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 영어: The Parthian invasion of 40 BC | ||
시기 | 기원전 40년 ~ 기원전 38년 | |
장소 | 소아시아, 시리아, 유대 속주 | |
교전 세력 | 안토니우스 하스몬 왕조 유대 | 파르티아 폼페이우스 친 파르티아파 유대인 세력 콤마게네 왕국 |
지휘관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 폼파이디우스 실로 요한 히르카노스 2세◎ 파사엘† 헤로데 대왕 | 오로데스 2세 파코로스 1세† 파르나파테스† 바르자파네스 퀸투스 라비에누스†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 콤마게네의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 |
결과 | 로마 공화국의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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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0~38년,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이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잔당, 친 파르티아파 유대인 세력, 콤마게네 왕국과 연합하여 로마 공화국의 동방 속주를 공격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2. 배경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는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였다.(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당시 파르티아 제국의 샤한샤였던 프라아테스 3세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원군을 보낼 의향이 있으니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로 공식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파르티아가 고르디아네를 점거한 걸 문제삼았고,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와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고르디아네를 공략한 후 아르메니아에게 넘겼다.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충돌을 원치 않아 이를 막지 않았다.기원전 64년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철수하여 폰토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자, 프라아테스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왕 티그라네스 2세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서 쉽사리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양자는 폼페이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의 명령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며 개입을 거부했다. 결국 두 왕은 평화협약을 맺기로 했는데, 메소포타미아와 아디아베네는 파르티아 제국의 영역이 되었고, 고르디아네는 아르메니아 왕국의 영역으로 확정되었다.
기원전 57년, 프라아테스 3세가 두 아들 오로데스 2세와 미트리다테스 4세에게 살해당했다. 두 형제는 곧 파르티아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는데, 수레나스의 지원을 받은 오로데스 2세가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멸망시키고 시리아를 속주로 삼았던 로마로 달아나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에게 자신을 왕위에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가비니우스는 분견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까지 갔지만, 더 많은 뇌물을 제공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파라오로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이집트로 향했다. 미트리다테스 4세는 가비니우스가 좀처럼 자신을 돕지 않자 단독으로 파르티아에 귀환해 바빌로니아와 셀레우키아를 공략했으나, 오로데스 2세의 반격으로 밀리다가 기원전 54년 항복한 뒤 처형되었다.
기원전 54년 봄 시리아 속주의 새 총독으로 부임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전공을 세워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버금가는 입지를 굳힐 야욕을 품고 파르티아를 침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 2세, 아랍 왕자 알카오도니오스(Alchaudonius)와 동맹을 맺고,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진군해 파르티아 총독 실라케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여러 도시를 공략했다. 뒤이어 기원전 53년 보병 30,000명~40,000명, 기병 4,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사막 지형을 곧장 돌파하여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격하려고 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수레나스의 궁기병 9,000명과 카타프락토이 1,000기에게 궤멸당하고 본인 역시 치욕적인 죽음을 면치 못했다. 한편 오로데스 2세는 본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큰 승리를 거두고, 아르다바스데스 2세를 봉신으로 삼았다.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스가 너무 큰 공을 세워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져 왕권을 위협한다고 여기고 얼마 후 처형했다. 이후 기원전 51년 오사체스를 시켜 시리아를 공략하게 했으나, 카르헤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하고 오사체스는 전사했다. 그 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간의 내전(카이사르의 내전)이 벌어지자, 오로데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동맹을 제안하면서 그 대가로 시리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바수스를 지원해, 그가 2년간 로마에서 보낸 진압군을 상대로 항전할 수 있도록 했다. 카이사르는 이런 파르티아를 응징하고자 대대적인 원정 준비를 했으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열린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카이사르파와 '해방자'를 자처한 카이사르 암살자파간의 내전(해방자 내전)이 벌어지자, 오로데스 2세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지원했으며, 파르티아 제국의 일부 부대는 필리피 전투 당시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휘하에서 싸웠다.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에 따르면, 카시우스는 전투 직전에 퀸투스 라비에누스(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를 파르티아에 보내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해방자파가 필리피 전투에서 패망했지만, 로마 공화국의 동방 속주에서 벌어지는 혼란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오로데스 2세는 동방을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이집트에 있는 동안 해방자파인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아들인 파코로스 1세에게 군대를 맡겨 시리아, 유대, 소아시아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3. 전개
3.1. 파르티아의 확장
기원전 40년 초, 파코로스 1세는 20,000명 가량의 기병을 이끌고 퀸투스 라비에누스와 함께 시리아로 쳐들어갔다. 시리아 속주에 잔존해 있었던 많은 로마군은 과거 카시우스를 따랐던 이력이 있었기에 카시우스와 같은 편이었던 라비에누스에게 가담했다. 안토니우스파 장성이며 시리아 총독을 맡고 있었던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는 안티오키아 근처에서 이들과 대적했으나 크게 패배하여 독수리 기 몇 개를 탈취당하고 킬리키아로 도주했다. 파코로스 1세는 퀸투스 라비에누스에게 일부 기병대와 귀순한 로마군 전체를 맡겨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공략을 맡기고, 자신은 시리아와 유대 공략을 맡았다.라비에누스는 킬리키아로 진격해 삭사를 체포한 뒤 처형했고, 파코로스 1세는 휘하의 지휘관인 바르자파르네스와 함께 지중해 연안을 따라 진군하며 프톨레마이스까지 이어지는 시리아의 거의 모든 해안 도시를 정복하고 나바테아인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오직 티레만이 파르티아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또한 바르자파르네스는 하스몬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던 유대로 쳐들어가 왕위 요구자인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와 연합하여 친 로마 성향이었던 하스몬 국왕 요한 히르카노스 2세와 실권자 안티파트로스의 두 아들들인 파사엘과 헤로데의 군대를 격멸했다. 요한 히르카노스 2세는 붙잡힌 뒤 귀가 절단된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갔고, 파사엘은 처형되었으며 헤로데는 간신히 로마로 망명하여 안토니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승리한 파코로스 1세는 안티고노스 2세 마타티아스를 유대의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오로데스 2세는 콤마게네 왕국의 군주인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해 그들을 같은 편으로 삼았다.
이렇듯 파르티아 제국의 침략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지만, 안토니우스는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아내 풀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상대로 페루시아 내전을 단행하는 바람에 파르티아를 신경쓸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일단 그리스로 이동한 뒤 상황을 지켜봤지만, 내전을 일으켰다가 페루시아에서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포위당한 동생을 구하려 하지 않았고, 시칠리아 섬을 기반으로 삼아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동맹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생이 항복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보내진 후인 기원전 40년 5월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브룬디시움으로 진군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치했다. 양측 병사들이 싸우길 원하지 않았기에 몇 달간 협상한 끝에 그해 10월 브룬디시움 협약을 체결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갈리아 지배는 공인되었고,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소 옥타비아가 안토니우스의 새 아내가 되었다. 여기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등 옥타비아누스에게 맞섰다가 망명한 인사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옥타비아누스 문제를 매듭짓고 그리스로 돌아온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의 침략을 물리치고자 11개 군단, 기병대, 투석병을 집결시켰다. 그렇지만 이 병력이 모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일단 부관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게 2개 군단을 맡겨 소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는 퀸투스 라비에누스를 저지하도록 했다. 안토니우스는 시간을 벌 요량으로 그런 지시를 내렸지만, 벤티디우스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선보였다.
3.2. 벤티디우스의 대활약
기원전 39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시에 따라 동방으로 출진한 벤티디우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자격으로 부하인 폼피디우스 실로와 함께 킬리키아로 진격했다. 당시 파르티아군은 본국으로 일시 돌아갔고, 라비에누스는 현지 병력만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잘 훈련받은 벤티디우스의 로마군에 직면하자 시리아로 도주했다. 벤티디우스는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그를 추격하다가 타우루스 산맥의 킬리키아-시리아 경계 지역에서 따라잡았다. 벤티디우스는 중무장한 군단병이 추가로 합류하기를 기다렸고,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군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기에 양측 모두 며칠간 별다른 교전을 치르지 않고 대치하기만 했다.로마 군단병과 파르티아군이 동시에 도착하자, 벤티디우스는 적의 기병이 많은 걸 걱정해 언덕 위의 진영에 그대로 남았다.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을 가볍게 여겨 고지대에 세워진 적진으로 섣불리 다가가자, 벤티디우스는 병사들에게 적이 바로 앞에 이를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했다. 파르티아군이 로마군의 진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벤티디우스는 즉시 출격하여 그들을 덮쳤고, 투석병들은 파르티아군을 향해 돌 세례를 퍼부었다. 이로 인해 혼란에 빠진 파르티아군은 패주했다. 라비에누스의 부하들은 파르티아군이 쉽게 무너지자 낙담하여 집단 탈영했다. 이에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로 철수하려고 했으나 벤티디우스가 미리 숨겨놓은 로마군 병사들의 매복 공격에 휘말려 전군을 잃었다. 라비에누스는 변장한 채 킬리키아에서 얼마간 숨어 있다가 발각된 후 곧바로 처형당했다. 그가 이끌었던 로마인 병사 대부분은 벤티디우스에게 투항했다.
벤티디우스는 라비에누스를 격멸하고 킬리키아를 되찾은 뒤 그 지역에 잠시 머물며 흐트러진 질서를 재정비했다. 이후 부관 실로에게 분견대를 맡겨 아미누스 고개에 버티고 있었던 바르자파르네스의 파르티아군을 유인하도록 했다. 적이 실로의 얼마 안 되는 로마 기병대를 깔보고 추격해오자, 사전에 매복하고 있었던 벤티디우스의 보병과 투석병이 기습 공격했고, 파르티아군은 이번에도 참패하여 파르나테스 장군이 전사하는 등 막심한 피해를 입고 본국으로 달아났다. 파코로스 1세는 거듭된 패전 소식에 놀라 파르티아로 철수했고, 벤티디우스는 시리아로 진군하여 통제력을 회복한 뒤,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진군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파르티아군에 의해 유대 왕으로 추대되었던 안티고노스 2세 마티티아스는 벤티디우스에게 거액의 뇌물을 찔러줬고, 그는 안티고노스 2세의 유대 왕위를 용인해줬다고 한다.
기원전 38년 이른 봄, 파코로스 1세는 로마군이 아직 카파도키아에서 겨울 숙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시리아를 재침공할 태세를 갖췄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당시 시리아 속주 주민들은 로마인 관료들의 수탈에 반감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다고 한다. 벤티디우스는 흩어진 군대를 모으고 민심이 폭발하지 않도록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다. 또한 키레스티카의 파르네우스 왕자가 로마와 동맹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파르티아를 추종한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며, 왕자가 로마군의 모든 기밀을 파르티아군에게 알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바로 이 점을 노려 파르티아군에게 거짓 정보를 주기로 했다. 그는 파르네우스 왕자를 매우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며 개인사를 솔직하게 털어놔서 경계심을 완전히 풀도록 유도한 뒤,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파르티아군이 그동안 자주 건넌 제우마 마을의 건널목을 잘 지키고 있습니다. 다만 파르티아군이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의 건널목을 통해 시리아로 횡단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린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파르네우스 왕자는 이 이야기를 파코로스 1세에게 고스란히 전달했고, 파코로스 1세는 곧바로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의 건널목을 통과하여 시리아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제우마 마을의 건널목은 평야 지대라서 기병이 잘 활약할 수 있었지만, 키레스티카 마을 인근 건널목으로 가려면 수심이 깊은 강물을 통과해야 했고, 주변 지형이 구릉지대라서 로마군이 파르티아 기마 궁수로부터 보다 쉽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출진한 파코로스 1세는 강의 수심이 깊어서 그냥 건너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되자 40일 동안 재료를 모아서 다리를 건설했다.그 사이 흩어진 병력을 재규합하는 데 성공한 벤티디우스는 파르티아군이 강을 건너와 키레스티카로 진군했을 때 간다루스 산지에 세워진 진지에 그대로 남아서 두려워하는 척했다. 이에 파르티아군은 그들이 두려워한다고 여기고 그 진지로 곧장 쳐들어갔다. 벤티디우스는 적군이 500보 이내로 접근하자마자 급히 적에게 달려들어서 파르티아 궁수대가 미처 화살을 쏠 틈을 주지 않았다. 이어진 격전에서, 파르티아 기병대는 로마군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밀려 언덕 아래로 축출되었고, 뒤따라온 기병대와 서로 엉키면서 진형이 흐트러졌다. 파코로스 1세는 카타프락토이를 이끌고 로마 군단병과 혈투를 벌이다가 끝내 전사했고, 지휘관이 죽은 걸 알게 된 파르티아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로마군은 파코로스 1세의 수급을 창에 꽂은 뒤 시리아 전역에 돌려서 로마 공화국에 다시 복종하도록 했다.
벤티디우스는 뒤이어 로마의 동맹국이었다가 파르티아와 손잡은 콤마게네 왕국의 안티오코스 1세 테오스를 응징하러 출진했다. 안티오코스 1세가 1,000달란트를 줄 테니 평화협약을 맺자고 제안하자, 벤티디우스는 이미 동방으로 오고 있는 안토니우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안토니우스는 벤티디우스에게 그와 타협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후 도착한 안토니우스는 벤티디우스를 로마로 보낸 뒤 콤마게네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 실패하자 300달란트를 받고 평화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한편, 로마로부터 유대의 왕으로 선임된 헤로데 대왕이 유대로 돌아와서 안티고노스 2세 마티티아스와 대결했다. 기원전 38년 봄, 헤로데 대왕은 로마군의 지원에 힘입어 예루살렘을 제외한 모든 유대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안티고노스 2세는 예루살렘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기원전 37년 예루살렘이 끝내 함락된 후 체포되었고, 안티오키아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4. 이후
대파르티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벤티디우스는 기원전 38년 말 이탈리아에 돌아온 뒤 대중의 갈채를 받았다. 원로원은 본래 그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관에 불과한 점을 고려해 임페라토르 칭호를 안토니우스에게만 주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압력을 받고 벤티디우스에게도 임페라토르 칭호를 하사하고 개선식을 개최하는 걸 허락했다. 개선식은 기원전 38년 11월 27일에 개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안토니우스가 벤티디우스의 대활약에 질투심을 느끼고 더이상 기용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내전을 벌일 때 둘 중 누구도 그를 부르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기원전 38년 이후 몇 년 안 되어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벤티디우스가 죽은 뒤 로마에서 공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융숭한 예우를 받으며 매장되었다고 한다.한편, 파르티아는 참패의 충격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총애하던 아들 파코로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긴 채 기원전 37년 경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차남 프라아테스 4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프라아테스 4세는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또한 형제들의 추종자들과 자신의 정적들도 모조리 처형했다.
파르티아 귀족 모나세스(Monaeses)는 잔혹한 숙청을 피해 시리아로 망명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휘하에 들어갔다. 안토니우스는 모나세스에게 라리사, 히에라폴리스, 아레투스 등 3개의 도시를 통치할 권리를 맡기고 파르티아 왕위에 앉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나세스는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모든 지역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며 장담했고, 안토니우스는 이에 고무되어 전쟁을 준비했다. 안토니우스의 부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동맹국으로 만든 뒤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베리아인과 알바니아인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로 이동할 로마군의 진군로가 확보되었다. 하지만 모나세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화해 제안을 받아들여 파르티아로 돌아갔다.
이후 파르티아 사절이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카르헤 전투때 노획한 로마군의 깃발을 반환하고 생존한 포로들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16개 군단 60,000명, 10,000명의 이베리아인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으로 구성된 1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로 진격했다.(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