 고준 · 장사제 · 양지 · 최섬 · 역도원 · 곡해
90권 「일사전(逸士傳)」
휴과 · 풍량 · 이밀 · 정수
91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연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강식 · 주담 · 이숙 · 서건 · 왕현 · 최욱 · 장소유
92권 「열녀전(列女傳)」
임성국태비
93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증흥 · 구맹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정엄 · 서흘
94권 「엄관전(閹官傳)」
종애 · 구락제 · 단패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진송 · 백정 · 유등 · 가찬 · 양범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95권 「유총등전(劉聰等傳)」
유총 · 석륵 · 유하 · 모용외 · 부건 · 요장 · 여광
96권 「사마예등전(司馬叡等傳)」 97권 「환현등전(桓玄等傳)」 98권 「소도성등전(蕭道成等傳)」
사마예 · 이웅 환현 · 풍발 · 유유 소도성 · 소연
99권 「장실등전(張實等傳)」
장실 · 걸복국인 · 독발오고 · 이고 · 저거몽손
100권 「고구려등전(高句麗等傳)」
고구려 · 백제 · 물길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고막해 · 거란 · 오락후
101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강 · 고창 · 등지 · 만족 · 요족
102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차말 · 우전 · 백정 · 차사국 · 언기 · 쿠처 · 소륵 · 속특 · 파사 · 남천축 · 읍달
103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104권 「자서전(自序傳)」
위수
※ 105권 ~ 114권은 志에 해당. 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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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정 24사 관련 틀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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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본기(本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권 「위본기1(魏本紀一)」 2권 「위본기2(魏本紀二)」 3권 「위본기3(魏本紀三)」
탁발규 · 탁발사 탁발도 · 탁발황 · 탁발준(浚) · 탁발홍 원굉
4권 「위본기4(魏本紀四)」 5권 「위본기5(魏本紀五)」
원각 · 원후 원자유 · 원공 · 원랑 · 원수 · 원보거 · 원흠 · 원곽 · 원선견
6권 「제본기상(齊本紀上)」 7권 「제본기중(齊本紀中)」 8권 「제본기하(齊本紀下中)」
고환 · 고징 고양 · 고은 · 고연 고담 · 고위 · 고항
9권 「주본기상(周本紀上)」 10권 「주본기하(周本紀下)」
우문태 · 우문각 · 우문육 우문옹 · 우문윤 · 우문천
11권 「수본기상(隋本紀上)」 12권 「수본기하(隋本紀下)」
양견 양광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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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列傳)]
||<-4><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3·14권 「후비전(后妃傳)」 ||
신원황후 · 봉황후 · 기황후 · 평문황후 · 소성황후 · 헌명황후 · 도무황후 · 선목황후 · 소애황후 · 명원밀황후 · 태무황후 · 경애황후
울구려황후 · 문명황후 · 문성원황후 · 헌문사황후 · 효문정황후 · 폐후 풍씨 · 효문유황후 · 효문고황후 · 우황후 · 고황후 · 호황후 · 효명황후 · 효무황후 · 문황후 · 도황후 · 우문황후 · 약간황후 · 효정황후 · 누소군 · 원황후 · 이조아 · 원황후 · 호황후 · 곡률황후 · 호황후 · 목야리 · 풍소련 · 원씨 · 질노씨 · 원호마 · 독고황후 · 아사나 · 이아자 · 양려화 · 주만월 · 진월의 · 원락상 · 울지치번 · 사마영희 · 독고가라 · 소황후
15권 「위제종실전(魏諸宗室傳)」
탁발흘나 · 탁발영문 · 탁발육 · 탁발인 · 탁발수낙 · 탁발퇴 · 탁발소연 · 탁발욱 · 탁발목신 · 탁발육수 · 탁발비간 · 탁발여 · 탁발고
탁발돈 · 탁발석 · 탁발위 · 탁발대두 · 탁발제 · 탁발처진 · 탁발니 · 탁발식군 · 탁발한 · 탁발준(遵) · 탁발건(健) · 탁발순 · 탁발의열 · 탁발굴돌
16권 「도무7왕·명원6왕·태무5왕전(道武七王·明元六王·太武五王傳)」
탁발소 · 탁발희 · 탁발요 · 탁발수 · 탁발처문 · 탁발연 · 탁발려(黎) · 탁발비 · 탁발미 · 탁발범 · 탁발건(健) · 탁발숭 · 탁발준(俊) · 탁발복라 · 탁발한 · 탁발담 · 탁발건(建) · 탁발여(余)
17·18권 「경목12왕전(敬穆十二王傳)」
탁발신성 · 탁발자추 · 탁발소신성 · 탁발천사 · 탁발만수 · 탁발낙후 · 탁발운 · 탁발정 · 탁발장수 · 탁발태락 · 탁발호아 · 탁발휴
19권 「문성5왕·헌문6왕·효문6왕전(文成五王·獻文六王·孝文六王傳)」
탁발장락 · 탁발략(略) · 탁발간(簡) · 탁발약(若) · 탁발맹 · 원희 · 원간(幹) · 원우 · 원옹 · 원상 · 원협 · 원순 · 원유 · 원역 · 원회 · 원열
20권 「위조등전(衛操等傳)」
위조 · 막함 · 유고인 · 울고진 · 목숭 · 해근 · 숙손건 · 안동 · 유업연 · 왕건 · 나결 · 누복련 · 염대비 · 해목 · 화발 · 막제 · 하적간 · 이율 · 해권
21권 「연봉등전(燕鳳等傳)」 22권 「장손숭등전(長孫嵩等傳)」
연봉 · 허겸 · 최굉 · 장곤 · 등언해 장손숭 · 장손도생 · 장손비
23권 「우율제전(于栗磾傳)」 24권 「최영등전(崔逞等傳)」
우율제 최영 · 왕헌 · 봉의
25권 「고필등전(古弼等傳)」
고필 · 장려 · 유결 · 구퇴 · 아청 · 이후 · 을괴 · 주기 · 두대전 · 거이락 · 왕낙아 · 거로두 · 노노원 · 진건 · 내대간 · 숙석 · 만안국
주관 · 울발 · 육진 · 여락발 · 설표자 · 울원 · 모용백요 · 화기노 · 순퇴 · 우문복
26권 「송은등전(宋隱等傳)」
송은 · 허언 · 조옹(刁雍) · 신소선 · 위랑 · 두전
27권 「굴준등전(屈遵等傳)」
굴준 · 장포 · 곡혼 · 공손표 · 장제 · 이선 · 가이 · 두근 · 이흔 · 한연지 · 원식 · 모수지 · 당화 · 구찬 · 역범 · 한수 · 요훤 · 유숭
28권 「육사등전(陸俟等傳)」 29권 「사마휴지등전(司馬休之等傳)」
육사 · 원하 · 유니 · 설제 사마휴지 · 유창 · 소보인 · 소정표
28권 「노현등전(盧玄等傳)」 29권 「고윤등전(高允等傳)」
노현 · 노부 고윤 · 고우 · 고덕정 · 고익 · 고앙
32권 「최감등전(崔鑒等傳)」 33권 「이령등전(李靈等傳)」
최감 · 최변 · 최정 이령 · 이순 · 이효백 · 이예 · 이의심
34권 「유아등전(游雅等傳)」
유아 · 고려 · 조일 · 호수 · 호방회 · 장담 · 단승근 · 감인 · 유연명 · 조유 · 색창 · 송요 · 강식
35권 「왕혜룡등전(王慧龍等傳)」 36권 「설변등전(薛辯等傳)」
왕혜룡 · 정희 설변 · 설치 · 설징
37권 「한무등전(韓茂等傳)」
한무 · 피표자 · 봉칙문 · 여나한 · 공백공 · 전익종 · 맹표 · 해강생 · 양대안 · 최연백 · 요훤 · 이숙인
38권 「배준등전(裴駿等傳)」 39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배준 · 배연준 · 배타 · 배과 · 배관 · 배협 · 배문거 · 배인기 설안도 · 유휴빈 · 방법수 · 필중경 · 양지
40권 「한기린등전(韓麒麟等傳)」 41권 「양파등전(楊播等傳)」
한기린 · 정준 · 이표 · 고도열 · 견침 · 장찬 · 고총 양파 · 양부양소
42권 「왕숙등전(王肅等傳)」 43권 「곽조등전(郭祚等傳)」 44권 「최광등전(崔光等傳)」
왕숙 · 유방(劉芳) · 상상 곽조 · 장이 · 형만 · 이숭 최광 · 최량
45권 「배숙업등전(裴叔業等傳)」
배숙업 · 하후도천 · 이원호 · 석법우 · 왕세필 · 강열지 · 순우탄 · 음중달 · 장당 · 이묘 · 유조 · 부영 · 부수안 · 장열 · 이숙표 · 노시경 · 방량
조세표 · 반영기 · 주원욱
46권 「손소등전(孫紹等傳)」
손소(孫紹) · 장보혜 · 성엄 · 범소 · 유도부 · 녹여 · 장요 · 유도빈 · 동소 · 풍원흥
47권 「원번등전(袁翻等傳)」 48권 「이주영전(爾朱榮傳)」
원번 · 양니 · 가사백 · 조영 이주영
49권 「주서등전(朱瑞等傳)」
주서 · 질열연경 · 곡사춘 · 가현도 · 번자곡 · 후심(2) · 하발승 · 후막진열 · 염현 · 양람 · 뇌소 · 모하 · 을불랑
50권 「신웅등전(辛雄等傳)」
신웅 · 양기 · 고도목 · 기준 · 산위 · 우문충지 · 비목 · 맹위
51·52권 「제종실제왕전(齊宗室諸王傳)」
고침 · 고악 · 고성 · 고영락 · 고현국 · 고사종 · 고언귀 · 고령산 · 고준 · 고엄 · 고유 · 고환(高渙) · 고육 · 북제 · 고식 · 고제 · 고응 · 고윤
고흡 · 고효유 · 고효연 · 고효완 · 고장공 · 고연종 · 고소신 · 고소덕 · 고소의 · 고소인 · 고소렴 · 고백년 · 고량 · 고언리 · 고언덕
고언기 · 고언강 · 고언충 · 고작 · 고엄 · 고곽 · 고정 · 고인영 · 고인광 · 고인기 · 고인옹 · 고인검 · 고인아 · 고인직 · 고인겸 · 고각 · 고선덕
고매덕 · 고질전
53권 「묵기보등전(万俟普等傳)」
묵기보 · 가주혼원 · 유풍 · 파륙한상 · 금조 · 유귀 · 채준 · 한현 · 울장명 · 왕회 · 임상 · 막다루대문 · 사적회락 · 사적성 · 장보락
후막진상 · 설고연 · 곡률강거 · 장경 · 요웅 · 송현 · 왕칙 · 모용소종 · 질열평 · 보대한살 · 설유의 · 모용엄 · 반락 · 팽락 · 포현 · 피경화
기연맹 · 원경안 · 독고영업 · 선우세영 · 부복
54권 「손등등전(孫騰等傳)」
손등 · 고융지 · 사마자여 · 두태 · 울경 · 누소 · 사적간 · 한궤 · 단영 · 곡률금
55권 「손건등전(孫搴等傳)」
손건 · 진원강 · 두필 · 두태 · 울경 · 장찬 · 장량 · 장요 · 왕준 · 왕굉 · 경현준 · 평감 · 당옹 · 백건 · 원문요 · 조언심 · 혁련자열 · 풍자종 · 낭기
56권 「위수등전(魏收等傳)」
위수 · 위장현 · 위계경 · 위난근
57권 「주종실전(周宗室傳)」
우문호 · 우문련 · 우문낙생 · 우문중 · 우문측 · 우문신거
58권 「주실제왕전(周室諸王傳)」
우문진 · 우문직 · 우문초 · 우문검 · 우문순 · 우문성 · 우문달 · 우문통 · 우문형 · 우문강 · 우문현 · 우문정 · 우문실 · 우문찬 · 우문지
우문윤(允) · 우문충 · 우문태(兌) · 우문원 · 우문연(衍) · 우문술(術)
59권 「구락등전(寇洛等傳)」 60권 「이필등전(李弼等傳)」
구락 · 조귀 · 이현 · 양어 이필 · 우문귀 · 후막진숭 · 왕웅
61권 「왕맹등전(王盟等傳)」
왕맹 · 독고신 · 두치 · 하란상 · 질열복귀 · 염경 · 사녕 · 권경산
62권 「왕비등전(王羆等傳)」 63권 「주혜달등전(周惠達等傳)」 64권 「위효관등전(韋孝寬等傳)」
왕비 · 왕사정 · 울지형 · 왕궤 주혜달 · 풍경 · 소작 위효관 · 위진 · 류규
65권 「달해무등전(達奚武等傳)」
강자일 · 약간혜 · 이봉 · 유량 · 왕덕 · 혁련달 · 한과 · 채우 · 상선 · 신위 · 사적창 · 양춘 · 양대 · 전홍
66권 「왕걸등전(王傑等傳)」
왕걸 · 왕용 · 우문규 · 경호 · 고림 · 이화 · 이루목 · 달해식 · 유웅 · 후식 · 이연손 · 위우 · 진흔 · 위현 · 천기 · 이천철 · 양건운 · 부맹 · 양웅 · 석고 · 임과
67권 「최언목등전(崔彥穆等傳)」 68권 「두로녕등전(豆盧寧等傳)」
최언목 · 양찬 · 단영 · 배과 · 당영 · 류민 · 왕사량 두로녕 · 양소(楊紹) · 왕아 ,왕세적한웅 · 하약돈
69권 「신휘등전(申徽等傳)」
신휘 · 육통 · 사적치 · 양천 · 왕경 · 조강 · 조창 · 왕열 · 조문표 · 양대 · 원정 · 양표
70권 「한포등전(韓襃等傳)」
한포 · 조숙 · 장궤 · 이언 · 곽언 · 양흔 · 황보번 · 신경지 · 왕자직 · 두고 · 여사례 · 서초 · 단저 · 맹신 · 종름 · 유번 · 류하
71권 「수종실제왕전(隋宗室諸王傳)」
양정 · 양찬 · 양상 · 양홍 · 양처강 · 양자숭 · 양용 · 양준 · 양수 · 양량 · 양소(楊昭) · 양간 · 양고
72권 「고경등전(高熲等傳)」
고경 · 우홍 · 이덕림
73권 「양사언등전(梁士彥等傳)」
양사언 · 원해 · 우경칙 · 원주 · 달해장유 · 하루자간 · 사만세 · 유방(劉方) · 두언 · 주요 · 독고개 · 걸복혜 · 장위 · 화홍 · 음수 · 양의신
74권 「유방등전(劉昉等傳)」
유방(劉昉) · 유구 · 황보적 · 곽연 · 장형 · 양왕 · 배온 · 원충 · 이웅
75권 「조경등전(趙煚等傳)」
조경 · 조분 · 왕소 · 원암 · 우문필 · 이누겸 · 이원통 · 곽영 · 방황 · 이안 · 양희상 · 장경 · 소효자 · 원수
76권 「단문진등전(段文振等傳)」
단문진 · 내호아 · 번자개 · 주나후 · 주법상 · 위현 · 유권 · 이경 · 설세웅
77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배정 · 이악 · 포굉 · 고구 · 영비 · 육지명 · 양비 · 유욱 · 조작 · 두정
78권 「장정화등전(張定和等傳)」
장정화 · 장윤 · 맥철장 · 권무 · 왕인공 · 토만서 · 동순 · 어구라 · 왕변 · 진릉 · 조재
79권 「우문술등전(宇文述等傳)」
우문술 · 왕세충 · 단달
80권 「외척전(外戚傳)」
하눌 · 요황미 · 두초 · 하미 · 여비 · 풍희 · 이혜 · 고조 · 호국진 · 황보집 · 양등 · 을불회 · 조맹 · 호장인 · 여씨
81·82권 「유림전(儒林傳)」
양월 · 노추 · 장위 · 양조 · 평항 · 진기 · 유헌지 · 장오귀 · 유란 · 손혜울 · 서준명 · 동징 · 마자결 · 이흥업 · 양원의 · 풍위 · 장매노 · 유궤사
포계상 · 형치 · 유주 · 마경덕 · 장경인 · 권회 · 장사백 · 장조무 · 곽준 · 심중 · 번심 · 웅안생 · 악손 · 기준 · 조문심 · 신언지 · 하타 · 소해 · 포개 · 방휘원 · 마광 · 유작 · 유현 · 저휘 · 고표 · 노세달 · 장충 · 왕효적
83권 「문원전(文苑傳)」
온자승 · 순제 · 조홍훈 · 이광 · 번손 · 순사손 · 왕포 · 유신 · 안지추 · 우세기 · 유변 · 허선심 · 이문박 · 명극양 · 유진 · 제갈영 · 왕정 · 우작
왕주 · 유자직 · 반휘 · 상덕지 · 윤식 · 유선경 · 조군언 · 공덕소 · 유빈
84권 「효행전(孝行傳)」
장손려 · 손익덕 · 동락생 · 양인 · 염원명 · 오실달 · 왕속생 · 이현달 · 장승 · 창발 · 왕숭 · 곽문공 · 형가 · 진족 · 영선 · 황보하 · 장원
왕반 · 양경 · 전익 · 유인 · 유사준 · 적보림 · 화추 · 서효숙
85권 「절의전(節義傳)」
우십문 · 단진 · 석문덕 · 급고 · 왕현위 · 누제 · 유갈후 · 주장생 · 마팔룡 · 문문애 · 조청 · 유후인 · 석조흥 · 소홍철 · 왕영세 · 호소호
손도등 · 이궤 · 장안조 · 왕려 · 곽염 · 지용초 · 을속고불보 · 이상 · 두숙비 · 이악 · 유원 · 장수타 · 양선회 · 노초 · 유자익 · 요군소
진효의 · 두송지 · 곽세준 · 낭방귀
86권 「순리전(循吏傳)」
장응 · 노옹 · 염경윤 · 명량 · 두찬 · 두원 · 소숙 · 장화업 · 맹업 · 소경 · 노거병 · 양언광 · 번숙략 · 공손경무 · 신공의 · 유검 · 곽현 · 경숙
유광 · 왕가 · 위덕심
87권 「혹리전(酷吏傳)」
우락후 · 호니 · 이홍지 · 장사제 · 조패 · 최섬 · 저진 · 전식 · 연영 · 원홍사 · 왕문동
88권 「은일전(隐逸傳)」
휴과 · 풍량 · 정수 · 최곽 · 서칙 · 장문후
89·90권 「예술전(藝術傳)」
조숭 · 장심(1) · 은소 · 왕조 · 경현 · 유영조 · 이순흥 · 단특사 · 안악두 · 왕춘 · 신도방 · 송경업 · 허준 · 유준세 · 조보화 · 황보옥 · 해법선 · 허준 · 위녕 · 기모회문 · 장자신 · 육법화 · 장승 · 강련 · 유계재 · 노태익 · 경순 · 내화 · 소길 · 양백추 · 임효공 · 유우 · 장주현 · 주담 · 이수 · 서건 · 왕현 · 마사명 · 요승원 · 저해 · 허지장 · 만보상 · 장소유 · 하조
91권 「열녀전(列女傳)」
난릉공주 · 남양공주 · 초국부인
92권 「은행전(恩倖傳)」
왕예 · 왕중흥 · 조수 · 여호 · 조옹(趙邕) · 후강 · 구락제 · 왕거 · 조묵 · 손소(孫小) · 장종지 · 극붕 · 장우 · 포억 · 왕우 · 부승조 · 왕질 · 이견 · 유등 · 가찬 · 양범 · 성궤 · 왕온 · 맹란 · 평계 · 봉진 · 유사일 · 곽수 · 화사개 · 안토근 · 목제파 · 고아나굉
93권 「참위부용전(僭偽附庸傳)」
혁련발발 · 모용외 · 요장 · 풍발 · 걸복국인 · 저거몽손 · 소찰
94권 「고려등전(高麗等傳)」
고려 · 백제 · 신라 · 물길 · 해족 · 거란 · 실위 · 두막루 · 지두우 · 오락후 · 류구 · 왜국
95권 「만등전(蠻等傳)」
만족(蠻) · 요족(獠) · 임읍 · 적토 · 진랍 · 파리
96권 「저등전(氐等傳)」
저족 · 토욕혼 · 탕창 · 등지국 · 당항 · 부국 · 계호국
97권 「서역전(西域傳)」
선선 · 포산국 · 실거반 · 권우마국 · 차사국 · 우전국 · 고창 · 차미 · 언기 · 구차 · 고묵국 · 온숙국 · 울두국 · 오손국 · 소륵국 · 열반국 · 토호라
소월씨 · 아구강국 · 속특국 · 파사국 · 복로니국 · 색지현 · 가색니국 · 고창 · 차미 · 여국
98권 「연연등전(蠕蠕等傳)」
연연 · 우문막괴 · 단질육권 · 고차
99권 「돌궐등전(突厥等傳)」
돌궐 · 철륵
100권 「자서전(自序傳)」
이연수
(1) 본명이 장연(張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2) 본명이 후연(侯淵)으로 당고조 이연(李淵)을 피휘하여 심(深)으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 ||
<colbgcolor=#dc143c><colcolor=#fff> 위국강헌자(衛國剛憲子)
李彪 | 이표
시호 강헌자(剛憲子)
이(李)
표(彪)
도고(道固)
출생 444년
사망 501년 (향년 56~57세)
작위 위국자(衛國子)
부친 불명
본관 둔구군(頓丘郡) 위국현(衛國縣)
아들 이지(李志)
1. 개요2. 생애

1. 개요

북위의 인물. 효문제가 친히 '표(彪)'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본래 이름은 알 수 없다.

2. 생애

이표는 집안이 대대로 미천하였고,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가난하였으나, 포부가 있어 학문에 열중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처음 이표가 백양(伯陽)을 스승으로 삼아 그 밑에서 배웠는데, 백양은 그를 훌륭히 여겼다. 나중에 이표는 어양(漁陽)의 고열(高悅), 북평(北平)의 양니 등과 함께 이름난 산에 들어가 은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고열의 형 고려는 박학하고 재주가 높아, 집안에 여러 서적을 보관하고 있었기에, 이표는 고열의 집에서 친히 손으로 베껴 쓰며 입으로 외워, 잠잘 틈도 없이 공부하였다.

이표가 학문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 평원왕 탁발예(拓跋叡)는 약관의 나이로 이미 뜻과 학문이 있었는데, 그는 기상(冀相)을 지나가다가 이표의 명성을 듣고 그를 찾아가, 스승과 벗의 예로 대하며 군(郡)에 칭찬하였다. 이에 둔구군에서는 이표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였다. 이표가 수도에 이르자, 탁발예가 그를 머물게 하여 학문을 배웠다. 또, 고려가 조정의 대신들에게 이표를 칭찬하였고, 이충이 그를 매우 예우하니, 이표는 깊이 그들에게 의지하고 따랐다. 이후 이표는 중서교학박사(中書敎學博士)로 임명되었다.

태화 7년(483년) 10월, 이표는 임시로 원외상기상시(員外散騎常侍)•건위장군(建威將軍)•위국자(衛國子)로 임명되어 남조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태화 8년(484년) 4월, 이표는 정식으로 원외상기상시에 임명되어 다시 제나라의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 뒤 비서승(秘書丞)으로 옮겨져 저작(著作)의 업무를 맡았다.

태화 11년(487년) 12월, 이전에 최호고윤이 《국서(國書)》를 저술하였으나, 그 편년과 서록은 《춘추(春秋)》의 체제를 본떠 만들었고, 당대의 사실을 누락하여 세 가지 중 하나도 온전히 남은 것이 없었다. 이에 이표는 비서령 고우와 함께, 이전의 편년체를 고쳐 사마천, 반고의 체제에 따르도록 아뢰었으며, 새로이 기(紀)·전(傳)·표(表)·지(志)의 항목을 창설하였다.

태화 12년(488년) 12월, 이표는 또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신은 듣건대,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은 모두 부지런히 힘써, 바른 말을 받아들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묻고 스승에게 물으며, 깊은 못과 늪이라도 피하지 않았고, 계책을 묻고 선한 이를 자문함에 있어 초야의 나무꾼이나 풀베는 이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 공적이 죽간과 비단 위에 찬란히 드러나고, 그 아름다운 이름이 쇠와 돌에 새겨져 전해졌습니다. 신은 다행히 도의(道義)가 있는 세상에 태어나,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는 조정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감히 옛 제도를 닦아 살피고, 대략 그때의 마땅함을 헤아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봉사(封事) 일곱 조목을 올립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의 말이오니, 죄를 받아 형벌에 처해질 것을 스스로 기다리겠습니다.

그 첫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태화(太和) 연호를 세운 이래로 이미 한 세대를 넘겼으니, 그 법도와 덕정(德政)은 말할 만합니다. 원구(圜丘)를 세워 효(孝)를 밝히니, 온갖 신령들이 제사를 끊이지 않고 받게 되었고, 어진 인재를 들어 쓰고 물음에 보답하니,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습니다. 지극한 성심을 열어 만물을 이끌었으니, 조정에는 아첨하는 자가 없었고, 여섯 가지 순수한 덕을 두터이 하여 백성을 가르치니, 나라 안에는 흉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관복(冠服)을 제정하여 예의의 질서를 밝히니, 옛 제도가 다시 드러났고, 아악(雅樂)을 지어 인륜을 조화시키니, 사람과 신이 함께 경사를 누렸습니다. 형벌을 신중히 하여 법을 밝히니, 모든 재판이 공정하게 되었습니다. 의복과 음식의 향락을 절제하여 절약을 보이니, 검소한 덕이 빛나고 드러났으며, 궁녀를 줄여 홀아비에게 짝을 맺어 주니, 세상에 원망하며 홀로 사는 이가 없어졌습니다. 창고의 재물을 기울여 가난한 자를 구제하니, 은택이 널리 미쳤고, 부역을 덜어 백성을 기르니, 골목마다 노래 소리가 울렸습니다. 덕과 은혜를 널리 펴서 멀고 가까운 나라를 감화시키니, 오랑캐들마저 춤추며 기뻐하였고, 지극한 덕을 드리워 밝고 어두운 세상에 통하게 하니, 상서로운 징조가 형체를 드러냈습니다. 만물이 생기를 얻어 살아가고, 모든 일이 새로워지니, 그 크고 위대한 모습이 마치 조물주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은 어리석게도 생각하건대, 검소함을 실천하는 도는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지금 네다섯 명의 부호(富豪) 집안들은 사치스러움에 이미 깊이 익숙해지고, 질박함에 대한 마음은 얕습니다. 검소함을 알아도 그것을 오래 지키기 어렵고, 사치를 행하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집을 웅장하게 짓고, 수레와 말을 화려하게 꾸미며, 하인과 시녀들은 비단옷을 입고, 집의 기둥과 벽에는 수놓은 무늬를 덮어 장식하니, 예법의 한계를 넘고 본분을 잃은 자가 많습니다. 옛날의 성스러운 임금들이 제도를 세울 때는, 위로는 천자(天子)에서부터 공경(公卿)에 이르고, 아래로는 문을 지키고 종을 치는 자에 이르기까지, 그 궁실과 의복, 수레와 말에 이르기까지 각각 등급의 차등이 있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넘지 못하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위아래의 질서가 바로 서고, 사람의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지금은 허영을 서로 다투고, 마음에 절제가 없어, 일마다 공을 허비하고 힘을 낭비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을 허비하는 것은 수놓은 비단과 조각 장식이며, 힘을 낭비하는 것은 넓은 집과 높은 집, 장대한 구조물과 화려한 장식입니다. 그로 인해 남자는 본업을 해치고, 여자는 수고를 허비하게 되니, 그 폐해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문황제 때에 가의가 상소하여 '오늘날의 왕정(王政)에는 항상 탄식할 만한 여섯 가지 일이 있습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이 그 하나입니다.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는 아랫사람이 반드시 본받게 마련이므로, 월왕(越王)이 용맹을 좋아하자 그 나라의 병사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겼고, 초영왕(楚靈王)이 여위는 것을 좋아하자 나라에 굶주린 자가 생겼습니다. 지금 두 성상(二聖, 효문제와 문명태후)께서 몸소 검소하고 순박하게 행하시며, 조서를 내려 간절히 권하시는데도, 백성들의 사치가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것은, 어찌 초나라와 월나라 사람들은 쉽게 변할 수 있었는데, 대위(大魏)의 선비들은 이렇게나 교화되기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이는 조정의 제도가 충분히 선포되지 않아, 백성들이 덕을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일 따름입니다. 신은 어리석게 생각하건대, 관료의 집과 수레, 옷차림에 이르기까지, 백관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등급에 맞는 제도를 마련하여,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누르지 못하게 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사치스러운 뜻을 좇아 경전에 어긋나는 일을 행해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풍속이 오래되어 갑자기 고칠 수 없다.'고 하지만, 신은 감히 옛사람들이 점차 고쳐나간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옛날 자산(子產)이 정(鄭)나라에서 정치를 한 지 1년이 되었을 때, 백성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내게 밭이 있으면 자산이 그것을 함께 하고, 내게 옷과 갓이 있으면 자산이 그것을 모아 두니, 누가 자산을 죽이려 하거든 내가 그를 함께 죽이리라.' 하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다시 노래하기를, '내게 밭이 있으면 자산이 그것을 가꾸게 하고, 내게 자식과 아우가 있으면 자산이 그것을 가르치게 하니, 자산이 죽는다면 누가 그를 이어 할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처음에는 어두웠다가 나중에 밝아진 것이겠습니까? 정치를 하는 자는 점진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교화를 받는 자는 갑자기 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등급에 따라 구별하는 제도를 세운다면, 그 시행의 처음과 끝에서의 상황이 다르더라도, 위(魏)의 백성들이 정(鄭)나라 사람들과 같아질 것입니다. 정나라 사람들과 같다면, 마침내는 선한 노래가 생기게 될 것이니, 어찌 그들이 처음에 원망한다고 해서 끝내 좋은 결과를 얻는 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은 복의 근원을 여는 것이며, 사치를 좋아하는 것은 가난의 징조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것은 가르치고 실행하기 쉬우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은 재물을 다 써도 다 채울 수 없으니, 성인들이 여기에 마음을 두고, 현인들이 본받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라우왕(禹王)은 궁실을 낮게 짓고 옷을 초라하게 입었으며, 은나라탕왕(湯王)은 황색 장막 아래에서 잠을 자고 나무로 만든 수레를 탔습니다. 이는 뒷날 임금들에게 검소함을 보인 것이니, 후왕(後王)은 그 뜻을 살펴 중용을 취해야 합니다. 공자(孔子)는 노(魯)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어도 거친 수레를 타고 둔한 말을 몰았고, 안영(晏嬰)은 제(齊)나라의 정경(正卿)이 되어도 씻은 갓을 쓰고 낡은 갖옷을 입었습니다. 이는 뒷날의 신하들에게 검소함을 보인 것이니, 후세의 신하들은 그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야 합니다. 옛 기록에 '법을 너무 엄격히 만들면, 그 폐단은 오히려 탐욕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비록 간략하나 정치의 도리를 통달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말이 혹시라도 채택된다면, 3년쯤 지나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성과가 생기면 사람들이 근본을 중히 여기게 되고, 사람들이 근본을 중히 여기면 사치와 낭비가 사라질 것입니다. 사치와 낭비가 사라지면 곡식과 비단이 넉넉해지고, 곡식과 비단이 넉넉해지면 백성이 평안하고 즐거워집니다. 백성이 평안하고 즐거우면 황실의 근본이 굳건해질 것입니다.

그 둘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易)》에 이르기를 '임금의 그릇으로는 장남보다 나은 자가 없다.' 하였고, 《전(傳)》에 이르기를 '태자는 선왕의 무덤에 제사를 올릴 때 제물과 제기를 받드는 자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임금을 제사지내는 데 태자가 없으면 종묘가 제향할 곳이 없고, 무덤의 적자(嫡子)가 끊기면 신성한 제기를 다룰 이가 없게 됩니다. 옛 성현들은 이것을 깊이 알았기에, 오래도록 전할 법으로써 그 제도를 남긴 것입니다. 옛날 주(周)나라 왕들은 이 도리를 얻었으므로, 유술(儒術)을 융성하게 하여 세자의 교훈으로 삼았습니다. 세자는 이에 어질고 아름다운 덕을 익혀 백성을 크게 조화시켰으니, 그리하여 왕통이 백성을 다스리며 제사를 이어 800년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진(秦)나라의 군주들은 덕정(德政)을 버리고, 유가의 경전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묻어 죽였으며, 그 세자에게 의리에 맞는 법도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잔혹한 성품이 길러지고, 폭정을 일삼아 백성을 학대하니, 그로 인해 오래 누리지 못하고 두 대 만에 망하였습니다. 망함과 흥함의 길은 바로 스승의 보좌와 지도에게 달려 있으므로, 스승의 도움이 있는가, 혹은 손해가 되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롭게 한 자는 주공(周公)으로서 성왕(成王)의 스승이 되어, 효도와 인애, 예의와 의리를 가르쳤고, 간악한 자를 몰아내어 악한 자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천하의 올바른 선비, 효제(孝悌)하며 학식이 넓고 도리가 있는 자를 골라 세자의 곁에서 보좌하게 하였으니, 보좌가 바르고 세자가 정직하였기에 주나라의 도가 길고 오래 이어졌던 것입니다. 해롭게 한 자는 조고(趙高)로서 호해(胡亥)의 스승이 되어, 그에게 사람을 벌하고 베고 코 베며 멸문지화에 처하는 일만 가르쳤고, 바른 사람을 몰아내어 어진 선비를 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첨과 모함, 간사하고 잔혹한 자들이 모두 그의 곁을 차지하였으니, 곁이 사악하자 호해의 마음도 삐뚤어졌고, 이것이 진나라의 운명이 짧게 끝난 까닭입니다. 하늘은 덕을 돕는 것이니, 어찌 주나라만을 편애하고 진나라를 멀리했겠습니까? 그들이 행한 도리가 달랐기 때문에, 복과 화의 길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옛날 광무제가 태자를 위해 스승을 세우고자 하여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은 모두 뜻을 헤아려 태자의 외숙인 집금오(執金吾) 신양후(新陽侯) 음취(陰就)를 추천하였습니다. 그때 박사 장일(張佚)이 정색하며 아뢰길 '지금 태자를 세우는 것은 음씨(陰氏)를 위함입니까, 아니면 천하를 위함입니까? 만약 음씨를 위함이라면 음후(陰侯)가 마땅하겠으나, 천하를 위함이라면 마땅히 천하의 현명한 인재를 써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광무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말하길 '태자의 스승을 두는 것은 태자를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박사가 감히 짐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낌 없이 말하니, 하물며 태자를 바르게 하지 못하겠는가?' 하며 곧 장일을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임명하였고, 그 결과 명제(明帝)는 마침내 어진 임금이 되었습니다. 장일이 명제를 가르쳐 훌륭한 임금이 되게 한 일은, 비록 성인이 된 뒤의 가르침이었음에도 이토록 칭송되었는데, 하물며 태자가 어린 시절부터 올바른 도리로 교육받는다면 그 유익함이야말로 더욱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태자가 태어나면 예를 갖추어 받들고, 선비에게 안게 하며, 관원이 엄숙히 관을 쓰고 남교(南郊)에서 뵙게 한다.' 하였으니, 이는 적통의 무게가 하늘에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또, '궁궐의 문을 지날 때는 내려 걷고, 종묘를 지날 때는 빠른 걸음으로 간다.' 하였으니, 이는 효성과 공경의 도리를 밝힌 것입니다. 이처럼 태자는 갓난아기 때부터 이미 예의와 행실의 교육을 받았으니, 이는 먼 옛 시대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고종(高宗) 문성황제(文成皇帝)께서도 일찍이 젊은 시절에 스승이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은 것을 한탄하시며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나이는 어렸고, 마음이 아직 전념하지 못했으며, 천하의 정무를 맡고부터는 다시는 공부를 익힐 여유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어찌 나만의 잘못이겠는가? 또한 스승과 보좌와 지도가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하셨습니다. 이에 상서(尙書) 이흔이 관을 벗어 사죄하였으니, 이는 근래의 경계로 삼을 만한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태황태후(太皇太后)께서는 고종을 도와 현조(顯祖)를 훈도하시어, 그 위대한 공덕이 앞선 임금들을 능가하게 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훈육을 받으시어, 성덕(聖德)이 날로 자라나셨고, 이제 태자께서 탄생하자 다시 몸소 보살피시며, 날마다 살피고 달마다 시험하시어, 정성을 다하셨습니다. 이제 마땅히 옛 예에 따라 태자의 스승과 보좌와 지도를 세워 가르치게 해야 합니다. 가르침이 바르면 태자가 바르게 되고, 태자가 바르면 황실이 경사로워지며, 황실이 경사로워지면 천하 백성들이 큰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 셋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들으니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요, 백성은 곡식을 먹고 사는 데에 의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왕(聖王)들은 농사짓는 일을 부지런히 권장하여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요(堯)와 탕(湯) 시대에는 물난리와 가뭄이 있어도 사람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색이 없었는데, 이는 미리 대비함이 점차 이루어졌고, 평소에 곡식을 쌓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한(漢)나라에 이르러서는 인구에 비해 식량이 부족하였으므로,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곡식을 공급하였고, 위(魏)나라 때는 군량이 모자라 '둔전제(屯田制)'를 시행하여 군사에 필요한 식량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로써 시기에 따라 궁핍하지 않았고, 나라와 군사에 필요한 것이 충족되었습니다. 또한 《예기(禮記)》에는 '나라에 3년 치의 양식이 없으면, 그 나라는 참된 나라가 아니다.' 하였으며, 광무제는 한 마지기의 논이라도 실하게 경작되지 않으면 그 죄를 수령에게 물었습니다. 이처럼 성인은 세상의 근심을 덜기 위해 곡식을 중히 여겼고, 그 근심의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어진 임금은 백성을 걱정하고 농사를 권장하기를 간절히 하였던 것입니다.

근년에는 산동 지방이 흉년이 들고, 지난해에는 수도가 곡식이 귀하였으므로, 안팎의 백성들이 곡식을 찾아 다니며 부유한 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농업이 폐하여 곤궁에 시달리다가 겨우 생계를 잇게 되었으며, 국체(國體)에도 큰 손실이 있었습니다. 만약 미리 곡식을 많이 쌓아 두어 평상시에 대비했다면, 어찌 노약한 자들을 억지로 몰아 천 리 밖으로 생계를 구하게 하였겠습니까? 지금의 형세를 옛날과 비교하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땅히 주·군(州郡)에서 정기적으로 거두는 조세에서 아홉 중 둘을 덜어내고, 수도의 탁지(度支)가 해마다 쓰고 남은 재정의 일부를 떼어, 각기 관청을 세워야 합니다. 해가 풍년일 때에는 곡식을 사들여 창고에 저장하고, 흉년일 때에는 이자와 이익을 더하여 백성에게 되팔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백성은 반드시 관청의 비단을 사기 위해 농사에 힘쓸 것이며, 관청의 곡식을 얻기 위해 재물을 모을 것입니다. 해가 좋을 때는 항상 저축이 생기고, 흉년이 들면 바로 그 곡식으로 백성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로 농관(農官)을 두어 주·군의 백성 가운데 열 명 중 한 명을 뽑아 둔전의 농부로 삼고, 지세의 물길과 육지의 편의를 살펴 밭의 넓이를 계산하여, 재판의 벌금과 잡물로 얻은 재화로 소를 사서 나누어주고, 힘써 농사짓게 하십시오. 한 농부의 밭에서 한 해에 60석의 곡식을 거두게 하되, 그에게는 정과(正課)와 병역 및 부역 등의 잡역을 모두 면제하십시오.

또 신이 들으니, 옛날의 현명한 임금들은 모두 멀리 있는 이들을 포용하고, 현자를 예우하며, 숨은 인재를 불러냈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의 고조(高祖)는 조(趙)나라를 지날 때 악의의 후손을 찾았고, 진(晉)나라무제(武帝)는 천하를 평정한 뒤 오(吳)나라촉(蜀)나라의 인재를 표창하였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마땅히 황하 이남의 일곱 주(州) 사람들 중에서 문벌이 높고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 조정으로 부르시어, 중원 관리의 사례에 따라 그 능력에 맞게 등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첫째, 조정의 은덕이 신구(新舊) 사람들 모두에게 고르게 미치게 되고, 둘째, 장강과 한수(漢水) 이남의 백성들이 도리를 따르고 귀순하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넷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순제(舜帝)는 고요(咎繇)에게 명하여 '형벌은 반드시 가엾이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였고, 주공(周公)은 성왕(成王)에게 '백성의 옥사(獄事)를 그르지 말라.' 하고 타일렀습니다. 이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경계하여 형벌을 중히 여긴 데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두 성상께서는 죄인에 대해 항상 애휼의 마음을 가지시어, 크고 작은 일에 판결을 내릴 때에도 대개 감형과 용서를 택하시며, 혹 어쩔 수 없이 형벌을 내리실 때에도 반드시 슬퍼하시니, 예전 임금들이 부지런히 죄인을 살피고 사면을 베풀던 일도 이보다 더할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 시기가 맞지 않는 일은, 신이 감히 편안히 여길 수 없습니다. 한(漢)나라 제도에 따르면, 옛날에는 중죄의 판결을 모두 음력 한 해의 끝, 곧 열두번째 달에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러나 효장제(孝章帝) 때에는 이를 바꾸어 음력 열째 달에 판결을 마치게 하였으니, 이는 '삼미(三微)'를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뒤 흉년이 들자, 당시 식자들은 '열째 달에 형벌을 시행하여 음기가 아직 미약하고 양기가 흩어져 나가니, 이로 인해 가뭄이 생겼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장제가 일을 공경(公卿)들에게 물으니, 상서(尙書) 진총(陳寵)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동지(冬至)가 되면 양기가 비로소 싹트기 시작하니, 열한번째 달에는 초목 중에 사간(射干)·운(蕓)·려(荔)가 자라나고, 주(周)나라에서는 이를 봄으로 여겼습니다. 열두번째 달에는 양기가 위로 통하여 꿩이 울고 닭이 알을 품으니, 은(殷)나라는 이를 봄이라 하였습니다. 열세번째 달에는 양기가 이미 땅 위에 퍼져 잠자던 벌레들이 깨어나므로, 하(夏)나라는 이를 봄이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세 번의 미세한 양기가 차례로 드러나며, 삼통(三統)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삼미가 무르익는 달에 형벌을 시행하여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월령(月令)》에 이르기를 '한겨울의 달에는 몸을 편히 하고, 일은 고요해야 한다.'하였습니다. 분노를 일으키고 큰 형벌을 시행하는 것은 편안함이라 할 수 없고, 고요함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장제는 이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열째 달까지만 재판과 형벌을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수도와 지방의 형사 제도는 여전히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아, 중죄의 판결을 계동(季冬)까지 마무리하니, 삼정(三正)에 따라 삼미를 기르는 뜻이 전혀 없게 되었습니다. 용서와 자비의 뜻은 옛날보다 더하나, 시기에 따른 규범은 오히려 빠져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양기를 도와 만물을 소생시키며, 미세한 생명에도 자비를 베푸는 도리'에 맞다 하겠습니까? 진실로 마땅히 멀리는 주(周)의 전례를 본받고, 가까이는 한(漢)의 제도를 따르시어, 천하의 재판과 형벌은 초가을에 시작하여 맹동(孟冬)까지만 마무리하고, 삼통의 봄에는 결코 참수와 교수형을 시행하지 않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도가 하늘과 땅에 조화를 이루고, 인자한 덕이 후세에 드리워질 것입니다.

그 다섯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에는 대신이 부정한 일로 파면될 때, 이를 곧바로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고, '보궤(簠簋)가 단정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귀히 여겨, 그 허물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려 한 까닭이었습니다. 대신이 큰 죄를 지으면 흰 관을 쓰고, 검은 소의 털로 만든 끈을 달며, 물그릇과 칼을 앞에 두고 집 안에서 스스로 죽음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신하가 죄를 알고 감히 형벌을 피하지 않는 도리였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대신을 대하는 예가 옛 제도와 같아, 태화(太和) 이후로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를 지은 자라 하더라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습니다. 또, 그들을 보낼 때에는 깊은 슬픔과 불쌍히 여김을 드러내어, 말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백관이 모두 이를 보고, 천하가 모두 들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죽음을 앞둔 자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 가족의 슬픔을 위로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은혜는 오로지 마음의 자비로부터 나온 것으로, 아직 영구적인 법으로 세워지지 않았으니, 이것이 신이 감히 사견을 아뢸 까닭입니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 때에, 어떤 사람이 승상 주발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하였으므로, 그를 장안의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때 관리들이 주발을 천하게 대하여, 그는 노비와 다름없이 모욕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가의가 글을 올려, 임금과 신하의 도리를 논하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간절히 아뢰었습니다.
"귀한 신하는 천자가 몸가짐을 고쳐가며 예로써 대하는 존재이고, 일반 백성들 또한 몸을 굽혀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라도 죄를 지었으면 파면하는 것이 마땅하고, 사사(賜死)함도 마땅하나, 결박하여 사구(司寇)의 형정으로 보내거나, 곤장을 치게 하고, 아전들이 욕을 퍼붓게 하는 것은 백성들이 보기에 마땅하지 않습니다. 형벌을 내릴 때에는 신하가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무릎 꿇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천자는 '대는 죄를 지었을 뿐이니, 내가 예를 갖추어 그대를 대한다.' 하고, 위에서 억지로 형을 집행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옳게 여겨 받아들였고, 그 후로 대신이 죄를 지으면 모두 스스로 죽고 형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효무제(孝武帝) 때에 이르러 다시 일부가 감옥에 들어가 형벌을 받았으니, 이는 문제가 당시의 일로만 시행하고 영구한 제도로 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폐하의 성덕(聖德)과 자비로움이 어찌 한나라의 문제라도 감히 견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천하가 다스려져 평안하고, 백성이 임금을 논하지 않는 이때에, 신이 어찌 감히 어리석은 말을 조정에서 함부로 하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만세의 뒤에, 제위를 잇는 임금 중 혹 한나라의 효무제와 같은 일이 있을까 함입니다. 도가 귀한 것은 오래도록 이어지는 것이요, 법이 존귀한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손에게 남길 유업입니다. 어찌 지금의 은혜만 행하고, 길이 전할 제도를 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여섯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효경(孝經)》에 '부자(父子)의 도리는 천성(天性)이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효도함이여, 진실로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라.' 하였습니다. 두 경전의 뜻은 한몸과 같은 관계, 같은 숨결을 지닌 이들이 서로 도울 수는 있어도 결코 갈라설 수는 없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더라도 그 죄가 서로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은 임금이 베푸는 후한 은혜이며, 반대로 죄로 인해 연좌될까 두려워하는 것은 본래 천리(天理)의 당연한 이치입니다. 무정한 사람들은 아버지나 형이 옥에 갇혀도 얼굴빛에 근심이나 두려움이 없고, 자식이나 아우가 형벌을 받아도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안히 누리고 높은 자리에 머물며, 평소처럼 놀고 지내며, 수레와 말은 여전히 화려하고, 옷과 관은 여전히 장식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같은 몸 혹은 같은 기운으로서 근심을 나누고 슬픔을 함께하는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진백(秦伯)은 초(楚)나라 사람이 강(江)을 포위하자 흰옷을 입고 두려움을 드러냈고, 송중자(宋仲子)는 자신이 천거한 환담(桓譚)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관을 벗고 사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자식이나 아우가 아버지나 형에게, 또 아버지나 형이 자식이나 아우에게 느끼는 정은 본디 지극한 것이어서, 어찌 단순한 결의지교(結義之交)처럼 얕게 논할 수 있겠습니까? 두 성상께서는 풍속을 청렴하고 검박하게 하시며, 효도와 자애를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신이 어리석게 생각하건대, 아버지나 형이 죄를 범했을 때는 그 아들 또는 아우로 하여금 흰옷을 입고, 웃옷을 벗은 채로 궁궐에 나아가 죄를 빌게 하시고, 자식이나 아우가 죄를 범했을 때는 그 아버지나 형으로 하여금 상소문을 올려 스스로 책임을 시인하고 그 직책을 면하게 해달라 청하게 하소서. 만약 그 직책에 꼭 필요한 인재라 물러나게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위로하고 격려하여 그대로 머물게 하되, 이러한 절차를 밝히면 세속의 풍속이 두터워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 일곱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신하가 큰 상(喪)을 당하면, 임금은 3년 동안 그 집의 문에서 그를 부르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는 성인이 인간의 정에 따라 예를 세워, 효자의 슬픔을 온전히 마치게 한 것입니다. 주(周)나라 말기에 예도가 쇠퇴하자, 이러한 상례 또한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상복을 입은 채로 전장에 나가고, 흰 관을 쓰고도 군신의 의식을 행하게 되었다가 포학한 진(秦)나라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예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한(漢)나라 초기에 군대의 출정이 잦아 옛 예를 따를 수 없었고, 선제(宣帝) 때에 이르러서야 백성 중 군역이나 둔전의 임무를 맡은 자가 조부모나 부모의 상을 당하면, 3개월이 차기 전에는 부역을 면제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의 예는 아직 정해진 규범이 없었고, 후한(後漢) 원초(元初) 연간에 이르러서야, 대신이 중대한 상을 당하면 비로소 벼슬을 그만두고 온전히 장례를 마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위무제(魏武帝), 손권, 유비 세 나라가 서로 전쟁하던 시대에는 날마다 전쟁이 일어나 옛 제도가 다시 폐지되어 시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진(晉)나라 때, 홍려(鴻臚) 정묵이 부모상을 당하자 끝까지 상복을 입고자 간청하였고, 무제(武帝)는 그의 효성을 감동하여 이를 제도로 정하였습니다.

성대한 우리 위(魏)나라 초기에 세상이 어지러움에서 막 벗어나 예를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아직 상례를 마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세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사방이 평온하고 백성이 편안하니, 이는 참으로 효도와 자애의 도리가 두루 퍼지고 예와 교화가 다시 일어날 때이나, 어리석은 신이 살펴보건대, 아직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부모상을 당했을 때, 휴가가 끝나면 곧 복귀하여 벼슬에 나아가고, 비단옷을 입고 수레를 타며, 교묘(郊廟)의 제사에 참여하고, 옥을 달고 끈을 늘어뜨리며, 다른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니, 이는 효자의 도리를 해치고, 하늘과 땅의 근본된 법도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만약 조부모나 부모의 상을 당한 자가 있다면, 모두 상복 기간을 마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의 부재로 인해 관직이 오래 비게 되는 경우에는, 조정에서 자상한 명으로 위로하고 독려하여, 복직하되 다만 출납(出納)과 문서 전달만을 맡게 하며, 나라의 경사로운 의식에는 한 번도 참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군사적으로 위급한 상황에 대해서는, 상복을 입은 채라도 군역을 수행하게 하되, 예에 어긋나더라도 사정상 불가피한 경우이므로 시행함이 옳습니다. 신의 말이 조금이라도 채택할 만하다면, 바라건대 관련 관청에 넘겨 따로 조목을 정하여 제도로 세우소서."
효문제는 이 글을 보고 매우 훌륭하다고 여겼으며, 곧 그 내용을 모두 시행하였다. 이후 이표는 점차 예우를 받게 되어 중루장군(中壘將軍)이 더해졌다.

태화 14년(490년) 9월, 문명태후가 붕어하자, 여러 신하들이 효문제에게 상복을 벗고 공무를 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효문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이표는 끈질기게 효문제를 설득하여 업무에 복귀시켰다.

태화 15년(491년) 4월, 이표는 또다시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이후 효문제는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예로부터 일을 살펴보면, 재능 있는 사람을 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혹은 미천한 음덕(蔭德)을 이어받아 당대에 덕을 드러낸 자도 있었고, 혹은 그늘진 곳에서 발탁되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자도 있었다. 그러므로 모수(毛遂)는 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초나라 사신들과 논변을 겨루어 이름을 떨쳤다. 진실로 재능이 있다면 어찌 가문을 따질 것이 있겠는가? 이표는 비록 본래 청귀(清貴)한 가문이 아니고 재산도 넉넉하지 않았으나, 식견이 높고 본성이 엄정하며, 학문이 넓고 경전과 사적에 밝고, 논리에 능하고 말이 날카로워, 세상에서 쓸 만한 인재이다. 또 관리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으며, 조정의 아름다운 뜻을 널리 전하고 있으니, 만약 공로를 포상하고 업적을 논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가 근면하고 유능한 자가 되기를 권장하겠는가? 특별히 비서령(秘書令)으로 승진시켜 그의 충성과 정성을 보답하라."
또한 이표는 율령의 개정과 관련하여 자문하고 참여한 공로로써 비단 500필, 말 1필, 소 2마리를 하사하였다.

태화 15년(491년) 11월, 이표는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에 더하여 임명되어, 사신으로 다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의 황제인 무제 소색은 주객랑 유회(劉繪)를 보내어 이표를 맞이하게 하고, 잔치와 음악을 베풀었다. 다만 이표는 음악을 사양하면서 자리에 앉은 뒤에 말하였다.
"제(齊)의 임금께서 연회와 음악을 베푸신 것은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함인데, 내가 음악을 사양한 까닭을 경이 혹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소. 예로부터 상례(喪禮)가 폐지되고 바뀐 지 오래인데, 우리 황제께서는 타고난 효성을 지니시어, 어머니의 은혜를 깊이 사모하시고 끝없이 슬퍼하신 나머지, 이번에 상복을 벗는 일을 의논하게 되신 것이오. 지난 3월 말에야 조정의 신하들이 비로소 상복을 벗었으나, 아직도 모두 흰옷을 입은 채로 일을 하고 있소. 여기 있는 배(裴)씨와 사(謝)씨 두 사람은 모두 그 사정을 아는 분들이오. 내가 지금 음악을 사양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니, 경이 부디 이상히 여기지 않기를 바라오."
유회가 이에 대답하였다.
"음악을 사양하신 일은 알겠습니다. 다만 묻건대, 위(魏)나라의 상례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까?"
이표가 말하였다.
"고종(高宗, 문성제) 3년에는, 헌문황제께서 상을 한 달 넘게 치르셨소. 지금의 성상께서는 길러주신 은혜와 가르침의 깊은 덕을 생각하시어, 은나라와 한나라의 제도를 절충하여 따르고 계시오. 이를 두고 예의 변화를 잘 하였다 할 만하오."
유회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굳이 옛 제도를 따르려 한다면, 어찌하여 삼년상을 마치지 않습니까?"
이표가 답하였다.
"만기(萬機)의 정무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에, 깊은 슬픔을 자제하시고 조정의 논의에 따라 결정하신 것이오. 복장의 형식은 삼년상과 다르지 않지만, 기간만 한 해로 줄인 것이니, 예를 잃지 않으면서도 예를 조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소."
유회가 말하였다.
"지나치십니다, 어르신! 어찌 예법을 사람에 따라 변형하여 허락하십니까?"
이표가 대답하였다.
"우리 조정은 스스로 시대를 뛰어넘은 제도를 세운 것이오. 어찌 남의 허락이 필요하겠소?"
유회가 말하였다.
"백관이 모두 업무에 종사하는데, 어찌하여 정무가 비는 것을 걱정하십니까?"
이표가 대답하였다.
"내가 문헌에서 들으니, 오제(五帝) 때의 신하는 임금만 못하였기에 임금이 친히 정사를 잡았고, 삼왕(三王) 때에는 임금과 신하의 지혜가 비슷하였기에 함께 국정을 다스렸으며, 오패(五霸) 때에는 신하가 임금보다 뛰어났기에 정사가 아래에서 결정되었소. 우리 조정의 관리들은 모두 오제 시대의 신하와 같으니, 임금께서 친히 정사를 잡으시는 것은 요(堯)·순(舜) 시대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오."
이후 이표가 돌아가려 할 때, 무제가 친히 말하였다.
"경은 지난번 사신으로 왔을 때, 완적의 시를 인용하여 '단지 오랜 한가로움을 원하노니, 후세에 다시 와서 놀리라(但願長閑暇,後歲復來遊)' 하였는데, 이제 과연 다시 왔도다. 경이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 올 마음이 있는가?"
이표가 대답하였다.
"신이 다시 완적의 시를 인용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청도(清都) 안에서 한 번 노니고, 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리라(宴衍清都中,一去永矣哉).'"
무제가 놀라며 말하였다.
"청도(清都)가 이렇듯 좋은데, 어찌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오? 경의 말을 들어보니, 아마 이번이 영원한 이별이겠구려. 짐이 특별한 예로써 경을 전송하겠소."
이리하여 무제는 친히 낭야성(瑯邪城)에 이르러, 산에 올라 강가를 바라보며 여러 신하들에게 시를 지어 이표의 송별을 하게 하였다. 이처럼 이표는 남쪽 사람들에게서 크게 존중받았다. 이표는 앞뒤로 여섯 번 남쪽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남쪽 사람들은 그의 정직하고 곧은 말을 높이 평가하였다.

태화 17년(493년) 8월, 효문제가 남쪽 정벌을 가장한 낙양 천도를 감행할 때, 이표는 관군장군(冠軍將軍) 및 동도부장(東道副將)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정로장군(征虜將軍)이 더해졌다. 낙양 천도가 완료된 후, 이표는 어사중위(御史中尉)로 승진하고, 저작랑(著作郎)을 겸임하였다. 이표는 이미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고, 성격 또한 강직하여, 여러 관리를 탄핵하고 바로잡는 일이 많았다. 이에 멀리 있는 자들도 두려워하고, 권세가와 부호들조차 숨을 죽였다. 효문제는 늘 그를 '이생(李生)'이라 부르며, 어느 날 한가한 자리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생을 가진 것은, 한나라가 급암(汲黯)을 가진 것과 같다."
또, 한번은 효문제가 유화지(流化池)에서 여러 신하들과 잔치를 벌이며, 상서복야 이충에게 말했다.
"최광의 박식함과 이표의 강직함은, 우리 국가가 현인을 얻은 근본이니라."

태화 20년(496년) 10월, 분주(汾州)에서 토경(吐京)의 호(胡)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효문제는 조서로 이표에게 절(節)을 주어 위무하게 하였다. 반란이 평정되자 수도로 돌아왔고,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임명되었으며, 어사중위는 그대로 맡았지만 저작랑의 업무는 면제되었다.


태화 22년(498년) 3월, 효문제가 친히 남벌할 때, 이표는 탁지상서(度支尚書)를 겸임하여 상서복야 이충, 임성왕 원징 등과 함께 수도 낙양에 남아 정무를 처리하였다. 이표는 본래 성품이 강직하고 호기로워, 이충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자주 논쟁하였으며, 그 감정이 언성과 얼굴빛에까지 드러날 정도였다. 그는 조금도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없었고, 스스로 어사의 지위에 있으니, 감히 자신을 탄핵할 자는 없을 것이라 여겨, 점점 전횡이 심해졌다. 이충은 그의 전후의 죄상과 월권행위를 빠짐없이 적어두었다가, 마침내 상서성(尚書省)에 이표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효문제에게 표문을 올려 아뢰었다.
"신은 들으니,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인도하는 것은 교화를 빛내어 다스림을 일으키는 근본이라 하였기에, 수레와 복식과 제도가 한순간이라도 흐트러져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므로 진(晉)의 문공(文公)은 구합(九合)의 대공을 세우고도, 죽은 뒤 묘실을 청하는 일로 간언을 받았으며, 제(齊)의 계씨(季氏)는 세대에 걸쳐 권세를 잡았으나, 여번(璵璠)을 받은 일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명예와 관직의 무게는 함부로 빌려줄 것이 아닙니다. 선왕들께서 이미 옛 법을 본받아 이를 법제로 삼으셨고, 폐하께서는 오늘의 시대를 정리하고 다스리심으로써, 수레와 관복이 질서 있게 되었고, 예물의 법도가 무너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신하 이표는 본래 평범한 신분에서 출발했으나, 오직 재능으로 발탁되어 청화(清華)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는 동관(東觀, 비서성)을 맡아 문헌을 관리하다가, 성은을 두텁게 입고, 법을 수호하는 어사대(御史臺)의 장으로서 좌우에 금옥 매미 장식이 달린 관을 받았습니다. 마땅히 은혜를 생각하여 절개를 굳게 하고, 충성으로 덕을 보답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어사중위라는 이름만 빌려 그 직위를 더럽히고, 몸으로는 오만을 범하였으며, 권세를 믿고 거만하게 굴어 공공연히 도를 넘어 행동하였습니다. 또, 감히 지금 출입이 금지된 관청의 인원과 함께 자리를 하며, 사사로이 관용인 황색 수레를 모는 데에 꺼리낌이 없었습니다. 뜻을 제멋대로 부리고, 남의 말은 듣지도 보지도 않는 듯한 행태를 보였는데, 이런 것을 참는다면, 또 누구의 죄를 참지 않겠습니까? 이에 신은 상서 이하, 영사(令史) 이상, 그리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 역도원(酈道元) 등과 함께 상서성의 도좌(都座)에서 이표의 죄상을 낭독하고, 사실 여부를 따져 물었습니다. 혹시 알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부하들을 불러 조사하겠다고 하였으나, 이표는 신에게 답하기를,
'그 일들은 모두 눈앞에 드러난 사실로, 탄핵된 내용은 모두 실제와 같습니다. 전부 제가 알고 있는 일들이니, 부하를 따로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보고드립니다. 이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이표가 맡은 관직을 면직시키고, 정위(廷尉)에 넘겨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충이 또 상소하여 말했다.
"신은 이표와 서로 알고 지낸 지 거의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가 남쪽으로 사신으로 갔을 때, 신이 보니 그 사람됨이 얼굴빛은 엄숙하고 말은 조리 있으며, 재능이 뛰어나고 학문이 넓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식견으로도 '이 사람은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다'라 여겼습니다. 그 후 이표가 벼슬이 올라 조정의 중신이 되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조회와 잔치에 참여하며, 고금의 문장과 인물 평론을 논하였습니다. 임금의 곁에서 이야기할 때나 여러 현사(賢士)들 사이에서 논의할 때마다, 충성과 정의를 높이 여기고, 발언은 간절하고 진실했으며, 언제나 올바름만을 말하여 숨기거나 피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비록 여러 왕족이나 폐하의 측근들처럼 높은 지위의 인물이라도,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 앞에서 곧장 시비를 가리고 논박하였으며, 거짓과 아첨을 극도로 미워하여, 잘못이 있는 자를 가차 없이 꾸짖고 바로잡았습니다. 그 낯빛은 엄숙하고, 말은 강직하였으며, 마치 매가 참새를 덮치듯 단호하였으니, 엄정하고 청렴한 기상은 실로 본받을 만했습니다. 신은 비록 재주가 부족하나, 그의 굳센 기개를 존경하고, 그 정직함을 흠모했습니다. 다만 그 성격이 다소 급하고 협착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을 흠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표가 처음 어사대(御史臺)에 올라 사직(司直)의 임무를 맡았을 때, 행차 때마다 길을 비키라고 크게 외치는 수행원처럼 조정의 질서를 바로잡고, 곧은 법의 본체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의 식자들은 모두 이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 평가하였으나, 이표는 뜻과 행실을 굳게 지켜, 권세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가 탄핵한 자는 화살에 맞은 듯 바로 쓰러졌습니다. 그 위엄은 크게 떨쳐 먼 지방까지 진동하였고, 그가 청렴하고 엄정하다는 평판은 수도에서부터 퍼졌습니다. 천하 사람들이 다시 그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탐욕스럽고 포악한 자들은 모두 움츠러들었습니다. 그가 한 일을 신도 직접 보면서 그의 말과 행실은 참으로 하나이며, 충성과 청렴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표에게 개인적인 원망이 있거나, 그의 위세와 강직함을 두려워한 자들이 있어, 그를 헐뜯어 포악하다 말하였으나, 신은 어사대의 직책이 본디 사람들의 미움을 사는 자리이니, 이런 풍문은 쉽게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하양(河陽)의 사건 때, 신은 이표와 함께 영군부(領軍府)에 있었고, 태위(太尉), 사공(司空) 및 영군의 여러 경(卿)들과 함께 정위(廷尉)가 심문한 죄수를 모아 재검토하는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때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었는데, 두 공(二公, 태위와 사공)과 신은 그 말을 일부 들으니, 혹 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고 여겨, 조금 받아들일 의향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변론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표는 갑자기 동쪽 자리에서 분노하여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 올리고 크게 호통치며, 구두로 '도적 같은 놈!'이라 부르고, 좌우를 꾸짖으며 이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남대(南臺, 어사대)에 가서 내 형벌용 나무 몽둥이를 가져오라! 저놈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겠다!'
이렇게 외쳤지만, 끝내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어서 말하기를,
'남대의 심문은 오히려 억울하게 살려두는 경우는 있어도, 억울하게 죽이는 일은 결코 없으나, 지금의 심문도 그에 따라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때 여러 사람들은 죄수의 억울함이 무겁다고 여겼으나, 자백한 이가 많았고 또 마음속으로 이표를 꺼려 두려워했기에, 모두 말없이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일로부터 신은 비로소 혹시 이표가 과도하게 급하고 잔혹하지 않은가 의심하게 되었고, 자세히 살피며 조사하니, 그가 형벌을 엄하게 다스리긴 하나, 여전히 신문과 조사의 절차는 법대로 따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말하자면, 그가 자잘한 죄에는 다소 급하게 굴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금령(禁令)을 엄정히 유지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공평히 판단하건대, 해가 되는 것보다 이로운 점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그때 품었던 의심을 끝내 조정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신하로서 아는 일이면 반드시 아뢰어야 한다는 의리를 저버린 잘못이었음을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지난해 폐하의 남정 이후, 이표가 탁지상서를 겸하면서 신 또한 밤낮으로 그와 함께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그의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긋나고, 남을 탓하면서 스스로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제멋대로 행동하며 거리낌이 없고, 자신만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겼습니다. 스스로 지은 잘못에는 관대하면서, 남의 허물에는 깊이 파고들어 엄하게 탄핵하였으며, 남을 섬길 때에는 오만하였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마치 옛날의 충신과 어진 자처럼 충의와 관용을 입에 담았지만, 그 행실을 따져보면 세상에 아첨하고 폭악한 무리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자였습니다. 신은 임성왕(任城王)과 함께 그를 따르며, 스스로를 낮추고 굽혀 순종하였으니, 마치 온순한 아우가 포악한 형을 섬기듯하였습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든, 비록 일이 도리에 맞지 않더라도, 신은 어쩔 수 없이 모두 그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에 따라 진상을 찾아내면, 모든 것이 증거로 드러날 것입니다. 만약 신이 열거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이표를 북방의 변방으로 귀양 보내어, 간사하고 거짓된 자가 조정을 어지럽히는 폐단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신의 말에 아무런 증거가 없다면, 신을 사방 변방으로 내쳐버리시어, 파리떼 같은 참소와 시비의 소란을 그치게 하소서."
효문제는 현호(懸瓠)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충의 상소문을 보고는 놀라며 탄식하였다.
"어찌하여 경이 도성에 남아 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관청에서는 이표를 사형에 처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황문시랑 송변의 변호로 효문제는 그를 용서하고 단지 명부에서 제명하는 데 그쳤다. 그리하여 이표는 곧 고향으로 돌아갔다.

태화 22년(498년) 11월, 효문제가 북쪽으로 행차하여 업(鄴)에 이르렀을 때, 이표가 업성 남쪽에서 절하며 영접하였다. 효문제가 이표에게 말했다.
"짐이 경을 두고 늘 생각하던 바는, 경이 마치 굳은 절개의 소나무처럼 곧게 서고,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근래 탄핵문을 보니 그 뜻과 전혀 어긋나는구나. 경이 이런 참소를 입은 것이 짐의 잘못이냐, 경과 함께 정무를 본 신하들의 잘못이냐, 아니면 경 스스로 자초한 것이냐?"
이에 이표가 답하였다.
"신의 허물은 스스로의 잘못에서 비롯되었고, 죄는 신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결코 폐하께서 부당하게 신을 죄주신 것도 아니오, 또한 정사를 맡은 신하들이 무고히 신을 해친 것도 아닙니다. 신의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동고(東皋) 아래에 엎드려 죽을 몸이지, 어찌 감히 폐하의 수레 먼지조차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상께서 병환이 위중하다는 말씀을 듣고, 신의 간과 쓸개를 쏟아 바칠 마음으로 달려왔을 뿐이며, 죄를 사하여 달라 청하려 온 것이 아닙니다."
이에 효문제는 또 송변의 말을 받아들여 이표를 다시 등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마침 어사대영사 용문관(龍文觀) 과거 이표가 어사 가상(賈尚)과 함께 폐태자 원순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서신을 숨겼고, 이로 인해 원순이 사사당했다고 상주하여, 체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이표는 스스로 억울함을 호소하였고, 효문제는 그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좌우 신하를 시켜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소달구지 한 대를 내려주어 실려서 낙양으로 가게 하였다. 그 뒤, 대사면령이 내려져 죄를 사면받았다.

효문제가 병으로 붕어하고 선무제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때 이표는 상서령 왕숙에게 의탁하였고, 또 형만(邢巒)과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 덕에 조정에서 이표의 옛 관직을 회복시켜 사관(史官)의 일을 다시 맡기자는 논의가 나왔고, 왕숙과 형만은 그가 어긋나지 않도록 곁에서 도울 것을 청하였다. 이에 이표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이 들으니, 용의 무늬가 나타나면 황실의 도가 밝아지고, 거북딱지에 글이 드러나면 제왕의 덕이 길게 이어진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보낸 상서로운 글입니다. 상서로운 문채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예와 법이 높고 낮음을 차례로 드러내며, 백성의 스승이 세워지고, 귀천의 질서가 바로 서는 것은, 모두 인간 세상에서 법도와 모범이 세워진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당전(唐典)》에는 요(堯) 임금의 밝은 덕을 새긴 책이 있고, 《우서(虞書)》에는 순(舜) 임금의 신중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새겨져 있으며, 《전(傳)》에는 하나라의 간하고 경계하는 말이 실려 있고, 《시(詩)》에는 상나라 사람들의 찬미하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나라의 역사서가 임금의 선악과 득실의 자취를 밝힌 것입니다. 주나라의 왕실에 이르러, 두 왕조의 전례를 거울로 삼아, 문왕(文王)은 《주역》의 두 경전을 열었고, 주공(周公)은 여섯 편의 글로 이를 보완하였으니, 그 문장이 풍성하고 그 제도가 크고 뚜렷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雅)》와 《송(頌)》을 보면 문왕과 무왕의 큰 공덕을 알 수 있고, 그 노래의 음조를 들으면 주공의 지극한 효성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계찰(季札)은 나라의 노래를 듣고 그 나라의 흥망을 알았고, 《송(頌)》을 듣고 성덕의 크고 작음을 알아보았습니다.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역사를 바로잡고, 좌구명(左丘明)이 공자의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은, 참으로 온화하고도 완전한 글이며, 다함이 있어도 더럽혀지지 않은 글이라 할 만합니다. 그 밖의 《승(乘)》과 《지(志)》 등 여러 기록도 나름의 의의가 있었습니다. 사마천과 반고의 사서에 이르러서는, 문장은 진·한(秦漢)에 이르고, 실제로는 애제(哀帝)와 평제(平帝)에 이르러 다하였으며, 두 사서는 징계와 권면의 뜻을 아울러 담고, 화려함과 실질이 고르게 조화를 이루어, 그 문장은 참으로 풍부하고 훌륭하였습니다. 그 덕으로써 대한(大漢)의 기풍은 삼대(三代)의 아름다움과 같았고, 염상(炎上)의 도를 숭상하여 후세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화영(華嶸), 마융(馬融), 진숭(陳崇), 우사(于嗣) 등도 모두 그 유풍을 따랐으니, 네 방에 두루 그 덕이 퍼졌고, 멀리 전해져 사라지지 않았으니 어찌 헛된 일이겠습니까. 그 밖의 사람들 중에서도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목도한 일을 글로 남긴 자들이 많았으니, 그 근원과 끝을 살펴보면, 그 흐름을 두루 이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효문황제께서는 하늘과 땅의 보배를 이어받고, 조종(祖宗)의 업을 높이셨는데, 그 위대한 공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붕어하시니, 천하의 백성들은 마치 하늘과 땅이 사라진 것처럼 느꼈습니다. 다행히 폐하께서 하늘의 밝은 덕을 이어받으시고, 보전하고 조화시키는 큰 그릇을 지니시어, 밝음을 널리 펴서 만물을 비추시고, 고요하고 공손한 덕으로 나라를 안정시키셨습니다. 하늘은 그 기운이 맑고, 땅은 그 고요함을 즐기며, 어긋남도 잊음도 없이 옛 제도를 따르셨으니, 참으로 다시 밝음을 잇고 거듭 성스러움을 이루신, 훌륭한 군주라 할 만합니다. 선황께서 천지의 질서를 개창하시고, 만물을 경륜하심은 광대무변하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위나라의 법전과 제도를 전하고, 아름답게 다듬어 글로 남기셨습니다. 형상이 있는 모든 이치를 궁구하시고, 만물의 변화에 따라 본성을 다 드러내셨으니, 마치 해와 달이 떠올라 그 빛이 어둠을 남김없이 비추는 것과 같았습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길 '선을 행하는 자는 그 길을 이어받기를 바라고, 노래를 잘 부르는 자는 그 소리를 이어받기를 바란다.' 하였으며, 《전(傳)》에 이르길 '문왕(文王)이 기초를 닦고, 주공(周公)이 그것을 완성하였다.'라 하였고, 또 '주공의 재능이 없으면 주공의 일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친왕(親王)들은 그에 걸맞다고 할 만하나, 선황의 높은 도모와 성스러운 통달함, 지금 왕의 아름다운 덕과 밝은 통찰을 헤아려 보건대, 지난 시대의 성왕들과 견주어도 그 덕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렀으니, 어찌 그 빛을 드러내지 않겠습니까.

하늘과 땅의 덕을 합한 것은 선황의 도야(陶鈞)요, 해와 달의 밝음과 같았던 것은 선황의 통찰이요, 사시(四時)의 변화를 두루 살핀 것은 선황의 큰 공이요, 신령과 귀신의 이치에 통달한 것은 선황의 깊은 지혜요, 도읍을 옮기고 나라를 고친 것은 선황의 통달함이요, 변화에 순응하여 조화를 이룬 것은 선황의 통찰이요, 중국과 오랑캐의 문자를 하나로 하려 한 것은 선황의 원대한 뜻이요, 사방 오랑캐를 제어한 것은 선황의 책략이요, 바다 밖까지 위엄이 미친 것은 선황의 위덕이요, 기양(岐陽)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선황의 의로움이요, 대교(岱郊)에서 음악을 연 것은 선황의 인자함이요, 북쪽 변경을 순행하신 것은 선황의 지혜요, 남쪽 형주(荊)를 토벌하신 것은 선황의 예의요, 천제에 제사를 올리고 공덕을 보고한 것은 선황의 엄숙함이요, 종묘를 친히 받들어 제사하신 것은 선황의 공경이요, 옷과 예식에 빠짐이 없었던 것은 선황의 덕이요, 만물을 열어 일을 이루신 것은 선황의 정성스러움이요, 인간의 문화를 살핀 것은 선황의 품격이요, 폐단을 고치고 새로움을 창조하신 것은 선황의 뜻이요, 효성과 자비가 두루 퍼진 것은 선황의 진심이었습니다. 선황의 큰 공적은 스무 가지에 이르며, 그 위에 겸손하고 존귀함으로써 더욱 빛나셨고, 일을 이루되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않으셨으니, 참으로 삼황오제에 견줄 만하셨습니다. 마땅히 그 공적을 죽간(竹簡)에 기록하고, 그 명성을 종과 쇠북의 울림처럼 천세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사관(史官)의 도리에 통달한 자들 중, 그 큰 자는 해와 달과 함께 빛나고, 그 작은 자는 사시(四時)와 더불어 무성하였습니다. 그 큰 자는 공자와 좌구명이요, 그 작은 자는 사마천과 반고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전해지고, 그 뜻은 후세에 밝게 드러났습니다. 금석(金石)은 사라질 수 있어도, 그들의 남긴 바람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기록된 문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속담에 '재상의 집안에서는 재상이 나고, 장군의 집안에서는 장군이 난다' 하였으니, 이는 단지 타고난 성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익히고 닦은 결과를 이른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천문을 맡은 관직인 태사(太史)의 직책은, 만일 그에 걸맞은 인재가 있다면, 그 시대를 빛나게 하는 일이라 여깁니다. 그러므로 《상서(尚書)》에 '희화(羲和)가 대대로 하늘과 땅의 일을 맡았다.'고 하였고, 장형이 지은 부(賦)에 '옛날의 사관으로부터 배운다.'고 한 것은, 대대로 전수됨을 말한 것입니다. 좋은 대장장이의 아들은 갖옷을 잘 재단하고, 좋은 활장이의 아들은 줄을 잘 엮는다 하니, 사물에는 정해진 성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익힘이 깊어지면 능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이 말을 드리는 까닭은, 요즈음 사관의 직책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아, 기록이 자주 누락되고 흩어지는데, 하늘과 인간의 일들은 잠시라도 기록에서 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옛날 사마담과 사마천 부자는 세상의 일을 논하여 공을 세웠고, 반표(班彪)와 반고 부자는 세상의 일을 고증하여 명성을 이루었으니, 이는 앞선 자들의 본보기가 되어 후세의 거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에도 사관이 그 직무를 마치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쇠퇴한 시대가 어진 이를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반고는 사관직을 그만두고 부(賦)를 지어 이름을 떨쳤으며, 채옹은 궁중 기록청을 떠나 《독지(讀志)》를 지었습니다. 가까운 시기의 진(晉)나라 말엽에 저작랑 왕은이 있었는데, 같은 저작랑이었던 우예에게 모함을 받아 관직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낮에는 땔나무를 베어 밥을 지었고, 밤에는 글을 읽으며 기록을 잇고 다듬어, 《진서(晉書)》를 엮어 한 시대의 일을 남겼습니다. 사마소가 상서(尚書)에게 명하여 붓과 종이만을 공급하게 하였을 뿐이었으니, 나라의 대기록이 사가(私家)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이 말기에 이르러 폐단이 심해진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관이 등용되지 못한 것은 시대의 불운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위(大魏)의 사관은 그 직책으로 말하자면 몸이 존귀하고, 녹봉으로 말하자면 친족이 함께 영화를 누리니, 참으로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내며, 곡식을 거두듯 평온하게 쉴 만한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나라의 기록을 널리 펴지 못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에 저작랑으로 있었던 어양(漁陽)의 부비(傅毗), 북평(北平)의 양니(陽尼), 하간(河間)의 형산(邢產), 광평(廣平)의 송변(宋弁), 창려(昌黎)의 한현종(韓顯宗) 등은 모두 글재주로 천거되어 같은 일을 맡아 기록을 정리하였으나, 일찍 죽어 끝내 그 업적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저작랑 정령규 또한 같은 때에 천거되어 함께 이 일을 맡았으나, 지금은 다른 관직에 있어 직책이 본래 담당한 바와 다릅니다. 오직 최광 한 사람만이 자리를 옮기지 않았으나, 시중(侍中)의 관직을 겸하였기에, 기록의 일에 빈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신이 듣건대, 역사의 기록이 일어나는 까닭은 큰 업적이 있기 때문이요, 《아(雅)》와 《송(頌)》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덕과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때로는 문(文)과 질(質)의 차이가 있고, 역사에도 간략함과 상세함이 있으나, 세대를 거듭하여도 그 본래의 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사마담이 아들 사마천에게 '당세에 아름다운 일이 있으는데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너의 죄다.'라고 경계하였으므로, 그 이름이 길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제갈량은 촉나라에 있으면서 사관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기에, 오랫동안 후세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깊은 뜻에서 살펴보면, 사마담의 지조는 참으로 현명하고 멀리 내다본 것이었습니다. 《서경(書經)》에 '모든 관직이 비지 않게 하라.'고 하였고, 《시경(詩經)》에 '직책을 맡은 자는 그 근심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지금은 그 일을 맡은 자가 아니지만, 예전에 잠시 그 직에 몸을 두었으므로, 초야에 물러난 몸이라 하여 스스로 멀리하지 않고 감히 이 말을 아룁니다. 옛말에 '일을 맡은 자는 반드시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일을 맡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진실로 능하지 못하나, 억지로라도 그 일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선황께서 신에게 '표(彪)'라는 이름을 내리신 것은, 멀리는 한나라의 사관 숙피(叔皮)에 견주고, 가까이는 진나라의 사관 사마표에 본받게 하신 뜻이었습니다. 이름의 뜻을 헤아리자면, 그 뜻을 그만둘 수 없어, 임금의 은혜와 덕택을 입은 몸으로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할 뿐입니다. 이제 도성 안에 조용한 한 곳을 얻어 나라의 사적(史籍)을 정리하여 지난 뜻을 마치고자 하오니, 관청에서 인력과 물자를 내려 이 일을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나라의 큰 기록을 빛내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허송세월하며 밥만 먹는 사람으로 남지는 않겠습니다. 가까이로는 한두 달이면 완성할 수 있고, 멀게 잡아도 3년이면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완성된 본편은 능각(麟閣)에 보관하고, 부본은 이름난 산에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사공을 지내던 북해왕 원상과 상서령 왕숙이 이표가 녹봉이 없는 것을 가엾게 여겨 여러모로 돕고 식량을 보내 주었다. 이에 그는 비서성(秘書省)에 머물며, 옛날 진나라 때 왕은의 사례처럼 흰옷을 입은 채로 사서(史書)를 편찬하였다.

선무제가 친히 정사를 돌보게 되었을 때, 최광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前) 어사중위 신하 이표는 오래전부터 훌륭한 뜻을 품고, 위나라의 전적을 새로 엮어 세상에 내놓고자 하였습니다. 신이 예전에 그의 권유로 함께 이 일에 종사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그의 뜻과 힘은 굳세고 강직하며, 기록을 고증하고 서술함에 게으름이 없었습니다. 이에 여러 관리들을 독려하고 장려하여, 주석과 편찬의 큰 틀을 거의 갖추었습니다. 비록 근래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일이 중단되고 흩어진 점이 많았으나, 가까운 시일에 다시 소집되어 본래의 일을 맡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오히려 더욱 정진하고, 역사 편찬의 재능은 날로 새로워졌습니다. 만약 옛 관직을 회복시켜 전념하게 하신다면, 반드시 《춘추(春秋)》의 밝은 뜻을 드러내고, 황실의 사적을 완전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선제(先帝)께 깊은 신임을 받았고, 오랫동안 높은 지위에 있었으니, 작은 허물이나 미세한 과오가 있더라도 마땅히 씻어 주어야 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에게 상백(常伯)의 직함을 다시 주어 저작(著作)을 맡겨 외직을 중단하고, 안에서 깊이 연구하게 하시어 세월을 쌓아 기록을 완성하게 하심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웅대한 명성과 위대한 자취가 빛나게 드러나고, 훌륭한 본보기가 되어 후세에 길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무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선무제가 조서를 내려 이표를 겸 통직산기상시(兼通直散騎常侍)로 삼아 분주(汾州)의 일을 맡겨 밖으로 나가게 하였으나, 이는 이표가 원한 바가 아니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길 굳게 사양하였으나, 관련 관청에서 강제로 출발을 재촉하였다. 그러다 이표는 병이 들자, 온몸 곳곳에 종기가 터지고 고름이 흘러,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경명 2년(501년) 가을, 이표는 낙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 조서로 비단 150필이 하사되었고, 사후에는 진원장군(鎮遠將軍) 및 분주자사(汾州刺史)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강헌자(剛憲子)'라 하였다.

당초 이표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매우 엄혹한 인물이라 불렀다. 그는 간악한 무리들을 다루기 어렵다고 여겨, 나무로 '목수(木手)'라는 몽둥이를 만들어 죄인의 옆구리를 치게 하였는데, 숨이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는 자가 있을 정도였다. 또 분주(汾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호인(胡人)들을 회유하여 그 우두머리들을 잡자, 그들의 얼굴에 채찍질을 가한 뒤 죽인 적도 있었다. 어사중위에서 면직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표가 다시 비서성(秘書省)에 있던 것은 1년 남짓이었으나, 역사 편찬의 큰 틀을 정리하고 서체를 구분한 것은 모두 그의 공이었다. 《춘추》와 세 편의 《전》을 주해하여 합해 10권으로 엮었고, 또한 그가 지은 시(詩)·송(頌)·부(賦)·뢰(誄)·장의(章議)·주문(奏文)·잡필 등은 100여 편에 달하며, 따로 문집이 전해졌다.

이표는 비록 송변과 관포지교를 맺었으나, 송변이 대중정이 되어 효문제와 은밀히 의논할 때에도, 이표를 신분이 낮은 지방 출신이라 여겨 특별히 우대하거나 높이 쓰려 하지 않았고, 이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송변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후 송변이 죽자, 이표는 끝없이 슬퍼하며 애통해 마지않았다. 그를 위해 지은 애도문에서는 슬픔과 비통함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 뒤 곽조(郭祚)가 이부상서가 되었을 때, 이표는 자신의 아들 이지를 위해 관직을 청하였으나, 곽조는 예전의 인사 등급에 따라 평범하게 임명하였다. 이표는 자신이 이미 상백(常伯)의 지위를 지냈고, 또 상서(尙書)를 겸한 적이 있으므로, 곽조가 명문귀족을 등용하듯 특별히 높여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크게 분노하고, 그 감정을 말과 얼굴에 드러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로 곽조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곽조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의화(義和, 송변의 자)와 그토록 깊은 벗이라면서, 어찌 나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임성왕 원징 또한 이표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원징이 옹주자사가 되었을 때, 이표가 아들 이지를 위해 그에게 청을 올리자, 원징은 기꺼이 이를 받아들여 조정에 표문을 올려 주어, 이지가 조행참군(曹行參軍)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훌륭한 일이라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