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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42대 샤한샤 아르타바노스 4세 𐭍𐭐𐭕𐭓 | ||
제호 | 한국어 | 아르타바노스 4세 |
파르티아어 | 𐭍𐭐𐭕𐭓 | |
영어 | Artabanus IV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224년 4월 28일 | |
재위 기간 | 213년 ~ 22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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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42대 샤한샤이자 마지막 샤한샤.형제인 볼로가세스 6세를 상대로 왕위 계승 전쟁을 벌이던 중 니시비스 전투에서 로마 제국을 상대로 맞붙은 후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동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르다시르 1세를 토벌하려다 전사해서 파르티아의 패망을 초래했다.
2. 생애
볼로가세스 5세의 아들이다. 208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형제인 볼로가세스 6세가 왕위에 오르자 21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파르티아 동부 일대와 수사를 통제했고, 볼로가세스 6세는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수도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에서 버텼다. 당시 아르타바노스 4세의 중심지는 엑타바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고고학자들은 엑타바나에서 213년부터 216년까지 그의 이름으로 주조된 동전들을 상당량 발견했다.이 무렵 전공을 세워 자신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던 로마 황제 카라칼라는 두 형제 사이의 갈등을 이용하려 했다. 214년, 그는 볼로가세스 6세에게 철학자 안티오코스와 티리다테스[1]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볼로가세스 6세가 이 요청을 거부한다면,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삼아 파르티아를 침공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볼로가세스 6세는 215년 두 사람을 곧바로 카라칼라에게 보내 침략의 구실을 없애버렸다. 216년, 카라칼라는 이번엔 아르타바노스 4세에게 그의 딸과 결혼하고 싶으니 결혼식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라칼라가 그에게 협상을 제안했다는 것은 이즈음에 아르타바노스 4세가 볼로가세스 6세와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파르티아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카라칼라가 진심으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카라칼라의 제안을 거부했고[2], 카라칼라는 이를 빌미삼아 파르티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로마군은 메디아의 넓은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아디아베네의 수도 아르벨라에 도착했다. 그러나 217년 초 카라칼라는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병사들에게 살해되었고, 마크리누스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마크리누스는 파르티아인 포로를 돌려보내고 분쟁의 책임을 카라칼라에 전가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아르타바노스 4세는 황폐화된 요새와 마을을 재건하며, 카라칼라가 파괴한 아르벨라의 파르티아 왕릉에 대해 보상해주고,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답했다. 이후 양군은 니시비스에서 3일간 격돌했다.(니시비스 전투)
양측 모두 이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빨리 로마로 돌아가서 제위를 인정받고 싶었던 마크리누스가 먼저 굴복했다. 218년 초, 양측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로마는 파르티아에 현금과 선물로 5,000만 데나리온을 지불하기로 했고, 카라칼라가 빼앗아간 모든 영토를 돌려주기로 했다. 단, 아르메니아 왕국과 메소포타미아 북서부는 그대로 로마의 지배하에 두기로 했다. 이렇게 로마를 상대로 유리한 조건에 평화 협약을 맺은 아르타바노스 4세의 입지는 탄탄해졌지만, 셀레우키아 등지에서 동전을 독자적으로 주조하며 대항하는 볼로가세스 6세를 여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파르스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아르다시르 1세가 아르다시르-콰라 시를 수도로 삼고 신도시를 건설하며 서쪽의 후제스탄, 동쪽의 케르만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노골적으로 새 왕조 건설 작업에 착수하자, 아르타바노스 4세는 위협을 느끼고 후제스탄 영주에게 아르다시르 1세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르다시르 1세가 간단하게 막아내자, 이번엔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아랍 역사가 알 타바리의 기록에 두 사람의 맞대결이 묘사되어 있다. 아르타바노스 4세와 아르다시르 1세는 4월 말에 호르모즈겐에서 한판 붙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아르다시르 1세는 평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사전 약속보다 일찍 그곳으로 가서 도랑을 팠다. 그의 군대는 10,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로마군과 유사한 유연한 사슬 갑옷을 입고 있었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더 많은 병사를 이끌었지만, 다들 불편한 라멜라(lamellar)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전투는 224년 4월 28일에 치러졌고, 유연한 갑옷으로 무장한 사산군이 상대적으로 둔한 파르티아군을 우수한 기동력으로 압도하면서 사산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아르타바노스 4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아르다시르 1세는 이 기세를 이어가 파르티아 대부분을 삽시간에 공략했다. 볼로가세스 6세가 228년까지 남은 지역에서 버텼으나 끝내 제압당했고, 파르티아는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