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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디아 동부 4대 군주 마우레타니아 군주 ⵢⵓⴱⴰ ⵡⵉⵙⵙ ⵙⵉⵏ | 유바 2세 | ||
제호 | 한국어 | 유바 2세 |
베르베르어 | ⵢⵓⴱⴰ ⵡⵉⵙⵙ ⵙⵉⵏ | |
라틴어 | Juba II | |
가족 | 히엠프살 2세(조부) 유바 1세(아버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첫째 아내) 글라피라(둘째 아내) 프톨레마이오스(아들) | |
생몰 년도 | 기원전 48년 ~ 서기 23년 | |
재위 기간 | 누미디아의 왕 | |
기원전 30년~기원전 25년 | ||
마우레타니아의 왕 | ||
기원전 25년~서기 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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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미디아 동부 4대 군주이자 마우레타니아 왕국 군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마우레타니아 왕으로 선임된 뒤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고 그리스, 로마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문화 발전을 도모했다.2. 생애
누미디아 동부 제3대 군주 유바 1세의 아들이다. 유바 1세는 카이사르의 내전 시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든든한 동맹자로서 바그라다스 전투에서 대표적인 카이사르파 인사였던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를 패사시켰고,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상륙할 때도 격렬하게 맞섰다. 그러나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 주민들로부터 버림받자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함께 자결했다. 아버지가 자결한 후 어린 유바 2세는 카이사르에게 생포되어 로마로 끌려가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전리품' 취급받았다.카이사르는 이 어린 왕자를 자신의 가정에서 양육하기로 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집안에서 자라면서 로마 시민권을 받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빠르게 숙지했다.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카이사르의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았고, 나중에는 소 옥타비아의 집에서 자랐다. 무척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옥타비아는 친자식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대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소 클라우디아 마르켈라, 대 안토니아, 소 안토니아 외에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의 자식들도 입양해서 함께 키웠다. 그녀는 유바 왕자 역시 한 집에서 살면서 동등하게 대접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역사와 언어학에 깊은 관심을 품고 이와 관련된 저서를 집필했다. 20대 초반이 되었을 때 이미 이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로서 명성을 공고히 했고, 그의 작품은 로마 문학 사회에서 회람되었다. 이후 분야를 좀더 넓혀서 자연사, 고고학, 의학, 식물학, 지리학을 포함한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다. 이 책들은 갈레누스, 플루타르코스, 대 플리니우스 등 여러 고대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기원전 5세기의 카르타고 항해가 한노의 연대기를 집필하기도 했으며, 로마 예술을 비평한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일생 동안 여러 편의 희곡과 시를 저술했다. 이렇듯 학자로서 수많은 책을 집필했기 때문에, 동시대인들에 의해 "rex literatissimus"(학자의 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한편, 그는 옥타비아누스 아래에서 여러 전투에 복무했으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때 참전하여 공적을 세우기도 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누미디아의 왕으로 세웠고, 기원전 26년 히스파니아 전역 때 누미디아 기병대의 지휘관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원전 25년, 누미디아는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의 일부로서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누나 옥타비아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를 그와 결혼시켰다. 이후 보쿠스 2세 사망 후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고 있던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군주로 선임되었다. 레스보스 출신의 로마 궁정 시인인 미틸레네의 크리네고라스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비문을 쓰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물이 불어나는 나일강과 검은 에티오피아인이 갈라지는 경계선이 닿는 대지의 거대한 땅, 당신은 결혼으로 주권을 공유하게 되었고 이집트와 리비아의 한 민족을 만들었습니다. 홀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대대로 이어지면서 두 땅에 걸쳐 영원히 굳건히 자리잡기를 바랍니다.
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마우레타니아에 도착했을 때, 이 나라는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마우레타니아는 보쿠스 2세와 보구드 사이의 내전으로 분열되어 부족들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는 마우레타니아의 수도 이올에 도착한 뒤 황폐화된 도시를 재건하고 아우구스투스를 기려 카이사레아로 개명했다. 이후 로마의 문화를 본떠서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 값비싼 공공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그리스-이집트 풍의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또한 농업 진흥 정책을 실시했으며, 무역을 장려했다. 마우레타니아 주민들은 곧 농사에 익숙해졌고, 목재, 곡물, 티리안 보라색 염료 같은 고급 상품들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었다. 이 시기 카이사레아 항구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모방한 등대가 건설되었다.
한편, 마우레타니아는 로마의 다른 속국에 비해 상당히 컸지만, 수도 바깥의 인구는 희소했다. 이때문에 외부의 침략을 막기가 매우 힘들었다. 특히 아틀라스 산맥과 사하라의 북쪽 가장자리 주변에 살던 유목민족 가이툴리아인이 지속적으로 침입했다. 그는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한편 인구를 주변 일대로 분산시켜서 정착시키고자 노력했다. 가이툴리아인들은 그의 이러한 정책에 반발하여 지속적으로 저항했고, 서기 6년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기 힘으로 이들을 진압하기 어려워서 로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반발에 굴하지 않고 변경 이주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인구가 희소했던 변경 지역의 개발이 잘 이루어졌다.
그는 기원전 2년부터 서기 2년까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지중해 동부를 여행하면서 가이우스의 주요 조언자로서 활약했다. 서기 4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하자, 아라비아에 관한 책을 헌정하기도 했다. 가이우스와 함께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후, 그는 카파도키아 왕국의 공주 글라피라와 만나 금세 사랑에 빠졌고, 얼마 안가 그녀와 결혼했다. 서기 5년에 사망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가 살아있을 때 결혼했는지, 아니면 셀레네가 사망한 후에 결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글라피라는 결혼 1년 후 그와 이혼하고 헤로데 왕조의 군주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와 결혼했다.
그는 지중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탐험했으며,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 무역 식민지를 설립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리와 그곳 사람데 대한 여러 작품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가 파견한 원정대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지브롤터)을 통과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항해했다. 이 원정은 그 당시 관체족이 거주하던 카나리아 제도까지 도달했다. 그는 이 항해 동안 에사우이라 섬에 보라색 염료 생산 공장을 설립하기도 했다.
티파자의 유바 2세 영묘.
그는 말년에 아들 프톨레마이오스와 공동으로 통치했다. 서기 23년에 자연사했으며, 카이사레아 인근 마우레타니아 영묘에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와 함께 안장되었다. 이 영묘는 아우구스투스 영묘를 모델로 삼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유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지만, 영묘는 여전히 보존되어 알제리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손꼽힌다.
3. 사후
그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3년 마우레타니아 왕위에 오른 뒤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을 길러냈지만,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프린키파투스(원수정)과 원로원의 약한 연결고리를 약점삼아 로비를 펼치고 로마 내정에 개입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원로원, 로마군부의 진노를 샀다. 그럼에도 그는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면서, 로마를 자극한다. 그 결과, 로마 원로원은 당시 황제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아 원정과 갈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인 서기 39년 말, 일찌감치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칼리굴라는 위험인물인 그를 서기 40년 로마에 방문한 틈을 노려 암살한다. 이때 로마 원로원은 칼리굴라와 프라이토리아니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아들을 암살하기에 앞서 마우레타니아 강제 병합 법안을 통과시켰고, 황제에게서 그를 제거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이를 공표한다.이후 로마는 마우레타니아를 강제 병합하는데, 칼리굴라는 왕국을 둘로 쪼개 속주화 작업을 지시한다. 이에 왕국 주민들은 반발하는데,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항의만 하다가 서기 41년 칼리굴라가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게 암살된 직후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로마군은 황제 암살 정국 속에 갈팡질팡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데,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티베리우스-칼리굴라 시대때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를 파견해 얼마 안 가 제압되고 2년 뒤 완전히 속주로 병합된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칼리굴라 생전, 원로원과 황제의 결정으로 계획된 법안에 근거해, 왕국을 둘로 쪼개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관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