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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0:33:14

제3차 노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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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노예 전쟁
영어: Third Servile War
파일:제3차 노예 전쟁.jpg
시기 기원전 73년 ~ 기원전 71년
장소 이탈리아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노예 반란군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겔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퀸투스 마르키우스 루푸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
파일:attachment/mon_256.png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스파르타쿠스
크릭수스
칸니쿠스
오이노마우스
카스투스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

1. 개요2. 사료3. 배경4. 경과
4.1. 발발4.2. vs 글라베르의 민병대4.3. vs 2차 원정군/세력 확장4.4. vs 집정관 겔리우스, 렌툴루스/북상과 남하4.5. vs 크라수스/시칠리아 후퇴 실패와 결전
5. 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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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전쟁[1]"○○○의 난"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 사건이 "스파르타쿠스의 난" 또는 "검투사의 난"으로 불렸겠지만 후대에 서양 사학자들이 당시 로마 공화정의 부당하고 잔혹하며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에 저항한 노예들의 투쟁에 "노예 전쟁"이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그 투쟁의 명분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비슷한 예로 1894년 조선에서 전봉준이 일으킨 봉기는 결국 실패해서 당시엔 "동비의 난"이라고 불렸지만 후대에 사학자들에 의해 높게 평가되어 현재는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즉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명제가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후대 사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기도 한다.]은)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했던 전쟁"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

기원전 73~71년, 스파르타쿠스 등이 이끄는 노예 반란군이 로마 공화국의 중심지인 이탈리아 반도에서 봉기하면서 발발한 노예 전쟁이다. 비록 진압되었지만 로마인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된 사건으로, 반란의 주동자인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는 후대에 길이 전해졌다.

2. 사료

제3차 노예 전쟁에 관한 주요 사료는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플루타르코스, 아피아노스의 기록이다. 살루스티우스는 저서 《역사》(Histories)에 기원전 78년부터 그의 시대까지의 로마 역사를 기술했는데, 노예 반란에 관한 기록은 단편만 전해진다. 플루타르코스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전기를 실을 때 스파르타쿠스의 봉기에 대해 기술했다. 독자들에게 도덕적인 교훈을 주고자 노력했던 그는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였지만 무척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칭송하면서 크라수스보다 훨씬 더 높게 평가했다. 아피아노스는 기원전 133년에서 기원전 35년 사이의 로마 역사를 기술했는데, 노예 반란의 세부 사항들을 극적으로 조명했다. 그외에도 플로루스 등 30여 명의 로마 역사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다뤘지만, 현존하지 않거나 파편적으로나마 전해진다.

3. 배경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노예는 경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구성 요소였다. 노예들이 제공하는 노동력은 복잡하고 고된 작업, 특히 광업 등 건강과 생명에 대한 위험과 관련된 직업의 수행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노예 없이는 대규모 농경지(일명 라티푼디움)의 경작이나 대규모 건축 등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노예는 중범죄를 저지른 시민을 노예로 삼는 것,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것, 타국의 자유 시민을 납치하여 노예로 삼는 것 등 여러 루트로 공급되었다.

로마 공화국은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수많은 노예를 자국으로 데려왔다. 기원전 167년 그리스 서쪽 에페이로스를 정복했을 당시, 로마인들은 무려 150,000명에 달하는 에페이로스인을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기원전 146년 고대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뒤 생존한 55,000명의 카르타고인을 노예로 삼았다. 현대 학계는 기원전 1세기 말 이탈리아 반도의 노예 인구는 300만명에서 750만명 사이였다고 추정하는데, 이는 전체 인구의 1/3에 달했다.

로마 공화국의 노예에 대한 대우는 일반적으로 가혹하고 무자비했다.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주인은 자신에게 속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고, 불구로 만들며, 심지어 죽여도 법 앞에서 책임을 지지 않았다. 또한 대다수 노예는 광산과 들판에서 일하면서 힘겨운 육체노동을 해야 했다. 노예 중에 한 명이라도 주인을 해칠 경우, 연대책임으로 그 집안의 모든 노예들이 가장 잔혹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당해 죽어야 했다. 노예가 되기 전에 높은 신분이었거나 지적인 능력이 탁월한 노예들은 주인의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거나 회계 업무를 담당하다가 주인의 선처로 해방노예가 되기도 했지만, 그 숫자는 전체 노예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로마 공화국에서는 포로 또는 노예끼리 검투 경기를 조직하는 관습이 있었다. 기원전 308년 삼니움 전쟁에서 승리한 뒤, 로마인들은 포로가 된 삼니움인들에게 자기들끼리 싸우도록 강요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264년 최초의 검투사 경기가 벌어진 이래로, 프로 검투사들이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투를 벌이는 것이 대중의 인기를 끌어 기원전 1세기에는 가장 인기있는 오락으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검투사를 양성하기 위한 특수학교가 설립되었다. 검투사는 노예 '엘리트'로 취급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상당한 금액에 판매되어 노예 소유주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검투사 학교의 소유자는 막대한 후원을 받는 대가로 소속된 노예들이 우수한 신체 상태를 유지하는 동시에 최상의 방법으로 무술 훈련을 받고 있는지를 수시로 점검해야 했다.

검투사들은 온갖 학대를 당하며 강제 노동을 강요당하는 노예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었지만, 무척 위험한 시합을 하며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들 중에 성공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쥔 자도 있었지만 극소수였고, 다수는 검투 경기에서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고 여생을 힘겹게 보내곤 했다. 자연히 많은 검투사들은 자유를 갈망했고, 기회만 되면 들고 일어나려고 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노예들이 한니발 바르카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었다고 간략하게 기술했고, 기원전 198년 라티움의 로마 식민 도시 세티아에서 노예들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최대 500명이 처형되었다고 서술했다. 또한 기원전 196년에는 에트루리아에서 노예들이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기원전 185년에는 아풀리아에서 양치기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직 집정관인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칠리아 섬에서는 기원전 136~132년에 제1차 노예 전쟁이 발발했고, 기원전 105~101년에도 제2차 노예 전쟁이 발발했다.

이러한 노예 반란은 특정 지역에서만 국한되었고, 지역 민병대를 상대로 초기에 승리를 거뒀지만 정규 로마군이 투입되면 크게 힘을 못 쓰고 진압되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노예 반란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73년,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4. 경과

4.1. 발발

기원전 73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바티아투스가 소유한 카푸아(현 캄파니아)의 검투사 수용소에 소속된 70명의 검투사들이 탈출을 계획했다. 기독교 신학자이자 철학자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크릭수스가 원형 극장에서 로마 사람들을 위한 정화 의식에서 제물로 사용될 예정이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연례 정화 의식은 2월 말에 거행되었으므로, 봉기의 시작은 그때 즈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사람이 이끄는 검투사들은 칼과 쇠꼬챙이로 무장하여 경비원들을 살해하고 거리로 뛰어간 뒤, 검투사들을 위한 무기를 다른 도시로 운반하던 여러 대의 마차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했다.

그 후 검투사들은 카푸아에서 탈출하여 이때까지만 해도 수목이 번창했던 베수비오산에 숨었다. 노예들은 트라키아인 스파르타쿠스와 2명의 갈리아(켈트)인인 크릭수스 및 오이노마우스를 지도자로 선출했는데, 그 중 군사적인 역량이 가장 뛰어난 스파르타쿠스가 리더 역할을 맡았다. 스파르타쿠스는 이들을 이끌고 베수비오 산 정상에서 방어하기에 편리한 장소에 정착하고 지나가는 여행객이나 상인들을 습격하여 자금을 뜯어냈다. 스파르타쿠스는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를 공정하게 실시했다. 카푸아에서 이들을 잡으려고 민병대가 몇 차례 파견되었지만 모조리 격파당하고 많은 양의 장비가 노획되었다. 이들의 명성이 점차 퍼지면서, 농장에서 힘겹게 일하던 노예들과 양치기 노예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숫자가 급격하게 불어났다.

4.2. vs 글라베르의 민병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푸아는 자기들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로마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법무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글라베르의 지휘하에 3,000명 가량의 민병대를 파견했다. 글라베르는 베수비오 화산을 포위해 노예군이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여,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항복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에 스파르타쿠스는 산비탈에서 자라는 덩굴과 나뭇가지로 밧줄과 사다리를 만든 뒤, 산 반대편 바위를 내려가는 데 이용했다. 그후 그들은 베수비오 산의 기슭을 돌아가서 방심하고 있었던 글라베르의 로마군을 습격해 완승을 거두었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노예군의 오이노마우스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법무관 글라베르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4.3. vs 2차 원정군/세력 확장

노예군은 전투에서 승리한 뒤 글라베르의 로마군 진영에 정착했으며 더 많은 노예와 추방자, 그리고 하층민들을 끌어들였다. 글라베르의 패배 소식을 접한 원로원은 이번엔 법무관 푸블리우스 바리니우스의 제2차 원정군을 파견했다. 바리니우스는 모종의 이유로 병력을 부하인 푸리우스와 코시니우스의 지휘하의 2개 부대로 나누었다. 플루타르코스는 푸리우스의 휘하에 약 3,0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기술했다. 스파르타쿠스는 먼저 푸리우스의 분견대를 습격하여 크게 물리친 뒤, 살리나 마을 근처에서 목욕 중이던 루키우스 코시니우스를 기습 공격했다. 코시니우스는 이날 거의 사로잡힐 뻔했다가 부하들의 분전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달아났다는 기록도 있고, 벌거벗은 채로 어쩔줄 몰라 하다 노예군에게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두 분견대가 모조리 패배하자 바리니우스의 군대에서 대규모 탈영이 발생했고, 종국엔 4,000명만 남았다. 이에 바리니우스는 군대를 진영에 배치하고 방벽과 도랑 및 제방으로 진영을 요새화했다. 이후 그는 재무관 가이우스 토리니우스와 함께 스파르타쿠스의 노예군 진영을 봉쇄했다. 스파르타쿠스는 군대의 규율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 앞에서 기둥에 묶인 시체를 세워둬서 멀리서 보면 보초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 뒤 진영에 불빛을 여러 개 피운 뒤 어둠을 틈타 진영을 빠져나갔다. 바리니우스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적군 진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급히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하다가 쿰스에서 자원병을 모집하던 중 스파르타쿠스의 급습을 받고 완전히 패배해 말과 호위병들을 전부 잃고 가까스로 빠져나갔다. 반란군은 뒤이어 가이우스 토라니우스의 진영을 습격해 그마저 격파하고 진영을 차지했다.

이제 이탈리아 남부에서 그들을 저지할 로마군이 없자, 노예군은 여세를 몰아 놀라, 누케리아, 푸리이, 콘센티아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메타폰투스 인근의 비옥한 땅에 진영을 세웠다. 이후 겨울 숙영에 들어가면서 신병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파르타쿠스를 따르는 이들은 7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성공에 도취된 많은 반란군이 수도 로마로 진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양치기 노예를 섭외하여 기병으로 삼아야 한다며 루카니아로 이동하도록 설득했다. 그가 루카니아로 진군한 뒤, 노예들은 곳곳을 약탈하고 불지르며 로마 주인들을 학살했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병사들의 이런 행위를 막으려 애썼고, 자살을 택한 로마 여사제를 영예롭게 묻으라고 명령했으며, 여사제의 장례식 때 400명의 포로가 참여하는 검투사 대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4.4. vs 집정관 겔리우스, 렌툴루스/북상과 남하

반란 2년째인 기원전 72년 봄, 노예군은 겨울 숙영지를 떠나 갈리아 알프스 이남 키살피나 속주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원로원은 이 소식을 접하자 두 명의 집정관들인 루키우스 겔리우스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클로디아누스에게 각각 2개 군단씩 이끌고 반란군을 진압하도록 했다. 렌툴루스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남하했고, 겔리우스는 아피아 가도를 따라 아풀리아로 이동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지휘하는 주력군은 북서쪽으로 진군했고, 크릭수스가 이끄는 별동대는 이들로부터 분리되어 가르간 산의 경사면에 자리를 잡았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이에 대해 스파르타쿠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트라키아로 빠져나가려 했고, 크릭수스는 이탈리아 남부 일대에서 군사 활동을 지속하고 싶어했다고 추정한다. 실제로 플루타르코스는 많은 노예들이 이탈리아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스파르타쿠스는 아테르누스(현 아브루초)에서 아펜니노산맥을 통한 원정을 이어가고 있었던 렌툴루스의 2개 군단을 공격해 타격을 입힌 뒤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렌툴루스는 즉시 그들의 진영을 공격했으나 크게 패배하여 상당량의 보급품을 노예군에게 헌납하고 패주했다. 한편, 크릭수스는 겔리우스의 로마군과 가르간 산에서 맞붙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크릭수스에게는 30,000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20,000명 가량의 병력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양측은 곧바로 치열한 결전을 벌였으나 전투력이 우월한 로마군이 곧 승기를 잡았고, 반란군의 3분의 2가 사살당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크릭수스 본인은 대대장 퀸투스 아리우스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후의 전개에 대해 아피아노스와 플루타르코스는 상반된 설명을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겔리우스는 크릭수스를 무찌른 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향하던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그들이 추격하는 걸 정찰병을 통해 확인하자 곧장 방향을 틀어 겔리우스와 맞붙어 크게 이겼고, 겔리우스의 군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이때 사로잡힌 300명의 로마 군단병들이 검투 경기를 벌여 서로 죽게 함으로써 크릭수스의 죽음을 기렸다고 한다.

그후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가능한 한 빨리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하고, 모든 잉여 물자를 불태우며 포로를 다 죽였고, 소떼를 해산시켰다고 한다. 한편 패전한 로마군은 재편성을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가 재출격해 피케눔 인근에서 노예군과 재차 맞붙었지만 패배했다. 아피아노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처음에는 로마로 이동하려 했지만, 자신의 군대가 충분한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해 이탈리아 남부로 후퇴하기로 했다고 기술했다. 반란군은 투리를 점령한 뒤 주변 영토를 습격하고 청동과 철을 가져와서 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반면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렌툴루스의 군단을 물리치고 그들의 보급품과 장비를 탈취한 뒤 이탈리아 북부로 곧장 향했다. 그리고 두 집정관은 이 패배로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어 로마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쿠스가 겔리우스 군단을 파괴하고 피케눔 인근에서 로마군을 재차 격파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스파르타쿠스의 군대는 무티나 인근에 도착한 뒤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로마군 10,000명을 격파했다. 이후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의 등장 이전까지 어떤 군사 활동을 했는지 기술하지 않았다. 다만 학계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무티나에서 이탈리아 남부 또는 중부로 남하했다고 본다.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목표인 '알프스 산맥를 넘어 트라키아로 빠져나가는 것'을 저지할 로마군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노예군은 돌연 남하를 택했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노예들이 알프스 산맥를 건너는 것에 겁을 먹었거나 로마로 가자고 강하게 요구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한편 일각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본래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평민파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연계하려고 북상했지만,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되고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끝났다는 걸 알게 되자 폼페이우스가 이탈리아 북부로 곧 오리라 여기고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 뒤 시칠리아 섬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전쟁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으리라 추정한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가 로마에서 불과 1주일 남짓 거리까지 접근하자 로마 시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로마를 그대로 지나쳐 아풀리아와 루키니아로 향했다.

4.5. vs 크라수스/시칠리아 후퇴 실패와 결전

반란 3년째인 기원전 71년, 로마 원로원은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며 로마군을 연이어 격파한 노예군을 무찌르기 위해 겔리우스와 렌툴루스의 잔여 병력과 6개의 새로운 군단을 합친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40,000명 ~ 50,000명으로 추정) 그리고 그 지휘관으로는 수석 법무관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선임했다. 말년에 카르헤 전투에서 대패하고 죽음을 면치 못한 것 때문에 군사적인 역량이 별로라는 혹평을 받지만, 크라수스는 술라의 내전 때 술라의 밑에서 맹활약하여 승리에 일조한 적이 있었다. 특히 콜리네 성문 전투 때 술라가 패배를 확신할 정도로 암울했던 전황을 잘 수습하고, 삼니움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가 히스파니아 반도에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지속하고,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소아시아 반도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원로원이 맡길 만한 인물은 오직 크라수스 밖에 없었다.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분견대와 피케눔(플루타르코스의 기록) 또는 삼니움(아피아노스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 그 결과 6,0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고, 900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후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주력군을 따라잡기 위해 부관 뭄미우스 휘하의 2개 군단을 앞서 보냈다. 이때 크라수스는 노예군과 마주쳤을 때 절대로 교전하지 말고, 자신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뭄미우스는 막상 스파르타쿠스와 마주치자 명령에 불복종하고 공격했다가 크게 패배했고, 이로 인해 독수리 깃발을 비롯한 여러 군기를 노획당했다.

이 소식에 격분한 크라수스는 뭄미우스의 살아남은 병사들을 일렬로 늘어 세운 뒤, 각각 10개의 제비를 뽑게 하여 그 중 당첨 제비를 뽑은 1명을 나머지 9명의 전우가 쳐죽이게 하는 '데키마티오'(decimatio)를 내렸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때 희생된 병사의 수가 4,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데키마티오'는 그 잔혹함이 너무 심하다고 하여 집단 항명과 같이 당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군기를 잡아야 할 최악의 상황일 때만 집행이 가능했으며, 그렇다 해도 선고만 하고 실제로는 시행하지 않거나 혹은 소수 범법자들만 대상으로 시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도망친 병사들에게 시행했으니, 크라수스가 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 살아남은 병사들도 전원 군단에서 추방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크라수스가 작전 재개를 결정한 뒤에야 겨우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로마군의 규율과 사기를 극적으로 끌어올린 뒤, 크라수스는 투리이 부근에 주둔한 노예군을 추격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초기에 로마 선봉대를 상대로 급습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곧 크라수스의 반격에 직면했다. 크라수스는 별도의 진영에 배치된 10,000명의 노예군을 공격하여 물리친 뒤,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주력군과 교전하여 우세한 교전비를 기록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을 분리하는 해협 근처에 위치한 루카니아로 이동하여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의 메세나(현 메시나)로 건너가려고 했다. 그는 사전에 킬리키아 해적들과 협정을 맺어 그들의 배를 타고 시칠리아로 건너가려고 했다. 한편 시칠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는 노예군의 침공 가능성을 구실 삼아 시칠리아인들로부터 보급품과 무기를 마구 강탈해 민심의 이반을 야기했다. 따라서 스파르타쿠스가 시칠리아에 상륙한다면, 민중의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킬리키아 해적의 수장이었던 헤라클리온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들이 노예군을 속였다고 기술했으며, 로마군이 해적들에게 뇌물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그 사이, 크라수스는 병사들을 독촉하여 300스타디온(55km)에 달하는 해자를 파고, 성벽을 그 뒤에 세웠다. 이리하여 노예군은 레기아 반도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제 꼼짝없이 굶주릴 지경에 몰리자, 스파르타쿠스는 돌파를 결심했다. 어느 겨울 밤, 노예군은 그의 지휘하에 도랑의 일부를 매우고 건너 방벽을 돌파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아침에 6,000명, 저녁에 6,0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를 따라 탈출할 수 있었던 노예군은 전체의 3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포위망을 뚫은 뒤 브룬디시움(현 브린디시)을 건너 동쪽의 발칸 반도로 건너가려고 했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3]의 분견대에게 저지되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병력으로는 브룬디시움을 함락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다만 칸니쿠스카스투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스파르타쿠스를 따라가지 않고 루칸 호수에 진을 쳤다가 크라수스의 군단과 맞붙어 궤멸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12,300명의 노예군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후 스파르타쿠스는 브루티움(현 칼라브리아)에 있는 페텔리안 산맥으로 후퇴했고, 크라수스는 부관 루키우스 퀸티우스 등에게 추격을 맡겼다. 스파르타쿠스는 카수엔트 강 유역에서 퇴각을 멈추고 로마군을 급습해 다시 한 번 격파했고, 재무관 트레멜리우스 크로파는 얼굴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로마 기병에게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교전으로 반란군의 자원은 거의 소진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피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그의 군대는 크라수스와 한판 붙자고 강요했다. 결국 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실라루스 강 인근에 진을 치고 크라수스의 본대와 맞붙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결전 당일
"오늘 이긴다면 좋은 말을 많이 구할 수 있지만, 진다면 말은 더 이상 필요없을 것이다."
라며 자신이 그동안 타고 다니던 말을 베어 죽였다. 이어진 교전에서 그는 특공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목표로 돌진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 바로 앞까지 침투해 앞을 가로막은 백인대장 2명을 처치했지만 결국 로마군에게 둘러싸여 버렸다. 전우들은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그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는 다트가 허벅지에 박혀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무릎을 꿇고 방패를 앞으로 내민 뒤 주변의 전우들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플로루스는 스파르타쿠스가 최전선에서 임페라토르처럼 용맹하게 싸우다가 쓰러졌다고 서술했다.

스파르타쿠스가 쓰러진 직후 노예군은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크라수스는 6,000명 이상의 노예군 포로를 카푸아에서 로마로 가는 길을 따라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한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던 노예군 잔여병 6,000명을 섬멸한 뒤 원로원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크라수스는 공개 전투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물리쳤지만, 나는 전쟁의 뿌리를 파괴했다."
원로원은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한 끝에 반란을 마무리지었다는 폼페이우스의 주장을 인정하기로 했다. 물론 그들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 리 없었지만, 공화국 최고의 거부로 영향력이 높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까지 얻음으로써 정계의 중심인물로 우뚝서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히스파니아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에게 이왕 거행할 개선식에 스파르타쿠스 토벌 업적을 덧씌워주고 반대로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얕은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4] 때문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한 단계 아래인 '오바티오'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그래도 오바티오 때 수여하는 금속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다. 크라수스는 이 일로 폼페이우스에게 반감을 품었고, 두 사람은 이후로 오래도록 반목했다.

5. 전쟁 이후

스파르타쿠스가 죽은 후에도 잔여 노예 집단은 오래도록 이탈리아 남부에서 암약했다. 기원전 62년에는 반란군이 투리를 점령하고 오랫동안 통제를 유지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정권 탈취를 갈망했던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지지자들이 이들과 연합하여 로마를 도모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카틸리나가 죽은 뒤, 투리의 반란군은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인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에게 최종적으로 토벌되었다.

하지만 3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각지를 종횡무진하며 로마를 뒤흔들었던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인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로마의 정치인들은 정적을 비난할 때 로마의 적이라는 의미로 '스파르타쿠스'라고 지칭했으며, 폼페이 유적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말을 타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또한 검투사들의 경기장 주변에 군대를 배치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노예 반란은 로마 제국의 기나긴 역사 내내 종종 발생해 로마인들의 우환거리로 남았다.
[1] 일반적으로 실패한 봉기는[2] 이마저도 시행한 자가 당대 로마 최고 부호이자 권력가였던 크라수스였던데다, 야만족도 아니고 노예군에게 등을 돌려 달아났다는 점에 의해서 정상참작된 것이다.[3]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의 동생[4] 덤으로 원로원으로서는 크라수스의 개선식을 절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개선식을 치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의미인데, 스파르타쿠스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개선식을 허락하면 로마 원로원이 직접, 한낱 노예 검투사에 불과했던 스파르타쿠스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