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숙적인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로마에 입성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를 기념하여 세운 개선문에 장식된 다키아족 포로들이다. 본래 대제 트라야누스 의 다키아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개선문에 새겨졌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신의 개선문에 써먹고자 떼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키아를 재정복했다는 설이 사실이라면, 이 '무단 도용'이 미래를 예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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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기 332~334년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제2대 로마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동게르만계 고트족을 격파하고, 이란계 사르마티아인들을 복종시킨 원정이다. 로마 제국이 군인 황제 시대 말기의 명군이었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치세때 포기했던 다키아를 이때 재정복했다는 설이 제기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2. 상세
서기 306년 7월 25일 부황 콘스탄티우스 1세가 사망한 뒤 장병들에 의해 브리타니아 섬과 갈리아의 황제로 추대된 이래, 콘스탄티누스 1세는 혼란과 격전의 연속이었던 사두정의 내전에서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 등 여러 경쟁자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한편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국경 수비도 착실하게 수행했다. 306년 말 서게르만계 프랑크족이 라인 강을 건널 준비에 착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콘스탄티누스 1세는 다른 곳에서 강을 건넌 뒤 그들을 급습해 대파하고 여세를 몰아 프랑크인들의 마을을 모조리 파괴한 후 전사자들의 유골을 쌓은 해골탑을 세웠으며, 수많은 프랑크족 포로들을 잡아 노예로 삼거나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삼았다. 기록에 따르면, 어찌나 많은 프랑크족 포로들이 경기장에 던져졌는지 야수들이 살육에 지쳐서 더는 해치려 들지 않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 공적으로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후에도 이민족이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면 먼저 쳐들어가 큰 타격을 입히는 공격적인 방위 전략을 고수했다. 심지어 324년 라우시모드 왕의 지휘하에 다뉴브 강을 건너 발칸 반도로 침입하려던 이란계 사르마티아인과 마에오티아인들을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가해 타격을 입힌 후, 그들을 추격하다가 리키니우스 황제의 관할 구역을 무단으로 지나가버리는 바람에 리키니우스의 반발을 사서 대규모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단 전투 및 전쟁에 있어서 자신감이 있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인척인데 대놓고 아무 명분이나 이유없이 치고들어가기는 좀 그러니까, 이민족 정벌을 구실로 하여 일부러 리키니우스 황제의 영역을 넘나들며 도발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어쨌든 리키니우스와의 격렬한 내전에서 승리한 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는 대사업을 단행하는 한편, 328년 다뉴브(도나우, 다누비우스) 강을 가로지르는 석조 다리를 건설하여 로마 도시인 오에스쿠스(오늘날 불가리아 기겐)와 고트족의 수시다바(오늘날 루마니아 셀레이우)를 연결하고, 다뉴브 강 하류에 다프네 요새를 건설하는 등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영역에 대한 원정도 준비했다.
329년, 고트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 모에시아 속주와 트라키아 속주를 침략해 약탈을 자행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들을 격퇴해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네 번째로 받고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처음으로 받았다. 그러나 고트족의 침공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331년, 그들은 사르마티아인들을 침략해 복속시킨 뒤 로마 제국에 속한 발칸 반도로 쳐들어와 현지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각지를 황폐화시킨 뒤 돌아갔다.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Origo Constantini imperatoris)에 따르면, 이를 보복하기 위한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장남이었던 콘스탄티누스 2세가 선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2세는 당시 15살이었기에 실질적인 지휘는 경험이 많은 장군들이 맡았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세 본인은 마르키아노폴리스에 머물면서 대 고트 원정의 상황을 주시했다.
332년 3월 또는 4월 초, 콘스탄티누스 2세를 위시한 대규모 야전 기동대가 다뉴브 강에 새로 건설된 석조 다리를 건너 고트족의 영역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고트족 마을들을 불태우고 가축들을 포획했으며, 고트족이 쌓아뒀던 식량을 모조리 빼앗았다. 고트족은 급히 일찍이 복속시켜뒀던 사르마티아인들의 영역인 크림 반도 일대로 도피했지만, 로마군이 거기까지 쫓아온데다가 4월의 날씨가 비정상적으로 추워서 상당수가 얼어죽자 어쩔 수 없이 로마군과 정면 승부를 벌이게 되었다. 4월 20일, 양군은 오늘날 불가리아의 바르나 인근에서 격돌했는데, 전투 결과는 로마군의 완승이었다.(바르나 전투)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에 따르면 무려 100,000명에 달하는 고트족이 기아와 추위로 죽었고, 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다.
결국 고트족은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청했는데, 콘스탄티누스 1세는 고트족의 왕 아리아리크의 아들인 아오리크를 포함한 고위급 인질을 보내고 로마 제국에 매년 공물을 바쳐야 하며, 40,000명의 병력을 로마군에 공급해 제국의 국경 방비에 협조하게 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이리하여 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로원으로부터 고티쿠스 막시무스 칭호를 두 번째로 받았으며, 데벨라토리 겐티움 바르바라룸[1]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추가로 받았다. 또한 고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고트 축제'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는 브라즈다 루이 노박(Brazda lui Novac) 방벽을 건설했다. 이 방벽은 드로베타(현재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쉬티)에서 시작해 왈라키아 동부 평야를 거쳐 시레트 강까지 이어졌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이 시기 다뉴브 강변에 로마 제국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요새와 참호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사르마티아인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고트족을 물리친 덕분에 자유를 되찾았지만 곧 내전에 직면했다.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과 에우세비우스 및 제롬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334년 '리미칸테스'(노예)들이 '아르가라간테스'(주인)들을 상대로 대규모적인 반란을 일으켰고,(리미칸테스의 난) 아르가라간테스가 결국 축출되어 로마 제국으로 몰려와 망명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는데 그 숫자가 무려 30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사르마티아인들이 패배했다는 것만 언급하고 조국에서 추방된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사건을 단순히 요약했거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미칸테스를 물리치고 아르가라간테스들을 완전한 전멸로부터 구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망명하러 온 사르마티아인들을 받아줬는지, 그들의 영역으로 진군해서 한 쪽 파벌을 물리치고 다른 쪽 파벌을 이주시켰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수많은 인파가 발칸 반도로 몰려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규모 이주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로마 제정 초기인 서기 1년 섹스투스 아이리우스 카투스 장군이 다뉴브 강 건너편에서 모에시아 속주로 50,000명의 게티족을 이주시켰고,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때 40,000명의 게르만족 포로가 갈리아에 재정착했으며, 네 황제의 해 이전인 서기 64년에는 모에시아 총독 티베리우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아일리아누스가 100,000명 이상의 이민족을 수용했다. 명군으로 칭송받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마르코만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이민족들을 라인 강-다뉴브 강 국경 지대에 사민시켰으며, 군인 황제 시대 말기인 280년 경 프로부스 황제는 바스타니족 100,000명을 트라키아에 정착시켰다.
<오리고 콘스탄티니 칙령>에 따르면, 사르마티아 이주민들은 트라키아, 스키티아,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전역으로 분산되었다고 한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최고의 전사들 중 일부를 선택하여 국경 지대의 군대 사단에 배속시켰고, 나머지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등지의 황량하거나 경작되지 않은 땅에 농부로 정착시켰다고 한다. 당시 사르마티아 이주민들은 프라이펙티 사르마타룸 겐틸리움[2]을 결성했다. 후기 로마 제국의 행정 조직을 기술한 《Notitia Dignitatum》(관청 목록)에 따르면 이탈리아 반도에 15개의 사르마티아 정착촌이 존재했는데 대부분은 이탈리아 북서부에 배치되었고, 2개 정착촌 만이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336년 경 원로원으로부터 다키쿠스 막시무스[3]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다수의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트라야누스 황제가 정복했지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포기했던 다키아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치세때 로마 제국에 재복속했거나, 적어도 일부가 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서기 4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식 목책들이 루마니아 각지에서 발견되었고, 솔리두스 금화가 대량으로 출토된 것을 볼 때, 콘스탄티누스 1세의 치세 때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다키아까지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헌 기록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다키아 속주를 되찾았다는 언급이 일절 존재하지 않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7년 5월에 사망하기 전에 조카인 달마티우스에게 다뉴브 강 방비를 맡긴다는 유언을 남긴 사실, 고트족 고유의 문화가 이 시기에도 다키아에서 그대로 이어진 것을 볼 때 다뉴브 강 이북의 다키아를 직접적으로 복속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다키아 이북에 거주하는 고트족-사르마티아인들을 봉신으로 삼고, 일부 병력을 그곳에 배치한 후 활발한 상호 교류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고트족과 사르마티아에 대한 원정은 다뉴브 강 전선의 평온을 이룩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후 그의 아들들끼리 세력 다툼을 벌이고, 찬탈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르만족이 라인 강 전선을 돌파하여 갈리아로 쏟아져 들어오고, 사산 왕조의 제10대 샤한샤인 샤푸르 2세가 동방 전선을 침략하는 등 로마 제국이 대혼란에 빠져있는 상황에서도, 다뉴브 강 전선 만큼은 굳건히 버텼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받아들인 이란계 사르마티아 전사들은 로마군의 전력 보충에 큰 힘이 되었다. 376년 고트족이 훈족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로마 제국에 망명을 신청했을 때 로마 제국 동부의 황제였던 발렌스가 흔쾌히 받아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발렌스 황제는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는 달리 로마 제국 영내에 거둬들인 고트족을 통제하는 데 실패해 재앙을 초래했고, 로마 제국은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