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플로루스 (Flor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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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역사가 또는 시인.2. 생애
고대 문헌에는 다음 3명의 '플로루스'가 언급되었다.- 푸블리우스 안니니우스 플로루스(Publius Annius Florus): 로마 시인이자 수사학자.
- 루키우스 안니니우스 플로루스(Lucius Annaeus Florus): 에피토메(Epitome)를 집필한 역사가.
- 율리우스 플로루스(Julius Florus): 밤베르크 문헌(Codex Bambergensis)에 인용된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대화>에서 언급됨.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활약한 시인, 연설가, 작가라고 한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율리우스'는 필사 과정에서 필사자의 실수로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푸블리우스 안니니우스 플로루스와 루키우스 안니니우스 플로루스는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대화>와 <에피토메>의 수사적 표현이 비슷한 점 등을 근거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어서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고대 후기의 문벅학자 비르길리우스 마로(Virgilius Maro)에 따르면, 플로루스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에 로마로 이주했다. 도미티아누스가 루디 카피톨리니(Ludi Capitolini) 축제 때 시 작품 경연 대회를 열었을 때, 그는 여기에 참가했고, 그의 출품작은 청중의 호평을 받았지만 상을 받지 못하자 자신이 로마인이 아니기 때문에 상을받지 못했다고 여겨 혐오감을 느끼고 로마를 떠났다. 이후 로마 제국의 그리스어권 지역을 여행하며 여러 철학자, 웅변가들과 교류했고 자신도 극장이나 오데온에서 즉석 연설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플로루스는 이외에도 시칠리아, 크레타, 키클라데스 제도, 로도스, 이집트를 방문했다고 한다.
그 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의 수도인 타라코에 정착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베르길리우스에 대한 대화>를 집필했다. 트라야누스 집권 후 로마로 돌아와서 여러 시를 집필했다. 그 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친구가 되어 황제의 여행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플로루스는 하드리아누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바쳤다.
저는 카이사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브라타니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게르마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스키타이의 혹독한 추위에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요.
브라타니아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게르마니아 사람들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스키타이의 혹독한 추위에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요.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아래의 답시를 지었다고 한다.
나는 플로루스가 되고 싶지 않소.
여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싸구려 술집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배부른 벼룩들 사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
여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싸구려 술집 사이에서 나쁜 짓을 하려 몸을 숨기고
배부른 벼룩들 사이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니까.
3. 에피토메(Epitome)
플로루스는 로마의 역사에 관한 2권의 저서를 지었다. 후대 필사가들은 그의 저서에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의 <로마사>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아 리비우스 저서의 요약서로 간주했다. 실제로 첫번째 책에서는 리비우스의 저서 내용을 기반으로 삼았지만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대 세네카(세네카의 아버지)의 <역사> 등 다른 저자들의 글도 여러 편 인용했으며, 종종 리비우스의 것과 상반되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2번째 책에서는 리비우스 이후 자신의 시대까지의 로마 역사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한편, 에피토메는 첫번째 책 서문에서 로마의 건국과 성장을 다룬다고 밝혔으며, 두번째 책에서는 로마의 쇠퇴와 도덕의 변화를 다룬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락탄티우스는 플로루스로부터 로마 역사를 '유아기', '청년기', '성인기', '노년기'의 4개 시대로 나누는 방식이 도입되었다고 평했다.에피토메는 전반적으로 로마가 치른 전쟁에 초점을 맞췄고, 로마인들의 활약상을 찬미하는 투로 서술되었으며 모든 사건들을 로마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신용하기 어렵다. 게다가 세부 사항이 부정확하고 연대적, 지리적으로 불일치한 점이 많으며, 수사학 기법이 지나치게 많이 가미되어서 실제에 비해 과장된 내용이 많다. 하지만 리비우스의 역사 중 현존하지 않는 부분 일부가 이 저서에 들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유용한 자료로 평가받았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간의 내전을 다룰 때 카이사르를 옹호하는 성향을 드러내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로마의 여러 파벌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후대에는 142권에 달하는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던 이들에게 유용한 요약집으로 간주되었고, 19세기까지 로마 역사에 관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