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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7 00:36:24

자산(춘추시대)


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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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成子)
국교
國僑
파일:정자산.jpg
(姬)
(國) / 공손(公孫)
(僑)
자산(子産) / 자미(子美)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580년 추정 ~ 기원전 522년 추정

1. 개요2. 생애3. 정치
3.1. 법치3.2. 일화
4. 외교
4.1. 일화
5. 그 외 일화6. 공자의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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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중·안영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명재상 중 한 명이다.

소국(小國)인 정(鄭)의 재상으로서, 대국(大國)인 진(晉)과 초(楚) 사이에 끼어있는 정(鄭)을 외교적으로 잘 이끌었고, 내정에서도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이다. 그리고 법치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공손교(公孫僑) 또는 공손성자(公孫成子)로도 불린다.

자는 자산(子産) 또는 자미(子美). 그래서 "자산" 혹은 "정자산"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시호는 성자(成子).

2. 생애

자산은 정(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 목공의 직계로, 정(鄭)의 ‘칠목’[1] 중 한 명인 자국의 아들이었다. 정 목공 사후에는 자사와 자한이 정나라를 이끌었는데, 자산의 아버지 자국은 자사의 측근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자국은 출정했고, 자산은 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경험했다.

자산은 10살 때부터, 군사회의에 참석해 탁월한 전황 파악을 했고, 책사처럼 계책을 선보이며, 아버지를 포함한 정나라 대신 및 장군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자산이 어릴 때부터 군사·천문·주역·법가의 학문을 익힌 덕분이었다.

기원전 544년 정(鄭) 간공 때, 귀족 가문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귀족 공손흑이 대부 양소를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했고, 이로 인해 내란이 벌어졌다. 자산은 귀족 자피의 후원에 힘입어, 이 내란을 수습했다. 이를 통해, 자산은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귀족 가문들은 자산을 재상[2]으로 내세우게 된다.

3. 정치

자산은 정치를 농사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농부의 심정으로 밤낮으로 매진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자산은 관리의 등용하고 배치할 때, 인재를 먼저 봤다. 다재다능한 인재뿐만 아니라, 한가지 재주만 가진 사람들도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그리고 자산은 이들을 능력에 맞게 배치해줬다. 그리고 인재들의 의견이 타당하면, 자산은 그 의견을 정책에 반영했다.

자산이 등용한 대표적인 인재로, 풍간자·자대숙(유길)·자우·비심을 꼽을 수 있다. 풍간자는 실익 판단과 정세 분석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자대숙은 외모와 말솜씨가 뛰어났다. 자우는 타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비심은 계책을 세우고 전략을 잘 짰다. 자산은 이들의 재주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발휘했다.

3.1. 법치

"정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를 통해, 백성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물과 불을 가지고 비유할 수 있는데,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은 겁을 먹는다. 따라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매우 적다. 반대로,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백성이 겁내지 않는다. 그래서 물 때문에 죽는 백성이 많은 것이다. 관대한 통치는 물과 같아서, 효과를 내기 어렵다. 그래서 엄격한 통치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자산曰
자산이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됐다. 2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물건값을 속이는 일이 없어졌다.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됐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을 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예를 갖췄다.
<사기>, 사마천
자산은 중국 최초로 정(鼎 = 솥)[3]에 성문법을 주조한 인물이다.[4] 그의 사상은,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관맹상제(寬猛相濟)'로 표현할 수 있다. 자산은 성문법을 통해서 인습적인 귀족 정치를 배격했다. 그리고 농지를 정리, 전부(田賦)를 설정해서 국가의 재정을 강화했다. '공경사서(公卿士庶)'의 개념으로, 귀족·선비·서민의 토지를 구분 짓고, 그 토지와 인구에 맞게 부세(賦稅)를 매겼다. 또한, 미신적인 행사를 배척했는데, 이런 자산의 행적은 공자(孔子) 사상의 토대가 됐다.

그런데 이런 자산의 법치는, 실시 초기에 백성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됐다.[5] 노래까지 만들어 자산을 저주했을 정도. 그런데 자산은 자신의 개혁을 그대로 밀고 갔다. 결과적으로, 3∼5년 만에 자산의 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됐고, 백성은 자산을 칭송하게 됐다.

그리고 '관맹상제'로 표현되는 자산의 법치는, 이런 엄격함 말고도 '민심과 정치적 관용' 또한 중시했다. '향교'와 관련된 일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향교는 정나라의 교육 기구다.[6] 그런데 점점 정치 활동의 장소로 변질돼서, 당파를 짓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까지 발생하게 된다. 자산의 아버지인 자국(子國)은 이 폭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됐는데, 그런데도 자산은 향교를 없애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은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든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하루 빨리 막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이 피해는 어찌해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낫다. 향교를 남겨두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자산曰

3.2. 일화

4. 외교

진(晉)과 초(楚)라는 대국 사이에서, 자산은 균형 외교를 구사했다. '종진화초(從晉和楚)'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진(晉)을 따르면서도 초(楚)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4.1. 일화

5. 그 외 일화

6. 공자의 칭찬

"일을 행함에 있어 공손하고, 윗사람을 존경으로 섬기며, 백성을 은혜로 보살피고,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선 의로써 행하는, 군자의 네 가지 도(道)를 고루 갖춘 인물"
공자曰
"고인의 유풍을 이어, 백성을 사랑한 사람"
공자曰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하면 백성들이 게을러져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면 상처를 내기 쉬워 다시 관대함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여 서로 보완하도록 해야만 정책이 통하고 인화를 이룰 수 있다."
공자曰, 자산의 관맹상제(寬猛相濟)에 대해.

[1] 자국, 자한, 자량, 자사, 자유, 자풍, 자인[2] 정경(正卿)이라고도 한다.[3] '형정(刑鼎)'이라고도 한다.[4] 즉 자산은 성문법으로 통치를 한 중국 최초의 인물이다.[5] 평소에 자산을 흠모하며 자산과 친하게 지내던 진(晉)나라의 '숙향'도 자산이 성문법을 주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산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6] 향교는 하층 대부(大夫)나 사(士) 등, 통치 계급에 속하는 지방 귀족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7] 공손흑(公孫黑). 사씨 집안의 우두머리인 조카 사대(駟帶)를 능가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었다.[8] 공손초(公孫楚)[9] 정나라 제후를 말한다.[10] 귀족 가문 양쪽 모두를 약화시킨 다음, 가장 약한 상대부터 제거해 나가는 전략이다. 자산의 뛰어난 정치 감각이 드러난다.[11] '인심여면(人心如面)'은 '人心之不同, 如其面焉'의 줄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