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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5대 샤한샤 𐭅𐭓𐭅𐭃 | 오로데스 2세 | ||
제호 | 한국어 | 오로데스 2세 |
파르티아어 | 𐭅𐭓𐭅𐭃 | |
영어 | Orodes 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37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57년 ~ 기원전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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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15대 샤한샤.명장 수레나스의 활약에 힘입어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을 대패시키고, 아르메니아 왕국을 굴복시켰다. 수레나스를 숙청한 뒤 소아시아 침공을 직접 이끌었지만 실패했다.
2. 생애
'오로데스'(Orōdēs)는 중세 이란어인 '우로드'(Urūd)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프라아테스 3세의 아들로, 기원전 57년 형제인 미트리다테스 4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고 미트리다테스 4세를 왕위에 올렸다. 그러나 곧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미트리다테스 4세에게 도전해 수도에서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로마 역사가 유스티누스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 4세는 귀족들에게 잔혹하게 굴어서 그들에게 버림받았다고 한다.오로데스 2세는 동부 파르티아의 수렌 일족, 그리고 사카족과 연관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차남 프라아테스 4세의 어머니는 샤카족의 공주로 추정되며, 장남 파코로스 1세는 파르티아의 동쪽 변두리에서 온 다른 배우자의 소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메디아에 기반을 두고 바빌로니아의 여러 도시들의 지원을 받았지만, 강력한 유목민족과 군사적으로 유능한 수렌 가문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수도 니사에서 축출된 뒤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망명했다. 가비니우스는 왕위에 복위시켜주면 영토를 할양하겠다는 그의 요청에 따라 분견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전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고 마음을 바꿔 기원전 56년 이집트로 진군하여 베레니케 4세를 축출하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파라오로 세웠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오르사네스라는 이름의 고위 인사와 함께 가비니우스의 진영에 머물며 나바테아인과의 전투에도 참가했지만, 로마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자 단독으로 파르티아로 귀환해 바빌로니아와 셀레우키아를 공략하고 티게 여신을 묘사한 동전을 발행했다.
그러나 오로데스 2세가 곧바로 반격을 가하여 셀레우키아를 탈환하고, 뒤이어 바빌론을 포위했다. 바빌론은 오랜 포위 끝에 기근을 버티지 못하고 기원전 54년에 항복했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자비를 구했지만, 오로데스 2세는 그를 형제가 아닌 정적으로 간주하고 가차없이 처단했다. 이후 오로데스 2세는 셀레우키아에서 미트리다테스 4세가 주조한 동전을 다시 주조해, 셀레우키아가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자신이 오른손을 뻗어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새기게 했다.
이리하여 형제간의 내전을 끝내고 파르티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침략에 직면해야 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을 진압한 인물이자 로마의 제일가는 부자이며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전공을 세우려는 야욕을 품고 파르티아를 공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기원전 54년 봄 시리아에 도착한 뒤, 곧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했고,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BC 55~BC 34 재위),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2세, 아랍 왕자 알카오도니오스(Alchaudonius)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북부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이치나이 인근에서 파르티아 총독 실라케스의 파르티아 분견대를 격파했다. 이후 54/53년 겨울 시리아로 철수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에 7,000명의 보병과 1,000명의 기병을 배치했다.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들을 점령하는 사이, 오로데스 2세와 그의 주력군은 파르티아의 여러 전선에서 미트리다테스 4세 지지자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특히 서부 박트리아의 통치자 사카라우카이(Sakaraukai)의 반란이 거셌지만 오로데스 2세의 맹공으로 토벌되었다. 이후 2명의 지휘관을 파견하여 북부 메소포타미아 도시 몇 곳을 탈환하고 로마 수비대를 학살했다. 뒤이어 사절을 크라수스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만약 파르티아를 침공한 로마군이 로마 원로원에서 보낸 것이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가 망령 들린 크라수스의 탐욕 때문에 온 것이라면 샤한샤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
크라수스는 격분하여 사절단을 내쫓은 뒤 파르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보병 30,000명에서 40,000명, 기병 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6,000명의 기병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오로데스 2세는 친히 아르메니아를 치는 한편, 수레나스에게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 궁기병 9,000명을 맡겨 로마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게 했다. 하지만 수레나스의 탁월한 지략과 크라수스의 치명적인 실책이 맞물리면서, 수레나스의 기병대 10,000명은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최악의 패배를 안겼다. 크라수스는 목숨을 잃었고, 사상자는 20,000명, 포로는 10,000명에 달했다. 단지 10,000여 명의 패잔병만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의 지휘하에 시리아 속주로 복귀했다. 포로들은 파르티아의 동방 변경인 메르브 지역으로 압송되어 강제 노동을 하면서 변경 수비를 겸했다.
한편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격파하고, 그로부터 봉신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장남 파코로스 1세와 아르타바스데스 2세의 누이의 결혼식이 개최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결혼을 기념하여 그리스식 연극이 한창 진행되던 중, 전령이 도착하여 크라수스의 머리와 손을 가지고 왔다. 크라수스의 머리는 연극 기획자에게 주어졌고, 무대의 소품 대신에 이 머리를 사용하기로 했다. 파르티아 왕은 수레나스가 머리에 왕관을 쓰는 특권을 누리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그가 너무 큰 공을 세워 명성이 너무 높아져서 왕권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얼마 후 처형해버렸다고 한다.
기원전 51년, 파르티아 사령관 오사체스가 시리아에 쳐들어가 안티오키아로 진군했지만,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급습당하여 목숨을 잃었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내전이 벌어지자, 오로데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시리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45년 장남 파코로스 1세에게 군대를 맡겨서 시리아 총독을 자칭하면서 카이사르에 맞서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돕도록 했다. 기원전 44년, 독재관 카이사르는 16개 군단을 조직하여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하려 했지만 그해 3월 15일 원로원 회의 도중 암살당했다.(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그 후 로마에서 내전이 다시 벌어지자, 그는 원로원파인 카시우스와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지원했으며, 파르티아의 일부 부대는 필리피 전투 때 카시우스-브루투스 휘하에서 싸웠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카시우스는 전투 직전에 퀸투스 라비에누스(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를 파르티아에 보내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카시우스-브루투스 연합이 패망한 뒤인 기원전 40년, 오로데스 2세는 장남 파코로스에게 라비에누스와 함께 시리아를 침공하도록 했다.(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시리아를 성공적으로 공략한 뒤, 라비에누스는 분견대를 이끌고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고, 파코로스 1세는 휘하 지휘관 바르자파르네스와 함께 레반트를 침공했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여 프톨레마이스까지 이르는 모든 도시를 정복했다. 오직 티레만이 파르티아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유대 지방에서는 대제사장 요한 히르카노스 2세, 하사엘, 그리고 헤로데가 이끄는 친로마 유대군이 파르티아군과 그들의 유대 동맹인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에게 패배했다. 헤롯은 마사다로 피신했고,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는 파르티아에 의해 유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휘하 장교인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가 반격에 나섰다. 그는 기원전 39년 킬리키아 성문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고, 라비에누스는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 벤티디우스는 뒤이어 아마누스 고개 전투에서 바르자파르네스의 파르티아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파코로스 1세는 시리아에서 일시적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기원전 38년 봄 다시 시리아로 진군하여 안티오키아 북동쪽 긴다루스 산 전투에서 벤티디우스와 맞붙었다. 전투 결과 파르티아군이 완패했고, 파코로스 1세는 전사했다. 로마군은 파코로스 1세의 수급을 창에 꽂은 뒤 시리아 전역에 돌려서 로마에 다시 복종하도록 했다. 안티고노스 2세 마터티아스는 기원전 37년까지 예루살렘에서 버티다가 헤로데에게 붙잡힌 뒤 처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총애하던 아들 파코로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긴 채 기원전 37년경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차남 프라아테스 4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라아테스 4세는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걸 우려해 이복형제들을 모두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