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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13 16:43:59

선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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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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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선왕(宣王)
(姬)
정(靜)
생몰 기간 기원전 850년경[1] ~ 기원전 782년
재위 기간 기원전 828년 ~ 기원전 782년
비(妃) 강씨(姜氏)[2]

1. 개요2. 즉위 전3. 즉위 후 통치4. 선왕의 중흥을 위한 노력
4.1. 선왕의 정벌 일지
4.1.1. 험윤 정벌4.1.2. 서융과 북적 토벌4.1.3. 회이를 치다.4.1.4. 초나라 정벌
5. 왕실 쇠락
5.1. 노나라 내정 간섭5.2. 무고한 대신을 죽이다5.3. 화려한 승리의 이면5.4. 간언을 듣지 않다.
6. 최후7. 치적 정리

1. 개요

주나라의 제11대 . 주 여왕의 아들이자 유왕의 아버지이자 정 환공의 형. 이 당시에 그의 노력으로 주나라는 중흥했으나, 하필 다음 왕이 암군으로 악명이 높은 주 유왕이다. 참고로 이때부터 사건의 연도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2. 즉위 전

그는 주 여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여왕이 쫓겨났을 때 그가 어렸던지라 주 정공(周定公)과 소 목공(召穆公)이 나라를 다스렸다. 이 때를 공화 시기라고 한다. 달리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공백 화(共伯和)가 주 여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도 있다. 어느게 정답이든 간에 아버지 여왕이 기원전 828년에 죽자 주 정공과 소 목공은 장성한 그를 불러들여 왕으로 모셨다.

십팔사략에서는 소 목공의 집으로 도망가는데 성공하지만 이미 백성들이 선왕 역시 악한 왕의 자식인 이상 무조건 죽이겠다고 을러대는 바람에 고민 끝에 소 목공이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 시절 선왕으로 분장시켜 백성들에게 내보냈고 불쌍한 소 목공의 아들은 그 자리에서 강경파 백성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해 이를 본 다른 백성들이 너무 심했다고 말릴 정도였다 한다.

3. 즉위 후 통치

선왕은 즉위한 후, 소 목공(召穆公)[3], 주 정공(周定公), 윤길보(尹吉甫) 등의 명신들을 기용하여 조정을 정비하고 쇠퇴한 주나라 왕실을 일시적으로 부흥시켰다. 또한 주변 적대 부족과 국가들을 정벌하여 역사가들이 이를 "선왕 중흥(宣王中興)"이라 칭했다.

선왕의 아버지인 주여왕(周厲王) 시대에 국가 소유의 토지가 점차 귀족의 사유지로 전환되자, 여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괵공장부(虢公長父)와 영이공(榮夷公)을 등용해 산림과 늪지의 산물을 왕실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 정책은 서민의 이익을 침해했고, 국인들의 강한 반발을 샀으나 여왕은 간언을 듣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841년, 분노한 국인들이 궁성을 공격했고, 여왕은 황하를 건너 체(彘)[4]로 도망쳤다. 여왕의 망명 후, 공화시대가 열렸으며 이 당시 통치자인 주공과 소공은 나중에 여왕의 태자 정(靜)을 옹립해 선왕으로 즉위시켰다.

선왕은 아버지 여왕의 실정을 교훈 삼아 주 정공과 소 목공의 보좌를 받아 문왕(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시대의 정책을 회복했다. 언로를 넓히고 관리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했다. "세금을 착취하거나 백성을 학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관리들의 기강을 강화하고 음주 소란을 금지시켜 제후들이 다시 주나라에 조공하게 만들었다.

그는 적전(籍田)을 폐지해 토지 사유화를 인정해 농민의 노동 의욕을 높였다. 이는 농업 생산 회복과 군사 원정의 기반이 되었으나, 보수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또한 천묘(千畝) 전투 패배 후 병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중산보(仲山甫) 등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태원(太原)에서 호구 조사를 시행하여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선왕의 중흥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선왕 말년에 이르러 국세는 다시 쇠퇴했다. 선왕 중흥은 주로 군사적 성과에 의존했으며, 정치 개혁은 귀족의 반발로 한계가 있었다. 말년에는 군주 본인이 궁중에 머물며 향락에 빠졌고, 노나라에 무력 개입해 동성 제후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선왕 중흥은 '군사적 성공에 의존한 제한된 개혁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평가되며, 토지 사유화 인정과 호구 조사는 춘추전국시대 '변법(變法)'의 선구적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4. 선왕의 중흥을 위한 노력

4.1. 선왕의 정벌 일지

4.1.1. 험윤 정벌

선왕 6년(기원전 823년),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5]이 설쳤는데, 선왕은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6]에 성을 쌓아 험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선왕 13년(기원전 816년), 선왕은 괵계자백(虢季子白)을 보내 험윤을 치게했다. 낙수 북안에 험윤을 이겨 500명을 죽이고, 50여명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괵계자백은 말, 활과 화살, 부월을 받아 이민족 토벌권을 받았다.

4.1.2. 서융과 북적 토벌

선왕 5년(기원전 824년), 서융[7]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선왕은 진중(秦仲)을 대부로 임명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선왕 7년(기원전 822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선왕은 진 장공(秦莊公)의 형제 5명에게 병사 7000명을 주어 서융을 치게 했고, 진 장공은 기대에 부응하여 서융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주 선왕은 그 공로를 기려 진 장공을 대부로 봉하고, 봉지를 넓혀 주었다. 참고로 이때 진(晉)나라도 참여했었다.

선왕 27년(기원전 802년), 천무 땅에서 융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39년(기원전 790년), 분수와 습수 부근에서 북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4.1.3. 회이를 치다.

회이가 주 여왕 때 다시 세력을 회복해 여왕이 그들을 정벌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왕 6년(기원전 823년), 선왕은 윤길보에게 명해 회이를 정벌하게 했다. 그리하여 재물과 양식, 노비, 등을 얻었는데, 다시 회이들이 일어나자 선왕은 소 목공에게 정벌을 명해 포로와 재물, 가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회이는 주나라에게 철저하게 굴복하였다.

서(徐)나라는 동이족 계열의 강국으로 그들 또한 주나라와 대적했으나 사마 정백휴보의 공격으로 그들 또한 굴복하였다.

4.1.4. 초나라 정벌

선왕은 초나라를 쳤다. 초나라는 세간에서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묘족 계열의 이민족이다. 그런데, 그들이 당당히 왕을 칭하자 선왕은 그들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하여 주나라의 강역이 더 넓어졌다.

5. 왕실 쇠락

그러나 이렇게 중흥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주선왕이지만 그런 그도 왕실 쇠락의 주범 중 하나이기도 했다.

5.1. 노나라 내정 간섭

선왕 12년(기원전 817년) 봄 노무공이 장남 희괄 대신 작은 아들 희획(姬劃)을 데리고 주나라에 입조하였다. 선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노 무공의 아들 희획을 노나라의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중산보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렸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노 무공이 선왕을 알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곧 죽자 희획이 노후가 되니 그가 바로 노 의공이다.

선왕 22년(기원전 807년), 희괄의 아들 백어가 노나라의 국인들과 함께 노 의공을 죽였다.

이에 분노한 선왕은 주선왕 33년(기원전 796년) 노나라를 쳐서 백어를 죽이고 중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 의공의 아우를 노후로 올리니 그가 바로 노효공이다. 이 일로 인해 주 선왕은 제후들의 마음을 잃게 되었다. 사실 내정 간섭해서 좋아할 국가가 세상에 어딨을까?

5.2. 무고한 대신을 죽이다

선왕 45년(기원전 785년), 무고한 대부 두백을 죽였다. 그 이유는 예언에 나온 요망한 여자[8]를 찾으라 했으나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해 죽였다. 결국 두백의 아들 습숙(隰叔)은 진(晉)나라로 달아나 범(范)씨의 조상이 되었다.

중국 전설에 따르면, 두백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날 그의 원혼이 나타나서 선왕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묵자에도 이 전설이 언급된다.

5.3. 화려한 승리의 이면

옛말에 승패는 병가상사라 했다. 선왕은 멋지게 승리도 거두었지만 패한 일도 많았다. 그 목록을 보도록 하자.

선왕 32년(기원전 797년), 태원에서 융족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

선왕 37년(기원전 792년), 조융 및 분융과 싸워서 졌다.

선왕 40년(기원전 789년), 신융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주군은 천무 전투에서 강융에게 패했다.

5.4. 간언을 듣지 않다.

선왕은 나이가 들어 교만해졌는지, 젊은 시절 간언을 듣던 귀가 사라져 사유지를 넓히지 말라고 괵 문공이 간했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6. 최후

선왕은 재위 48년 째인 기원전 782년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왕은 바로 주나라의 최대의 암군이자 서주 멸망의 원흉인 유왕이다.

7. 치적 정리

선왕의 치적이 본문에서 주요 사건 순으로 끊어 보기 힘드니 연도 순으로 다시금 정리하겠다.(단 같은 년도에 일어난 일은 시기 순으로 정리하기 힘드니 올라간 순서대로 하겠음.)

선왕 5년(기원전 824년), 서융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선왕은 진중(秦仲)을 대부로 임명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선왕 6년(기원전 823년),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9]이 설쳤는데, 주 선왕은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10]에 성을 쌓아 험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같은 해 선왕은 윤길보에게 명해 회이를 정벌하게 했다. 그리하여 재물과 양식, 노비, 등을 얻었는데, 다시 회이들이 일어나자 주 선왕은 소 목공에게 정벌을 명해 포로와 재물, 가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회이는 주나라에게 철저하게 굴복하였다.

선왕 7년(기원전 822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주 선왕은 진 장공(秦莊公)의 형제 5명에게 병사 7000명을 주어 서융을 치게 했다. 진 장공은 서융을 발랐다. 그리고 선왕은 그 공로를 기려 진 장공을 대부로 봉하고, 봉지를 넓혀 주었다.

선왕 12년(기원전 817년) 봄, 노 무공이 장남 희괄 대신 작은 아들 희획(姬劃)을 데리고 주나라에 입조하였다. 선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노 무공의 아들 희획을 노나라의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중산보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렸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노 무공이 선왕을 알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곧 죽자 희획이 노후가 되니 그가 바로 노 의공이다.

선왕 13년(기원전 816년), 선왕은 괵계자백(虢季子白)을 보내 험윤을 치게 했다. 낙수 북안에서 험윤을 이겨 500명을 죽이고, 50여명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괵계자백에게 말, 활과 화살, 부월을 내려 이민족 토벌권을 주었다.

선왕 24년(기원전 805년), 진 목후가 조융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27년(기원전 802년), 천무 땅에서 융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32년(기원전 797년), 태원에서 융족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

선왕 33년(기원전 796년), 노나라를 쳐서 백어를 죽이고 중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 의공의 아우를 노후로 봉했다.

선왕 37년(기원전 792년), 조융 및 분융과 싸워서 졌다.

선왕 40년(기원전 789년), 신융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주군은 천무 전투에서 강융에게 패했다.

선왕 45년(기원전 785년), 대부 두백을 죽였다.

선왕 48년(기원전 782년), 선왕 붕어하다.

[1] 기원전 841년 기준으로 나이가 어렸다.[2] 제무공의 딸[3] 소공(召公) 석(奭)의 16대손으로 소공 가문은 주나라 개국 공신인 소공 석 이후로 대대로 왕실을 보좌한 명문 가문이었다. 소목공은 국인폭동(國人暴動, 기원전 841년) 이후 혼란기에 왕실을 수호한 인물로 주선왕을 자신의 집에 숨겨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기도 했다. 여왕이 쫒겨난 공화시대(기원전 841년~828년)의 주요 통치자 중 한 사람으로 주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으며, 선왕이 즉위한 후, 언로를 열고 덕치(德治)를 강조하는 등 현명한 정치를 주도했다. 그는 북방 이민족인 융족(戎族)의 침입을 막고, 남방의 초(楚) 등 제후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4] 오늘날의 산서성 린펀시 훠저우시(霍州市)[5] 흉노의 전신이라고 알려졌다.[6] 북방이라는 뜻이 있다.[7] 현대 티베트인의 조상 민족이다.[8] 그 여자의 정체는 바로 포사다.[9] 흉노의 전신이라고 알려졌다.[10] 북방이라는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