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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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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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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알제리 상실2.2. 수니파 개종2.3. 쇠퇴기2.4. 노르만 침공
2.4.1. 에필로그

1. 개요

파일:Zirides_v.980.png
아랍어 زيريون
베르베르어 ⵉⵣⵉⵔⵉⴻⵏ

파티마 왕조가 튀니지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로 중심지를 옮긴 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지배한 왕조.

2. 역사

베르베르 산하자 부족의 족장이자 파티마 조 칼리파 이스마일 알 만수르에게 충성했던 지리 이븐 마나드가 마그레브 총독으로 임명된 것이 그 기원이었다. 그는 알제리 중북부에 엘 아키르라는 도시를 세워 자치적으로 알제리를 다스렸다. 그러던 970년, 파티마 조에 반기를 든 제나타 부족과 싸우던 산하자 군대는 패배하였다. 사령관 지리는 낙마하여 전장에 남겨졌고 적에 의해 참수되었다. 그의 수급은 후우마이야 왕조의 환심을 사려던 제나타 부족에 의해 코르도바로 보내져 시장에 효수되었다. 그리고 972년 파티마 왕조가 중심지를 알 만수리야에서 알 카히라 (카이로)로 옮긴 이후 불루긴 이븐 지리가 이프리키야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칼리파 알 무이즈는 천도하며 정예 병력과 막강한 해군을 함께 데려갔고 따라서 지리 왕조는 시칠리아의 칼비 조에 대한 영향력 역사 상실하며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973년, 불루긴은 반란을 일으킨 마그라와 부족을 격파하고 그들을 모로코로 몰아내었다. 그 공로로 불루긴은 파티마 칼리파로부터 아불 푸투흐 (승리의 아버지)와 사이프 앗 다울라 (국가의 검) 칭호를 하사받았다. 977년 불루긴은 칼리파 알 아지즈로부터 트리폴리, 시르테, 아즈바비야에 이르는 해안을 하사받으며 이프리키야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후 그는 페스와 시질마사를 정복하였으나 후우마이야 조가 원군을 보낸 세우타에서 멈추며 모로코 북부 원정을 마무리하였다. 979년 불루긴은 스스로 선지자라 선포한 바르가와타를 침공, 수만명의 포로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정들에도 토착 부족들의 세력은 꺾이지 않았다.

결국 980년, 친파티마 베르베르 계열인 미크나사 부족[1]이 친우마이야 베르베르 계열인 마그라와 부족에게 패배하여 페스를 내어주었다.[2] 그러자 불루긴은 모로코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와 싸웠으나 세우타와 탕헤르를 빼앗지 못한채 984년 병사하였다. 그를 계승한 장남 아불 파스 알 만수르는 동생 함마드를 알제리 총독으로 임명, 제나타[3] 및 쿠타마 베르베르 부족들과 싸우게 하였다. 988년, 만수르와 함마드는 각각 쿠타마 부족과 제나타 부족을 격파하여 마그레브 서부 (현재 모로코) 방면으로 몰아냈다. 그렇게 지리 왕조는 페스와 시질마사를 포기하는 대가로 마그레브 동부 (현재 알제리)를 확보하였다. 그렇게 모로코는 헬게이트 오픈

2.1. 알제리 상실

한편 10세기 말엽 파티마 제국은 시리아에서 동로마 제국 및 아바스 왕조와 대결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지리 조는 점점 자립성을 띄게 되었다. 995년, 만수르가 사망하고 아들 나시르 앗 다울라 바디스가 계승하였다. 한편 타헤르트의 태수이자 바디스의 작은 할아버지 (알 만수르의 숙부) 자위 이븐 지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999 ~ 1000년) 그러나 반란은 실패하였고 그는 안달루스로 건너가 1차 타이파 시대인 1013년 그라나다에 지리 왕조를 개창하기에 이른다.[4] 하지만 위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은 할아버지에 이어 작은 아버지인 함마드가 1007년 호드나 고원에 바니 함마드 성채를 세우는 등 독립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결국 1014년 수니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선포하며 독립해버린 것이다. (함마드 왕조) 이에 바디스가 전쟁을 선포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1016년 사망하였다.

2.2. 수니파 개종

알 무이즈는 겨우 9세의 나이로 지리 왕조를 계승하였고 고모인 움무 말랄이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즉위 직후인 1016년 함마드 왕조의 수니파 선포에 영향을 받은 이프리키야 (지리 왕조의 본거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지리 왕조의 겨울 수도[5]였던 알 만수리야의 시아파 2만여명이 학살당하는 소요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그해 함마드 왕조와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2년 후인 1018년에는 함마드 조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1022년 친위 쿠데타를 통해 친정을 시작한 알 무이즈는[6] 스승인 아불 하산 알리의 영향으로 수니파 말리카 법학파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1027년 그는 트리폴타니아에서 파티마 왕조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제나타 베르베르 부족을 도와 트리폴리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지리 왕조와 파티마 조와의 주종 관계는 악화되었다. 1038-40년엔 장남인 압둘라가 내전 중인 시칠리아로 출정하여 일시적이지만 섬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한편 1040년대 들어 이프리키야엔 재해와 가뭄이 닥쳐 기아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통화 가치가 하락하는 등 경제 상황이 안좋았는데 파티마 왕조에게 납부하는 백만 디나르의 연공은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045년, 알 무이즈는 카이로완의 말리키 법학파들과 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 민중의 여론에 떠밀려 카이로의 파티마 칼리파 대신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에 복종을 표하였다. 150여년 만에 이프리키야가 수니 이슬람으로 복귀한 것이다. 심지어 새로 발행된 동전에는 파티마 칼리파와 그의 추종자들이 '이단자'로 표현되었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파티마 조는 쇠퇴해가던 국력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결심하였다. 이에 키레나이카 지방을 어지럽히던 베두인 부족인 바누 힐랄과 바누 술라임이 지리 왕조를 향해 파견되었고 이는 이프리키야에 재앙으로 다가왔다. (1051-52년)

2.3. 쇠퇴기

파일:지리 왕조 튀니지.png

하이다란 산 전투에서 지리 왕조는 마킨 앗 다울라[7]가 이끄는 친파티마 계열의 베두인 군대에게 대패하였고 이내 알 무이즈는 카이로완에서 포위되었다. 1054년까지 이프리키야의 내륙 지방은 베두인들에게 유린되었고 이로써 반달 족의 침공과 아랍 정복을 견뎌낸 관개 시설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는 추후 천년간 완전히 복구되지 못하였다. 1057년 수도 카이라완이 함락되었고 알 무이즈는 간신히 항구 도시인 알 마디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카이라완이 폐허로 변하며 이후로 지리 왕조는 새로운 수도 알 마디야와 튀니스, 알제 등지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무역으로 간간히 유지될 수 있었다. 내륙 지방에는 베두인들의 세운 공국들이 들어섰다. 1059년엔 함마드 왕조로부터 튀니스 총독으로 임명된 아브드 알 하크가 후라산 왕조를 세우며 독립하였다. 왕국의 엄청난 손실을 경험한 알 무이즈는 1062년 사망하고 아들 타밈이 계승하였다.

악몽과도 같은 1050년대를 보낸 지리 왕조의 영토는 튀니지 동부 일대로 국한되었다. 이프리키야는 한세기 후 무와히드 왕조의 정복시까지 여러 왕조들로 분열되어 있어야 했다. 타밈은 1063년 튀니스 수복을 노렸으나 실패하였고 후라산 왕조를 인정해야 했다. 1087년에는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인 피사 공화국제노바 공화국의 연합군에 의해 일시적이긴 하지만 수도 마디야를 함락당하였고 엄청난 배상금을 바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시칠리아 왕국의 루지에로 1세에게 연공을 바치는 등 쇠퇴하는 왕국을 살려보려 노력하던 타밈은 40년 이상 재위한 끝에 1102년에 사망하였다. 이후 아들 야흐야가 1116년까지 재위하였고 알리 이븐 야흐야가 계승하였다. 그의 치세에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는 지리 왕조가 연공 납부를 미룬다는 이유로 두차례 튀니지 해안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2.4. 노르만 침공

프랑크인들의 영토는 트리폴리에서 튀니스까지, 마그레브부터 카이라완에 달했다.
ㅡ 12세기 아랍 연대기 작가

그러던 1117년, 알 마디야에서 남쪽으로 120km 떨어진 가베스의 총독 라피가 지리 왕조의 무역 독점을 불평하며 루지에로 2세에게 군사 개입을 요청하였다. 이에 루지에로는 소규모의 노르만 함대를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대규모의 지리 함대를 만나자 도주하였다. 이후 알리는 마디야에 상주하던 시칠리아 관리들을 축출하였고 양측의 해상 충돌로 이어졌다. 그와중에 1121년 알리가 사망하고 아들 아불 하산 알 하산이 전쟁을 이어갔다. 그는 루지에로의 관계 정상화 요구를 묵살하고 동맹인 무라비트 왕조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1122년 지리 함대는 칼라브리아의 니코테라를 습격, 주민들을 노예로 끌고갔다. 이듬해 노르만 인들은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의 판텔레리아 섬을 점령하곤 마디야를 습격하였다. 한편 1128년 함마드 왕조가 튀니스를 점령하였다. 시칠리아의 해군 제독 기오르기오스[8]는 1131년 튀니지 해안을 공격하여 몇몇 항구들을 점령하였다.

1134년 7월까지 라눌프 2세와의 1차 내전을 끝낸 루지에로는 이듬해인 1135년 이프리키야 공격을 결심하였다. 1135년, 북아프리카 공격의 첫 대상으로서 당시 해적 소굴이던 제르바 섬이 아랍/노르만인으로 구성된 시칠리아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후 1136-39년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재차 반란을 일으킨 라눌프는 1139년 4월 사망하였고 이에 루지에로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자 1142년 마디야의 알 하산은 루지에로에게 복속하였다. 이로써 지리 왕조는 그의 허락 없이 주변의 다른 무슬림 왕국과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마디야는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공급받는 대신 관세 수입을 바쳐야 했다. 당대 아랍인 연대기 작가는 알 하산을 루지에로의 총독으로 묘사할 정도였다. 이듬해인 1143년 루지에로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트리폴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1146년 마침내 포위 끝에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트리폴리 함락 이후 가베스의 총독 유수프 역시 루지에로에게 예복을 받고 그의 왈리 (지방관)가 되었다. 유수프는 루지에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안심하며 방어 태세를 약화한 것으로 보인다. 가베스의 총독 가문은 힐랄 부족의 이프리키야 침공 당시 지리 왕조를 배신한 산하자 기병대의 후예였고 이후로도 마디야를 괴롭혔다. 이틈에 복수를 하기로 한 알 하산은 가베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곤 유수프를 투석형으로 처형하였다. 이에 루지에로 2세는 분노하였고 동로마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기오르기오스를 위시로 한 시칠리아 함대를 판테렐리아 섬에 집결시켰다. (1148년 6월) 마디야로 향하며 시칠리아 측은 연락용 비둘기를 운송하는 지리 측 함선을 나포했는데, 기오르기오스는 비둘기들에 자신이 그리스로 향한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여 거짓 정보를 흘렸다.

6월 22일, 시칠리아 함대가 마디야 앞바다에 나타나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알 하산과 관료들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무슬림 주민들은 기독교도들의 집이나 성당으로 몸을 피하였다. 다만 시칠리아 병사들에겐 오직 2시간의 약탈만이 허용되었는데, 지중해 무역의 중심 도시를 온전히 지배하고 싶었던 루지에로 2세가 주민들에게 아만 (왕실의 보호)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랍 사가 이븐 아비 디나르에 의하면 기오르기오스는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빈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카디에게 행정을 맡겼다고 한다. 이로써 질서가 회복되었고 새 정부는 식량을 풀어 피난민들의 귀환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7월 1일엔 수스의 통치자인 알 하산의 아들 알리가 전투 없이 항복하였고 본인은 무와히드 왕조의 모로코로 피난하여 부왕과 합류하였다. 7월 12일엔 스팍스가 약간의 저항 후에 점령되었다.

2.4.1. 에필로그

비록 기존의 기독교도 주민들이 갑질을 행하는 일이 있긴 했지만 새로 정복된 이프리키야의 도시들은 루지에로에 의해 임명된 아랍인 총독들 하에 안정을 되찾았다. 이후 1152년 기오르기오스가 동로마 원정 중 사망하자 필리프가 후임 제독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무와히드 왕조가 베자이아를 점령하며 함마드 왕조를 멸하자 안나바의 태수가 시칠리아 왕국에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필리프는 1153년 도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팔레르모로 돌아온 필리프는 이슬람교도라는 오명을 받아 처형되었다. 1153-54년 무렵 시칠리아 함대는 이집트 북부의 티니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프리키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정복되지 않은 튀니스는 시칠리아에 곡물을 바치며 저자세로 나왔는데 비슷한 시기 루지에로 2세는 사망하였다. (1154년) 그를 계승한 굴리에모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침공과 교황과의 반목 때문에 아프리카 영토에 신경쓰지 못하였다.

1156년 교황과 베네벤토 조약을 체결하며 한숨을 돌린 시칠리아 왕국은 재차 티니스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무와히드 왕조의 동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슬람 지배로의 회귀를 원하는 봉기가 스팍스 등의 도시에서 일어났고 1158년 트리폴리가 무와히드 군에게 점령되었다. 아프리카 영토의 총독부가 위치한 마디야 역시 1159년 9월부터 포위되었다. 포위 도중 무와히드 칼리파 아브드 알 무민은 진중에 있던 알 하산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강력한 요새지를 포기했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하산은 '나는 신뢰할 수 있는 자가 곁에 별로 없었고 식량이 부족했으며 이는 운명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칼리파는 포위를 잠시 풀고 식량을 축적하였다. 그동안 스팍스가 항복하였고 가베스가 무력으로 점령되었다. 1158년에야 동로마와 화친을 맺은 시칠리아 왕국은 마디야에 신경 쓸 여력이 부족했다.

1159년 160척의 함대로 이비자 섬을 습격한 피에트로 제독이 마디야에 접근했지만 제대로 된 전투 없이 철수하였다. 결국 1160년 1월 11일 마디야는 무와히드 군에게 함락되었다. 당시 마디야 일대는 무와히드 군대를 피해 모여든 기독교도들이 집결해 있었는데, 칼리파 알 무민은 시내의 비무슬림 주민들에게 이슬람 혹은 죽음의 선택지를 주었다. 이로써 시칠리아의 아프리카 영토는 소멸되었고 이프리키야의 기독교 공동체 역시 무와히드 광신자들의 분노 하에 소멸되었다. 그리고 마디야를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전가받은 해군 제독 마이오는 결국 그해 11월 반역을 꾀했다는 오명을 쓰고 암살당하였다. 한편 시칠리아 왕국과 무와히드 왕조는 시칠리아 함대가 무와히드 조의 공주가 타고 있던 선박을 나포한 후에야 협상을 하여 화친을 맺을 수 있었다. (1180년) 그리고 양국은 동쪽의 아이유브 왕조 견제를 위해 힘을 모았다.



[1] 927년 파티마 군대가 페스를 함락한 후부터 그곳에 봉해졌다[2] 여담으로 당시 코르도바의 섭정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지원으로 페스의 알 카라위인 마스지드가 증축되어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3] 미크나사, 마그라와 부족 모두 그에 속한다[4] 비록 자위 본인은 계속된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1020년 조카 합부스에게 양위한 후 마그레브로 돌아와 증손자뻘인 알 무이즈의 환대를 받고 은퇴하였다. 그라나다의 지리 왕조는 1238년 나스르 왕조가 들어서기 전까지 그라나다를 다스렸다. 한편 자위는 1009년 코르도바를 함락하며 시타델 위에 여전히 효수되어었던 아버지 지리의 머리를 되찾았는데 이때서야 고국에 몸과 합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5] 1057년까지 본 수도는 카이로완, 여름 수도는 알 마흐디야[6] 고모이자 양어머니였던 말랄은 이듬해 병사. 무이즈가 직접 장례 주관.[7] 파티마 조가 파견한 지휘관. 그는 전리품을 두고 다투던 힐랄 부족을 규합하여 카이로완의 포위를 이끌었다. 또한 지리 왕조의 중추였던 산하자 기병대가 투항해 오자 그 수장을 내륙 가베스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8] 시리아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1차 십자군을 피해 튀니스로 이주하여 지리 왕조의 해군에서 복무하다 타밈의 사후 후계자인 야흐야와 대립한 후 팔레르모로 향하였고 아랍과 동로마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중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