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Marcus Claudius Marcellus | |
생몰년도 | 기원전 268년 ~ 기원전 208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풀리아 지방 베누시아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증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버지)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이복형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손자)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22년 |
전임 |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 |
동기 |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
후임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 |
임기 | 기원전 215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임기 | 기원전 21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임기 | 기원전 210년 |
전임 |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
동기 |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임기 | 기원전 208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동기 |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후임 |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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ὦ Ἡράκλεις, τί χρήσεταί τις ἀνθρώπῳ μήτε τὴν χείρονα τύχην μήτε τὴν βελτίονα φέρειν εἰδότι; μόνος γὰρ οὗτος οὔτε νικῶν δίδωσιν ἀνάπαυσιν, οὔτε λαμβάνει νικώμενος, ἀλλ' ἀεὶ μαχησόμεθα πρὸς τοῦτον ὡς ἔοικεν, ᾧ τοῦ τολμᾶν ἀεὶ καὶ τὸ θαρρεῖν εὐτυχοῦντι καὶ σφαλλομένῳ τὸ αἰδεῖσθαι πρόφασίς ἐστιν.
오 헤라클레스시여, 불운도 행운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저 사람을 어찌해야 합니까? 이겨도 쉴 줄 모르고 져도 쉴 줄 모르는 인간은 저 사람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이기면 용기가 솟아 더 싸우고, 지면 부끄러워 더 싸우니 우리는 평생을 저 사람과 싸워야 할까 봅니다...
―한니발[1]
오 헤라클레스시여, 불운도 행운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저 사람을 어찌해야 합니까? 이겨도 쉴 줄 모르고 져도 쉴 줄 모르는 인간은 저 사람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 사람은 이기면 용기가 솟아 더 싸우고, 지면 부끄러워 더 싸우니 우리는 평생을 저 사람과 싸워야 할까 봅니다...
―한니발[1]
1. 개요
로마 공화국 정치가이자 장군. 총 5번의 집정관 경력이 있는 대 정치가이자 역대 로마 장군 중 몇 안 되는 스폴리아 오피마(Spolia opima)[2]를 차지한 장군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라쿠사를 함락시키고 한니발 바르카의 숙적인 인물로 유명하다. 살아생전 일대일 전투 능력과 전술, 전략이 모두 탁월해, 로마군인들이 좋아하는 영웅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고[3] 그에 따른 위인전도 여러 번 출판됐다고 전해진다.2. 생애
2.1. 초년기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플레브스 지파인 마르켈루스 지파 출신이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본래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클리엔테스였다가 평민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정책에 따라 지파로 편입되었으리라 추정한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르켈루스의 어원이 전쟁의 신 마르스라고 주장했지만, 현대 학자들은 프라이노멘인 마르쿠스에서 변형되었으리라 추정한다.증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331년 마르켈루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올랐다. 조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87년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아버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 이름을 올렸지만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르켈루스의 형제로 '오타킬리우스'가 있었다고 언급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217년과 214년에 법무관을 역임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이며, 마르켈루스의 이복형이었으며 오타킬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었다고 추정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는 마르켈루스가 전사했을 때 60세를 넘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268년경에 출생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젊은 시절에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했고 성숙기에 켈트족과 싸웠으며, 노년기에 한니발 바르카를 격퇴하기 위해 다시 무기를 들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마르켈루스는 모든 형태의 전투에 능숙했지만 특히 단기접전에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마르켈루스가 초년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자료가 미비해 알 수 없다. 단지 마르켈루스가 적에게 둘러싸여 살해될 위기에 몰린 '형제' 오타킬리우스를 방패로 보호하고 적병들을 제압했다는 플루타르코스의 서술만 전해질 뿐이다.
기원전 226년, 마르켈루스는 아우구르에 선임되었고 뒤이어 조영관에 선출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시기에 호민관 또는 보조 조영관을 맡던 가이우스 스칸티니우스 카피톨리누스가 마르켈루스의 어린 아들을 타락시키려 하자, 마르켈루스는 이에 격분해 소송을 제기했다. 스칸티니우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어린 아들 마르켈루스가 눈물을 흘리며 모든 것을 털어놨고, 원로원은 순수한 어린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보고 스칸티니우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마르켈루스는 스칸티니우스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은 그릇을 제작한 뒤 신들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224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법무관에 선임되었다.
2.2. 켈트족과의 전쟁
기원전 223년,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와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가 원로원의 지시에 불복종하여 행동한 일로 강한 압박을 받고 예정보다 일찍 사임했다. 이후 인터렉스의 지명에 따라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22년도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마르켈루스는 동료 집정관으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를 선택했다. 이 무렵, 켈트족의 분파인 인수브레스 족이 플라미니우스와 필루스를 상대로 참패를 당한 뒤 로마에 사절을 보내 평화 협정을 맺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와 칼부스는 민회에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해 동의를 얻어낸 뒤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인수브레스 족은 이에 대응해 가에사타이 족 30,000명을 끌어들였다.두 집정관은 포 강을 넘어 인수브레스족의 영역을 침공해 아케라를 포위했다. 이때 가에사타이 장병들이 포 강을 건너 클리스티다움(오늘날 카스테지오)를 위협하자, 두 사람은 군대를 나누기로 했다. 칼부스는 대다수의 병력을 이끌고 아케라 포위를 계속하기로 했고, 마르켈루스는 전체 기병의 2/3와 경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포 강을 건너 클리스티다움으로 향했다. 이때 가에사타이 족이 돌연 나타나 공격해오자, 마르켈루스는 전투 대열을 길게 펼쳐서 조기에 포위되지 않게 한 뒤 몸소 기병대를 이끌고 적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한창 전투가 진행되던 중, 가에사타이 족의 왕 비리도마투스와 마르켈루스가 서로 맞닥뜨려 단기접전를 벌였다. 그 결과 마르켈루스가 승리하고 비리도마투스의 흉갑을 탈취했다. 지도자가 전사하자 전의를 급격히 상실한 가에사타이 족은 포 강으로 도주하다가 로마군의 추격을 받고 대거 전사했다.
한편, 칼부스는 아케라 공략에 성공한 뒤 인수브레스 족의 수도인 메디올라눔(오늘날 밀라노)를 향해 진격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메디올라눔 공략은 전적으로 칼부스의 공적이라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 에우트로피우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두 집정관이 합심하여 메디올라눔을 공략했다고 한다. 이후 인수브레스 족이 완전히 항복하자, 두 집정관은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때 마르켈루스는 유피테르 신전에 비리도마투스의 흉갑을 바치는 스폴리아 오피마를 행했다. 이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이래 세번째였다. 앞선 두 사례가 전설처럼 여겨지는 만큼 역사적인 유일한 사례였다.[4] 마르켈루스는 이와 더불어 비르투스와 호노스 신을 위한 신전을 건설하겠다고 맹세했다.
2.3. 3차례의 놀라 공방전
마르켈루스의 행적은 켈트족과의 전쟁에서 맹활약한 후 몇년간 전해지지 않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에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에 쳐들어와서 트레비아 전투, 트라시메노 전투, 칸나이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르켈루스는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17년 시칠리아 함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를 보좌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오타킬리우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내의 조카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마르켈루스는 파비우스 가문과도 연관되어 있었을 것이다.그러던 기원전 216년, 푸블리우스 푸리우스 필루스와 함께 법무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시칠리아를 근무지로 배정받은 뒤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에 가서 시칠리아 해안을 위협하는 카르타고 함대에 맞설 로마 함대를 규합했다. 그러다가 칸나이 전투에서 완패한 뒤 남은 장병들이 카누시움에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원로원은 필루스를 시칠리아로 보내고 마르켈루스에게 카누시움으로 가서 패잔병들을 이끌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카누시움으로 향하고 있던 중, 캄파니아의 수에술라 인근에서 놀라 시의 사절단과 대면했다.
당시 놀라 원로원과 지도층은 로마를 계속 따르려 했지만, 놀라 시민들은 자기들 농경지가 카르타고군에게 파괴되는 꼴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고, 로마가 한니발에게 패망할 게 분명하다고 보고 한니발의 편에 들고 싶어 했다. 놀라 원로원은 시민들의 의견을 따르는 척하면서, 마르켈루스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마르켈루스는 즉시 놀라로 달려가 그곳의 치안을 안정시켰다. 한편, 한니발은 주요 항구 도시인 네아폴리스(오늘날 나폴리)를 회유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네아폴리스 주민들이 로마를 확고히 지지한 데다 네아폴리스가 천혜의 요새로 명성이 자자했기에 감히 공성전을 벌이지 않고 누케리아로 이동했다. 누케리아 시민들 역시 회유에 넘어가지 않자, 한니발은 누케리아 시를 포위 공격하여 며칠만에 함락시키고,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누케리아 시의 운명을 전해들은 놀라 시민들은 몹시 두려워했고, 일부는 한니발에게 서신을 보내 놀라로 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한니발은 즉시 누케리아에서 출진하여 놀라로 진군했다. 이때 마르켈루스는 누군가가 적과 내통하고 있을 거라 여기고, 그들이 성문을 몰래 열어줄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군을 성벽 바로 앞에 포진하게 했다. 이후 양자는 소규모 접전을 벌일 뿐,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몇몇 원로원 의원이 마르켈루스를 찾아와서 시민들과 카르타고인들 사이에 밀담이 오갔다고 보고했다. 로마군이 도시를 나선 사이에 시민들이 성벽을 점령하고 성문을 걸어잠가서, 로마군이 성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카르타고군에게 몰살당하게 만들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원들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며 감사를 표한 뒤,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적과 마주보는 세 개의 문 앞에 각각 두었다. 또한 보급품들을 군대의 바로 뒤편에 배치했다. 중앙 성문에는 자신의 군단 중 가장 우수한 군단과 로마 기병을 배치했고, 측면의 2개 문 뒤에는 신병과 벨리테스, 라틴 동맹 기병대를 배치했다. 아울러 시민들이 성벽 위에 올라가거나 성문에 접근하는 걸 금지했다.
한편,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성 가까이 진군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적이 출격하지 않고 성벽에 무장한 병사가 없는 걸 이상하게 여기다가, 놀라 시민들과 짠 계획이 들통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군대를 진영 안으로 들어보낸 후 시민들이 봉기할 때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한니발이 군을 돌려 돌아갈 때, 마르켈루스가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나팔수가 나팔을 요란하게 불렀고, 로마군은 즉시 출격하여 후퇴하는 적병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적이 이토록 맹렬하게 돌격할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카르타고군은 2,800명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반면 로마군의 사상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그 후 한니발은 놀라 공략을 단념하고 아케라로 향했다. 마르켈루스는 성문을 닫고 아무도 나갈 수 없도록 보초들을 배치한 뒤, 적과 밀담을 나눈 자들을 색출해 70명 이상을 체포한 후, 반역 혐의로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로마로 보냈다. 이후 도시 운영을 놀라 원로원에게 맡긴 뒤 수에술라 언덕으로 이동하여 한니발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1차 놀라 공방전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칸나이 전투의 참패에 깊이 상심해 있던 로마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기 충분했고, 마르켈루스는 이 일을 계기로 로마인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 결과, 마르켈루스는 총독의 권한을 부여받고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에 계속 대적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후 기원전 215년 초 집정관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전사한 후 열린 집정관 선거에서 마르켈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파비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된 뒤 마르켈루스에게 수에술라 언덕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통솔하도록 했다. 마르켈루스는 놀라에 본거지를 마련한 뒤, 한니발에게 굴복한 이르피니와 산타니 카우디니 일대를 약탈하고 주거지를 불태웠다. 두 지역 지도자들이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자, 한니발은 그들에게 풍부한 선물을 주며 곧 도우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르켈루스가 한창 약탈에 열중하고 있는 사이에 놀라를 포위하길 희망해 강행군했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항상 퇴로를 마련해둔 채 급습 작전을 벌였고, 정찰병들을 수시로 사방에 보내 한니발의 움직임을 확인하게 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전속력으로 놀라로 진군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그는 즉시 전군을 놀라 시내로 이동시켰다.
자신이 한발 늦었다는 걸 알게 되자, 한니발은 도시를 포위한 뒤 성벽을 향해 진군하게 했다. 그때 마르켈루스는 기병대를 이끌고 성문 바로 앞에 있다가, 적이 성벽으로 바짝 다가갔을 때 성문을 열고 갑작스럽게 출격해 적군을 기습했다. 카르타고군은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다소 희생을 치렀지만 곧바로 반격했다. 이때 폭우가 내려 전투가 중단되었고, 양측 모두 철수했다. 다음날까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양군은 한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놀라 시를 포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한니발은 놀라 시 주변의 농경지를 약탈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했다. 마르켈루스는 적 진영에 사람이 줄어든 걸 보고 전군을 이끌고 성문을 박차고 나와 쳐들어갔다. 한니발은 진영에 남아있는 병사들을 이끌고 평원에 진을 치고 맞서는 한편, 농경지로 파견했던 병사들을 소환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고 한다.
"카르타고인들은 카푸아의 쾌락에 빠졌다. 그들은 겨울 내내 술과 창녀들과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쇠약해졌다. 과거의 힘과 활력은 떨어졌고,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나들던 투지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팔다리와 무기를 거의 들지 못한다. 카푸아는 한니발의 '칸나이 패배'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후 벌어진 2차 놀라 공방전에서 로마군은 1,000명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카르타고군은 5,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6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리비우스가 과장했다고 간주한다. 한니발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군대를 도로 진영으로 불러들었고, 마르켈루스는 농경지를 약탈하던 적군이 돌아오는 걸 보고 도시로 돌아갔다. 사흘 후 누미디아, 이베리아 기병 272명이 로마군에 귀순했고, 로마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정착할 토지를 줬다.
기원전 214년 집정관 선거에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길루스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두 집정관 당선인의 군사적 역량이 떨어진다며 첫번째 부족에 대한 재투표를 요구했다. 이에 오타킬리우스와 아이밀리우스 지지자들이 반발하면서 혼란이 벌어졌다가, 귀족 가문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14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오타킬리우스는 두번째로 법무관을 맡기로 했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18개 군단을 일으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로마를 배신한 카푸아에 투입하기로 결의했다. 한니발은 이 소식을 전해듣자 즉시 아르피를 출발해 티파타 산에 숙영지를 세우고 누미디아와 이베리아 병사 일부를 배치해 숙영지 및 주변 도시들을 방어하도록 맡긴 뒤, 자신은 나머지 군대와 함께 아베르누스 호수로 이동했다. 그는 푸테올리의 로마 수비대를 공격하는 걸 염두에 뒀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아르피를 떠나 캄파니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밤낮으로 행군해 군대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전직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베네벤툼으로 이동하여 한니발의 부하 한노가 한니발과 합세하는 걸 막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파비우스의 아들은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그라쿠스가 있던 아풀리아로 가서 그를 대신해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한니발이 아베르누스 호수 근처에 이르렀을 때, 몇몇 젊은이가 찾아와서 타렌툼으로 와서 그의 편에 서고 싶으니 로마인들로부터 도시를 해방시켜달라고 간청했다. 한니발은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며, 적절한 시기에 개입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서 계획이 실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푸테올리로 진군한 한니발은 사흘간 포위했지만, 6,000명의 병사들이 철저한 방비를 한 그곳을 공략하긴 어렵다고 보고, 주변 일대를 철저히 약탈한 뒤 놀라로 이동했다. 이때 놀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친 로마 인사들을 축출한 뒤,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어서 놀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한니발은 즉시 놀라로 진군해, 이번에야말로 그곳을 공략하려 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 역시 놀라 귀족으로부터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서둘러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즉시 수에술라 언덕으로 이동한 뒤 보병 6,000명과 기병 300명을 선발해 놀라로 도착하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곧 도착할 거라 예상하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게 기병을 맡겨 카르타고를 우회하여 후방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한니발이 놀라에 도착하자 마르켈루스가 즉각 출격하면서, 양측은 반나절 동안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양측 모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날이 어두워지자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한편,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기병을 이끌고 전장을 우회하여 진군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진군이 늦어져서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그는 본진으로 돌아간 뒤 마르켈루스의 꾸중을 받았지만 별다른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다음날 로마군이 평원에 재차 전투 대형을 펼쳤지만, 한니발은 숙영지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 한니발이 놀라 공략을 단념하고 철수하면서, 3차 놀라 공방전이 마무리되었다. 마르켈루스는 놀라에 2,000명의 수비병을 남겨둔 뒤 한니발과 동맹을 맺은 카실리눔을 포위하고 있던 파비우스와 합세해 맹공을 퍼부은 끝에 함락했다.
2.4. 시라쿠사 공방전
카실리눔 공략에 성공한 후, 마르켈루스는 병에 걸려 로마에 돌아가 몸조리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그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고 식량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라쿠사가 기원전 214년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원로원은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 사령관으로 선임해 시라쿠사를 막게 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전쟁 선포를 주도했던 참주 히에로니무스가 데이노메누스가 이끄는 공모자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후 집권한 아드라노도로스가 암살당하는 등 격렬한 권력분쟁이 이어진 끝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 형제가 최종적으로 시라쿠사 참주에 등극했다. 형제는 현 상황에서 로마와 싸우는 건 무리라 보고, 기원전 213년 봄 시칠리아에 상륙한 마르켈루스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마르켈루스 역시 시라쿠사와 타협하고 한니발에 전념하고 싶기에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그런데 카르타고가 곧 원군을 보낼 거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마음을 달리먹고 인근 영토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수비대를 공격해 많은 이를 살육했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에 전령을 보내 두 사람을 넘기지 않으면 전쟁 뿐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두 형제는 로마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레온티니 시로 도피했고, 시라쿠사 인들은 마르켈루스에게 레온티니에 두 사람이 피신했으니, 그들을 친다면 자기들이 돕겠다고 답했다. 마르켈루스는 전군을 이끌고 레온티니 시를 공격했고,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는 성문이 파괴되고 성벽이 공략당하자 아크로폴리스와 에르베소로 피신했다. 로마군을 돕기 위해 출진한 8,000명의 시라쿠사군은 도중에 레온티니 시 주민과 군인들이 전부 도륙당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전해듣고 심한 충격을 받고 행군을 멈췄다.
얼마 후, 로마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가 시라쿠사군을 찾아갔다. 그들은 부디 자신들을 넘기지 말고 보호해달라고 간청하면서, 로마군은 언젠가 시라쿠사도 레온티니 시처럼 만들 거라고 덧붙였다. 시라쿠사 지휘관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라쿠사 원로원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이때 히포크라테스는 편지를 가로채어 큰 소리로 읽었다. 그 편지에는 두 사령관이 마르켈루스에게 모든 용병 민병대를 넘겨서 가혹하게 다루도록 하는 대가로 시라쿠사가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도록 하는 게 어떠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병사들은 이에 분노했고, 사령관들은 시라쿠사로 달아났다. 군대는 히포크라테스와 에피키데스를 새 사령관으로 추대한 뒤 시라쿠사로 돌아왔다. 이후 시라쿠사는 잔혹행위를 자행한 로마와 끝까지 싸우기로 결의하고, 친로마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도 시라쿠사를 응징하기로 결의하고 마르켈루스에게 시라쿠사 공략을 맡겼다.
기원전 213년 중반, 마르켈루스는 4개 군단 20,000 ~ 30,000명을 이끌고 시라쿠사를 포위했다. 성벽 가까이에 진영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도시를 완전히 포위한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엑사필론 성문 쪽으로 돌격했고, 마르켈루스 본인은 활, 슬링,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이끌고 아크라디나 아크라디나 성문 쪽으로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마르켈루스의 부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이끄는 함대가 해안 성벽 쪽으로 이동하여 삼부카(Sambuca)를 활용하여 성벽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폴리비오스는 삼부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켈루스는 모든 배를 8척의 겔리선마다 밧줄로 서로 묶게 했다. 각각의 쌍은 그들의 노를 하나는 좌현에, 다른 하나는 우현 쪽으로 몰아놓고, 남겨진 측면마다 밧줄로 고정했다. 선원들은 남은 노를 바삐 저어 성벽 아래로 접근하였고, 뒤이어 '삼부카'라고 하는 기계를 들어올렸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사다리는 4피트 너비의 높이로 만들어졌고, 사다리의 양쪽은 난간으로 보호되었다. 머리 위는 덮개로 보호되었다. 이후 발이 묶인 배의 측면을 가로질러 놓이도록 놓았고, 다른 쪽 끝은 뱃머리 너머로 상당히 돌출되어 서로 닿았다. 돛대 꼭대기에는 도르래를 밧줄로 고정하고, 사다리를 사용하려고 할 때 배의 고물 위에 서 있는 선원들이 사다리 머리에 묶인 밧줄을 당기고 다른 이들은 들어올리는 걸 도왔다. 긴 막대기로 기계가 안정되도록 유지했다.
그런 다음 두 선박의 바깥쪽 노를 사용하여 배를 해안 가까이에 놓은 후 기계를 성벽에 떨어뜨리려 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4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삼부카가 성벽 위에 놓이는 걸 막으려는 적군과 싸웠다. 그들은 삼면이 고리버들 방패로 고정된 나무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만약 사다리가 벽의 꼭대기 높이 보다 높아지면, 네 사람은 고리 버들 방패를 풀고 성벽이나 답 위로 걸어 나왔다. 뒤이어 동료들이 삼부카를 타고 올라가 성벽에 이르렀다. 이 기계는 자연적인 이유로 '삼부카' 또는 '하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들어 올릴 때 배와 사다리의 조합이 그러한 악기의 모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두 선박의 바깥쪽 노를 사용하여 배를 해안 가까이에 놓은 후 기계를 성벽에 떨어뜨리려 했다. 사다리 꼭대기에는 4명의 병사가 배치되어 삼부카가 성벽 위에 놓이는 걸 막으려는 적군과 싸웠다. 그들은 삼면이 고리버들 방패로 고정된 나무 바닥 위에 서 있었다. 만약 사다리가 벽의 꼭대기 높이 보다 높아지면, 네 사람은 고리 버들 방패를 풀고 성벽이나 답 위로 걸어 나왔다. 뒤이어 동료들이 삼부카를 타고 올라가 성벽에 이르렀다. 이 기계는 자연적인 이유로 '삼부카' 또는 '하프'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들어 올릴 때 배와 사다리의 조합이 그러한 악기의 모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가 최대 발사 범위 내에서 모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투석기들을 성벽에 배치해둔 바람에, 로마 함대는 곧 위기에 직면했다. 투석기들은 접근해오는 적 함대를 향해 바위를 정확하게 날렸고, 적이 성벽 가까이 접근해오면 더 작은 기계를 사용해 적을 향해 돌을 발사하여 모조리 파괴했다. 또, '철제 손'을 사용하여 성벽에 가까이 접근하여 삼부카를 성벽 위에 걸려던 적 함선의 뱃머리를 들어올려서 전복시켰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배들은 철제 손에 걸려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했고, 매달려 있는 동안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기도 했으며, 선원들은 모조리 내동댕이쳐졌고 몇몇은 어떻게든 밧줄을 붙들었다가 속절없이 추락했다고 한다. 육상에서도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투석기와 철제 손의 대활약으로 로마군이 만든 공성 무기는 모조리 파괴되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이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는 유리잔에 물을 길어 올리는 것처럼 배를 끌어올리고 있고, 내 삼부카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연회장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두들겨 맞는구나."
결국 마르켈루스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해 적을 굶겨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3분의 2의 병력을 맡겨 도시를 계속 포위하게 한 뒤, 자신은 나머지 3분의 1을 이끌고 카르타고인들에게 넘어간 시칠리아 도시들 중 일부를 공략했다. 하지만 카르타고 사령관 히밀코가 25,000명의 보병, 3,000명의 기병, 12마리의 코끼리를 이끌고 헤라클레아 미노아에 상륙하여 아그리젠토의 항복을 받아낸 뒤 시라쿠사로 진군하자, 그는 일단 시라쿠사로 돌아오다가 도중에 히포크라테스의 시칠리아 기병대와 조우해 격파했다. 이후 카르타고군과 맞설 채비를 갖췄다. 얼마 후 히밀코가 도시에서 약 12km 떨어진 아나포 강 근처에 숙영지를 세웠고, 보밀카르가 이끄는 55척의 카르타고 함대도 시라쿠사 항구 앞에 도착했다.
히밀코는 적의 방비가 굳건한 걸 보고, 섣불리 마르켈루스를 치지 않았다. 보밀카르의 함대와 시칠리아 수비대와 함께 로마군을 협공한다면 충분히 승산 있었지만, 그는 끝내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르켈루스와 합류하러 오는 로마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로마군이 해안 도로로 진군하는 동안 내륙 산간 길에서 헤매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추가 병력이 마르켈루스와 합류하자, 히밀코는 병력을 철수시킨 뒤 로마에 복종하는 이웃 도시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카르타고군이 무르간티아의 항복을 받아내어 많은 양의 곡식과 모든 종류의 보급품을 확보하자, 여러 도시가 뒤따라 로마 수비대를 추방하거나 제압하여 카르타고군에 귀순했다. 에나 시에 주둔하고 있던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휘하 로마 수비대는 시민들이 자신들을 카르타고군에게 넘겨주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야밤에 시민들을 습격하여 학살을 자행한 뒤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시칠리아인들은 이 학살에 분노하여 카르타고 편에 대거 가담했지만, 정작 히밀코는 여전히 싸우길 주저하며 아그리겐툼으로 돌아갔다.
이후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18개월간 계속 포위했고, 카르타고군은 섣불리 달려들지 않고 적과 대치했다. 그러자 시라쿠사 주민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친 로마 성향의 인사들은 로마에 귀순해 궁핍해진 생활을 개선하자고 주장했고, 나머지는 끝까지 항전하자고 주장했다. 일부 시라쿠사 귀족들이 마르켈루스와 접촉해 성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곧 발각되어 모조리 처형되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 역시 카르타고군과 시라쿠사 중 어느 한쪽을 섣불리 꺾지 못해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러던 중 시라쿠사인들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인 다미포가 로마군에 붙들렸다. 그는 스파르타 출신의 지식인으로, 마르켈루스의 회유에 넘어가 시라쿠사의 약점을 알렸다. 그는 시라쿠사인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기 위해 사흘간 기념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며, 이때 포도주를 많이 마실 거라고 밝혔다. 또한 갈레아그라라고 불리는 탑 인근의 트로길로 만 쪽이 성벽의 높이가 가장 낮아서 공략하기 쉬운 편이니, 그쪽에 특공대를 보내라고 덧붙였다.
마르켈루스는 그의 조언에 따라 시민들이 축제를 실컷 즐기고 술에 취해 곯아 떨어졌을 새벽에 1,000명의 특공대를 극비리에 보내어 다미포가 알려준 갈레아그라 탑 부근의 절벽을 기어올라 성벽을 넘게 했다. 별다른 경계를 하지 않던 보초병들은 모조리 살해되었고, 특공대는 근처 성문을 열어 아군이 진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외곽 도시는 공략되었고, 시민과 수비대가 도주한 오르티야와 아카디나 등 내부 성채를 재외한 도시 대부분이 로마군의 손에 넘어갔다. 히밀코는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시라쿠사를 구하러 출정했지만 마르켈루스의 역공으로 격파되었고, 뒤이은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카르타고군과 함께 있던 히포크라테스 역시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에피키데스는 8개월간 내부 성채에서 항전하다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닫고 시라쿠사를 버리고 카르타고로 망명했다. 결국 수비대가 최종적으로 항복하면서, 시라쿠사는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로마군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일설에 따르면 시라쿠사 함락 직후 아르키메데스를 절대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말고 산 채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며[5], 아르키메데스가 그를 몰라본 한 로마 병사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애석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게 분노하여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아르키메데스를 죽인 그 병사를 무자비한 채찍형에 처했다고 한다. 이때 마르켈루스가 한 말은 "네놈이 저지른 죄는 무엄하게도 햇빛을 가린 죄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6]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공략에 성공한 뒤 카르타고 편에 섰던 도시들을 회유해 로마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나 시칠리아인들은 여전히 로마를 불신했고, 카르타고 정부가 한노에게 새 병력을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해서 성과가 크지 않았다. 여기에 한니발 역시 누미디아 혈통의 페니키아인이었던 부관 무티네스에게 누미디아 기병대 일부를 맡겨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무티네스는 시칠리아에 도착한 뒤 그곳을 철저히 조사하여 동맹 도시를 찾고, 같은 편인 자들을 도와주고 로마의 편에 선 마을들을 철저히 약탈했다. 그 결과 많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카르타고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였으며, 카르타고를 지지하는 이들은 그를 새로운 희망으로 여겼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무티네스를 무찌르기로 하고, 군대를 이끌고 무티네스를 추적한 끝에 히메라 강에서 조우했다. 그는 적에게서 약 4마일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뒤, 적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무티네스는 로마군에게 시간을 주지 않기로 결심하고,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적의 전초 기지를 공격하여 혼란을 일으켰다. 다음날 양군이 정면 대결을 벌였을 때, 그는 강을 곧바로 건넌 후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로마군을 크게 이기고 요새 안으로 몰아넣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르켈루스는 자신이 한니발을 놀라에서 겨룰 때마다 퇴각시킨 데다, 시라쿠사 함락이라는 최고의 군사적 성취를 이룩하였는데, 패잔병과 신병들로 구성된 오합지졸에게 당했다면서 펄펄 뛰었다고 한다.
이후 양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누미디아 기병 300명이 진영에서 이탈하여 헤라클레아 미노아로 달아났다. 그는 이들을 잡으러 가면서, 한노와 에피키데스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로마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두 장군, 특히 한노는 "누미디아 혼혈인 주제에 감히 순수 페니키아인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며 무시하고, 마르켈루스와 재차 전투를 벌였다가 완패했다. 이날 수천 명에 달하는 카르타고군이 죽거나 중상을 입었고, 8마리의 코끼리가 포획되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 동부 일대는 로마에게 완전히 굴복하였고, 나머지 지역에서도 카르타고에게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않고 점령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다가 기원전 211년 늦여름에 시칠리아의 지휘권을 법무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에게 넘겨주고 로마로 귀환했다.
2.5. 한니발의 숙적
마르켈루스는 로마로 돌아온 뒤 원로원에 승리를 보고하고 개선식을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시칠리아 전쟁이 지속되고 있고, 한니발이 아직도 건재하며, 승리를 거둔 병사들이 아직 시칠리아에서 복무하고 있어서 개선식에 동행하지 못하는 점을 들어 한 단계 아래인 오베이션(공개 장소에서 군중의 갈채를 받는 의식)을 알반 산에서 받게 했다. 한편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의 위상을 떨어뜨리기 위해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저지른 잔혹 행위를 이용하려 했다. 신임 시칠리아 사령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쿠스는 이에 부응해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었고 착취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그리스계 시칠리아인을 로마로 보내 마르켈루스의 만행을 증언하게 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할 적임자는 마르켈루스 뿐이라고 여겼기에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기원전 210년, 마르켈루스는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추첨 결과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 방면을 맡게 되었고, 라이비누스는 한니발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라쿠사 주민들은 기겁해 로마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애도복을 입고 원로원 회의장에 나타나 "마르켈루스가 또다시 시라쿠사를 파괴하는 것을 지켜보느니 에트나 화산이 폭발해 섬 전체가 멸망하는 것이 낫다"라며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에 보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원로원은 라이비누스를 시칠리아에 보내고 마르켈루스가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마르켈루스는 군대를 조직한 뒤 살라피아 시로 진군해 그곳의 귀족 발라티우스의 호응 덕분에 손쉽게 공략하고 그 곳에 주둔한 누미디아인 500명을 척살했다. 뒤이어 삼니움으로 진군해 말모레와 멜라를 공략했다. 얼마 후 한니발이 2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 2개 군단(20,000 ~ 30,000명)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서 패잔병들을 수습했다. 이후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켄투말루스의 전사와 헤르도니아 시민들이 한니발에게 강제 이송된 사실을 알렸다. 그는 한니발과 맞서겠다면서, 놀라에서 한니발을 3번이나 막아낸 자신이라면 그를 능히 막을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는 산니움에서 루카니아로 진군하여 누미스트로 근처 평지에 진영을 세워서, 바로 앞 언덕에 주둔한 한니발과 대치했다.
마르켈루스는 일전에 동료가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지만 절대로 두렵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군대의 선두에서 전장으로 향했다. 한니발은 적진에서 로마의 휘장이 나오는 걸 보고 자신의 군대 역시 카르타고의 휘장을 내세우라고 명령했다. 한니발은 우익 부대를 언덕의 경사면에 배치했고, 로마군은 누미스트로 시를 좌익의 기준점으로 사용했다. 이윽고 한니발의 군대가 언덕에서 진격하고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이 응전하는 방식으로 누미스트로 전투가 개시되었다. 전투는 오전 부터 밤까지 지속되었고, 도중에 지친 병사들을 후방의 군대와 교대하여 재차 맞붙었다. 그러나 좀처럼 승패가 판가름나지 않다가,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 앞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자 양측 모두 진지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다음날 새벽까지 진영에서 뜬 눈으로 지새웠고, 적이 야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 전사자의 유해를 한 곳에 모아서 불태웠다.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고, 장병들에게 완전한 침묵 속에서 진영을 떠나 아풀리아로 떠나게 했다. 날이 밝아서야 적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마르켈루스는 부상자들을 누미스트로 시에 남겨두고 카르타고군을 추격했다. 양군은 아스콜리에서 조우하여 재차 맞붙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한니발은 밤에 재차 철수해 아풀리아에 도착했다. 이후 겨울이 찾아오자 양측 모두 아풀리아에서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기원전 209년, 집정관에 선출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는 전임 집정관 마르켈루스와 함께 한니발을 봉쇄하고 그에게 가담한 타렌툼을 정벌하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개시했다. 파비우스는 타렌툼으로 진격했고, 플라쿠스는 루카니아로 진군했으며,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타렌툼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임무를 맡았다. 한니발은 카누시움 근처에 진을 친 뒤 주민들을 설득해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게 하려 했다. 그러다가 마르켈루스가 다가오자, 그는 마르켈루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서 주민들이 자신의 편을 들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한니발은 일단 후퇴하면서 매복군을 숨겨뒀다. 마르켈루스의 로마군은 즉각 추격했고, 양측은 교전을 벌였으나 별다른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밤이 돼서야 물러나 숙영지를 세웠다. 다음날 양군은 재차 맞붙었는데, 이때 한니발이 숨겨둔 매복병이 적의 측면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로마군의 전황은 위태로워졌고, 라틴 동맹 징집병으로 구성된 첫번째 전열의 측면이 무너졌다. 마르켈루스는 퇴각하는 동맹군을 구하기 위해 후방에 배치된 군단을 투입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로마군과 진군하는 로마군이 서로 뒤엉킨데다, 카르타고군이 맹렬히 공격해왔기 때문에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로마군 전체가 붕괴되어 숙영지로 도주했는데, 그중 2,700명은 숙영지에 미쳐 들어오지 못하고 피살되었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패배에 굴하지 않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적과 맞붙었다. 카르타고군이 전투 코끼리를 투입해 로마군의 전열을 무너뜨리자, 로마군은 투창 세례를 퍼부어 코끼리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게 만들어, 적을 혼란에 빠지게 했다. 마르켈루스는 이 틈을 타 기병대를 전투에 투입했고,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전투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마르켈루스는 전날보다 많은 병력을 잃어야 했다.[7] 이후 한니발이 남쪽으로 철수했을 때, 마르켈루스는 전사자와 부상자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당장 추격하지 못했다.
카누시움 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마르켈루스의 군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시누에사로 물러났다고 한다. 반면 리비우스에 따르면 베누시아로 물러났다고 한다. 그는 여름 내내 군대를 이동시키지 못했고, 한니발은 그 사이에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해 카울로니아 근처에서 8,000명의 로마군 분견대를 섬멸하여 레기움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타렌툼에서 5마일 떨어진 곳까지 이르렀을 때, 파비우스가 2차 타렌툼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타렌툼 구원은 실패했고, 플라쿠스 역시 북부 루카니아 일대를 평정했다. 한편, 마르켈루스의 정적들은 그를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고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무능한 장군이라고 비난하며 지휘권을 박탈하라고 요구했다. 그 때문에 가족을 잃은 시민들 역시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마르켈루스가 그동안 거둔 공적을 고려해 계속 신임하기로 했다.
2.6. 최후
기원전 208년 다섯 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된 마르켈루스는 베누시아에 겨울 숙영을 하고 있던 로마군과 합류했다. 얼마 후, 동료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한니발의 배후지인 브루티움으로 진군해 로크리 시를 포위했다가 한니발이 접근해오자 포위망을 풀고 베누시아로 가서 마르켈루스와 합류했다. 마르켈루스와 크리스피누스는 베누시아와 반티아 사이에서 한니발과 대치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게 여기고 있었기에 섣불리 회전을 벌이지 않고 단지 소규모 전투만 벌었다.당시 양측 진영 사이에는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있었다. 한니발은 누미디아 기병 300명을 그 곳으로 보냈다. 그리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고, 그저 그곳으로 향할 정찰대에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르켈루스는 직접 그 숲을 정찰하기로 마음먹고, 250명의 분견대와 동료 집정관 크리스피누스, 그리고 아들 마르켈루스와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이에 누미디아 기병들이 그들을 덮쳤고, 마르켈루스는 이들과 맞서다 트리부누스 밀리툼 1명, 동맹군 장군 1명, 40명의 로마 기병과 함께 전사했다. 크리스피누스와 아들 마르켈루스는 중상을 입고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니발은 그동안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마르켈루스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소식에 크게 놀랐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직접 현장으로 가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마르켈루스의 유해를 멍하니 바라봤다고 한다.
한편, 가까스로 탈출한 동료 집정관 크리스피누스는 진영에 도착한 뒤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인장을 얻었다는 사실을 모든 인근 마을에 알렸다. 그 결과, 한니발이 마르켈루스의 명령을 사칭하여 여러 마을에 보낸 서신을 어떤 마을도 믿지 않았고, 한니발은 마르켈루스를 죽인 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후 자신을 찾아온 사절단에게 부상이 심각하여 로마로 가서 독재관을 지명할 수 없다고 밝히고, 그 자리에서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독재관으로 추천했다. 그 후 카푸아에서 몇달간 신음하다가 기원전 208년 후반기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로마 역사상 최초로 두 집정관이 같은 해에 전사했다. 로마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칸나이 전투 때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전사했지만,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살아남았는데, 이 소규모 접전으로 두 집정관이 나란히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3. 후손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마르켈루스의 유해를 화장한 뒤 재를 담아서 고인의 아들에게 보내게 했다.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받은 뒤 장례식 연설을 발표했는데,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안티파테르의 역사서에 그 내용이 실렸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이를 인용했다. 기원전 205년, 아들 마르켈루스는 아버지 마르켈루스가 집정관을 처음 맡았던 기원전 222년에 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아버지가 세운 명예와 미덕의 사원(Aedes Honoris et Virtutis)의 봉헌식을 개최했다. 그 후 그는 기원전 196년 집정관을 역임했다.손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3차례(기원전 166년, 기원전 155년, 기원전 152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명예와 미덕의 사원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고 "9번 집정관을 역임한 3명의 마르켈루스(tres Marcelli novies consules)"라고 적힌 비문을 건립했다. 이후 마르켈루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고위 행정관 직임을 역임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시칠리아 전체의 후원자로 간주되었다. 이 가문의 마지막 대표자는 소 옥타비아의 아들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였다.
4. 평가
로마의 칼[8]
당대 마르켈루스를 가리키던 별명
당대 마르켈루스를 가리키던 별명
직접 정찰을 나서는 면이나, 갈리아 원정에서 적의 장군과 직접 결투를 행하는 점, 시라쿠사에서 보여준 면모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발목을 잡던 용맹한 면모 등을 종합해봤을 때 호전적이고 행동력 있으면서도 문화의 가치를 아는 문무양면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적 실력은 아마 스키피오를 제외하고 로마군의 최고 수준이라 할만한 자로 그가 지휘한 로마군은 몇 차례의 작은 손실을 겪을지언정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일이 없었고 특히 공성전에서는 공격하면 점령하고 방어하면 격퇴하는 신묘한 솜씨가 있었다.
이런 인물이 특이하게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음은 주목할 만한데, 시민들에게 그는 "너무 엄격하다", "무자비하다"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한니발 전쟁 초기에 파비우스의 지연전 주장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마르켈루스의 물어뜯기형 추격전은 당시 로마군이 야전에서 전멸하지 않고 한니발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고 또 결과적으로 분명 의미있는 방식이기는 했으나 그만큼의 수많은 패퇴와 막대한 아군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었다. 결국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맞서는 동안 계속해서 인적 손실을 겪자 그를 탄핵시키려는 움직임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이 되자 시칠리아 시민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러 로마에 방문할 정도였다.
마르켈루스가 사망했을 당시 그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평판이 점점 나빠져 "마르켈루스의 업적이 봉헌된 신전이 지나치게 많다", "모두 내려야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이 일화로 마르켈루스가 능숙한 정치가이기보다는 전형적인 군인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5. 창작물에서
《유레카》[9]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만화의 배경이 시라쿠사 공방전을 다루고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 기세등등하게 시라쿠사에 도착했다가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각종 기계장치들에 혼쭐이 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후 주인공 스파르타 사람 다밋포스가 시라쿠사 성의 약점을 알려준 덕분에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나온다.한국의 대체역사물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에선 천재 지휘관 한니발과 미래 지식으로 무장한 주인공을 무척 어렵게 하며, 그 둘이 없는 곳에선 카르타고군을 무자비하게 갈아버린다. 해당 작품 내에선 스키피오보다 더 활약하는 카르타고 입장에서 최종보스.
[1] 플루타르코스의 <마르켈루스> 26에서 인용.[2] 상대군의 총지휘관을 일대일 전투로 죽이고 그 갑옷을 벗겨 카피톨리누스 언덕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하는 것. 로마에서 군경력 중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 여겨졌다.[3] 다만, 일반 로마인들에게는 인기가 별로였다.[4] 후대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바스테르나이족의 왕 델도(Deldo)를 일대일 결투에서 죽여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나 당시 로마의 지배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허락하지 않았다.[5]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비록 적이지만 위대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6] 이를 두고 '어라? 장군의 명령을 어긴 것 치고는 죄가 가볍네?'라고 생각하면 큰코 다친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고대 로마에서 형벌로 쓰이던 채찍은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채찍 안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이걸 맨살에 맞으면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가 이 채찍형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해서 자결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고어성 때문에 판본에 따라서는 마르켈루스가 명령을 어긴 그 병사를 순식간에 참수하는 형태로 바뀌기도 한다. 다만 이런 형태의 채찍은 십자가형 같이 죽이는 것이 확정된 죄수에게 쓰이는 것으로, 채찍질 당하고 나면 회복불능인 물건인지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해당 병사에게는 다른 채찍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7]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 전투에서 8,000명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과장되었다고 본다.[8] 반면 지구전 전법으로 한니발을 상대하던 파비우스에게는 로마의 방패라는 별명이 붙었다.[9] 기생수, 히스토리에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