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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8 14:43:08

스폴리아 오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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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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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 적장 아크론의 갑옷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러 가는 로물루스 (18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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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소개3. 조건4. 사례5. 인정받지 못한 사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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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polia opima

고대 로마 시대 장군들이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무공 훈장이자 명예로, 직역하면 '빛나는 전리품' , '가장 고귀한 전리품' 정도로 해석된다.

직역 그대로 로마인으로 태어나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군사적 영예와 명성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로마 역사상 단 3명만 스폴리아 오피마를 차지했을 정도로 극악의 난도를 자랑했다.

2. 상세 소개

일단 승리를 거둔 장군이 가지고 온 전리품의 일종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의 여느 전리품과 달리, 스폴리아 오피마는 특별했다. 그래서 이 위엄을 차지한 로마 장군은 이 전리품을 참나무 줄기로 묶은 뒤,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의 유피테르 신전에 고이 봉헌했다.

스폴리아 오피마는 숭고로운 전리품으로 고이 보관된 만큼, 로마인들에게 문자 그대로 모든 영예의 최정점이었다. 하지만 스폴리아 오피마는 로마 건국 이후 단 3명만 차지했고, 우리가 아는 로마 최고의 명장들 중 이 최고의 영예를 누린 이는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의 '로 추앙받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단 한 명에 불과하다.

즉,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마리우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그나이우스 율리우스 아그리콜라, 코르불로, 폼페이아누스 같은 굵직굵직한 명장들은 물론 무인 황제로 유명한 트라야누스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클라우디우스 2세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또한 이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3. 조건

로마인들이 인정하는 조건은 매우 간단했다.

하지만 인정 조건만 간단할 뿐, 이를 달성한 사람이 기원전 753년(로마 왕국 건국)부터 서기 476년(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다섯 명도 안될 정도로 난도가 극악이었다. 스폴리아 오피마의 영광을 얻은 장군이 역사상 불과 3명밖에 안되는 이유는, 다른 전리품이나 개선식과 달리 얻기도 무척 까다롭고 난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먼저, 일대일 전투를 적군 지휘관과 맞붙는 것 자체도 힘들고, 상대가 거부해버리면 소용이 없었다. 이는 게르마니아 전쟁 당시 기록에도 나오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티베리우스의 동생, 게르마니쿠스클라우디우스 1세의 아버지 대 드루수스는 이것을 얻기 위해 적진 한복판에 앞장서 이를 파고들어 무수한 적을 죽였음에도, 적군 지휘관들이 죄다 일대일 전투를 거부한 탓에 끝내 이 대업을 달성하지 못했다.[2]

로마 장군이 힘들게 일대일 전투로 승리해도 적 지휘관이 갑옷을 착용하지 않은 불상사가 벌어질 경우에는 소용이 없었다. 다대다 전투에서 승리해 적장을 죽인 뒤 갑옷을 획득해도 해당 조건에서 제외됐다. 이와 함께 적장을 일대일 전투에서 승리해 제거하더라도, 본인이 로마군 사령관으로는 위치가 애매하거나, 죽인 장수가 적의 총사령관이 아니라면, 쟁취한 전리품인들 '그냥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 이런 번거로움과 어려움 못지 않게, 난도가 높은 점은 조건 자체가 일대일 전투였다는 것이다. 즉, 로마 장군이 이것을 얻기 위해선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했다. 더해 일대일 승리를 거둔 뒤 빼앗은 갑옷만 인정됐기 때문에 승리했더라도 이후 적에게 포위되거나 비등비등한 전투로 결론 날 경우에는 스폴리아 오피마로 인정받지 못했다. 아울러 설령 얻었다고 해도 아래 크라수스의 사례처럼 최고 제사장이나 황제, 원로원에서 인정하지 않거나, 봉헌하지 않으면 스폴리아 오피마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당사자의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정도 상당히 위험했고, 개인의 전투 역량과 외부적 조건과 이를 인정해줄 원로원이나 권력자의 승인도 필요했다. 더해 원로원의 권력자조차 이를 함부로 얻기 무척 어려운 나머지, 인정받지 못하면 깔끔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유명하게는 3번 정도 있었다. 티투스 만리우스 임페리오수스 토르콰투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코르부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 케이스였다. 이들 중 토르콰투스, 코르부스는 갈리아 족장을 상대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 부족장을 상대로 이것을 달성해, 모두 일대일 전투에서 적장을 죽이고, 그 몸에서 갑옷을 벗겨냈다. 하지만 이들은 로마군 사령관임에도 유피테르 신전에 바치기에는 상황상 애매하거나 불가능한 변수 때문에 모두 스폴리아 오피마 달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스폴리아 오피마 달성을 위해선 일대일 전투를 치를 배짱과 뛰어난 전투 능력 외 여러 외부 조건도 필수라서 난도가 상당했다.

4. 사례

기원전 753년부터 서기 476년까지 로마군 역사상 이 영광을 누린 사람은 공식적으로 단 3명이었고, 수상 자격을 얻었음에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도 1명에 불과했다. 또 달성한 사람 중 교차검증이 되는 사람은 역사상 단 두 명에 불과하며, 로마에서 인정된 이는 단 한 명에 불과하다. 즉, 스폴리아 오피마 조건에 도달한 로마인은 총 4명인데, 이 중에서 공식적으로 차지해 봉헌한 이는 단 3명이며, 이 중 교차검증된 사람은 고작 1명에 불과하다는 말.

공식적으로 획득한 3인은 아래와 같다.

5. 인정받지 못한 사례

세 사람과 달리, 이 장군은 스폴리아 오피마를 정당하게 차지했지만, 당시 권력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도 누리지 못한 로마인 최고의 영예를 허락하지 않은 탓에 개선식만 허락받고 스폴리아 오피마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그가 바로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인데, 이 장군은 1차 삼두정치의 한 축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장손자다.[4]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아우구스투스 휘하의 명장으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수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마케도니아로 파견됐는데, 이곳에서 정식 개선식이 당연한 승리는 물론 기원전 29년 데루도를 일대일 전투에서 죽이고 스폴리아 오피마 조건을 달성한 갑옷을 차지했다.

당연히 그는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과 스폴리아 오피마를 요구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크라수스가 자신의 휘하 장군이라고 해도 스폴리아 오피마라는 로마인 최고의 영예가 자신의 권력과 위상에 큰 위험이 된다고 판단해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대신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마지막으로 황제나 황족 남성이 아닌, 일반 로마인의 개선식을 거행케 허락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크라수스는 개선식의 영광을 얻어 개선 장군의 영예만 얻었다. 이때 그는 획득한 다른 전리품처럼 스폴리아 오피마가 되어야 할 갑옷도 개선식 후 그냥 봉헌해야만 했다.

개선식 이후 크라수스의 이름이 역사책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후 그가 피소 가문에서 들인 양자와 다른 후손들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계속 고위직에 오른 것을 볼 때, 아우구스투스가 그를 숙청하진 않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마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사건(?) 후, 은근한 견제를 받아 중책을 못 맡고 평범한 원로원 의원 생활만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6. 여담

서기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초반까지 이어진,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스폴리아 오피마의 명성이 안 좋게 회자돼, 이는 세베루스 왕조의 잔혹성, 비열함을 부각시키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그 이유는 로마 제국 역대 황제 중 가장 잔혹한 폭군카라칼라 때문이다.

카라칼라는 연년생 동복동생 게타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제 손으로 친동생 게타를 어머니 율리아 돔나가 보는 앞에서 백인대장 칼로 잔혹하게 죽인 직후, 친동생의 선혈이 묻은 양날 검을 스폴리아 오피마로 삼았다고 한다. 이 당시 카라칼라는 그날 저녁, 자신의 멘토인 옛 가정교사를 비롯한 무고한 로마인 2만명을 살해하기 직전 게타의 피가 그대로 묻어 있는 검을 치유와 복수의 신 세라피스에게 재물로 바치며 이를 스폴리아 오피마, 즉 신격화된 무기로 떠받들었다.

이는 로마인의 용기와 헌신, 적장의 용기에 대한 경외심 등이 복합적으로 담긴 스폴리아 오피마를 대놓고 무시한 행동이라서, 당대부터 로마인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허나 카라칼라는 이런 비난을 대놓고 무시했고, 이런 비판에 되레 강하게 반응해 그들까지 처벌했다.

후대의 황제인 이라클리오스도 니네베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나자테스 장군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 승리하였지만, 딱히 스폴리아 오피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당시 로마제국은 기독교화가 되어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하느니 하는 것은 부적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애당초 그 전설의 배경인 로마가 이미 로마제국의 영토에 없던 시기기도 하고.


[그림설명] 그림 한가운데에 월계관을 쓴 이가 로물루스이고, 로물루스가 나무줄기에 건 채 높이 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림 오른쪽에 쓰러져 있는 카이니아의 왕 아크론의 갑옷으로서 본 항목에서 설명하는 스폴리아 오피마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2] 로마 제정 시대 로마인 사가들은, 그가 만약 이를 차지했다면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크라수스의 전례와 달리 스폴리아 오피마로 인정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 이유는 드루수스와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를 읽어보면 된다.[3] 마르쿠스 크라수스까지 포함하면 두 명.[4] 할아버지와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2세, 본인까지 모두 이름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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