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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08:09:52

곰피 공방전

카이사르의 내전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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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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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8년 7월 29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이사르에게 복종하길 거부한 테살리아 도시 곰피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공방전.

2. 상세

기원전 49년 6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디라키움에 틀어박힌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디라키움 공방전을 벌였다. 그는 도시 주위에 방벽을 쌓아서 육상 보급로를 차단해 서서로 말라죽게 만들려 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기민한 대응으로 인해 포위망이 뚫리고 상당한 타격을 입은 채 아폴로니아로 퇴각했다. 만약 폼페이우스가 추격했다면 카이사르는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면치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폼페이우스는 아직 장병들의 전투력이 카이사르의 고참병보다 못하다고 여기고 추격하지 않았다.

아폴로니아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카이사르는 적 앞에서 패주한 부대원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들이 부끄러움과 울분에 사로잡혀 디라키움을 재차 포위하겠다고 요구했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남하하기로 했다. 4개 코호트가 아폴로니아로 보내졌고, 3개 코호트는 오리쿰으로 파견했으며, 1개 코홀트는 리시에 남겨졌다. 이후 본대를 이끌고 헤라클레아 인근에서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상대로 대치 중이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와 연합하려 했다. 폼페이우스는 적의 움직임을 전해 듣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메텔루스 스키피오에게 향하여 칼비누스를 쳐부수려 했다.

당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디라키움 공방전 후 폼페이우스를 따르기로 했기 때문에, 칼비누스는 폼페이우스가 자신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폼페이우스의 진영에 있던 알로브로게스족 전사 몇 명이 칼비누스에게 귀순하여 폼페이우스의 접근을 알렸다. 이에 칼비누스는 즉시 철수했고, 아이기니움 근처에서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 역시 메텔루스 스키피오와 합세한 뒤 카이사르를 향해 천천히 진군했다.

카이사르는 에페이로스를 떠나 테살리아로 이동했는데, 도중에 곰피에서 막혔다. 곰피의 지도자 안드로스테네스는 지난날 카이사르를 위해 지원을 약속했으나, 디라키움 공방전의 결과를 전해들은 뒤 약속을 없던 일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성문을 걸어잠그고 모든 시민과 노예를 성벽 위로 세워서 맞서 싸울 태세를 갖추게 했다. 여기에 폼페이우스에게 전령을 보내 속히 구원해줄 것을 청했다. 그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가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성에 붙들려 있을 여유가 없으니 곰피를 단념하고 다른 곳으로 가길 바랬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곰피의 배신 행위를 즉각 응징하지 않는다면 다른 도시들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니 본보기를 보여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장병들에게 즉시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일전의 패배로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성을 공략했다. 주민들은 대거 학살당하고 도시의 모든 부가 약탈당했으며, 안드로스테네스를 비롯한 20명의 지도자들은 집단 자살했다.

다음날 카이사르는 곰피를 떠나 메트로폴리스 외곽으로 진군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술에 잔뜩 취해서 무질서하게 행군했다고 한다. 메트로폴리스 시민들은 처음에는 저항하려 했지만, 곧 곰피의 일을 전해듣자 공포에 질려 성문을 열었다. 이리하여 식량과 전쟁 물자를 확보한 뒤, 카이사르는 자신의 뒤를 쫓아온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파르살루스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