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라틴어: 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 | |
생몰년도 | 미상 ~ 기원전 203년 |
출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사망지 | 로마 공화국 로마 |
지위 | 파트리키 |
국가 | 로마 공화국 |
가족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증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조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버지)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아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 |
직업 | 로마 공화국 집정관 |
로마 공화정 집정관 | |
임기 | 기원전 233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
동기 |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 |
후임 |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마르쿠스 푸블리키우스 말레올루스 |
임기 | 기원전 228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그나이우스 풀비우스 켄투말루스 |
동기 |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 |
후임 |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 |
임기 | 기원전 215년 |
전임 |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1]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2]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임기 | 기원전 214년 |
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동기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후임 |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
임기 | 기원전 209년 |
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 |
동기 |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
후임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
οὕτω δὲ παράγων τὸν χρόνον ὑπὸ πάντων κατεφρονεῖτο, καὶ κακῶς μὲν ἤκουεν ἐν τῷ στρατοπέδῳ, κομιδῇ δὲ τοῖς πολεμίοις ἄτολμος ἐδόκει καὶ τὸ μηδὲν εἶναι, πλὴν ἑνὸς ἀνδρὸς Ἀννίβου. μόνος δ' ἐκεῖνος αὐτοῦ τὴν δεινότητα καὶ τὸν τρόπον ᾧ πολεμεῖν ἐγνώκει συνιδών.
이런 식의 지연작전은 전반적으로 시민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불평이 들려왔다. 적군 역시 파비우스를 용기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생각은 달랐다. 한니발만이, 오직 그만이 파비우스의 영리함과 전투 방식을 두려워했다.
플루타르코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5
[clearfix]이런 식의 지연작전은 전반적으로 시민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그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불평이 들려왔다. 적군 역시 파비우스를 용기도 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생각은 달랐다. 한니발만이, 오직 그만이 파비우스의 영리함과 전투 방식을 두려워했다.
플루타르코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5
1. 개요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독재관.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불리한 전황에 놓인 로마를 파비우스 전략을 통해 구원한 인물로 유명하다. 사후에 붙여진 별명은 쿵크타토르(Cunctator)였다. 이는 "굼뜬 자"라는 뜻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지연전을 펼쳤던 걸 비꼬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로마의 방패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렸고, 이후 '로마의 검'이라고 불린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로마의 위대한 장군으로 칭송받았다.
2. 생애
2.1. 가문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파비우스(Favius)라는 명칭은 가문의 대표자가 야생 동물을 잡기 위해 구덩이를 자주 파는 것을 본 사람들이 이 사람의 가족들을 '땅을 파는 자'라는 뜻의 라틴어 단어 '포데레'(fodere)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파비우스의 시조가 헤라클레스와 이탈리아 님프의 아들이라는 설을 제기했다. 이 가문은 고대 로마 굴지의 파트리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영향력있는 가문으로 일컬어졌으며, 로마 공화국의 건국 이래 수많은 고위 행정관을 배출했다.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출신 일족인 파비우스 가의 역사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이 가문은 로마가 건국된 이래 유니우스, 발레리우스 가문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사를 한 것으로 명성이 대단했다.
특히, 로마의 전통 문학과 예술 발전 속에서 파비우스 가문의 후원은 후일 로마 공화정 이래 파트리키, 노빌레스 일가의 교과서로 인정될 정도였다.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477년 크레메라 전투에서 퀸투스 파비우스 비불라누스를 제외한 모든 파비우스 일가가 전사했다고 한다.
이후 비불라누스는 기원전 469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번창하며 고위 행정관을 역임했다. 이중에서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는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이 인물은 5차례(기원전 322년, 기원전 310년, 기원전 308년, 기원전 297년, 기원전 295년) 집정관을 역임했고 기원전 315년과 기원전 313년에 독재관을 역임하면서 삼니움 전쟁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기원전 295년 센티눔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력을 발휘해 삼니움과 켈트족 계열인 세노네스족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룰리아누스의 아들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는 3차례(기원전 292년, 기원전 276년, 기원전 265년) 집정관을 역임하면서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활약했지만, 3번째로 집정관으로 선임된 기원전 265년에 노예들이 주인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장악한 볼시니아를 공략하는 임무를 맡아 도시를 포위 공격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구르게스의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67년 조영관을 역임하던 중 아폴로니아의 사절들을 모욕했다가 원로원에 의해 아폴로니아인들에게 넘겨졌지만 로마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그들이 돌려보내면서 목숨을 건졌다. 이 인물의 아들이 바로 이 문서의 주인공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이다. 참고로, 사촌이 역사가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였다.
2.2. 초년기
생전에 불린 별명인 '베루코수스'(Verrucosus)는 윗입술 위에 난 사마귀를 가리킨다. 어린 시절에는 온순한 성격 때문에 '오비쿨라'(Ovicula, 양)로 불렸다고 한다. 생년월일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일부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62년 동안 아우구르였다고 서술했는데, 이게 맞다면 아주 오래 살았던 것이다"
라고 기술했다. 이에 대해 19세기 독일의 역사가인 프리드리히 뮌처는 리비우스가 연대기 작가들의 기술에 회의적이었으며,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일부 학자들은 기원전 275년에 출생했다고 추정했지만, 이를 입증하는 증거는 부족하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어렸을 적 공부나 운동은 잘 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필요한 지식을 느리지만 확실하게 인식했는데, 특히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그외의 역사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군인이자 연설가로서의 준비를 착실히 해나갔다고 한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기원전 265년에 아우구르가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조부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이 해에 사망한 뒤 그가 아우구르의 직위를 물려받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알려지지 않은 시기[3]에 트리부누스 밀리툼을 2차례 맡았으며 재무관과 조영관을 잇따라 역임했다.
2.3. 첫 번째, 두 번째 집정관과 감찰관, 첫 번째 독재관
기원전 233년, 마니우스 폼포니우스 마토와 함께 집정관에 첫 번째로 선출되었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그는 이탈리아 북부를 수시로 침략하던 리구리아인들과 맞붙어 승리를 거두고 그들을 알프스산맥 깊숙이 몰아낸 뒤 로마로 귀환해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당시 동료 집정관 마토는 사르데냐 섬에서 발발한 봉기를 진압했다. 아울루스 겔리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는 이 시기에 해군을 파견해 사르데냐를 탈환하려고 했지만 로마 해군에 저지되었다. 이후 파비우스는 카르타고인들에게 창과 지팡이를 보내면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했다. 창을 택한다면 전쟁이고, 지팡이를 택한다면 평화가 있을 것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이 지팡이를 선택하면서 평화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 등 다른 사료는 카르타고 해군이 사르데냐를 되찾으려 했다가 무산된 시기는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와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불부스가 집정관이던 기원전 235년이라고 밝혔다.기원전 230년, 마르쿠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임되었다. 이 사실은 《파스티 카피톨리니》에만 언급되었으며, 감찰관으로서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228년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에 대한 세부 정보를 제공하는 고대 저자는 오직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뿐이다. 키케로는 저서인 《노년에 관하여》에서 집정관 루가는 호민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농지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데 비해 파비우스는 극력 반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폴리비오스는 플라미니우스가 호민관을 맡아서 이 법안을 제시한 시기는 기원전 232년이며, 기원전 228년에는 법무관을 맡아 농지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고 기술했다.
키케로의 언급 때문에, 파비우스는 후대 학자들에게
"평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기득권층의 대표"
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파비우스가 단순히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플라미니우스가 빈농들에게 나눠주겠다고 한 토지는 켈트족이 거주하던 피케눔 일대의 농지였다. 파비우스 등은 이를 강행할 경우, 켈트족이 대대적으로 반발해 로마의 국방이 위험해진다고 여기며 반대했지만, 플라미니우스 등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로마 시민들이 열렬히 찬성하면서 가결되었다. 결국 기원전 223년 켈트인들이 로마의 피케눔 식민지화에 심한 위협을 느끼고 대대적으로 봉기했지만, 플라미니우스가 직접 집정관을 맡아 토벌했다. 하지만 켈트족은 이 일로 로마에 원한을 품고, 훗날 한니발 바르카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했을 때 그에게 대거 가담했다.기원전 220년대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나,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그가 이 시기에 독재관을 역임했다고 밝혔으며, 학자들은 《파스티 카피톨리니》의 행정관 목록에 기원전 221년과 기원전 219년 사이가 비어있는 것을 볼 때 파비우스가 기원전 221년에 모종의 이유로 독재관을 역임했고,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기병장관을 맡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이 선임이 발표된 직후에 쥐들이 '끽끽'하며 우는 소리가 들렸고, 사제들이 이를 불길한 징조라고 하는 바람에 파비우스와 함께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4.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
폴리비오스가 인용한 카일 아크테의 실레노스와 라케다이몬의 소시로스에 따르면, 기원전 218년 한니발 바르카가 9개월간 사군툼 공방전을 벌인 끝에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군툼을 함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원전 236년 집정관을 역임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카우디누스는 카르타고에게 전쟁을 당장 선포하자고 주장했고, 파비우스는 먼저 정의 회복을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폴리비오스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회의가 열릴 수 없다며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했지만, 후대의 일부 학자들은 신빙성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원로원은 카르타고에 보낼 사절단으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퀸투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 등을 선임하고, '파비우스 중 한 사람'을 사절단 수장으로 임명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 관한 주요 사료를 제공한 폴리비오스와 아피아노스는 이 수장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와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라고 주장했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는 '퀸투스 파비우스'라고 밝혔다. 후대 학계에서는 한 때 이 수장이 훗날 독재관을 맡아 한니발에 대적하게 될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분명하다는 의견이 강했지만, 프리드리히 뮌처는 둘 중 하나에 찬성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며, 두 파비우스 모두 감찰관을 일찍이 역임한 바 있었으니 사절단을 이끌 수 있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무튼 '파비우스'를 수장으로 한 사절단은 카르타고 당국에 한니발에게 사군툼을 포위할 권한을 부여했는지를 물었다. 카르타고 정치인들은 직접적인 대답을 거부하고, 그 대신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에서 정복을 수행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그 말을 듣고 토가를 접은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전쟁과 평화를 제시하겠소. 어느 것이든 택하시오!"
카르타고인들이 답했다.
"스스로 선택하시오!"
파비우스는 토가를 풀며 답했다.
"전쟁을 주겠소!"
카르타고인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해 당신들을 상대하겠소."
이리하여 양국간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발발했다. 이후 사절들은 히스파니아로 건너가 여러 부족들에게 로마와 동맹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에브로 강 북쪽에 거주하는 일로게테스족은 사절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였지만, 볼키니족은 사군툼이 로마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멸망한 것에 대해 로마인들을 비난했으며, 다른 이베리아인들은 사절단을 만나길 거부했다. 사절들은 켈트인들을 찾아가서 카르타고인의 진군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은
"로마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것이 뭔데 이런 부탁을 함부로 하는가?"
라고 비웃으며 거부했고, 이후 한니발이 건넨 막대한 자금을 보고 기꺼이 길을 열어줬다.2.5. 파비우스 전략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이래, 로마군은 2년간 한니발을 상대로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참패했다. 특히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살해되고 전군이 궤멸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플라미니우스에게"많은 전투에서 군대를 단련시킨 자와 싸우지 말고, 한니발이 저절로 말라갈 때까지 기다리라"
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폴리비오스 등 주요 출처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는 점을 근거로 플루타르코스의 창작으로 간주한다.트라시메노 전투 소식을 접한 뒤, 원로원은 독재관을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독재관은 본래 집정관이 직접 지명해야 했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전사했고, 또다른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아르미눔에 있었기 때문에,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민회에서 독재관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에 선임되고,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기병장관에 선임되었다. 이전에는 독재관이 기병장관을 직접 임명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파비우스는 독재관에 선임된 직후 원로원 연설에서 플라미니우스가 의례를 경멸했기 때문에 신들의 미움을 사 군대를 파멸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후대 학자들은 이에 대해 파비우스가 플라미니우스에게 적대감을 표출했거나 패배에 대한 책임의 일부를 플라미니우스가 아닌 신들의 천벌로 돌리려는 시도 중 하나라고 추정한다. 그 후 민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새로운 사원을 건립하고, 희생제를 치른 뒤, 마르스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다시 이행하라고 명령했다.
그 후 2개의 군단을 추가로 동원했으며,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에게 로마로 즉각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세르빌리우스는 호위병들과 함께 파비우스를 향해 질주하다가,
"호위병 없이 혼자서 내 앞에 출두하라"
는 파비우스의 지시에 순종했다고 한다. 이후 파비우스는 카르타고 함대로부터 이탈리아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세르빌리우스를 시칠리아 섬에 보내 함대를 이끌게 했으며, 배에 선원들을 제공하기 위해 추가 동원령을 내렸다.로마군은 건국 이래 외적을 적극적으로 상대해 격멸하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비우스는 수많은 숙련병들이 죽었고, 이제 신병이 다수인 로마군이 탁월한 지휘관인 한니발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카르타고군을 전면전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적과 회전을 벌이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그 대신
적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식량징발대를 요격하며, 신병들에게 필요한 전투 경험을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요새화되지 않은 지역의 주민들, 특히 한니발이 곧 지나갈 지역의 주민들에게 집을 불태우고, 농작물을 파괴한(청야작전) 다음 안전한 지점으로 떠나라고 지시했다. 한니발이 공격하는 동맹시는 아무리 위태로워도 무시하되, 한니발이 점령하고 떠난 곳은 공성력을 총동원해서 즉시 되찾아오며,[4] 한니발이 없는 소규모 분견대는 즉각 파괴하기로 했다.
이는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보유하는 이점을 누리고 한니발을 고사시키기 위한 소모전을 감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단기 결전을 선호하는 한니발에게 분명 치명적인 전략이었지만, 수많은 로마인들이 그의 전략을 격렬히 반대했다. 그들은 파비우스가 한니발이 이탈리아 중부, 아풀리아, 캄파니아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약탈을 자행하게 내버려둔다고 여겼고, 이는 나약함, 비겁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뿐더러 로마가 동맹국을 보호할 능력이 없다는 걸 세상에 드러내는 꼴이라고 봤다.
하지만 파비우스는 이 외에는 한니발을 상대할 만한 작전은 없다고 보며 자기 뜻을 꿋꿋이 밀어붙였다. 한니발이 캄파니아 일대를 약탈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다가 아르피 부근에 이르렀을 때, 파비우스 휘하의 로마군이 6마일 떨어진 아이카에에 진을 쳤다.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파비우스의 진영 가까이 와서 회전을 벌이자고 제안했지만, 파비우스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한니발의 뒤를 계속 따라가면서 고지를 선점하면서도, 한니발이 어떤 종류의 도발을 하든 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분견대를 종종 파견하여 물자를 모으려는 한니발의 병사들을 습격했다. 또, 한니발의 진군로 주변의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안전한 성채로 이동시켰으며, 카르타고군이 미처 파괴하지 않은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더라도 절대로 구원하지 않았고, 한니발이 성채를 포위해도 견제만 할 뿐 직접적인 교전을 하지 않았다.
한니발이 서쪽으로 진군하여 삼나움을 거쳐 베네벤토로 이동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했지만, 로마군은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갈 뿐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베누시아 시를 점령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그러던 중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자신의 편에 들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카푸아로 이동하고자 했다. 한니발은 안내인에게 카푸아로 진군할 때 거쳐야 하는 카누시움으로 자신들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안내인이 페니키아 발음을 잘못 알아듣고, 카누시움이 아닌 카실리눔으로 안내해 버렸다. 한니발은 카실리눔 남쪽의 비옥한 평원인 아게르 팔레르누스에 자리를 잡고 여름 내내 주변 일대에 약탈 부대를 파견해 소, 곡물, 보급품, 포로를 확보했다.
파비우스는 이때를 틈타 아게르 팔레르누스 주변의 모든 길목을 차단했다. 그는 먼저 카실리눔에 수비대를 증원하고 거기로 가는 다리를 봉쇄하게 했다. 또한 미누키우스에게 분견대를 맡겨 평원의 북쪽 길목에 진을 쳐서 라티나 가도와 아피아 가도를 모두 사수하게 했으며, 주력 부대를 미누키우스 분견대의 서쪽에 있는 마시쿠스 산 인근에 배치했다. 4,000명의 부대는 칼리쿨라 산을 지나 알리페 근처 평원의 동쪽으로 나아가는 통로를 차단했으며, 평원 남쪽에도 각 부대가 길목을 틀어막았다. 그리하여 한니발은 아게르 팔레르누스 평원에서 모든 통로가 차단되어, 장차 말라죽을 위기에 몰렸다. 한니발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하여 안내인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내 포위망을 돌파할 절묘한 계략을 고안했다. 그는 먼저 부하들이 저녁을 든든히 먹게 한 후 모닥불을 피워놓고 잠자리에 일찍 들게 했다. 또한 사로잡은 2,000마리의 소를 선발하고, 하스드루발에게 보병과 경무장 보병 2,000명으로 하여금 이들을 지키게 했다. 소의 뿔에는 마른 통나무와 나뭇가지가 횃불 형태로 묶여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하스드루발은 소떼를 몰아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다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자 소의 뿔에 묶인 나뭇더미에 불을 붙였다. 소떼는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면서 산악 지대로 달려들었다. 갑자기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횃불 무리가 산지로 달려들자, 고갯길을 지키던 로마군 4,000명은 한니발이 정면 돌파를 꾀한다고 판단하고 그들을 막으러 그곳으로 향했다. 한편, 로마군 본진에서는 부관들이
"한니발이 탈출을 시도하려 하니 당장 출격하여 저지해야 한다."
라고 주장했지만, 파비우스는 야밤에 군대를 함부로 움직였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진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라고 명령했다.한니발은 고갯길을 지키던 로마군이 다른 데 관심이 쏠린 틈을 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조용히 진군해 고갯길을 빠져나갔다. 한편 소떼가 몰려간 산지로 이동한 로마군은 수많은 소들이 날뛰는 광경에 당황했다가,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적군과 교전했다. 날이 밝자, 한니발은 산악전에 능숙한 이베리아 부대 1,000명을 파견하여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곧 패주했고, 하스드루발은 부대원들을 이끌고 본대와 합세했다. 파비우스는 한참 후에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인지하고 한니발의 뒤를 추격했으나, 한니발은 이미 멀찌감치 떠나 있었다.
아게르 팔레르누스 전투에서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을 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뒤, 파비우스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안해졌다.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포위망을 세워놓고도 적이 유유히 빠져나가게 놔둔 그에 대한 불만을 터트렸고, 한니발 때문에 재산을 잃은 부자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한니발은 다른 곳은 실컷 약탈하고도 파비우스의 영지를 일부러 놔두었고, 이 때문에 파비우스가 한니발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파비우스는 자신의 아들이자 당시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동행하고 있었던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에게 로마로 가서 가족 영지를 팔아 한니발이 사로잡은 로마군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라고 지시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아들 파비우스는 지시에 따르고 돌아온 뒤, 세간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워서 병사 몇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전투를 벌여서 입지를 강화하자고 조언했다. 그러자 파비우스는 정색하며 아들을 꾸짖었다.
"너도 그 몇 명과 함께 하고 싶으냐?"
결국 파비우스는 희생제를 드리는 문제를 논한다는 명목으로 로마로 향한 뒤 자신을 변호하려 애썼지만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 한편, 파비우스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던 기병장관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을 쫓아가다가 모이셰스의 게로니움 언덕에 숙영지를 세운 적의 맞은편인 리리눔 평원에 새 숙영지를 세웠다. 그가 병사들을 시켜 카르타고 약탈자들을 공격하게 하자, 한니발은 이에 대응해 3분의 2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로마 진영 근처로 이동하여 임시 진영을 건설하고, 2,000명의 누미디아 창병들과 함께 로마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을 점거했다. 하지만 기병들은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게 했다. 미누키우스는 즉시 그들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그 언덕을 장악했다.
이후 한니발이 약탈자들을 재차 보내 식량을 구하도록 하자, 로마군은 경보병과 기병을 파견해 약탈자들을 습격하여 다수를 죽였고, 미누키우스 자신은 보병을 이끌고 카르타고 임시 진영으로 진군했다. 한니발은 이에 맞서 보병대를 이끌고 교전했다가, 상황이 점차 불리해지자 진영으로 후퇴했다. 미누키우스는 이를 추격했다가 한니발의 부하 하스두르발이 이끄는 4,000명의 약탈자들이 한니발과 합세하자 철수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날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은 6,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로마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한니발은 여기서 소모전을 벌이는 건 의미없다고 판단한 후 게로니움의 본진으로 후퇴했다. 미누키우스는 즉시 버려진 카르타고 진영을 점령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했던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교전을 벌인 것에 분노하여 그를 처벌하려 했지만, "적을 상대로 값진 승리를 거둔 부하를 옹졸한 자존심 때문에 처벌하려 든다"라고 여긴 원로원이 막으면서 무산되었다. 여기에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등이 미누키우스에게 독재관의 권한을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관철되면서, 파비우스와 미누키우스는 동등한 군권을 갖고 각각 2개 군단을 맡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이러다가 군대 전체를 미누키우스에게 뺏길 것을 우려해 군대로 서둘러 복귀한 뒤, 미누키우스에게 한니발과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미누키우스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진영을 별도로 설치한 후 차후에 회전을 벌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자 했다.
한니발은 적이 별도로 진영을 친 것을 보고, 미누키우스의 군대를 유인해 섬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벌어진 게로니움 전투에서, 미누키우스는 한니발의 책략에 넘어가 포위 섬멸될 위기에 몰렸다.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군단을 소집한 뒤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파비우스는 즉시 2개 로마 군단과 2개 라틴 동맹 군단을 이끌고 아군을 구하고자 출진했다. 그는 적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던 아군을 수습하면서 언덕을 향해 질서정연하게 행진했다. 한니발은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병들이 파비우스의 로마군과 다시 맞붙는 건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다. 파비우스 역시 한니발을 추격하지 않고 미누키우스의 패잔병들을 수습한 뒤 진영으로 귀환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미누키우스는 전투가 끝난 뒤 파비우스 앞에 부복하여
"나의 아버지여"
라고 외치며 감사를 표했고, 파비우스도 미누키우스를 용서하고 그를 다시 휘하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미누키우스는 지휘권을 내려놓고 파비우스의 기병장관으로서의 소임만 맡았다.2.6. 칸나이 전투 이후
파비우스는 독재관으로 취임한 뒤 6개월이 지날 무렵에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로마로 돌아갔다. 레굴루스는 한니발의 회전 요구에 응하지 않고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가 기원전 216년 새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군대를 맡기고 물러났다. 이후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을 처단하기 위해 8개 군단 87,000명 ~ 92,000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해 바로와 파울루스에게 몰아줬지만, 두 집정관은 기원전 216년 8월 2일 칸나이 전투에서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바로는 가까스로 탈출했고 파울루스는 전사했으며, 로마군 44,500 ~ 60,000명이 전사하고 19,300명이 생포되었다. 또한 파비우스의 기병장관이었던 미누키우스, 전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도 전사했으며, 전투에 참여한 원로원 의원 80명도 전사했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서 칸나이 전투에 참전했던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중상을 입은 파울루스에게 말을 건네며 그 어느 때보다 훌륭한 지휘관이 필요한 동포를 위해 로마로 어서 피하라고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가서 원로원에게 로마를 요새화하고, 승리한 적들이 올 때까지 방어를 단단히 하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파비우스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그대와의 약속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고. 나를 살해당한 병사들과 최후를 맞도록 내버려 두시오. 부디 나를 집정관이 아닌 몸으로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아니면 전우를 고발하여 스스로의 결백을 다른 이를 유죄에 빠뜨리며 증명하게 하지 말아주시오."
현대 역사가들은 이 유언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칸나이 전투가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는 소식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파비우스는 원로원이 소집한 긴급 회의에 출석해 다음의 제안을 했다.
1. 기병을 아피아 가도 외 도로를 따라 파견해 정보를 수집한다.
2. 로마의 성문을 굳건히 닫아 수비에 전념한다.
3. 여인들이 거리에 나가 통곡하는 것을 금지하고 집에 있도록 한다.
4.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2. 로마의 성문을 굳건히 닫아 수비에 전념한다.
3. 여인들이 거리에 나가 통곡하는 것을 금지하고 집에 있도록 한다.
4. 의원들은 개인적으로 시내로 나가서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원로원은 그의 제안을 모두 수락했고, 파비우스 본인이 직접 로마 전역을 돌며 시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그러던 중 바로가 패잔병을 수습해 로마로 귀환하자, 파비우스는 다른 의원들과 함께 그를 마중하며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로마를 지키기 위해 돌아온 것에 감사를 표했다. 한편 파울루스가 전사한 뒤 그가 맡고 있었던 폰티펙스를 물려받았으며, 베누스 여신을 기리기 위한 신전을 건립했다. 기원전 216년 연말에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가 원로원 의원들의 손실을 메꾸기 위해 각 라틴 도시의 의원 2명을 선출하고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자고 제안하자, 파비우스는
"그렇게 했다간 로마 시민의 순수성과 우수한 자질을 잃게 되니 논의 자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주장해 관철시켰다.기원전 215년,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포스투미우스는 집정관에 취임하기 전에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의 매복에 걸려 25,000명의 병력을 전부 잃고 전사했다. 로마 시민들은 실바 리타나 전투 소식을 듣고 절망했다. 그들은 지난해 칸나이 전투의 충격에서 간신히 벗어나고 있었지만, 또다시 켈트족에게 전군이 몰살당했으니 이제 로마는 끝장이라고 여겼다. 상점은 문을 닫았고,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으며, 밤에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이에 원로원은 순찰대를 시켜 거리를 돌며 가게를 다시 열게 하고 애도를 중단하게 했다.
이후 재선거가 실시되어 1차 놀라 공방전에서 한니발을 격퇴해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보결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원로원은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 명이나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삼아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로 처리하고 파비우스를 보결 집정관에 선출했다. 파비우스는 집정관에 선출된 뒤 마르켈루스에게 수에술라 언덕에 주둔한 군대를 계속 통솔하여 한니발에게 굴복한 도시들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게 하고, 자신은 별도로 군대를 이끌고 한니발을 견제하면서도 한니발의 전투 요청을 모조리 물리쳤다.
기원전 214년 집정관 선거에서 티투스 오타킬리우스 크라수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굴루스가 당선되는 듯했지만, 파비우스가 예기치 않게 선거 절차를 중단하고 두 당선 유력자들을 향해 비판을 가하면서 재투표를 요구했다.
"크라수스는 군사 문제에 있어서 무능하고, 레굴루스는 플라멘 퀴리누스로서 군대를 지휘해서는 안 되오. 이런 자들에게 한니발을 상대하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오!"
이에 크라수스와 레굴루스 지지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혼란이 벌어졌다가, 귀족 가문 사이에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기원전 214년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오타킬리우스는 두 번째로 법무관을 맡기로 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일이 파비우스가 작년에 억울하게 집정관 직을 놓친 마르켈루스에게 집정관 직을 되찾아주려고 벌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 후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18개 군단을 일으킨 뒤 병력을 두 개로 나눠서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고, 파비우스는 한니발에 가담한 카실리눔을 포위했다. 그러나 오랜 공방전에도 카실리눔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파비우스는 철수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때 3차 놀라 공방전에서 한니발과 대등한 승부를 벌이고 그와 합류한 마르켈루스가 계속 공격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자, 파비우스는 마음을 돌려 카실리눔을 끈질기게 공격했다. 그 결과 카실리눔은 함락되었고, 700명의 카르타고인과 함께 수비대를 구성한 2,000명의 캄파니아인 중 50명 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파비우스에게 보호를 간청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 후 파비우스는 삼니움과 루카니아를 대상으로 원정을 개시해 콤플루테리아, 텔레시움, 콤프사, 푸지풀라, 오르비타늄 시를 공략했다. 그 과정에서 25,000명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로마군의 손에 넘어간 탈영병 370명을 채찍질한 뒤 테르페아 바위에 던져 죽였다. 그 결과 한니발이 통치하던 이탈리아 남부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다. 그 해 겨울 로마로 돌아가서 집정관 선거를 실시했는데, 이 선거에서 아들인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가 지휘권을 아들에게 이양하기 위해 아들에게 다가가자,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릭토르를 그에게 보내
"집정관과 거래할 게 있다면 말에서 내려서 다가와라"
라고 명령했다. 아버지 파비우스는 이를 순종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잘하고 있다며 칭찬했다고 한다.리비우스는 파비우스가 아들 밑에서 레가투스를 맡았다고 기술했지만, 후대 학자들은 실제로는 로마에 머물렀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211년 한니발이 카푸아 공방전을 수행하는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여 성문 앞까지 이르러 숙영지를 세운 후 주변 지역을 약탈하자,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발칵 뒤집혔다. 긴급 소집된 회의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나 등 많은 의원들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모든 군대를 불러들이자고 주장했고,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는 카푸아 포위망을 풀지 않고도 로마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있는지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군대를 로마쪽으로 유인하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뿐이니, 어떤 군대도 로마로 돌아오게 하지 말고 농성만 하면 된다며 묵살했다. 며칠간 로마 주위를 약탈하면서 도발했지만 로마군이 끝내 성밖으로 나오지 않자,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2.7. 2차 타렌툼 공방전
기원전 209년, 파비우스는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그 해의 감찰관인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에 의해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되었다. 플라쿠스가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그는 한니발에 의해 넘어간 타렌툼을 탈환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타렌툼에 주둔했던 로마 수비대는 1차 타렌툼 공방전에서 도시가 한니발 손아귀에 넘어간 뒤 타렌툼 인근의 해안 요새로 피신했다. 한니발은 시민들에게 요새를 봉쇄하여 적을 굶겨죽이라고 지시했지만, 시민들이 봉쇄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수비대가 식량을 계속 보급받을 수 있었다.이후 파비우스는 타렌툼을 향해 진격했고, 플라쿠스는 루카니아로 진군했으며, 마르켈루스는 한니발이 타렌툼을 구원하지 못하도록 붙잡는 임무를 맡았다. 한편, 파비우스는 8,000 명 가량의 분견대를 한니발의 근거지인 브루티움으로 보내 그 일대를 약탈하게 했으며, 본인이 직접 만두리아 시를 공략하여 타렌툼과 브루티움 사이의 연락로를 개설했다. 파비우스가 이끄는 로마군 2개 군단이 타렌툼을 포위하자, 카르타고의 해군 제독 보밀카르는 시민들을 돕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군에게 완전 포위된 도시를 구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로마 함대가 접근해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다.
포위가 개시된 지 6일 후, 로마군은 총공격을 가했다. 도시 북서부 지역에 2차례의 간혈적인 공격이 벌어졌지만, 대부분의 로마군은 성벽의 동쪽 구역에 집중되었다. 당시 타렌툼 성벽 동쪽 구역 수비대장을 맡았던 브루트족 출신 카르탈로의 여동생은 파비우스의 군대에 종사하던 군인과 애인 관계였다. 파비우스는 이 점을 활용해 카르탈로를 포섭했고, 그는 기회를 틈타 성문을 열기로 했다. 다들 로마군의 공세를 막느라 정신없는 사이, 그는 성문을 열어서 로마군이 들어오게 했다. 그들은 곧바로 성안으로 진입하여 수비대와 시민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3일 동안 약탈을 자행했다.
한편, 한니발은 카누시움 전투에서 마르켈루스에게 큰 타격을 입혀서 자신을 쫓지 못하게 한 뒤,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하여 브루티움을 약탈하던 8,000명의 로마군 분견대를 카울로니아 인근에서 섬멸하여 레기움 일대를 장악했다. 그러나 타렌툼에서 5마일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타렌툼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한니발은 어쩔 수 없이 메타폰툼으로 철수했다. 로마는 대부분의 타렌툼 시민들을 노예로 팔았고, 수많은 전리품을 몰수했다. 시라쿠사, 카푸아에 이어 타렌툼마저 로마에게 귀속되자,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이제 대세는 로마에게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반도 끝자락인 브루티움으로 점차 밀려났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이에 복수하기 위해 파비우스를 메타폰툼으로 유인하기로 하고, 메타폰툼 시민이 귀순하기를 청하는 편지를 조작해 파비우스에게 보냈다. 파비우스는 처음에는 이것을 믿고 메타폰툼으로 향했지만, 아우구르를 통해 새 점을 2번이나 쳤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자 이상하다고 여겨 사절을 고문한 끝에 진실을 알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은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타렌툼을 공략한 뒤 로마로 돌아가서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2.8. 말년
기원전 208년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형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병력 50,000명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진입하자, 로마 시민들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집정관으로 선출했지만 두 번째 집정관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이때 파비우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집정관에 거론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당시 고령의 나이인 데다가 병을 얻어서 집정관을 또다시 맡기를 거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기원전 219년 일리리아 원정 도중 전리품을 빼돌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막대한 벌금을 지불한 뒤 은둔 중이었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가 두 번째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두 사람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카르타고군을 섬멸했다.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유능하지만 지나치게 젊고 경박하며, 야심이 대단해 장차 공화국에 해악을 끼칠 인물이라 여겨 싫어했다고 한다. 기원전 205년 스키피오가 집정관에 선임된 뒤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기 위해 아프리카 원정을 감행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자, 파비우스는 격렬히 반대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아프리카 원정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단언하며 민회를 설득했고, 전쟁을 얼른 끝내고 싶었던 민중의 열띤 호응 덕분에 스키피오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디베스에게
"스키피오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양보하지 말고 직접 바다를 건너 카르타고로 가라"
고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파비우스가 로마의 운명에 대한 조심성과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스키피오에 대한 시기심과 그가 품은 야망에 대한 두려움으로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파비우스가 크라수스에게 그런 권유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기원전 204년, 로크리 사절들이 로마에 찾아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레가투스인 퀸투스 플레미니우스가 자기들 도시에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규탄했다. 이에 파비우스는 스키피오가 군대의 기강을 엉망으로 이끌어 약탈자들을 양성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로마로 소환하고 지휘권을 박탈하는 안건을 민회에 제안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당장 조치를 취하는 대신 위원회를 조직해 이 문제를 조사하기로 했다. 위원회는 필요하다면 스키피오를 체포하고, 이미 아프리카로 출발했다면 돌아오라고 지시하려 했지만, 위원회 내의 친 스키피오 인사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스키피오는 이 사건에 관여하지 않은 게 분명하며, 큰 전쟁을 눈앞에 둔 장군을 압박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원로원은 이에 동의해 스키피오가 아프리카 원정을 계속 이어가게 했다.
기원전 207년에서 기원전 203년 사이, 아들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극도의 자제력으로" 슬픔을 억제했다고 하며, 자신이 직접 장례 연설을 하고 이를 나중에 출판했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203년 한니발이 카르타고 정부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이탈리아를 떠난 직후,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먼저 사망한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외에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른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의 후손들이 가문을 대대로 물려받으며 고위 행정관을 잇따라 역임했다.
3. 평가
혹시 한니발이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더라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했을 것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비록 트라시메네와 칸나이에서 승리했을지라도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되었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동맹을 깨뜨리는 것이 한니발의 전쟁 전략 가운데 최우선적인 목표이자 그가 성취하려고 했던 궁극적인 승리였던 것이다. 로마에게 승리를 안겨준 일등 공신은 자마 전투의 승자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지연자 파비우스 막시무스였다. 그가 즐겨 사용한 지연과 고갈 전술이 한니발의 구도를 무력화시키고 로마의 막대한 전쟁 동원력이 가동될 시간을 벌어 주었던 것이다. 그는 지연함으로써 국가를 구했다.(cunctando restituit rem).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41쪽
프리츠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현대지성, 2017), 341쪽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막시무스라는 이름을 써도 될 정도의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그의 가문에서 첫 번째로 막시무스라는 이름을 쓰기에도 마땅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부친보다 훨씬 더 많은 횟수의 행정장관직을 지냈고, 조부와 같은 횟수의 행정장관직을 역임했다. 그의 조부인 룰리아누스는 많은 승리와 전투 참여로 명성을 떨쳤지만, 한니발이 적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조부의 공로와 동등하거나 혹은 그것을 능가하는 업적을 쌓았다.
리비우스, 《로마사》
리비우스, 《로마사》
처음에는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굼뜬 사람(cunctator)이라며 비난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비록 단기간에 결판은 나지 않았어도 그의 전략이 결국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어 "지연자", "굼뜬 사람" 등의 비난섞인 호칭은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 시인 엔니우스(Quintus Ennius)는 그의 용기를 찬양한 시를 썼다.
한 사람, 오직 그만이 지연 작전을 써서
우리 공화국을 부활시켰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안전만을 중히 여겼도다.
지금 그의 명성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그의 명예는 고귀하게 되리니.
엔니우스, 《연대기》[5]
즉 진정한 용기를 지닌 정치가는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지 않고, 오직 국가의 이익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파비우스의 전략이 당시엔 인기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로마를 구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니발은 파비우스가 지구전을 펼치는 동안 로마시를 공격하지 못하고,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우리 공화국을 부활시켰노라.
그는 자신의 명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조국의 안전만을 중히 여겼도다.
지금 그의 명성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더 그의 명예는 고귀하게 되리니.
엔니우스, 《연대기》[5]
한니발을 제외한 카르타고의 장군들은 로마를 상대로 대부분 함량 미달의 전과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군이라고 해도 결코 무적의 군대는 아니었고 카르타고군 역시 완전히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베티스 고지의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스페인에서 본격적으로 본국의 보급을 받아 규모가 늘어난 카르타고군을 상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6]
한니발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히스파니아와 카르타고 본토를 공격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조국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멀리 내다보고 그것을 현명하게 대처한 파비우스는 위대한 정치가의 상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파비우스에 대한 칭송은 어느 정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파비우스는 대 카토를 비롯한 스키피오 반대 파벌의 정치적 원로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스키피오를 몰아낸 대 카토 중심의 반'스키피오'파는 한니발을 패배시키고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의 명성을 어느 정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여, 스키피오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된 영웅이 파비우스이다. 결국 파비우스 칭송은 "우리는 스키피오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다."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파비우스는 유능했다. 고유명사화되어 지금까지 이름이 남아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상황상 지연전이 강요되었고 파비우스는 이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했다. 또한 주요 관직들의 임기가 1년이고 민중과 여론의 지지가 정치 권력에 매우 중요한 공화정 로마에서 인기가 없어 정치적으로 위험하지만 국익에는 보탬이 되는 전략을 우직하게 밀어붙인 그의 결단력을 칭송하지 않으면 추후에 국가의 다른 중대한 위기가 닥쳤을 때 지도자가 국익보다는 여론을 의식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의 행보가 '파비우스 전략', '파비우스의 승리'라는 명칭으로 정치적으로 띄워진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띄워질만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타인의 입장에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4. 기타
- 영국 노동당의 외곽 정치단체인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파비우스처럼 끈질기게 점진적으로 싸워서 사회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나타낸 이름이다.
-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단어 Fabian은 그의 전술처럼 '지연전으로 적을 지치게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등장하는데, 그의 지구전법에 대해서도 묘사가 되었지만 크나큰 오류가 있다. 파비우스는 애초에 한니발과 전투를 벌어지 않고, 보급의 차단을 통한 장기전을 구상하면서 지구전법을 시도한 것이었으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마치 칸나이 전투를 치르기 전에 패잔병들을 끌어모을 시간을 벌기 위해 해당 전략을 구상하였다고 묘사했다. 실제 칸나이 전투가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인들이 파비우스를 해임하고 치른 전투임을 생각하면 완전히 반대로 묘사된 셈이다.
- 아들 소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도 한니발과의 전쟁에 참전해 전공을 세웠고, 기원전 213년 집정관에 취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1] 집정관 취임 전 실바 리타나 전투에서 보이족 전사들의 매복 공격으로 전사함.[2] 원로원이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두명 뽑힌 것에 반감을 품고 불길한 징조를 핑계로 마르켈루스의 취임을 무효화함.[3] 일각에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시기였을 거라 추정한다.[4] 얼핏 양측 모두 소득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애매하게 구원을 갔다가 도시도 뺏기고 구원군도 대패하고, 전반적인 사기가 깎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카르타고군도 원정군이어서 해당 지역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5] 원문은 소실되었고, 키케로의 《의무론》에만 남아있다.[6] 다만 이 보급도 매번 연패하던 카르타고가 겨우 보낸 것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