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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8b0000> 가족 | 아버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계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 양아버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 어머니 아티아 · 누이 소 옥타비아 | ||
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전투 | 필리피 전투 · 옥타비아누스의 일리리아 원정 · 악티움 해전 · 칸타브리아 전쟁 · 갈루스의 아라비아 원정 · 쿠시-로마 전쟁 · 게르마니아 전쟁 · 토이토부르크 전투 | ||
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해방자 내전 영어: Liberators' civil war | ||
시기 | 기원전 43년 ~ 기원전 42년 | |
장소 | 이탈리아, 시칠리아, 아프리카, 발칸 반도, 지중해 동부 | |
원인 |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파의 대립 | |
교전 세력 | 제2차 삼두정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해방자파 파르티아 |
지휘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티투스 섹스티우스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파보니우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루키우스 미누키우스 바실루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파르멘시스 아울루스 알리에누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1]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 퀸투스 라비에누스 세라피온 오로데스 2세 파코로스 1세 |
병력 | 28개 군단 | 19개 군단 130척 |
피해 | 불명 | 불명 |
결과 | 제2차 삼두정파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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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3~4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후 '해방자'를 자처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이 제2차 삼두정을 결성한 뒤 카이사르의 복수를 천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등에 맞서 싸운 내전. 제2차 삼두정파가 승리하면서 로마 공화국은 사실상 무너지고 지중해 세계의 패권은 카이사르파의 수중에 넘어갔다.
2. 배경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 독재관을 역임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데키무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등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 암살자들은 자신들을 '해방자'라고 칭하며, 폭군 암살이 공화국의 회복으로 이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암살극에 호응하긴 커녕 집에 틀어박혔고,[2] 암살자들은 여론이 예상과는 달리 호응해주지 않자 유피테르 신전에 숨었다.한편, 현직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를 설득하여 독재관의 모든 서류와 유언장을 확보했다. 이후 7억 세스테르티우스에 달하는 국고를 확보해 카이사르를 따랐던 병사들과 지지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시 근처에 전투 준비가 된 부대는 기병장관(부독재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군대 뿐이었다. 그는 당초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로마에 군대를 이끌고 가 포로 로마노를 점거한 뒤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를 죽인 자들을 척살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상황이 불확실한데다 암살자들 중 자신과 가까운 이들도 많았고, 또다른 내전이 촉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레피두스를 말렸다. 그는 '해방자'들과 카이사르파를 중재해 3월 17일 원로원 회의에서 타협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3월 17일 데메테르 신전에 의원들이 모였지만,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과 군중이 둘러싸고 있어서 암살자들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몇몇 의원이 카이사르를 폭군으로 선언하고 암살자들에게 감사를 표하자고 제안하자, 안토니우스는 그렇게 되면 카이사르의 모든 명령이 취소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많은 의원들이 카이사르에 의해 공직에 임명되거나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을 사면하고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모든 명령을 승인하자고 제안했고, 키케로 등이 동의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또한 합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아이들을 공화파에 인질로 넘기기로 했다.
3월 19일 안토니우스의 집에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낭독되었다. 주요 상속인은 카이사르의 양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으며, 평민 한 사람당 300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3월 19일 또는 20일에 카이사르의 장례식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다. 군중은 카이사르의 유해를 보고 분노해 폭동을 일으켰고, 암살자들은 로마를 탈출해야 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4월 초에 로마를 탈출해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했고,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지정된 대로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리하여 로마에서 전권을 잡게 된 안토니우스는 "독재를 영원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히스파니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불러들여 로마 함대 사령관으로 앉히자고 제안해 옛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자신은 마케도니아 속주를 배정받았고, 동료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는 시리아 속주를 맡기로 했다. 여기에 최대 6천 명을 호위병으로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백인대장을 모집하고 병사를 선발하여 군대를 통솔할 권한도 받아냈다.
안토니우스는 여러 명을 새 의원으로 임명하고, 속주와 속국에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카이사르의 공개되지 않았던 명령이라고 주장했지만, 동시대인들은 그가 거액의 뇌물을 받는 대가로 가짜 법령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여겼다. 키케로는 이에 대해 친구 아티쿠스에게 다음과 같이 한탄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되지 않겠지만, 그의 메모의 노예가 되었다네."
4월 중순, 그리스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자신을 양자로 지명하고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로마의 정세가 너무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로마에 가서 카이사르의 상속을 받아들이기기로 하고 친구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등과 함께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4월 19일 키케로를 만나 그의 호의를 얻어냈고, 매형 소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통해 원로원내 거물급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로마에 도착한 뒤 카이사르가 약속한 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카이사르가 자신이 아니라 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내심 불만을 품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재산을 그에게 양도하는 걸 거부하고 입양 절차 또한 질질 끌었기 때문에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로부터 돈을 받아내지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자신의 재산과 토지 소유물을 어머니, 계부와 함께 팔고 마련한 재산을 시민들에게 나눠줬다. 그는 이를 통해 많은 이의 호의를 얻어냈다. 기원전 44년 초여름, 카이사르의 옛 병사들이 로마로 몰려들면서 치안이 불안정해졌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지지자와 클리엔테스들을 규합하면서 내란의 조짐이 감돌았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6월 3일 속주 교환에 관한 법률을 제시했다. 이 법에 따르면, 마케도니아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고, 갈리아 키살피나는 자신이 차지하며, 브루투스를 아시아로, 카시우스를 시칠리아로 보내 로마에 빵을 공급하는 역할을 맡겼다. 브루투스는 이를 모욕적이라고 여겼다.
6월 8일, 원로원의 저명한 인사들이 안치오에서 회의를 열었다. 키케로, 브루투스, 카시우스, 브루투스의 어머니 세르빌리아, 카시우스의 아내이자 세르빌리아의 딸인 유니아 테르티아, 브루투스의 아내 포르키아[3] 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키케로는 희망을 잃고 사위 돌라벨라에게 자신을 시리아에 부관으로 데려가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바람이 그의 배를 이탈리아 해안에 못박았고, 브루투스와 새로운 만남을 가진 뒤 마음을 달리 먹었다. 그는 8월 31일에 로마로 돌아간 뒤 안토니우스 탄핵을 본격적으로 단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동방에서 안토니우스에 대항하기로 결심했다. 8월 말, 두 사람은 각각 마케도니아와 시리아로 가서 군대를 징발해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그 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집정관 임기 만료가 임박하자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속주를 양도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그가 틀어박힌 무티나를 포위 공격했다. 원로원은 키케로의 제안에 따라 안토니우스의 행위를 규탄하고, 행정관을 역임한 적이 없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이 주축이 된 군대를 통솔하려면 옥타비아누스의 협력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43년 1월 7일, 옥타비아누스는 아레티아의 숙영지에 도착하여 병력을 집결시켰고, 뒤이어 현직 집정관 아울루스 히르티우스, 가이우스 비비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와 함께 무티나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무티나 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해 갈리아로 도주했지만, 히르티우스와 판사는 전사했다. 원로원은 사망한 두 집정관의 군대를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양도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들은 카이사르를 암살하는 데 관여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경멸하고 카이사르의 양자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들은 카이사르의 심복이자 자신들과 함께 전장에서 함께 싸운 안토니우스와 계속 싸우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편, 아스쿨룸에 있던 안토니우스의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는 안토니우스가 크게 패하고 갈리아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신병을 모집하여 2개 군단을 결성한 뒤 아펜니노 산맥을 횡단하여 400마일을 행군한 끝에 바다(Vada)에서 안토니우스와 합류했다. 당시 무티나 패전으로 인해 군대가 와해되었던 안토니우스는 그의 합류에 힘입어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에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을 맡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합세하여 로마로 남하하고자 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아프리카에서 군단을 소집하고 동방에 가 있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에게 레피두스-안토니우스 연합과 맞서라고 요구했고, 갈리아 코마타[4] 속주 총독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에게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협력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상황은 원로원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 숙영지를 떠나지 않고 7월에 로마에 대표단을 보내 집정관에 선출해달라고 요구했다. 원로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옥타비아누스는 8월에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원로원은 급히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2개의 아프리카 군단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자체에 1개 군단이 있으니 그들과 합세한다면 버티지 못할 것 없다고 여기고 태도를 바꿨다. 그러나 불행히도 3개 군단 모두 옥타비아누스 편으로 돌아섰고, 그는 전투 없이 로마 시를 점령했다. 그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대가로 공식적으로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었으며, 8월 19일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가 13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로 진군했다.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대세의 흐름을 파악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와 협력하길 거부하고 안토니우스 편에 섰다.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합류하려고 마케도니아로 떠나려 했지만, 군대가 그를 배신했다. 결국 그는 300명의 기병과 함께 탈출했지만, 나중에는 10명만 그를 따라갔고, 알프스를 넘던 중 어느 작은 부족 지도자에게 붙들려 처형된 뒤 수급이 안토니우스에게 바쳐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상대하고자 북상했지만,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가 20개 군단을 모아서 로마로 진군하려는 상황에서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지속하다는 건 어리석다고 판단해 9월부터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기원전 43년 11월, 보노니아 근처 라비니아 강 한 가운데의 작은 섬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3자가 회동했다. 이틀간 이어진 회의 끝에, 공화정을 사실상 종식시키는 결정이 내려졌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직을 사임했고, 그 대신 세 사람이 로마를 나눠서 통치하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레피두스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 사르데니아, 시칠리아를 접수했고, 이탈리아는 공동으로 관할하기로 했다. 해방자를 자처하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가이우스 카시우스에 대한 전쟁 수행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맡기로 했고, 레피두스는 로마를 지키기로 했다. 또한 병사들에 대한 보상으로 이탈리아의 18개 도시에 속한 땅을 그들에게 분배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무티나 내전은 종결되었고 제2차 삼두정치가 탄생했다.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어 로마에 남아있던 퀸투스 페디우스에게 서한을 보내 12~17명의 이름으로 구성된 첫번째 숙청자 명단을 제시하며 이들을 숙청하라고 명령했다. 이 사실이 새어나가자 로마 시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페디우스는 비밀 명단을 공개하면서 탄압은 이것으로 제한될 것이니 안심하라고 권했지만, 시민들의 동요가 워낙 극심해서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다가 얼마 안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후 삼두는 로마로 입성한 뒤 본격적인 숙청에 착수했다. 숙청자 명단의 최상위에 올려진 키케로는 피신하다가 추격대에게 잡혀 살해되었고, 그의 머리와 오른손은 자신을 수없이 비방한 그에게 원한을 품었던 안토니우스에게 전달되었다.
삼두는 단지 17명만 숙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을 '관련자'로 지목하여 숙청 명단에 포함시켰다. 이는 해방자파와의 대결을 앞두고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몰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부동산 소유자는 연간 소득의 절반을 지불해야 했는데, 이 금액은 삼두의 마음에 따라 임의로 설정되었다. 모든 노예는 세금을 내야 했으며, 유산계층의 대표자들은 독신 여성일 지라도 연간 소득에 해당하는 일시금과 재산 가치의 2/3을 추가로 지불해야 했다. 삼두의 숙청으로부터 가까스로 빠져나온 인사들은 동방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또는 시칠리아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의 복수를 천명한 제2차 삼두정치파와 해방자파의 대결이 임박했다.
3. 전개
3.1. 아프리카 쟁탈전
로마 정계가 카이사르 암살 후 혼란에 빠져 있을 무렵, 아프리카 속주는 해방자파의 편에 선 퀸투스 코르니피키우스가 통치했다. 삼두파가 로마를 장악한 뒤, 지중해 세계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아프리카를 가지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코르니피키우스에게 누미디아 총독 티투스 섹스티우스에게 통치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코르니피키우스가 거부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티우스에게 코르니피키우스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섹스티우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내륙 지역을 장악했지만 코르니피키우스의 부하 벤티디우스에게 포위되었고, 코르니피키우스의 또다른 부하 랄리우스는 누미디아를 침공하여 키르타를 포위했다.다급해진 섹스티우스는 누미디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아라비오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코르니피키우스 역시 아라비오에게 자신 편에 서라고 권유했다. 아라비오는 처음에는 폼페이우스의 지지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걸 고려하여 코르니피키우스 편을 들려 했지만, 나중에 해방자파가 결국 패할 거라 여기고 섹스티우스 편에 섰다. 섹스티우스는 아라비오의 도움 덕분에 포위망을 돌파하고 벤티디우스를 처단한 뒤 코르니피키우스를 상대로 우티카로 진군했다. 랄리우스는 키르타 포위를 해제하고 우티카로 달려왔지만, 우티카 성벽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해 코르니피키우스는 전사하고 랄리우스는 자살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 속주는 삼두파의 수중에 넘어갔다.
3.2. 시리아 쟁탈전
기원전 44년 4월, 해방자파의 일원인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생전에 정했던 대로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아시아에 도착한 뒤 도시를 요새화하는 한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돕고자 돈과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가 11월 또는 12월에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돌라벨라는 카이사르 암살 때 해방자파를 지지했지만, 안토니우스와 연계하기도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정치 행보를 보였다. 그는 돌라벨라를 신용할 수 없는 자라고 여기고, 식량을 공급해주긴 했지만 군자금을 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돌라벨라는 아시아 속주의 여러 요새를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기원전 43년 1월 중순, 최후의 수단으로 야습을 택해 스미르나 시를 공략했고, 이곳에 있던 트레보니우스는 곧 체포된 뒤 피살당했다.돌라벨라는 트레보니우스의 수급을 총독의 관저에 전시한 뒤 리키아에서 함대를 끌어모아서 기원전 43년 5월 킬리키아에 상륙해 자신에게 복종을 거부한 안티오키아를 포위 공격했다. 또한 아울루스 알리에누스를 이집트에 파견해 그곳에 주둔한 4개 군단을 소집하고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로부터 함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던 중 원로원으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관할권을 넘겨받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12개 군단을 이끌고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으며, 원로원이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리오디케아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던 아울루스 알리에누스의 군대가 돌라벨라를 구원하고자 진군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카시우스의 압도적인 병력에 직면하자 금세 태도를 바꿔 카시우스의 편에 섰다.
한편, 시리아에서 천혜의 요새로 손꼽히는 아파메이아에서는 기원전 46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촌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고 섹스투스 휘하 군대 대부분을 인수하고 노예도 모집해 총 2개 군단을 확보한 뒤 파르티아 샤한샤 오로데스 2세의 장남 파코로스 1세의 지원을 받았다. 섹스투스의 부관 또는 새로 임명된 시리아 총독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가 진압을 시도했으나 격파당하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를 파견해 아파메이아를 공략하게 했다. 무르쿠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아 포위 공격을 시작했지만, 방비가 워낙 강력해서 공략에 실패했다. 이에 비티니아 총독 마르키우스 크리스푸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크리스푸스는 3개 군단을 더 데려왔고, 로마군은 총 6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를 포위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무르쿠스는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등 '해방자'편에 섰지만, 카이사르가 생전에 내린 명령에 따라 포위를 이어갔다.
카시우스가 시리아에 상륙했을 때, 아파메이아 공성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무르쿠스와 크리스푸스는 원로원의 지령에 따라 카시우스에게 군대를 넘겼다. 바수스의 2개 군단 중 하나도 카시우스 편으로 넘어갔지만, 바수스 본인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고 1개 군단을 이끌고 아파메이아에서 계속 성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2번째 군단 마저 카시우스에게 가담했고, 그는 종적을 감췄다. 이렇게 병력을 끌어모은 카시우스는 돌라벨라가 숨은 라오디케아를 포위 공격했다. 돌라벨라는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으나, 클레오파트라가 파견한 함대는 역풍에 의해 저지되었다. 카시우스는 라오디케아를 지속적으로 공격했지만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문을 지키는 백인대장에게 뇌물을 줘서 성문을 열게 했다. 이리하여 도시가 함락되자, 돌라벨라는 호위병 중 한 명을 시켜 자신을 검으로 찌르게 하는 방식으로 자살했다. 이리하여 시리아는 카시우스가 이끄는 해방자파의 수중에 넘어갔다.
3.3. 발칸 반도 쟁탈전과 브루투스-카시우스의 연합
한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아테네에 도착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한 뒤 마케도니아로 부임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와 일리리쿰 현지 주둔 병력을 규합하여 3개 군단을 확보하고, 16,000달란트에 달하는 군자금을 속주민들로부터 강탈해 더 많은 병력을 모집했으며,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돌라벨라에게 피살되기 전에 보내 준 병력도 확보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마케도니아 속주를 동생 가이우스 안토니우스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무티나 내전을 빌미로 마르쿠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고 마케도니아 속주로 부임할 예정이던 가이우스의 권한 역시 무효화했다.가이우스 안토니우스는 이에 맞서 일리리아 산맥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브루투스와 맞섰다. 그러나 43년 2월 말 아폴로니아에서 브루투스의 군대에게 포위되었고, 결국 3월 중순에 항복했다. 처음에는 브루투스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고, 휘하 부대를 계속 이끌 수 있었다. 키케로가 브루투스에게 그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브루투스는 무시했다. 그러나 가이우스가 병사들에게 반란을 부추겼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브루투스는 그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감시를 엄하게 했다. 이후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많은 인사를 숙청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브루투스는 자기가 임명한 마케도니아 총독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에게 가이우스 안토니우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호르텐시우스는 백인대장 가이우스 클로디우스에게 처형을 집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발칸 반도의 패권을 확보한 브루투스는 얼마 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대규모 병력을 규합하여 아드리아 해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자 카시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카시우스는 돌라벨라를 무너뜨린 뒤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 사절을 보내 상당량의 배상금과 함대를 보내지 않는다면 이집트를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나라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이집트 해군 사령관 세라피오가 클레오파트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카시우스에게 40척을 제공했다.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기 말을 듣지 않자 그녀를 응징하고 풍요로운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집트를 정복하려 했다. 그러다가 브루투스로부터 즉각적인 합류를 요구하는 메시지를 받자 시리아에 1개 군단을 남겨두고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파르티아로 보내 우수한 기병대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카시우스는 북상하면서 시리아 도시들로부터 군자금을 강제 징수했고, 지불이 지연되는 도시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 타르수스는 1,500달란트를 지불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신성한 성전 물건을 팔아치워야 했다. 그럼에도 돈이 부족했기에 일부 시민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한편, 카시우스는 기병대를 파견해 친 카이사르파 인사인 카파도키아 왕 아리오바르자네스 3세를 살해하고 동생 아리아라테스 10세를 새 군주로 세웠다. 그 후 기원전 43년 말 또는 42년 초,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스미르나에서 합세했다. 브루투스는 삼두파가 최대 40개 군단을 가지고 있으며, 8개 군단이 이미 건너왔으니 서둘러 발칸 반도로 진격해서 적이 거점을 확보하는 걸 막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그보다는 보급로를 위협할 수 있는 로도스와 리키아를 공략하여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먼저라고 주장했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판단하고, 자신은 리키아를 맡고 카시우스는 로도스를 맡기로 했다.
3.4. 로도스와 리키아 공방전
카시우스가 로도스 인근에 도착하여 공격을 준비하자, 로도스인들은 방어를 준비하는 한편 카시우스가 일찍이 로도스에서 공부할 때 철학을 가르쳤던 아르켈라오스를 보내 카시우스를 설득하게 했다. 아르켈라오스는 카시우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은 로도스인으로서 이 나라를 뼈속 깊숙이 사랑하니, 자신을 봐서라도 제발 로도스를 파괴하지 말아달라고 설득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카시우스는 스승의 간절한 설득에 얼굴을 붉혔지만, 해방자파를 돕기를 거부하는 로도스인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전쟁은 공화정을 수호하는 자와 폭군의 대결이며, 모든 로마 동맹국과 속주들은 공화정을 수호하는 데 함께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결국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카시우스는 부관 파니우스와 렌툴루스에게 80척의 함대로 도시를 봉쇄하게 했다. 로도스 측은 33척의 함대로 맞섰으나 2척이 침몰하고 3척이 노획되는 패배를 당하고 물러섰다. 적이 도시를 봉쇄하자 다시 출격했으나 이번에도 격퇴되어 2척의 배를 잃었다. 그 후 로마군은 육지와 배 모두에서 도시에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던 중 로도스 내 카시우스 지지자들은 몰래 성문을 열어줬고, 로마군은 즉시 도시로 진입하여 로도스를 순식간에 장악했다. 카시우스는 50명의 저명한 시민을 처형하고 로도스인들에게 8,000달란트의 배상금을 부과했다.
한편, 리키아를 맡은 브루투스는 리키아의 산투스 시 주민들에게 귀순을 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공성전을 벌였다. 산투스 주민들은 맹렬히 저항했고, 브루투스는 머리에 돌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도시는 곧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패배가 불가피하자 집단 자살했다. 로마 인들은 노예, 소수의 자유인 여성 및 150명의 남성만을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접한 다른 리키아 도시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브루투스에 충성을 맹세하고 돈과 함대를 제공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브루투스는 카시우스보다 훨씬 더 자비롭게 행동했으며, 리키아 도시에 150달란트만을 요구했다고 한다.
3.5. 임박한 대결
얼마 후, 카시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돕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카시우스는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에게 60척의 함대를 맡겨 이집트 함대를 차단하게 했다. 무르쿠스는 이집트 해안가로 향하던 중 여왕의 함대가 아프리카 해안에서 폭풍으로 흩어지고 여왕은 귀국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방향을 돌려 브룬디시움으로 항해해 이미 발칸 반도에 들어선 적군과 이탈리아 사이를 차단하여 식량 보급을 막으려 했다.당시 삼두파는 레피두스가 로마를 지키고 옥타비아누스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상대하며,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로 건너가 브루투스를 상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앞서 보낸 선봉 군단이 적 함대의 보급 차단으로 인해 곤경에 처하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방향을 돌려 안토니우스와 합세했고, 두 사람은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전 함대를 소집해 20개 군단을 추가로 태워서 발칸 반도에 먼저 건너가 있던 8개 군단과 합세하기로 했다. 카시우스는 무르쿠스를 돕기 위해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함대를 추가로 보냈다. 아헤노바르부스와 무르쿠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연합해 130척의 군함과 다수의 보조함을 형성한 뒤 아드리아 해로 항해해 적의 식량 보급을 방해했다.
기원전 42년 여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리키아와 로도스 공략을 달성한 뒤 사르디스에서 합류한 후 헬레스폰트를 건넜다. 그 후 카시우스는 병사들을 소집했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 중에는 지난날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따랐던 이들이 많았다. 그는 병사들에게 "너희가 카이사르를 따라 전장에 섰던 건 카이사르를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위해서였다. 한 사람을 위해 국가의 대의를 저버리지 마라"고 밝힌 뒤, 카이사르를 위해 복수하겠다는 삼두파의 위선을 규탄하고 민중들이 삼두의 폭정에 치를 떨고 있으니 승리는 자신들에게 돌아갈 거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면서 이번에 승리를 거두면 로마를 구한 영웅으로 대접하며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장병들은 카시우스를 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적에 끝까지 맞서겠다고 서약했다.
한편,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와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가 이끄는 선봉 8개 군단은 트라키아로 깊숙히 들어가서 적이 진군할 길목을 차단했다. 그러나 적군이 다른 길로 우회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들은 별 수 없이 필리피 서쪽으로 퇴각했다. 이윽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주력군이 바다를 건너 일리리아 해안가에 상륙한 뒤 선봉대와 합세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에그나티아 가도의 양쪽에 2개의 잘 요새화된 진영을 세우고, 타소스에 있는 후방 보급 기지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닦았다. 두 진영은 1.5km 정도 떨어졌지만 요새로 연결되었으며, 높은 언덕에 자리았다. 특히 남쪽 진영 주변은 행군이 불가능한 늪지대여서 포위 공격은 불가능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 맞은 편에 자리잡았고,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 맞은 편에 진을 쳤다.
3.6. 필리피 전투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80,000명의 보병, 20,000명의 기병, 속국 왕들이 제공한 대규모 보조병들을 보유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28개 군단병과 보조병 100,000명과 13,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적을 고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에 안토니우스는 우회로를 뚫기로 결정하고 병력 일부를 남쪽 늪지대로 파견했다. 대규모 행군이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안토니우스의 파견대는 로마군 특유의 토목기술로 행군로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했다.기원전 42년 10월 3일, 카시우스는 적이 우회로를 뚫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러다가는 우리 보급로가 위협받겠다'라고 판단하고 적을 급습했다. 파견대가 위험해지자,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의 주둔지와 늪지대 사이에 있는 요새화 지대로 병력을 투입하면서 양자간의 격전이 벌어졌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군이 적 진영을 장악했고, 카시우스는 몇몇 부하들과 함께 인근 언덕으로 도주했다.
한편, 브루투스의 군대는 출격 준비를 하던 중 기다리느라 지친 나머지 브루투스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당시 옥타비아누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건강이 악화되어서 십여 일간 군중에서 치료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적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자, 지휘관이 몸져누운 상태여서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한 옥타비아누스군은 삽시간에 허물어졌고, 옥타비아누스는 들판으로 달아나 늪에 숨은 채 아군이 도우러 올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날 브루투스의 전사들은 3개 군단을 격파하고 2,000명에 달하는 스파르타인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브루투스군과 안토니우스군은 상대 진영을 파괴하고 불사른 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는데, 흙먼지가 심하게 끼는 바람에 서로 지나쳐갈 때 아군으로 오인해 별다른 충돌을 벌이지 않았다. 이날 전투에서 카시우스의 군대는 최대 8,000명을 잃었고, 옥타비아누스는 16,000명을 잃었다고 한다.
카시우스는 자신의 부대가 무너지고 브루투스의 군대 역시 보이지 않자 완전히 졌다고 오판했다. 그러던 중 브루투스가 카시우스의 패전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기병대를 보냈는데, 카시우스는 그 기병이 적 기병이라고 오인하고 하인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날은 공교롭게도 카시우스의 생일이었다고 한다. 브루투스는 카시우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통곡했지만, 아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숨겼다.
첫번째 필리피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무렵, 무르쿠스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함대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가 이끄는 적 수송 함대를 포착하고 공격했다. 칼비누스는 적 함대가 함대 사이를 뚫는 것을 막기 위해 배를 밧줄로 연결했다. 무르쿠스는 이에 대응해 불을 붙인 화살을 적 함대에 퍼부으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함대가 순식간에 화염에 휩쓸리자, 배에 타고 있던 용병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일부는 적 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가 전사했다. 수송선들은 대거 노획되거나 파괴되었고, 17척의 전투함도 노획되었다. 칼비누스는 쪽배를 타고 가까스로 빠져나와 전투 5일째 되었을 때 브룬디시움으로 돌아와서 그가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카시우스가 자살한 뒤, 브루투스가 군대를 단독으로 통솔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2,000 데나리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번에 승리하면 테살로니카와 스파르타 도시들을 약탈할 권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생애에 큰 오점을 남길 결정이었다며, 이탈리아 전역을 약탈하게 만든 삼두정과 같은 수준으로 몸을 굽혀서는 안 됐다고 비판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보급이 끊기면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들에게 보상금으로 5천 데나리를, 군단에 2만 5천 데나리를 추가적으로 지급하기로 약속해 사기를 끌어올렸다.
안토니우스는 병력을 서서히 진군시켜 브루투스 진영의 남쪽에 포진하는 데 성공했다. 브루투스는 이러다가 측면이 공격당할 것을 우려하여 전열을 남쪽과 동쪽으로 길게 늘어뜨려 에그나티아 가도와 평행하게 포진하고 요새를 여럿 건설했다. 브루투스는 적이 식량 부족을 겪고 있으니 겨울까지만 기다리면 무너질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에게는 카시우스가 가졌던 군사적 역량이나 지도력이 없어서, 즉각적인 전투를 요구하는 병사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계속된 지연전술에 불만이 높아져가던 동방에서 고용한 용병들과 모집한 병사들 가운데 일부가 탈영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그는 군대가 와해되기 전에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10월 23일 고지에서 내려와 적과 맞붙었다.
전투 결과는 해방자파의 참패였다. 적군이 뿔뿔이 흩어지자, 옥타비아누스는 점령한 적진을 지키기 위해 남았고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가 잔여 병력을 재집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길을 따라 분견대를 파견했다. 브루투스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산으로 후퇴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전투를 계속해 진영을 탈환하거나 배를 타고 대피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었다. 병사들은 이미 할 만큼 했으며 자신을 돌볼 때라고 답했다. 브루투스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친구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해 목숨을 끊었다. 소 카토의 아들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유명한 웅변가였던 호르텐시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5] 등도 브루투스를 따라 자살했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코르비누스 같은 일부 귀족들은 안토니우스에게 항복하고 그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전했다. 잔존 공화정 군 중 약 1만 4천 명은 삼두정군으로 편입되었다. 나이 많은 고참병들은 이탈리아로 돌아가 제대했으나, 일부는 필리피에 그대로 남아 식민시를 건설했다.
4. 이후
필리피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해방자파를 끝장낸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비밀리에 연합하여 반기를 들려는 혐의가 있다고 고발했다. 레피두스는 본래 가지고 있던 히스파니아 일대를 옥타비아누스에게 빼앗기고 폼페이우스와 음모를 꾸민 혐의가 사실인지 조사받아야 했다. 또한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안토니우스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시리아 등 지중해 동방 전역을 차지했으며, 이전부터 자신의 세력권이었던 갈리아에 대한 권리도 인정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를 확보했다. 이탈리아는 명목상 공동 관리 구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옥타비아누스가 실권을 가졌다. 그러나 안토니우스파와 옥타비아누스파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페루시아 내전이 발발했다.한편, 바다를 장악하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루키우스 스타티우스 무르쿠스는 필리피 전투 소식을 접하자 각기 나뉘었다. 무르쿠스는 시칠리아의 지배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했고, 아헤노바르부스는 70척의 함대와 2개 군단을 이끌고 이오니아 해 연안을 약탈하다가 기원전 40년 안토니우스의 부관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의 중재를 받아들여 안토니우스의 부관이 되었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필리피 전투 후 자신에게 귀순한 이들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수년 간 이탈리아 해안 지대를 철저하게 약탈하여 이탈리아 주민들을 기아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는 시칠리아 내전이 발발하는 단초가 된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친구였던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는 필리피 전투 후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 후 가이우스 킬리니우스 마이케나스의 회유를 받아들여 옥타비아누스의 편에 섰고 그를 위한 시와 연극을 여러 편 집필했다. 그는 <폼페이우스 바루스에 대한 송가>에서 필리피 전투를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