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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0:21:15

스파르타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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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스파르타쿠스
Spartacus | Σπάρτακος
파일:C3TZR1g81UNcexr7CN6oLFxdYPTk9EAY9hdGJZM5wxLb8Jbjf8UeRMBQFHSfg5VdFiTVYFpoxfvomohcrJAYqpvHpgZpNYhNmRn3aYFddofAFVL2PeLMrmU.jpeg.jpg
데니스 포야티에의 조각상 (1830년)[1]
<colcolor=#fff> 본명 스파르타쿠스 (Σπάρτακος)
출생 기원전 111년 추정
스트루마 강 인근
(現 불가리아)
사망 기원전 71년 (향년 39세 또는 40세)
셀레 강 인근
참전 제3차 노예 전쟁
(스파르타쿠스 전쟁)
참전 기간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1. 개요2. 생애
2.1. 출생2.2.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난)
2.2.1. 검투사들의 탈주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2.2.3. 자유의 투사2.2.4. 로마군이 달아나다2.2.5. 알프스가 보인다2.2.6. 크라수스의 등장2.2.7. 수세에 몰리다2.2.8. 임페라토르의 최후
2.3. 전쟁 이후
3. 평가
3.1. 군사적 역량에 대하여3.2. 후대의 평가
4. 그를 소재로 한 창작물5.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고대 로마 시대에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검투사 노예.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에 저항했던 그의 항쟁은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불멸로 만들었고, 많은 정치 사상가들과 예술가들,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2. 생애

2.1. 출생

스파르타쿠스 개인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며, 어디까지가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단순한 전설인지도 알 수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그는 트라키아[2]유목민 출신으로, 명민한 정신과 대단히 튼튼한 신체를 갖추었고, 신분에 비해서 훨씬 교양 있는 인물로 트라키아인보다는 그리스인에 가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목민 출신이라고 기록된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여, 트라키아마이디(Maidi) 부족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당시 트라키아에는 그리스어스파르타코스라는 이름의 촌락이 있었는데, 라틴어 스파르타쿠스와 같기 때문에 그를 이 촌락 출신이라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즉 그리스스파르타와는 별 관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웅전》에서는 또 그의 아내[3]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부족 출신으로 디오니소스의 광기에 들린 여자 예언가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트라키아디오니소스 숭배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아피아노스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는 한때 로마군의 병사로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고 언급되어 있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만,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을 상대로 사용한 비범한 전술 능력을 볼 때 그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출신이 아니라 본래는 교양 있는 자유인이었으며, 군대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는 가설이 그럴 듯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지 않다. 고대 사회는 현대 이상으로 지식과 기술의 전수가 신분의 공고화, 권력, 부의 세습과 직결되어 그 전수 과정이 매우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4] 콜린 맥컬로의 소설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가설을 적당히 비틀어서 스파르타쿠스가 실제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인으로 전직 군단병이었고, 모종의 이유로 탈영병 취급을 받아 검투사로 전직하였는데, 당시 검투사 세계에서 인기있던 기믹 중 하나인 "트라키아인" 역을 맡으면서 이름을 그 역에 맞게 스파르타쿠스로 바꾸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기묘하게도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키기 3년 전인 BC 77년 겨울에서 BC 76년에 걸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트라키아의 마이디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전쟁이 스파르타쿠스가 노예로 전락한 중대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2.2. 제3차 노예 전쟁(스파르타쿠스의 난)

2.2.1. 검투사들의 탈주

기록이 확실하지 않아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추정과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나, 아무튼 트라키아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가 되어 이탈리아로 끌려와 검투사가 되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들어가게 된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는 렌툴루스 바티아투스라는 남자가 소유한 곳으로, 이곳 검투사들은 트라키아인과 갈리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두고 바티아투스 소속 검투사들이 실제로 트라키아와 갈리아 출신이라는 설과 당시 검투사 세계 양대 기믹이 트라키아인갈리아인이었던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는 설이 갈린다. 양쪽 다 나름대로 역사적인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라 현재는 두 가설 모두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기록에 의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소속된 검투사 양성소는 다른 곳보다도 검투사들에 대한 대우가 상당히 가혹한 곳이었던 듯하다. 사실 노예나 포로들이 혹독한 대우를 받으며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당시 로마의 검투사는 상당히 인기 있는 직업이었고, 노예나 하층민보다 자유인(로마 시민) 비중이 더 높았으며, 검투 시합도 매일매일 목숨을 거는 수준으로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현대의 이종격투기 선수들과 비교하는 게 아주 적절할 정도. 다만, 인권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이 거의 없었던 당시의 특성을 감안하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비참하고 위험한 시합을 하며 혹독한 대우를 받는 검투사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바티아투스 아래의 검투사들이 바로 그 처지였던 것.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검투사 양성소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하여 BC 73년 여름, 74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바티아투스에 대한 기록은 이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스파르타쿠스와 수십 명의 검투사 동료들만의 소규모 탈주극에 불과했다. 양성소를 탈주한 스파르타쿠스와 그 동료들은 베수비우스 화산의 산악 지대로 도망쳤다. 보통 화산 지역은 암석만 그득한 황폐한 지역이지만, 베수비우스 화산이 분화해 폼페이를 덮치는 것은 이로부터 150년 뒤인 원수정 시대의 일이었고 따라서 당시의 베수비우스 화산은 화산인지도 모를 정도로 삼림이 울창한 곳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베수비우스 화산은 숨고 산적질하기 딱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이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협하고 짐을 빼앗는 산적질을 하기 시작했다.

계속된 산적질에 카푸아에서도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의 토벌대를 파견하였는데 스파르타쿠스 일당은 이들을 격퇴하고 빼앗은 무기와 갑주로 무장한 뒤 더 심하게 날뛰었다. 이들의 명성은 높아져만 갔고 이를 듣고 합류한 노예, 불량배, 부랑자들로 인해 카푸아 지방 정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할 수 없이 중앙 정부인 로마에 노예들의 진압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2.2.2. 검투사, 로마군을 격파하다

처음에 로마 정부는 이들을 가볍게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이라 생각하였으며 때문에 정규 로마 군단병 레기온이 아닌 시민군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천 명의 신병이 긴급히 징집되었고 이들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5]의 지휘하에 스파르타쿠스를 토벌하러 갔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법무관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산으로 올라가는 길들을 모두 철통같이 막고 한 발짝 한 발짝 올라가며 노예군을 깨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노예군은 산 속에 널려있는 야생 넝쿨을 꼬아 밧줄을 만들어 그것을 타고 험한 바위를 타고 내려와 글라베르군의 뒤편으로 돌아가 순식간에 습격했다. 불의의 기습에 깜놀한 로마군 3천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다가 노예군의 공격에 박살이 났다.

그러자 로마 정부는 2차로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지휘 아래 다시 시민군 4000명을 편성하여 보냈다. 이때 바리니우스는 그의 부관인 루키니우스 코시니우스에게 군사력의 절반을 지휘하게 하였다가 각개격파당했고, 코시니우스는 별장에서 마음놓고 목욕을 하다가 스파르타쿠스의 기습을 받아 벌거벗은 채 허둥지둥 하다가 살해당했다. 바리니우스는 스파르타쿠스 반란 도당을 포위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밤 중에 시체를 살아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빠져나가는 속임수를 썼다. 이 사실을 알아낸 로마군은 곧바로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지만 얼마 못 가서 크게 패했고, 바리니우스는 도망치긴 했지만 말과 파스케스, 군기를 모조리 스파르타쿠스에게 빼앗겼다. 군대가 군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죽을 죄였고,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묶어서 만든 도끼인 파스케스는 그 당시 로마 고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인데 이걸 외국도 아니고 반란 노예 무리에게 뺏긴 것이다. 로마의 위신에 얼마나 큰 구멍이 났을 지 알 만하다.

2.2.3. 자유의 투사

두 차례에 결쳐 로마 정부가 파견한 토벌대를 무찌르자 스파르타쿠스의 명성은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이 반란에 합류하였다.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고의적으로 양치기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이동했으며, 그의 생각대로 양치기들은 앞을 다투어 스파르타쿠스에게 합류했다. 당시의 양치기 노예들은 신체가 건강하고 발이 빨랐으며 난폭하기로 이름이 높았기에[6] 스파르타쿠스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으며, 노예는 아니지만 그들과 처지가 별로 다를 것 없고 사회에 불만이 많은 하층민들도 반란에 합류하였다. 반란에 합류한 사람들이 워낙 많았기에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산적떼는 가공할 숫자로 불어나게 된다. 문헌마다 숫자가 4만·7만·9만·12만 등으로 다양하지만, 추정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수인 4만이라도 고대에는 엄청난 수였다.

이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탈주는 단순한 노예 탈주 사건이 아니라, 로마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의 노예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노예군은 누케리아·투리·메타폰툼 등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그때마다 병력을 확장하고 전리품도 대거 탈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로마에 학대받았던 원한이 첩첩히 쌓여 있던 노예 병사들은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을 수시로 저질렀다. 로마 역사가들에 따르면, 이때 스파르타쿠스는 약탈을 막으려고 했으며 이탈리아에서 빠져나가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노예군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스파르타쿠스의 가장 친한 동지인 크릭수스 역시 "로마놈들을 죽이자!" 는 의견을 가졌고, 이 때문에 나중에 둘이 갈라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스파르타쿠스의 "내년에 로마군이 쳐들어올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고, 이에 따라 그는 야생마를 잡아 기병대를 조직하고, 양치기들을 모아 군인으로 키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또한 , 같은 사치품의 구입을 금지하고 이나 구리를 구입하게 함으로써 장래에 쓸 무기를 만드는 치밀함을 보였다.

2.2.4. 로마군이 달아나다

이듬해 로마 정부는 이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라 판단하였고 더는 묵과할 수가 없어 그해에 선출된 두 집정관, 루키우스 겔리우스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에게 각각 2개 군단의 정예 병력을 주어 스파르타쿠스의 진압을 맡겼다. 두 명의 집정관이 군단 지휘권을 가지고 2개 군단의 정규군을 적국의 정규군도 아닌 일개 폭도 무리의 토벌에 투입한 것은 로마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이 무렵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그의 동료 크릭수스가 일부 병력을 데리고 떠나갔는데, 로마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단병들이 이들을 추격하여 가르가노 산에서 대파하고 크릭수스를 죽인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쿠스는 나머지 병력과 북상하여 갈리아로 달아나려 시도하였고 이를 렌툴루스가 가로막았다. 두 명의 집정관이 출정했는데, 한 사람만 앞길을 막은 이유는 당시 로마 집정관들이 둘이서 합쳐서 이기기보다는 군사적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본인의 병력만으로 이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렌툴루스는 자신 휘하의 병력만으로 급히 싸움을 걸었는데 이것이 패인이 된다.

뒤이어 벌어진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을 거짓말처럼 격파하였고, 이 때 로마군은 수치스럽게도 스파르타쿠스에게 등을 보이고 달아났다. 이 전투에는 이름도 없고, 로마 역사가들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채 그냥 졌다고 썼을 뿐이라서 스파르타쿠스가 어떤 전술을 썼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숫자만 믿고 무식하게 돌격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렌툴루스의 로마군이 노예군의 일부를 포위했을 때 스파르타쿠스가 나머지 노예군과 함께 렌툴루스를 기습했다고 한다. 곧이어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을 추격해오는 겔리우스의 군단도 격파했으며, 갈리아 키살피나의 총독으로 부임한 전직 집정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병력까지도 격파한다.

이는 지중해 최고의 군사적 영광에 빛나는 로마로서는 크나큰 치욕이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는 물건에 불과한 노예 검투사와 그 검투사가 지휘하는 노예군에게 로마의 높으신 분들인 현직 집정관 2명과 전직 집정관 1명이 연달아 패배한 것이다. 군단 수만 따져봐도 집정관 1인당 2개 군단이니 6개 군단이 패배를 당한 셈이다.[7]

그 다음에 들어온 소식은 로마 고위층이 경악하며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파르타쿠스가 포로로 붙잡은 로마인들에게 검투사 경기를 시켜 서로 죽이게 했던 것이다. 이 경기는 전사한 크릭수스를 위해 벌인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전사자를 위해 경기를 바치는 것은 로마의 높으신 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일로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길이 남아 로마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게 되었다.

2.2.5. 알프스가 보인다

두 집정관을 패배시킨 스파르타쿠스와 동료들은 계속 북상하였고 가는 길에 합류하는 인원 덕에 12만까지 불어난다. 해당 기록은 로마 시대 역사가 아피아노스의 것이고 당시의 경향을 볼 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신빙성은 낮지만, 하여간 그걸 감안해도 엄청나게 불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로마군의 추격을 뿌리친 이들은 알프스산맥까지 행군하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남하를 시작해 나폴리 지방으로 내려온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스파르타쿠스 최대의 (그리고 사실상 유일의) 실수라고 평가한다. 그냥 진군했으면 자유를 얻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이탈리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자유를 찾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은 분명한 만큼, 왜 방향을 돌렸는지에 대해서는 (스파르타쿠스 측의 사정이나 의사 결정을 대변하는 기록이 전무한지라) 여러 추측만이 분분할 뿐이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은 스파르타쿠스의 수하들, 특히 트라키아 출신이 아닌 이들 가운데 다수가 야만족이 들끓는 빈곤한 벽지인 트라키아로 향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반란 초기부터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잘 듣지 않았던 노예들의 행태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배리 스트라우스 같은 경우는 스파르타쿠스 군단의 상당수를 이뤘던 켈트게르만족이 소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번째 세대 노예였던 점을 얘기하고 있다. 즉, 그들에게 알프스 이북은 고향이 아니라 타향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세력 확대를 위해 포섭한 이탈리아 남부의 빈민과 유민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한 평생 이탈리아 남부에서 살아왔을 그들에게 거대한 알프스산맥이 주는 위압감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에게는 단신으로 또는 따르는 자들만 이끌고 고향으로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영영 알 수 없는 의문일지도 모른다.

2.2.6. 크라수스의 등장

스파르타쿠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안 원로원은 로마 제일의 부자인 법무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게 스파르타쿠스 토벌의 명을 내린다. 크라수스는 노예군이 절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님을 알고는 패주한 집정관의 군대와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징집한 병사를 합친 무려 8개 군단으로[8]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집정관이 패배한 싸움에 등급이 낮은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이유는 두 집정관들이 이미 산적떼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당했으므로 더 이상 군단을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수스는 8명의 법무관 중에서도 수석 법무관이었고 따라서 두 집정관의 패배 뒤 그가 지휘할 차례였던 것이었다. 또한 원로원이 로마 제일의 부자였던 크라수스가 사비를 털어 병력을 소집하기를 기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다 이 때의 스파르타쿠스는 단순한 노예가 아닌 로마의 집정관 두 명을 연달아 패배시킨 반란군 수장인 만큼 크라수스 입장에서도 이런 적을 상대로 군공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탐나는 기회이기도 했을것이다.

크라수스는 결전에 앞서 패배한 집정관의 군단병들에게 로마군의 법정 최고형인 10분의 1형(decimatio), 즉 모든 십인대에 열 명당 한 명을 제비로 뽑고 나머지 아홉 명이 그 한 명을 직접 때려죽이게 하는 형벌을 내린다. 원래 데키마티오는 그 잔혹함이 너무 심하다 하여 집단 항명과 같이 극단적인 방법으로라도 군기를 잡아야 할 상황일 때만 내려졌으며, 설령 선고가 내려진다 해도 상징적으로 선고만 할 뿐 실제로는 아예 시행하지 않거나 극소수 주동자에게만, 그나마 그냥 사형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적절히 조치하는 경우가 많았을 만큼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다. 원래 이 정도 형벌을 집행하면 당장은 승리를 하더라도 나중에 법적, 정치적으로 책임을 추궁받기 십상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자주 져 본 이민족도 아니고 오합지졸 그 이하인 노예군에게 등까지 돌려 도망친 로마군 병사들을 시민들이 굉장히 수치스럽게 여겨서 적당히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9] 살아남은 병사들도 전원 군단에서 추방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크라수스가 작전 재개를 결정한 뒤에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무서운 형벌을 내려 패잔병의 1할을 처형하고 전 군단에게 본보기로 삼은 뒤 로마군은 스파르타쿠스를 조이기 시작한다.

2.2.7. 수세에 몰리다

수의 열세에 서서히 밀린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장화 발끝까지 몰렸다. 불리함을 깨달은 스파르타쿠스는 해적들과 접선해서 선박을 얻어 이탈리아를 탈출하려 했지만 배를 주기로 한 해적들의 배신으로 실패했고, 뗏목을 동원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 로마군의 공격으로 실패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스파르타쿠스가 시칠리아로 달아나서 그 섬을 근거지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본다. 시칠리아는 몇 년 전에도 노예 반란이 일어났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판단 자체는 옳았지만 문제는 해적들이 로마에 매수당했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 스파르타쿠스에게 나쁜 소식이 전해진다. 외국으로 원정을 나갔던 로마 군단들이 속속 돌아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벽까지 쌓아서 포위망을 완성한 크라수스의 병력들은 "이제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막 이기고 돌아오는) 폼페이우스가 오면 넌 죽는다."고 조롱했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파르타쿠스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군의 포위망을 보기좋게 돌파해버린다.[10]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말을 통 들어먹질 않는 이놈의 노예들의 고질병이 또 터졌다. 노예군 일부가 스파르타쿠스와의 의견 차이로 갈라져 스파르타쿠스 진영을 이탈하여 독자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들은 곧 로마군에게 섬멸당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겸사겸사 스파르타쿠스를 추적하던 크라수스의 기병대에게 역습을 걸어 패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목표로 한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 항구에는 이미 동방에서 돌아온 로마 군단이 상륙하고 있었다. 길이 막힌 스파르타쿠스는 다시 후퇴하면서 살 길을 모색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로마놈들과 싸우자!!!"며 후퇴 명령을 거부하고 말았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우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부하들이 너무 완강해 어쩔 수가 없었다.

2.2.8. 임페라토르의 최후

로마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던 스파르타쿠스는 노예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좋은 말을 많이 얻을 것이고, 진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언사와 함께 자신의 말을 베어버린다. 그러니까 일종의 배수진을 친 것이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전투를 벌였지만 압도적인 열세에 몰렸다. 훗날 카르헤 전투에서 보듯 크라수스는 군사적 재능은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가 동원한 병력은 8개 군단의 4만 8천 명과 보조군 1만 2천 명이 합쳐진 무려 6만여 명에 달하였다. 특히 두 번의 연이은 패전에 잔뜩 긴장한 원로원과 크라수스가 직접 선발한 이 8개 군단병들의 무력은 산적떼에 지나지 않는 스파르타쿠스 반란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수했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결사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죽이기 위해 돌격했다. 성공했다면 승리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로마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저지했고,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손으로 두 명의 백인대장을 베어 쓰러뜨리고 크라수스에게 근처에 접근하는 데 성공할 정도로 분전했으나 결국 로마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돌격대가 전멸하면서 힘이 다하여 쓰러지고 만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노예군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린다.

여기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록이 갑자기 자세해진다. 로마의 역사가 플로루스"그는 거의 임페라토르(Imperator)처럼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 임페라토르는 장군이나 사령관을 의미했지만, 플로루스의 시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개 검투사"황제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다른 역사가들 역시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스파르타쿠스가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에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묘사한 기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스파르타쿠스가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동료들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스파르타쿠스가 자유의 투사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운 노예들에게도 "노예들은 검투사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답게, 용감하게 싸우고 사나이답게 죽어갔다."는 찬사가 바쳐졌다.

그가 총대장다운 화려한 갑옷이 아닌 노예군 전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초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스파르타쿠스가 전사한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로마군은 전투 후에도 전장에 쓰러진 시신들 중 어느 것이 그의 시신인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상당수의 노예군 패잔병들이 하필 서둘러 로마로 강행군하던 폼페이우스군을 만나 격파당하는 바람에,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마무리지었노라고 원로원에 서신을 보냈고, 이것을 원로원은 그대로 인정하였다. 물론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공화국 최고의 거부로 영향력이 높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까지 얻음으로써 정계의 중심 인물로 우뚝서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었기 때문에, 이왕 거행할 개선식에 스파르타쿠스 토벌 업적을 덧씌워주고 반대로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덤으로 원로원으로서는 크라수스의 개선식을 절대로 허가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개선식을 치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인데, 당시 로마인에게서 물건에 지나지 않는 노예 검투사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개선식을 허락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 단계 아래인 오바티오라는 행사만을 주었다. 그나마 크라수스의 공을 인정해 (그리고 크라수스의 뜻이 반영돼서) 원로원은 오바티오 때 수여하는 금속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선식을 치르지 못하게 된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달리 "공화국의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인정받을만한 군공이 없다."는 컴플렉스를 키우게 되며, 이는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 그의 무모한 결단과 몰락으로 이어진다.

2.3. 전쟁 이후

패배한 스파르타쿠스의 병사들 중 6천 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노예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본보기로서 전원이 로마의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크라수스는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노예들이 오랜 기간 고통받다 죽는 모습을 다른 노예들이 보고 반란은 생각도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매달아버렸다. 그러나 반란 노예들은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도 의연했으며, 심지어 매달린 채로 로마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살아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노예군 잔당들은 산에 숨어서 산적질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들 중 누구도 스파르타쿠스의 위업을 재현할 수는 없었고 나중에 추격해온 로마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전투 직후 로마군이 스파르타쿠스를 찾아다닐 때, 이 잔존 병사들이 하나 둘 벌떡 일어서서 "내가 스파르타쿠스요!"라고 외치다가 모든 병사들이 한 목소리로 자신이 스파르타쿠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에서 나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아쉽게도 감독이 지어낸 허구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기록을 조금밖에 남기지 않았다. 스파르타쿠스 전쟁이 2명의 집정관이 털리고, 이례적인 조치로 8개 군단 수만 명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야 겨우 진압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음에도 기록 남기기 좋아하는 로마인들답지 않게 남은 기록이 적고 상세함도 꽤 떨어지는 편이다. 비천한 노예 검투사에게 로마가 몇 차례나 얻어맞았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절대로 스파르타쿠스를 잊지 못했다. 30명 이상의 고대 작가들이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썼으며, 이것은 당시의 그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를 보여준다. 키케로나 카이사르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한 바 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스파르타쿠스"라고 비난한 바 있다. 반란 150여 년 후인 CE 79년에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 유적에서도 스파르타쿠스가 말을 타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낙서가 발견되었다.

이 반란의 여파로 재발 방지를 위해 노예들에 대한 대우가 약간은 나아졌으나 실제론 전과 비교해 유의미한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11] 오히려 이후 로마인들은 검투사들의 경기장 주변에 군대를 배치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미리 죽여버리기 위해서.

물론 그렇다고 이후 로마 제국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선 노예들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최번영기 오현제 시대에도 노예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다만 그래도 노예에 대한 처우는 느리지만 서서히 상승되며, 이미 오현제 시기에는 노예를 함부로 다루는 주인이 교양 없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널리 잡혀 있었다. 그리고 서로마 제국 시기엔 노예가 이미 크게 줄어든 상태가 된다. 과거 주변 국가들을 공격하면서 노예를 수급했으나 이후 주변 국가, 민족들이 국력을 키우고, 로마로부터 군대 운용법 등을 모방하거나 배워서 점차 실력을 키우면서 로마의 노예 수급은 점차 줄어만 갔다. 노예들이 줄어가는 자리는 부채 등으로 자유를 잃은 자유민 출신 농노들이 대체했다. 로마의 적들이 더욱 강해져서 노예를 획득하기가 매우 어려워진 데다가 있는 노예들까지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켜 로마 제국은 그동안 의지해왔던 노예제 경제가 일종의 소작제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귀족들도 노예들이 도망가거나 반란을 일으킨 탓에 라티푼디움(노예제로 운영되는 대농장)을 경영하기가 어렵게 되자 휘하에 있는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켜 소작제로 전환한다. 즉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노예들의 저항이 아주 헛되지는 않아 로마 사회를 서서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한편 서로마 제국의 경우 5세기 중반에 게르만족과 결탁한 로마 시 반란 노예들이 로마시를 함락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노예가 아니라 5세기 초반에 라다가이수스가 이끄는 고트족들이 침입했을 때 스틸리코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대패한 뒤 노예로 팔린 패잔병들 및 그 처자식들이었다. 즉 일반적인 노예 해방 이미지와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이들이야말로 숱하게 로마 제국 영내를 침입하여 로마인들을 노예로 삼고 약탈을 일삼으며 아예 이탈리아 전체를 노리다 스틸리코에게 참교육당한 경우기에, 그야말로 억울한 피해자인 스틸리코의 경우와는 아예 결이 다르다. 5세기 중반에 또 다시 게르만 침공이 일어났을 때 노예로 있던 이들이 로마 시 안에서 반란을 일으켜 큰 타격을 주었지만 서로마 제국이 그걸로 망하지는 않았고 동로마로부터 온 지원군 힘을 빌려 어떻게든 수습했기에, 스틸리코 사례에 빗대기는 아예 예시가 맞지 않다.

3. 평가

로마 공화정은 그 이전에도 노예 반란을 여러 번 겪었지만 이번은 예전과 달랐다. 이전의 반란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고, 규모가 클지라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엄청난 반란군은 로마에서 일주일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진격해왔다. 한니발알프스산맥을 넘은 이래 어느 외부 세력도 이탈리아 반도에 그 같이 막심한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중략) 선전 효과를 능수능란하게 이용한 스파르타쿠스는 지지 기반을 넓혀 로마를 위협해왔다. 그는 노예들뿐 아니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 미트리다테스의 지지자들도 공감할 만한 말을 흘렸다. 궁극적으로 자유민들을 자신의 가치 아래로 끌어들이지는 못했지만, 그의 메시지는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파르타쿠스 반란은 고대에 가장 유명한 노예 반란이었으며 아마도 가장 큰 반란이었을 것이다. 반란 세력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본토가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던 로마의 허를 찔렀으며 로마 군대를 아홉 차례에 걸쳐 격퇴했고 2년 가까이 고대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막아냈다. (중략)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제의 폐지를 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폐지를 원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목표를 매우 낮게 잡았다. 그와 그의 부하들은 검투사들과 농부, 양치기인 노예들만 해방시켰을 뿐이다. 농촌의 일꾼들보다 더 유순한 엘리트 집단인 도시의 노예들은 그들은 기피했다. 그들은 자유를 향한 외침뿐 아니라 민족주의, 종교, 복수, 재물이라는 다른 주제를 통해서도 노예들을 끌어모았다.

로마는 크고 힘이 셌으나 굼떴다. 스파르타쿠스는 작고 굶주렸으나 빨랐다. 로마는 늙고 자기만의 방식에 고착되어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혁신가였다. 로마는 육중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민첩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매복과 야간 작전 그리고 급작스러운 선회와 측면 공격에 크게 당한 로마군은 결국 그의 전투에서 맞붙는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들은 스파르타쿠스 세력을 고립시키고 그들이 전투를 무릅쓰고 나올 때까지 아사시키는 전략을 꾸준히 밀고 나갔다. (중략) 그는 저돌적이고 불같은 성미의 소유자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끊임없는 통제를 벗어나는 집단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쓴 정치가였다. 타고났든 아니면 훈련에 의해서든, 그는 흥행사 기질이 풍부했다.
배리 스트라우스[12] (코넬 대학교 역사학 교수) / 스파르타쿠스 전쟁
로마사에서 노예 반란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스파르타쿠스가 봉기하기 얼마 전에도 시칠리아에서 노예 반란이 일어나 거의 전역이 점령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후세 사람들의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검투사라는 직업이 풍기는 잔혹함과 비정함, 로마인의 쾌락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비참한 처지, 그리고 그런 검투사들을 이끌고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던 로마를 상대로 봉기에 나선 스파르타쿠스의 비장함은 현대인들에게 여느 노예 반란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와 적대한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도 스파르타쿠스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하는 등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져, 저 고결한 성품의 남자가 어쩌다 노예의 신분이 되어서 봉기에 나서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군을 연파하고 멀리 도망쳐서 개인의 안위라도 챙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이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은 단순한 노예 해방의 상징을 넘어서,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와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3.1. 군사적 역량에 대하여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치품 구입을 금지하고 병기를 비축하는 한편 경계와 정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단순히 요행이나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기초적인 병법부터 충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단순히 '기본만 하는' 수준도 결코 아니었고 정석적인 지휘 능력도 비범하여 정면 대결에서도 몇 차례나 로마 군단을 격파했다. 놀라운 계략을 여러 차례 써서 로마군을 속이고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아 지략도 대단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쿠스는 단순한 노예 출신이 아니라 트라키아에서 부족민으로 지낼 때 로마군에서 보조병으로 근무했다는 추측이 있기도 하는데, 당시 가장 발달된 군사 기술을 가진 로마군과 함께 싸우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전술을 습득하는 가장 좋은 길이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는 스파르타쿠스가 본래는 고귀한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왜냐하면 당시 이런 병법이나 군사학은 노예의 처지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를 비롯한 고대 세계에서는 오늘날처럼 모든 국민들이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는 제도가 없었고, 비싼 수업료를 낸 사람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에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13]

물론 스파르타쿠스가 1류인지에 대해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루쿨루스폼페이우스카이사르와 같은 당대 로마 제일의 명장들과 직접 대결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2류들과 싸워 이긴 것만으로는 스파르타쿠스가 1류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 스파르타쿠스가 상대한 로마군도 대부분 새로 모집된 병사들로, 같은 로마군이라도 아시아나 스페인 원정에 동원된 정예들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긴 했다. 그 사령관이었던 크라수스도 지휘관에게 걸맞은 리더십이나 전술적 재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기강 잡는다고 생각해낸 것이 데키마티오였을 정도. 패잔병들 기강을 잡는다는 명분은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로마 지휘관들 중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지휘관이 없었을 리 없으므로 크라수스만큼 데키마티오를 대규모로 집행한 사례가 이전이나 이후나 없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의 상대가 2류라면, 스파르타쿠스 휘하의 병력은 3류나 4류란 표현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몇몇 검투사들을 뺀 대다수가 생전 군사 훈련은커녕 무기도 잡아본 적이 없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서 지휘관의 작계까지 수 차례나 씹어먹는 개트롤 그 자체였다. 이런 오합지졸 무리를 이끌고 (아무리 2군급이라지만) 당대 최강이던 로마군, 그것도 집정관급 군단을 몇 번이나 격파한 군사적 능력은 결코 낮춰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막판 상대한 크라수스의 군대에는 패하기는 했지만, 전력차가 압도적이었는데도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겨우 로마군이 승리할 수 있었다. 오히려 규율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던 오합지졸을 모아서 저 정도 군세를 상대로 겨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스파르타쿠스의 카리스마는 보통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스파르타쿠스가 직접적으로 1류 전략가라고 할 만한 전적을 보여주진 못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를 2류나 3류로 치부하는 것은 여러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상당히 부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로마 제국의 가도(街道)를 총정리한 프론티누스(Frontinus)는 책 '전략론(Strategemata)'에서 스파르타쿠스를 궁핍과 곤란을 견뎌내는 인물로, 그 전술은 그가 아는 모든 장군보다 낫다고 평가하고 있다.

3.2. 후대의 평가

스파르타쿠스는 고대 로마인들에게서는 "로마의 "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악명이 구전되어 중세에는 망각되었으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특히 프랑스 대혁명 시기부터 재평가되었다. 대표적으로 볼테르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으며, 베르나르 소린의 비극 '스파르타쿠스'를 보고 그에게 "내 타입의 남자입니다. 그는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죠."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트라키아인의 후손인 불가리아인[14]들은 현재까지도 스파르타쿠스를 자국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는 스파르타쿠스를 "고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위대한 장군, 고귀한 인격,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 부르며 극찬했고 또한 폼페이우스를 똥(shit)이라고 깠다. 이후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영은 스파르타쿠스를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세운 독일의 극좌 혁명 단체의 이름도 스파르타쿠스 연맹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을 맡은 스파르타쿠스가 영화화 될 때 어려움이 많았다.[15] 원작인 소설의 저자 하워드 패스트는 물론, 소설을 각색한 각본가 제임스 돌턴 트럼보 모두 매카시즘에 희생돼 각기 3개월, 11개월 징역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던 적이 있었던 것. 패스트가 이 소설을 집필한 것도 감옥에서였다. 트럼보의 얘기를 다룬 영화 《트럼보》에서 커크 더글라스가 트럼보가 만든 각본의 힘을 믿고서 매카시즘 압력을 모두 거부하는 게 인상적으로 나온다. 결국 영화 상에서 커크 더글러스는 트럼보를 믿고 자신의 뚝심대로 영화를 제작 및 주연으로 임했고, 케네디 대통령이 스파르타쿠스를 관람하면서 매카시즘이 공적 영역에서 패배하는 걸로 나온다. 실제로 이후 로널드 레이건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사람의 예로 스파르타쿠스를 들기도 했다.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민중 노예 봉기인 아이티 혁명의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도 스파르타쿠스를 본보기로 삼았다. 루베르튀르의 별명이 검은 스파르타쿠스(Black Spartacus).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싸운 주세페 가리발디는 스파르타쿠스에 관한 소설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가리발디는 스파르타쿠스에 대해 "구세주 그리스도처럼 노예들을 구하러 왔다."고 적었다.

4. 그를 소재로 한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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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외부 링크


[1]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2] 현재의 그리스 북부에서 불가리아에 걸친 지역으로 당시에는 그리스와는 구분되어 바르바로이로 불리던 문화권. 불가리아인들은 트라키아인이 남슬라브족, 불가르족과 더불어 현대 불가리아인의 3대 조상 중 하나인 것 때문에 트라키아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를 자국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다.[3] 엄밀히 따지자면 내연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들은 법적인 결혼이 불가능했다. 주인의 묵인하에서 동거녀와 살아갈 수는 있었지만.[4] 특히 전략, 전술같은 군사학은 제왕학과 동급 혹은 그 다음 가는 권위를 가진 고급 학문으로 분류되어서 그야말로 귀족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고대의 유명한 명장들의 대부분이 (개국공신, 중흥공신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명가 출신이거나 그 사회의 지도층 출신이 압도적이다. 예외로 분류되는 개국공신이나 중흥공신들 역시 사실 명가의 먼 후손이라느니 몰락 귀족 출신이었다는 사족이 붙는 경우가 많다.[5] 아피아노스의 기록에는 바리니우스 글라베르라고 되어 있다.[6] 현대 도시 사람들에게 "양치기"라고 하면 《》에 나올 법한 연약하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실제 고대의 양치기는 사나운 맹수와 그보다 더 무서운 도적에 맞서 수많은 양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된 직업이었으며 이들에게 무력은 필수였다.[7] 그러나 이런 패배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겔리우스와 렌툴루스 둘 모두 기원전 70년에 술라 개혁 이후 최초로 감찰관에 선출된다.[8] 로마의 군단 편제는 4천~6천으로, 약 3만 2천~4만 8천에 달한다. 이 정도면 고대에는 대군이다.[9] 군단 전체에 데키마티오를 집행했는지, 아니면 일부 부대만을 대상으로 했는지도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다. 미국 드라마 《스파르타쿠스 : 저주받은 자들의 전쟁》에서 크라수스가 데키마티오를 집행하는 장면이 자세하게 나오는데 엄청나게 잔혹하다.[10] 물론 이 과정에서 1만 2천 명에 달하는 노예군이 사살당했다. 그렇지만 로마군의 포위망은 한니발조차 뚫지 못하였고, 알레시아에서는 3배가 넘는 갈리아군이 양면에서 공략하였음에도 돌파하지 못했을 만큼 강력하였던 것을 고려하면 피해 규모와 별개로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11] 로마 사회에서 노예에 대한 대접은 소속된 장소와 주인의 성향, 가진 재주, 맡은 일에 따라 달라졌다. 노예들끼리도 뚜렷한 계층이 존재했고 그에 따라 처지가 달라졌다. 키케로의 노예 티로처럼 비서로 일하는 경우 대우가 괜찮았고, 그리스어 가정교사 역할을 맡는 노예는 주인의 자식을 가르치면서 경우에 따라 체벌까지 가할 수 있었다. 이런 노예들은 노예 신분이지만 그 활동에 따른 대가를 지불받아 자산 축적도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해방노예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주인 잘 만나고 재주 있는 일부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고, 농장, 공업장, 광산, 선박 등에서 일하는 대다수의 비숙련 노농 노예들은 흔히들 생각하는 쇠사슬에 묶인 채 채찍질당하면서 고된 노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성 노예들은 주인들에게 성적인 학대까지 당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성공한 이유 중 하나도 이탈리아 중남부에 산재한 대농장이나 광산 출신 노예들이 비참한 처우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너도나도 탈주해 반란군에 합류했기 때문이다.[12] 코넬 대학교 역사학과 학과장이었으며, 저명한 고대 군사사 전문가다.[13] 한 예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고대 세계 중에서 문맹이 가장 낮은 지역에 속했으나 그래도 전체 인구의 85%가 문맹이었고, 로마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전체 인구의 무려 95~97%문맹이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돈을 받고 글씨를 대신 읽어주거나 써주는 직업이 있었으며, 심지어 서기 2세기의 로마 관리들도 자기 이름으로 서명을 하는 것 이외에는 글씨를 제대로 못 쓸 만큼 문맹이 많았다. 실제 역사보다 로마를 극력 미화한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로마 시대에 문맹률이 낮았다고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이며 정작 고대 로마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은 모두 로마의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고 반박하고 있다.[14] 불가리아인은 트라키아인, 남슬라브인, 불가르인이 결합하여 생겨난 민족이다.[15] 스파르타쿠스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불가리아도 구 공산권 국가들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