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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08:09:08

바그라다스 전투(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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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3.2. 옵티마테스군
4.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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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9년, 아프리카 속주의 바그라다스에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이끄는 카이사르군과 유바 1세와 사부라가 이끄는 누미디아군이 맞붙은 전투.

2. 배경

기원전 49년 1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부재 중 집정관 선거 입후보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군대 해산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이대로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들어갔다간 정적들의 맹공으로 정치생명이 끝장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판단해 내전을 감행했다. 이탈리아 주민들이은 갈리아 전쟁의 영웅인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병사들은 앞다퉈 그에게 가담했다. 폼페이우스는 처음엔 이탈리아에서 카이사르와 일전을 치르려 했지만, 민심이 예상과는 달리 자신을 따라주지 않자 발칸 반도에 가서 군대를 규합하기로 했다. 카이사르는 내전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 브룬디시움 공방전을 치렀지만, 끝내 폼페이우스를 막지 못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부관들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평정하기로 하고, 코르피니움 공방전 때 자신에게 항복한 장병들로 구성된 군단들을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에게 맡겨 시칠리아를 공략한 뒤 여세를 몰아 아프리카 속주를 평정하도록 했다. 쿠리오에게 맡겨진 병력은 총 3개 군단에 1,000명 이상의 갈리아 기병이었다. 카이사르는 쿠리오의 재능을 아꼈지만, 그가 전투 경험이 없는 점을 고려해 측근인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를 부관으로 세워 그를 보좌하게 했다.

쿠리오가 시칠리아로 쳐들어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소 카토 등은 발칸 반도로 달아났다. 4월 23일 별다른 저항 없이 시라쿠사에 입성한 뒤, 쿠리오는 히스파니아의 상황을 주시하며 그곳에 머물렀다. 그해 8월 초, 카이사르가 일레르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확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고무된 쿠리오는 제15군단과 제16군단, 그리고 500명의 갈리아 기병을 함대에 싣고 아프리카 속주로 출진했다. 도중에 적 함대의 급습을 받았지만 가볍게 물리치고 우티카 인근 해안에 무사히 상륙했다.

한편, 아프리카 속주는 과거 이곳 총독을 맡으면서 인맥을 쌓았던 푸블리우스 아티우스 바루스가 맡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발칸 반도의 옵티마테스군을 위해 곡물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적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하여 3개 군단을 소집했으며, 누미디아 왕 유바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쿠리오가 쳐들어오자, 그는 유바 1세에게 구원을 청하는 한편 우티카로 진군했다. 이후 벌어진 우티카 전투에서 쿠리오가 완승을 거뒀고, 바루스는 우티카 시로 패주했다.

쿠리오는 부관들로부터 적이 재편성하기 전에 우티카를 공격하라는 재촉을 받았다. 하지만 공성 무기를 미처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기로 하고, 대신 우티카를 포위하여 굶겨죽이려 했다. 우티카 시민들이 항복하려 하자, 바루스는 유바 왕이 대군을 이끌고 올 테니 조금만 더 버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던 중 유바 왕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쿠리오는 포위를 풀고 카스트라 코르넬리아로 이동한 뒤 시칠리아에 주둔한 2개 군단에게 합류를 명령했다.

그러던 중 한 누미디아인으로부터 "유바 왕이 이웃 국가 마우레타니아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본군을 이끌고 돌아갔고, 사부라가 이끄는 몇 안 되는 군대 만이 우티카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쿠리오는 이들을 물리치기로 마음먹고 재차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사실 이 누미디아인은 유바 1세가 쿠리오를 유인하기 위해 보낸 밀정이었고, 쿠리오는 잘못된 정보를 섣불리 받아들인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3. 양측의 전력

3.1. 카이사르군

3.2. 옵티마테스군

4. 경과

쿠리오는 부관 마르키우스 루푸스의 지휘하에 4분의 1 가량(대략 2,500명)을 남겨둔 뒤, 동이 트기 약 2시간 전에 바그라다스 강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누미디아 전위대를 이끌던 사부라는 바그라다스에서 약 10마일 떨어진 곳에 숙영지를 세웠지만, 일부는 이미 강을 건넜다. 쿠리오의 갈리아 기병대는 그들을 우연히 발견하여 즉시 공격했고, 누미디아군 대부분은 죽거나 사로잡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이후 갈리아 기병대는 강 근처에서 기다리지 않고 돌아가서 쿠리오에게 돌아가 카스타르 코르넬리아에서 남쪽으로 6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를 만났다.

쿠리오는 기병대의 보고를 받고, 사부라가 이끄는 누미디아군이 전부라고 확신해, 이번 패배로 혼란에 빠진 누미디아군을 섬멸하기로 했다. 다만 말이 피로해서 정상적인 기동이 힘든 기병 300명은 숲에서 쉬게 하고 나머지 200명과 군단병을 이끌고 진격했다. 한편, 유바 1세의 누미디아 본대는 사부라로부터 약 6마일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유바 1세는 바그라다스 강 근처에서 접전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누미디아 경보병과 약 2,000명의 기병을 포함한 갈리아 및 히스파니아 용병대를 파견해 사부라를 지원하게 했다. 그리고 본인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바그라다스 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군했다.

쿠리오가 자신을 향해 진군하자, 사부라는 부하들에게 로마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게 했다. 쿠리오는 적이 다가와서 투창을 던진 뒤 퇴각하자 즉시 추격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강에서 위험할 정도로 떨어졌고, 군단병들은 작렬하는 태양빛을 가릴 수풀도 없는 황량한 평원에서 수 시간 행군하느라 매우 피곤하고 심한 갈증을 느꼈다. 이때 누미디아군이 재차 공격했다. 그들은 보병을 예비로 남겨두고 기병만 동원하여 로마군을 괴롭혔다. 로마군은 심한 피로와 갈증, 그리고 적의 연이은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적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시간이 지나면서 진군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고, 갈리아 기병 300명은 숫자가 너무 적어서 누미디아 기병을 상대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누미디아 기병대는 곧 다시 돌아와서 로마군 후방을 공격했다. 1개 코호트가 그들을 향해 달려들자, 누미디아인은 즉시 후퇴하다가 코호트가 본대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즉시 돌아서서 순식간에 고립시킨 뒤 포위섬멸했다. 이윽고 유바 1세가 파견한 군대가 사부라에 가세하면서 누미디아군의 전력은 대폭 강화되었지만, 로마군은 계속 약해졌다. 쿠리오는 병사들을 격려하며 끝까지 버티라고 외쳤다.

그러나 수 시간이 흐른 뒤 더 이상 전열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쿠리오는 부하들에게 북쪽의 낮은 언덕을 향해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사부라는 이 광경을 보고 기병대에게 적의 퇴각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기병대가 쫓아오자, 로마인들은 필사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달아나다가 적 기병이 내지른 창에 찔러 죽었고, 일부는 지쳐서 땅에 누운 채 죽음을 기다렸다. 부관 하나가 쿠리오에게 "어서 뭄을 피하셔서 후일을 도모하십시오"라고 권하자, 쿠리오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의 군대를 잃었는데 어떻게 카이사르의 얼굴을 볼 수 있겠느냐!"

그는 등을 돌려 누미디아인들을 상대로 최후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이날 대다수 로마군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고, 극소수만이 가까스로 빠져나와 카스트라 코르넬리아로 돌아가 패전 소식을 알렸다. 마르키우스 루푸스는 즉시 진영을 꾸려 해안가로 철수하였고, 해군 사령관 가이우스 카니니우스 레빌루스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지휘하에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유바 1세의 승리 소식을 들은 바루스가 즉시 쳐들어오자, 그들은 황급히 배를 몰고 시칠리아로 떠났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장병들은 백인대장들을 바루스에게 대표로 보내 신변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바루스는 동의했지만, 유바 1세는 우티카에 도착한 직후 몇몇 원로원 의원을 제외한 나머지 적병들을 처형했다.

그 후 유바 1세는 발칸 반도에 사절을 보내 승리 소식을 알렸고, 폼페이우스와 옵티마테스파 인사들은 그를 누미디아 왕으로 인정했다. 반면에 카이사르와 로마의 원로원은 유바 1세를 로마의 적으로 선포했다. 이후 아프리카 속주는 기원전 46년 카이사르가 침공할 때까지 옵티마테스 파의 본거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