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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3 16:45:13

아르타바스데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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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탁세스 왕조 5대 샤
Առաջին | 아르타바스데스 2세
파일:아르타바스데스 2세.jpg
제호 한국어 아르타바스데스 2세
아르메니아어 Առաջին
그리스어 ΑΡΤΑΒΑΖΔΟΥ
고대 페르시아어 Ṛtavazdā
존호
생몰 년도 미상 ~ 기원전 31년
재위 기간 기원전 55년 ~ 기원전 34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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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탁세스 왕조 5대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파르티아 원정 때 로마군을 도왔다가 파르티아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파르티아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때 로마와 다시 손을 잡았다가 안토니우스가 불리해지자 배신했다. 이에 분노한 안토니우스의 침략으로 폐위되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된 개선식에 전리품 취급받다가 결국 피살되었다.

2. 생애

아르메니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티그라네스 2세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 6세의 딸 클레오파트라의 장남이다. 기원전 69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에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참패한 뒤, 티그라네스는 아들 아르타바스데스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기원전 55년 티그라네스가 사망한 뒤 그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기원전 54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뒤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할 때 6,000명의 기병을 보내기로 했다. 이때 그는 파르티아의 강력한 기병대가 제대로 활약할 수 없는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그의 조언을 듣지 않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막 지형을 돌파해 에데사로 진군하는 길을 택했다. 파르티아 샤한샤 오로데스 2세는 주력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공격하는 한편, 수레나스에게 9,000 기마 궁수대와 1,000명의 카타프락토이를 맡겨 크라수스를 견제하게 했다.

파르티아군이 쳐들어오자, 그는 크라수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크라수스는 메소포타미아를 평정하고 난 뒤 구원하겠다고 답하고 진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4만 로마군은 카르헤 전투에서 수레나스의 파르티아 1만 기병대에게 괴멸되었고, 크라수스는 불명예스럽게 죽었다. 한편 오로데스 2세는 아르메니아군을 크게 격파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의 봉신이 되었다. 그의 누이는 오로데스 2세의 장남 파코로스 1세와 결혼했다. 기원전 51년 킬리키아 총독으로 부임한 키케로는 파코로스 1세가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시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아르메니아군이 이를 돕고자 카파도키아를 침략할 것을 우려하는 서신을 본국에 보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

기원전 36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16개 군단 60,000명, 10,000명의 이베리아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을 편성하여 파르티아를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파르티아의 봉신인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군주 아르타바스데스 1세와 적대 관계였던 그는 다시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하고, 7,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을 지원했다. 안토니우스는 크라수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아르메니아 산맥을 거쳐 파르티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부관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의 2개 군단과 함께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을 뒤따르는 수송 부대를 보호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샤한샤 프라아테스 4세가 친히 이끄는 파르티아 기병대가 수송부대를 습격해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를 격파했고, 수송부대를 호위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기병대는 안전한 곳으로 도피했다.

패배 소식이 로마 본군에 전해지자, 당시 안토니우스와 함께 있던 그는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아르메니아로 도피했다. 안토니우스는 이런 상황에서도 원정을 지속했지만, 가을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추워지고 보급품이 궁핍해지자 어쩔 수 없이 아르메니아 산맥을 거쳐 시리아로 퇴각했다. 그는 로마군이 자국 영역을 지나가는 걸 용인했지만 파르티아군의 추격으로부터 막아주지도 않았다. 이 일로 아르메니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확신한 안토니우스는 그를 징벌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 하지만 그냥 공격하면 파르티아와 손을 잡고 대항할 것이 자명하므로 함정을 파기로 했다.

안토니우스는 부관 퀸투스 델리우스를 그에게 보내 자신의 6살된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그의 딸을 약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가 제안에 응하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 초 아르메니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에 도착한 뒤, 아르타바스데스에게 재차 초대장을 보냈다. 그래도 응하지 않자, 안토니우스는 기병대를 친히 이끌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에 빠르게 진격했다. 로마군이 순식간에 도착하자 공포에 질린 그는 델리우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로마군 진영을 찾아갔다. 안토니우스는 그를 억류한 뒤 아르메니아 각지의 성채들을 공략하고 보물을 노획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타바스데스의 장남 아르탁세스 2세를 새 통치자로 선출했지만, 안토니우스의 공격으로 패배해 파르티아로 도피했다.

안토니우스는 뒤이어 메디아 파르테네로 진군해 파르티아에 반기를 든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딸과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약혼시켰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우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쇠사슬에 묶어 알렉산드리아로 끌고 간 뒤, 기원전 34년 가을에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할 때 전리품으로 취급했다.

그 후 감옥에 갇혀 지내던 그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뒤 귀환한 클레오파트라 7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수급은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에게 보내졌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할 무렵, 그의 아들 아르탁세스 2세가 파르티아군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 왕위에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