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영어: Maniakes' Sicily campaign | ||
시기 | 1038년 ~ 1042년 | |
장소 | 시칠리아 | |
원인 |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탈환 계획 추진.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살레르노 공국 노르만 용병대 | 시칠리아 토후국 |
지휘관 |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 스테파노스 하랄 3세 하르드라다 바실리오스 아르두인 무쇠팔 빌럼 1세 | 알 하산 알 삼삼 아브드 알라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원정 실패. | |
영향 | 노르만족의 시칠리아 진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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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38~1041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시칠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단행한 원정. 한 때 시라쿠사를 포함한 시칠리아 동부 영역을 순식간에 공략하면서 시칠리아 탈환이 성사되는 듯했으나, 원정군 수뇌부의 분란으로 인해 실패했다.2. 배경
826년, 시칠리아 방면 동로마 해군 사령관 에우페미오스는 미하일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여의치 않자 시칠리아 건너 마그레브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아글라브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아글라브 왕조는 이를 기회삼아 물자가 풍부하고 부가 넘치기로 유명한 시칠리아를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하여 단행된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은 100여 년간 이어진 끝에 963년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마지막 동로마 요새였던 로메타가 함락당하면서 종결되었고, 무슬림들은 시칠리아 토후국을 수립했다.시칠리아 토후국은 지중해 해안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면서도 지중해 해상 무역을 주관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고, 이를 발판삼아 이슬람 문화를 시칠리아에서 꽃피웠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시칠리아 탈환을 노렸다. 1018년 바실리오스 2세는 42년간 치렀던 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뒤 시칠리아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준비했다. 그는 1027년에 시칠리아로 친정하려 했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시칠리아 원정을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1034년 황위에 오른 미하일 4세는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시칠리아 토후국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원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시칠리아 토후국의 중심지인 팔레르모의 에미르 아흐마드 이븐 유수프 알 아칼은 1031년 시칠리아 내 비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세금을 대폭 늘렸다. 이에 반감을 품은 민중이 1034년 알 아칼의 형제 아부 하프스의 선동에 호응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알 아칼은 1035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가뜩이나 시칠리아를 정벌하려 했던 동로마 제국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비록 알 아칼은 1037년 암살당했지만, 미하일 4세는 어차피 명분이 충분한 만큼 그대로 원정을 감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038년, 동방 전선에서 아랍 토후국들을 상대로 활약해 에데사 공략에 기여했던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지휘하는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출발했다.
3. 전개
1038년 초여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지휘하는 시칠리아 원정대가 발칸 반도에서 출발했다. 원정대는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지방 민병대와 동방 전선에서 소집된 장정들을 포함한 정규병에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포함된 500명의 바랑인 친위대, 랑고바르드 계열 살레르노 공국이 파견한 아르두인 휘하 랑고바르드군, 그리고 '무쇠팔' 빌럼 1세가 지휘하는 300명의 노르만 용병대로 구성되었다.원정대는 레지오 지방의 칼라브리아 항구에 들린 뒤 1038년 늦여름에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메시나를 빠르게 점령했다. 당시 시칠리아를 다스리던 지리 왕조의 왕자 아브드 알라와 팔레르모의 에미르 알 하산 알 삼삼이 이들을 저지하고자 진군했지만, 발데모네 전투에서 마니아케스에게 참패했다. 마니아케스는 여세를 몰아 팔레르모로 가는 북부 해안 도로와 메시나를 잇는 고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로메타를 공격해 격전 끝에 함락시켰고, 뒤이어 시라쿠사로 진군해 1040년에 함락시켰다. 이때 빌럼 1세가 시라쿠사 에미르를 단칼에 베어죽였고, 이때부터 '무쇠 팔'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아랍측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동로마군은 몰타에 대한 해상 공격을 시도했지만 공략엔 실패했다고 한다.
이렇듯 동로마군은 원정을 개시한 이래 2년간 시라쿠사 등 시칠리아 동부 일대를 단숨에 석권했지만, 얼마 후 내홍에 시달렸다. 마니아케스는 군사적 역량이 탁월했지만 지나치게 독선적인 성격이었고 언행이 과격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 불만을 품은 이들이 잇따라 이탈했다. 먼저 노르만 용병대가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떠났으며, 살레르노 공국이 파견한 랑고바르드군 대장 아르두인이 생포한 말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를 붙잡아 두들겨 팼다. 이에 열받은 아르두인은 원정군을 이탈했다.
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마니아케스와 스테파노스의 갈등이었다. 한 번은 란다조와 트로이나 사이의 평원에서 동로마군과 아브드 알라가 이끄는 아랍군이 맞붙었다. 마니아케스는 스테파노스에게 별동대를 주고 해안가로 투입해, 적군이 이번 전투에서 패한 뒤 해안가로 도피할 때 모조리 섬멸하게 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마니아케스의 동로마군이 적을 압도했지만, 스테파노스는 모종의 사유로 해안가로 도피하는 아브드 알라 및 적병들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스테파노스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자, 마니아케스는 몹시 분노했다. 그는 "네놈이 남자인지 의심스럽다"면서 황제에게 즐거움이나 주는 자(즉 남색 상대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조롱했으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했다. 미하일 4세의 매제였던 스테파노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을 보내 마니아케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결국 마니아케스는 긴급 체포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 투옥되었다.
그 후 스테파노스가 새 사령관에 올랐지만 변변찮은 지휘력을 보이다가 얼마 안가 사망했다.[1] 환관 바실리오스가 뒤를 이었지만 역시 변변치 않았고,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1040년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 용병대가 베네벤토 공자 아테눌프를 지도자로 선출한 뒤 이탈리아 속주 총독 엑사고스토스를 생포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시칠리아에 투입되었던 원정군 일부가 그쪽으로 긴급히 투입되면서 원정군의 전력은 한층 더 약화되었다.
아랍군은 이 때를 틈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동로마군을 밀어붙였고, 1041년에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이 도로 무슬림의 수중에 들어갔다. 최후의 전초기지였던 메시나 역시 1042년에 함락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원정은 허망하게 실패했고, 동로마 제국은 두 번 다시 시칠리아에 손 대지 못했다.
시칠리아 토후국은 동로마군의 내분에 힘입어 적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아랍인과 비 아랍인간의 극심한 내분을 수습하지 못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원정에 가담했던 노르만인들은 시칠리아의 온난한 기후와 풍요로운 물산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장차 시칠리아를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1061년,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군이 시칠리아의 관문인 메시나를 공략한 이래 10년 동안 공세를 꾸준히 벌인 끝에 1072년 팔레르모를 정복하면서, 무슬림의 시칠리아 지배는 막을 내리고 노르만족이 수립한 시칠리아 왕국의 막이 올랐다.
[1] 아랍군과의 전투 도중 전사했다는 설과 병사했다는 설이 제기되나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