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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成子) 국교 國僑 | ||
성 | 희(姬) | |
씨 | 국(國) / 공손(公孫) | |
휘 | 교(僑) | |
자 | 자산(子産) / 자미(子美)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580년 추정 ~ 기원전 522년 추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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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중·안영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대표적인 명재상 중 한 명이다.소국(小國)인 정(鄭)의 재상으로서, 대국(大國)인 진(晉)과 초(楚) 사이에 끼어있는 정(鄭)을 외교적으로 잘 이끌었고, 내정에서도 큰 업적을 남긴 위인이다. 그리고 법치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공손교(公孫僑) 또는 공손성자(公孫成子)로도 불린다.
자는 자산(子産) 또는 자미(子美). 그래서 "자산" 혹은 "정자산"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시호는 성자(成子).
2. 생애
자산은 정(鄭)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 목공의 직계로, 정(鄭)의 ‘칠목’[1] 중 한 명인 자국의 아들이었다. 정 목공 사후에는 자사와 자한이 정나라를 이끌었는데, 자산의 아버지 자국은 자사의 측근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자국은 출정했고, 자산은 이 무렵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경험했다.자산은 10살 때부터, 군사회의에 참석해 탁월한 전황 파악을 했고, 책사처럼 계책을 선보이며, 아버지를 포함한 정나라 대신 및 장군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자산이 어릴 때부터 군사·천문·주역·법가의 학문을 익힌 덕분이었다.
기원전 544년 정(鄭) 간공 때, 귀족 가문의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귀족 공손흑이 대부 양소를 사적인 원한으로 살해했고, 이로 인해 내란이 벌어졌다. 자산은 귀족 자피의 후원에 힘입어, 이 내란을 수습했다. 이를 통해, 자산은 정치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귀족 가문들은 자산을 재상[2]으로 내세우게 된다.
3. 정치
자산은 정치를 농사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농부의 심정으로 밤낮으로 매진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자산은 관리의 등용하고 배치할 때, 인재를 먼저 봤다. 다재다능한 인재뿐만 아니라, 한가지 재주만 가진 사람들도 파격적으로 등용했다. 그리고 자산은 이들을 능력에 맞게 배치해줬다. 그리고 인재들의 의견이 타당하면, 자산은 그 의견을 정책에 반영했다.
자산이 등용한 대표적인 인재로, 풍간자·자대숙(유길)·자우·비심을 꼽을 수 있다. 풍간자는 실익 판단과 정세 분석에 탁월한 재주를 보였다. 자대숙은 외모와 말솜씨가 뛰어났다. 자우는 타국의 실상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비심은 계책을 세우고 전략을 잘 짰다. 자산은 이들의 재주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발휘했다.
3.1. 법치
"정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하나는 너그러움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함이다. 덕망이 높고 큰 사람만이 관대한 정치를 통해, 백성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물과 불을 가지고 비유할 수 있는데, 불이 활활 타오르면 백성은 겁을 먹는다. 따라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매우 적다. 반대로, 물은 성질이 부드럽기 때문에, 백성이 겁내지 않는다. 그래서 물 때문에 죽는 백성이 많은 것이다. 관대한 통치는 물과 같아서, 효과를 내기 어렵다. 그래서 엄격한 통치를 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이다."
자산曰
자산曰
자산이 재상이 된 지 1년 만에, 더벅머리 아이들이 버릇없이 까부는 일이 없어졌고, 노인들이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밭갈이 등 중노동에 동원되지 않게 됐다. 2년이 지나자, 시장에서 물건값을 속이는 일이 없어졌다. 3년이 지나자,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됐고,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었다. 4년이 지나자, 밭을 갈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에 돌아와도 아무 일이 없었다. 5년이 지나자, 군대를 동원할 일이 없어졌고, 상복 입는 기간을 정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예를 갖췄다.
<사기>, 사마천
자산은 중국 최초로 정(鼎 = 솥)[3]에 성문법을 주조한 인물이다.[4] 그의 사상은,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관맹상제(寬猛相濟)'로 표현할 수 있다. 자산은 성문법을 통해서 인습적인 귀족 정치를 배격했다. 그리고 농지를 정리, 전부(田賦)를 설정해서 국가의 재정을 강화했다. '공경사서(公卿士庶)'의 개념으로, 귀족·선비·서민의 토지를 구분 짓고, 그 토지와 인구에 맞게 부세(賦稅)를 매겼다. 또한, 미신적인 행사를 배척했는데, 이런 자산의 행적은 공자(孔子) 사상의 토대가 됐다.<사기>, 사마천
그런데 이런 자산의 법치는, 실시 초기에 백성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됐다.[5] 노래까지 만들어 자산을 저주했을 정도. 그런데 자산은 자신의 개혁을 그대로 밀고 갔다. 결과적으로, 3∼5년 만에 자산의 법치는 큰 효과를 보게 됐고, 백성은 자산을 칭송하게 됐다.
그리고 '관맹상제'로 표현되는 자산의 법치는, 이런 엄격함 말고도 '민심과 정치적 관용' 또한 중시했다. '향교'와 관련된 일화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향교는 정나라의 교육 기구다.[6] 그런데 점점 정치 활동의 장소로 변질돼서, 당파를 짓고 폭동을 일으키는 일까지 발생하게 된다. 자산의 아버지인 자국(子國)은 이 폭동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됐는데, 그런데도 자산은 향교를 없애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충성스럽게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백성의 원성은 줄어들 것이다. 위엄과 사나움만 가지고는 원망을 막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든 비난을 받으면 그것을 하루 빨리 막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는 마치 넘치는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다. 홍수는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이 피해는 어찌해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제방을 터서 물길을 다른 곳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 낫다. 향교를 남겨두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논의를 듣는 것 자체가 좋은 약으로 병을 낫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자산曰
자산曰
3.2. 일화
- 사(駟)씨 집안의 자석(子晳)[7]은 양(良)씨 집안의 우두머리인 백유(伯有)를 죽인 적이 있었다. 자석은 처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사씨 세력의 위세가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자산은 죄를 추궁하지 않고 잠시 지켜봤다. 그런데 서오범(徐吾犯)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었다. 유(游)씨 집안의 자남(子南)[8]은 그녀를 아내로 삼고자 했는데, 사촌 형 자석이 이를 모른 척하고 서오범의 여동생에게 흑심을 품었다. 이를 알게 된 서오범이 이 사실을 자산에게 고발했고, 자산은 이는 국가의 정치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서오범의 여동생은 자남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자석은 크게 화를 내며, 갑옷을 입은 뒤 자남을 찾아가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고자 했다. 자남은 자석의 이런 계획을 알게 됐고, 자석을 창으로 찔러 상처를 입혔다. 돌아온 자석은 이를 깨물며, "내가 좋은 뜻으로 찾아갔는데 오히려 그가 내게 상처를 입혔다"며 엉뚱한 소리를 늘어놨다. 대부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상의했다. 자산은 자석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이가 젊은 자남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면서, 자남이 다섯 가지 법규를 위반했다고 말했다. 국군[9]이 엄연히 조정에 계시는데도 무력을 사용한 것은, 그 위엄을 무시하는 것이다. 법을 위반한 것은 정치적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다. 하대부인 자남이 상대부인 자석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은, 귀인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젊은 사람이 공경하지 않는 것은 장자를 받들지 않는 것이다. 무기를 사촌 형에게 사용한 것은 친속을 봉양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고 나서 유씨 집안의 우두머리며 자남의 조카인 태숙(太叔)의 양해를 구해 자남을 오(吳)나라로 내쫓았다. 그 후에 자석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자산은 자석의 죄상을 밝히며 자석을 자살하게 했다. 그리고 죄상을 적은 나무를 자석의 시체 위에 놓고, 거리를 돌면서 조리를 돌리게 했다.[10]
- 정(鄭)나라의 집정관인 한호(罕虎)가 윤하(尹何)를 자기 봉지의 장관(長官)으로 삼으려 했다. 자산은 윤하가 너무 젊기 때문에, 그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산은 한호에게 "옷을 짜지 못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비단 한 필을 재단하면, 그 비단을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봉지에 사는 백성의 이익은 비단보다 훨씬 중요한 것인데, 만약 아무 경험 없는 사람이 관리를 하게 된다면, 큰 손해를 가져올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한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우리 집안의 일을 대부가 관리해주시지요"라고 부탁했다. 자산은 "사람의 마음은, 마치 사람의 얼굴처럼 모두 다른 것인데(人心之不同, 如其面焉), 제가 어찌 당신을 감히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11]
4. 외교
진(晉)과 초(楚)라는 대국 사이에서, 자산은 균형 외교를 구사했다. '종진화초(從晉和楚)'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진(晉)을 따르면서도 초(楚)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다.4.1. 일화
- 기원전 542년. 자산은 간공(簡公)을 수행하며, 진(晉)을 예방(禮訪)했다. 진의 국군은 일부로 노(魯) 양공(襄公)의 장례를 이유로, 접견을 질질 끌었다. 이에, 자산은 계책 하나를 생각해냈다. 자산은 수행원들에게 빈관의 담을 다 허물게 했다. 그리고 수레와 마차를 모두 뜰 안으로 몰고 오게 했다. 그러자 타국 손님의 접대를 책임지는 예빈관(禮賓館) 사문백이 항의했다. "최근에 도적들이 날뛰고 있어서, 빈객들이 피해를 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담을 높게 쌓았는데, 귀하께서는 그 담을 왜 허물었습니까?" 자산은 동요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귀국의 초청을 받고, 후한 예물을 갖추어 귀국의 국군을 뵈러 왔는데, 만날 시간이 없다고 하고, 만날 날짜도 확정되지 않았으니, 우리가 갖고 온 예물들이 밖에서 비바람을 맞아 모두 썩고 있습니다. 진(晉) 문공 때는 각국의 빈객들을 잘 대접하고, 빈관도 호화롭고 편안해서, 빈객들은 감동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군은 호화롭고 장엄한 이궁에 살면서, 빈관은 누추한 골목의 연극장 같고, 그 좁음은 수레와 마차도 다닐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도적을 예방한다고 했지만, 경비 하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예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담을 허문 것입니다. 귀국의 국군이 노의 국군을 위해 복상하시겠다니, 우리 국군도 그렇게 해야겠지요. 귀국이 예물을 받아가면, 우리는 바로 담을 고쳐놓고 귀국하겠소. 그러니 귀하께서 우리 뜻을 전해주시오." 보고를 받은 진나라의 재상은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문백을 통해 자산에게 사과했다. 진의 국군도 서둘러 간공을 만나, 융숭하게 접대한 뒤 환송까지 했다. 그 후, 진은 빈관을 다시 지었다.
- 기원전 529년. 진(晉)은 평구(平丘)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 자산은 정나라를 대표해서 회맹에 참석했다. 각국 대표들은 순서대로 맹서했고, 모두 의견이 없었지만, 자산은 회비 분담을 줄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예로부터, 납부 조항은 작위 등급에 따라 규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나라는 등급이 백남(伯男)에 해당하는데도, 공후 등급의 의무를 부담해왔으니, 그 부담이 너무 큽니다. 정(鄭) 같은 소국에서는 도저히 부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헌금액을 줄여주시기 바랍니다. 회맹을 거행하는 목적은 소국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 있는데, 헌금액의 부담이 너무 크면 소국들은 자멸하고 말 것이고, 이는 회맹의 큰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닙니까? 소국의 존망은 오로지 오늘에 달려 있으니, 신중하게 고려해주십시오." 이 제안을 진(晉)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하지만, 자산도 양보하지 않았다. 정오에 시작된 회맹은 저녁까지 계속됐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 제안을 논의하는 데,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고 말았다. 결국, 맹주 진(晉)의 체면은 갈수록 구겨졌고, 전체 국면을 고려하여, 진의 국군은 자산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기원전 526년. 진(晉)의 대부 한기가 정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진귀한 옥환 한 쌍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던 한기는, 정나라 상인이 갖고 있는 나머지 하나를 갖고 싶다고 청했다. 자산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정(鄭)의 대부 유길이 “공께서 그깟 옥환 하나를 아까워하여 저들의 화를 돋운다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저들에게 옥환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자산은 국왕인 간공을 비롯한 모든 대신이 있는 자리에서 진(晉) 한기에게 말했다. “나라를 이끌면서, 대국을 섬기고, 대국이 정(鄭)을 작게 보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하고, 정(鄭)의 힘과 위치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게 더 걱정입니다. 지금 저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준다면, 장차 저들이 무엇을 요구할 때마다,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소국은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보호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진나라 사신께서 이번에 옥환을 얻어 가신다면, 대신 동맹을 잃으시게 될 겁니다. 억지로 공물을 바치라고 하시면, 정(鄭)은 망하더라도 그 요구를 거부할 것입니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당당한 자산의 말에, 진(晉) 한기는 사과하고 말았다.
5. 그 외 일화
- 훗날 궁정에서 역모가 일어나 자산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누군가 나서서, 자산은 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산 없는 정나라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면서 말렸다.
- <좌전> 양공 8년 조 기록. 자산의 아버지 자국이 다른 칠목 중 한 명인 자이(子耳)와 함께, 채(蔡)를 침범해 채나라의 사마 공자섭(公子燮)을 포로로 잡아와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자산은 오히려 근심을 표하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소국이 문치(文治)를 하지 않고, 무력만 숭상하면 안 됩니다. 초(楚)가 보복하기 위해 쳐들어오면, 소국이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초(楚)에 복종하면, 진(晉)의 군대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진과 초 두 호랑이가 협공해올 것이니, 지금부터 최소한 4~5년간은 편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자국은 아들에게 화만 낼 뿐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은 자산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그해 겨울 초(楚)가 쳐들어왔고, 진(晉) 또한 초를 견제할 목적으로 쳐들어왔다. 결국, 정나라는 몇 년간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6. 공자의 칭찬
"일을 행함에 있어 공손하고, 윗사람을 존경으로 섬기며, 백성을 은혜로 보살피고, 사람을 부리는 데 있어선 의로써 행하는, 군자의 네 가지 도(道)를 고루 갖춘 인물"
공자曰
공자曰
"고인의 유풍을 이어, 백성을 사랑한 사람"
공자曰
공자曰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관대하면 백성들이 게을러져 통치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격한 법으로 다스리면 상처를 내기 쉬워 다시 관대함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강경과 온건을 함께 구사하여 서로 보완하도록 해야만 정책이 통하고 인화를 이룰 수 있다."
공자曰, 자산의 관맹상제(寬猛相濟)에 대해.
공자曰, 자산의 관맹상제(寬猛相濟)에 대해.
[1] 자국, 자한, 자량, 자사, 자유, 자풍, 자인[2] 정경(正卿)이라고도 한다.[3] '형정(刑鼎)'이라고도 한다.[4] 즉 자산은 성문법으로 통치를 한 중국 최초의 인물이다.[5] 평소에 자산을 흠모하며 자산과 친하게 지내던 진(晉)나라의 '숙향'도 자산이 성문법을 주조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산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6] 향교는 하층 대부(大夫)나 사(士) 등, 통치 계급에 속하는 지방 귀족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7] 공손흑(公孫黑). 사씨 집안의 우두머리인 조카 사대(駟帶)를 능가하는 권세를 지니고 있었다.[8] 공손초(公孫楚)[9] 정나라 제후를 말한다.[10] 귀족 가문 양쪽 모두를 약화시킨 다음, 가장 약한 상대부터 제거해 나가는 전략이다. 자산의 뛰어난 정치 감각이 드러난다.[11] '인심여면(人心如面)'은 '人心之不同, 如其面焉'의 줄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