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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2대 샤한샤 ΣΙΝΑΤΡΟΚΗΣ | 시나트로케스 1세 | ||
제호 | 한국어 | 시나트로케스 1세 |
그리스어 | ΣΙΝΑΤΡΟΚΗΣ | |
영어 | Sinatruces 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기원전 69년 | |
재위 기간 | 기원전 77년 ~ 기원전 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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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12대 샤한샤.2. 생애
'시나트로케스'(ΣΙΝΑΤΡΟΚΗΣ)는 '신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단어이다. 파르티아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파르티아의 수도 니사에서 발견된 오스트라콘에는 그의 아들인 프라아테스 3세의 가계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프라아테스 3세는 제3대 왕 프리아파티오스의 증손자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시나트로케스 1세는 프리아파티오스의 손자로 추정된다. 기원전 93년/92년경 수사와 메디아의 엑바타나에서 그의 이름이 담긴 동전이 발행된 사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이로 볼때 당시 파르티아 제국의 중부와 동부 지역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베히스툰 산의 기념비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88년/87년경 고타르제스 1세에 의해 수사에서 추방되었다.이후 사카족과 함께 살던 그는 사카족의 도움을 받고 파르티아 왕을 재차 칭했다. 기원전 77년부터 그의 이름을 새긴 동전이 주조되었으며, 기원전 75년 이후에는 수도 니사와 바빌론 일대까지 자신의 동전을 주조했다. 하지만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고르디아네, 메소포타미아 북부 일대는 대왕 티그라네스 2세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다. 시나트로케스 1세는 아르메니아 왕국과 대립했을 것으로 보이며, 로마와 한창 전쟁 중이던 미트리다테스 6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아르메니아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인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69년을 끝으로 그의 동전이 더이상 주조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아들 프라아테스 3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