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 라틴어: Publius Decius M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79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아스쿨룸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조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아버지) |
참전 | 피로스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79년 |
전임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티베리우스 코룬카니우스 |
동기 |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 |
후임 | 가이우스 파브리키우스 루스키누스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파푸스 |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아스쿨룸 전투에서 피로스 1세에 대적했으나 전사했다.2. 행적
노빌레스 가문인 데키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조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는 기원전 343년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맡아 사티쿨라 전투에서 삼니움족의 매복에 걸린 아군을 구해내 명성을 떨쳤고 기원전 340년 집정관에 선출된 뒤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든 마르시, 펠레그니 족을 상대로 베수비오 전투를 치를 때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신이 로마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기를 서원하는 데보티오(Devotio)를 이행해 로마군의 승리를 안겨주고 본인은 전사했다.아버지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는 기원전 312년, 기원전 308년, 기원전 297년, 기원전 295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삼니움 전쟁에서 활약했다. 특히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아군이 무너질 위기에 몰리자 역시 데보티오를 이행해 장렬하게 전사했고, 로마군은 이에 격앙되어 격렬하게 싸운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79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사베리오와 함께 집정관이 되기 이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두 집정관은 4개 군단 4만여 병력을 함께 이끌고 라티움으로 북상하고 있는 피로스 1세의 에페이로스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그들은 작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전투 코끼리가 막판에 아군 기병대를 몰아내는 바람에 패배했다고 판단하고, 소가 끄는 잔차에 긴 창을 든 병사들을 탑승시켜서 코끼리에게 상처를 입히고, 불에 가진 아궁이들을 코끼리에게 던져서 도망갸게 만들기로 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에 따르면, 아스쿨룸 전투 전날 에페이로스 진영에 적 지휘관 데키우스 무스가 조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본인 역시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투 중에 자신을 희생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피로스는 병사들에게 데키우스를 죽이지 말고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데키우스는 끝내 자신을 희생물로 바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반면 플루타르코스는 데보티오를 행한 데키우스를 기원전 340년과 기원전 295년의 두 명만 언급했다.
데키우스가 참여한 전투의 결과 역시 불분명하다. 카르디아의 히에로니무스는 로마군은 8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피로스는 3천의 전사자를 내었다고 기술했다. 반면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오스는 양쪽 모두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밝혔으며,로마 역사가들은 로마군이 데키우스의 '희생'에 힘입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현대 학자들은 피로스가 전투를 치른 뒤 로마에 사절을 보내 강화 협정을 맺자고 압박한 것을 볼 때 피로스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추정한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푸블리우스 데키우스 무스'가 볼시니아 시의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는 것을 사전에 파악하고 진압했다고 한다. 하지만 플로루스는 기원전 265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주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이 장악한 볼시니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았다가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고 밝혔다. 많은 학자들은 데키우스는 아스쿨룸 전투 당시 전사했고, 파비우스가 노예 반란 진압에 투입된 게 사실에 근접할 거라고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